일으키는 역사, 일어나는 민족
창세 37,3-28; 마태 21,33-46 / 사순 제2주간 금요일; 2024.3.1.
오늘 독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초기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인 요셉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요셉은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이었지만, 야곱이 마음을 다해서 사랑했던 라헬이 낳아준 첫 아들이었으므로 다른 어느 아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였고, 이 지독한 편애 때문에 형들의 질투와 시기를 불러 일으켜서 이집트로 팔려가는 기구한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반전(反轉)에 반전을 거듭하다가 끝내 이집트의 재상이 되어, 아버지 야곱과 형제들을 모두 불러 모아 이집트에서도 가장 비옥한 고센 땅에 가족 모두를 정착시킬 수 있었습니다. 거기서 430년을 사는 동안(탈출 12,40 참조) 야곱 집안은 장정만 해도 60만 명에다 전체 2백 만이 넘는 큰 무리로 불어났습니다(탈출 12,37 참조). 그렇게 되자 요셉의 사적(史蹟)을 모르는 이집트 파라오가 인구가 늘어난 야곱의 후손이 반역이라도 꾀할까봐 두려운 나머지 이들을 노예로 삼고 혹독한 노동을 시키는 바람에 불행이 시작되었고,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신 하느님께서 그들 가운데 모세를 불러내어서 가나안 땅으로 탈출시키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히브리들로 불리다가 이스라엘 백성으로 불리게 되면서 하느님 백성으로 선택되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하지만 40년 간 시나이 광야에서 난민으로 살기도 하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250년 간이나 판관들의 인도 아래 불안한 이주민으로 살기도 하다가, 사울과 다윗 그리고 솔로몬이 임금이던 시절에 간신히 통일 왕국을 세우는가 싶더니,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쪼개져 우상숭배에 물들어 살다가 다시 바빌론으로 끌려가야 했고, 70년 유배생활이 끝나고 돌아와서도 그리스 세력과 로마 세력의 총칼 아래 자기 땅에서 종살이하는 기구한 세월이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그러했듯이 그 후손들인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도 새옹지마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민족사에서 가장 어둡고 암울한 시절에 찾아오신 메시아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기운차게 선포하셨던 것인데,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하는, 기가 막힌 상황 속에서 오늘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가 나왔습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해석하신 이야기였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으로 선택되었던 이스라엘 민족은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함으로써 그 역사적 소임을 다했으며 바야흐로 새로운 무리가 하느님 백성이 되리라는 엄중한 선언이었습니다. 이 선언이 실제로 실현된 사정을 간추리면 이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사도로 양성하여 남겨두시고 수난과 죽음을 당하신 후에 부활하시어 사도들에게 성령을 보내셨으며, 사도들은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 자비를 기억하며(요한 3,16 참조)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새 하느님 백성으로 모인 교회도 지난 2천 년 동안 일어서고 스러지기를 되풀이하는 역사를 겪었으며, 이 땅에 들어온 교회 역시 백 년 동안이나 박해를 받으며 시작했지만 박해가 종식된 후에는 식민지배와 분단이라는 민족의 고난 속에서 운명을 함께 하고 있는 중입니다.
삼일절인 오늘, 우리는 고난으로 점철된 민족의 운명 속에서 이제 다시 겨레를 부추겨서 함께 일어서야 하는 교회의 소명을 생각합니다. 지금으로부터 3년 전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삼일절 기념식에서 우리 민족의 소명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 바 있습니다. “3·1 독립운동 이후 우리의 100년은 식민지배, 분단과 전쟁, 가난과 독재를 극복해 온 100년입니다. 인류 보편의 가치인 자유와 평화, 정의와 인도주의를 향해 전진해 온 100년입니다. 우리는 지금 3·1 독립운동의 정신과 민주주의, 포용과 혁신의 힘으로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있으며 세계는 우리의 발걸음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민족이 인류 보편의 가치를 향해 전진해 왔고 개척하고 있으며 그 성취에 대해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처럼, 우리 민족이 자리잡은 이 한반도 땅도 지정학적인 요충지여서 이 땅을 탐내는 주변 강대국들에 의해 휘둘려야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 우리나라에 힘이 없고 약했을 때 겪어야 했던 것일 뿐, 지금은 아닙니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백 년 전과 다릅니다. 우리를 둘러싼 4대 강대국들의 속셈은 이미 다 드러나 있습니다. 주변 나라들이 어느 한 나라도 우리 한 민족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고비인 분단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거나 호의를 베풀 의사가 없음을 우리가 잘 알고 있기도 하지만, 그들의 카드를 다 만족시켜서는 우리 민족의 미래가 없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과 뜻으로 우리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야 합니다. 이 길에 이 땅의 하느님 백성으로 부름받은 이들이 앞장서야 하는 소명이 있습니다. 노예처럼 수동적으로 끌려와야 했던 역사의 판을 바꾸는 겁니다. 앞으로는 우리가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로서 맞갖은 주도권을 지니고 상황을 끌고 나갈 수 있도록 구도를 만들어야 합니다. 스러졌던 우리 민족이 역사의 바닥을 치고 다시 일어서려는 이때, 민족의 미래와 운명을 다시 일으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민족의 소명을 일깨우는 일에 우리 교회의 소명부터 자각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면 이스라엘 민족이 보여 준 역사의 시행착오를 우리 교회와 우리 민족이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는데, 메시아를 알아보는 일과 최고선의 가치들을 살리는 일이 필요합니다.
40년 전에 한국을 방문했던 요한 바오로 2세와 10년 전에 방한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공경해온 순교자들을 성인품과 복자품에 올림으로써 한국 교회 신자들을 격려하면서도, 우리 민족이 억울한 고난에서 벗어나 남북의 한겨레가 화해하고 한반도에 평화를 실현하고자 하는 염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 보다 더 큰 하느님의 섭리 즉 아시아의 복음화를 위해 받고 있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간절하게 호소한 바 있습니다. 이 두 교황과 교황청 그리고 아시아 주교들이 바라보는 한국 가톨릭교회의 소명이 이것입니다. 또 한국교회가 아니고서는 이 막중한 요청을 감당할 만한 교회가 아시아에는 딱히 없기도 합니다. 한국교회는 순교정신을 계승한 신앙열기가 뜨겁고 경제적 자립을 이룬 데다가 한류 현상으로 아시아 여러 나라들에서 폭넓은 공감을 얻고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2021년 7월 대한민국은 국제사회로부터 선진국 지위를 공인받았습니다. 2021년 7월 2일 개최된 제68차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무역개발이사회는 대한민국의 지위를 그룹 A(아시아·아프리카)에서 그룹 B(선진국)로 변경하는 것을 만장일치로 가결했던 것입니다. 이는 UNCTAD의 설립(1964년) 이후 57년 만에 처음 있는 사례입니다. "UNCTAD 선진국 그룹 진출은 선진국과 개도국 모두에게서 한국의 선진국 위상을 확인 받은 계기이며, 무역을 통한 개발을 주목적으로 하는 유엔기구에서 모든 회원국이 대한민국을 선진국 그룹으로 이동하는 것에 만장일치로 합의했다는 것은 우리나라가 국제사회에서 직접 증명해 온 무역과 투자를 통한 성장의 모범적인 사례임을 확인하는 의미"(외교부 성명)입니다. 이는 UNCTAD를 비롯한 국제무대에서 우리나라에 요구하는 책임과 역할에 부합하도록, 선진국과 개도국간 가교로서의 역할과 기여를 더욱 확대해 달라는 요청도 숨어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국교회도 선교사를 파견받고 원조를 받던 처지에서 이제는 선교사를 파견하고 원조를 주는 선진 교회로 도약해야 합니다. 아시아 대륙에는 산업화를 이루지 못해 빈곤에 허덕이는 나라들이 아직 많이 있고, 민주화가 지체되어 인간 존엄성이 무시당하는 나라들도 아직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아울러 달성한 대한민국의 문화가 그토록 동경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나라도 우리나라처럼 발전하고 싶어서입니다. 하지만 산업화와 민주화의 열매는 복음화이며, 아직 빈곤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민주주의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나라의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 진리를 통한 공동선의 혜택을 누리게 해 주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소명입니다.
교우 여러분!
이집트로 팔려간 요셉이 자신을 팔아넘긴 형제들과 극적인 상봉을 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화해함으로써 민족의 새로운 역사를 시작했듯이, 백년 박해를 받고나서야 신앙의 자유를 얻었지만, 그로 인한 죗값을 뒤이은 백년 동안 받고 있는 민족의 고난 역사를 피해자요 희생자였던 우리 교회가 앞장서서 다시 일으켜야 할 몫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를 통해 당신 자신의 운명과 새 하느님 백성의 소명을 일깨워주셨듯이,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마태 21,42; 시편 118,22) 하느님의 섭리적 역사를 묵상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