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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이방원 제118편: 정치문제화 된 민씨형제사건
( 돌아온 하륜, 소방수일까? 저승사자일까?)
"전하께서 무구와 무질을 부르시니 모든 신민(臣民)들이 어리둥절합니다. 지난번 태상왕의 병환이 계셨을 적에 회안군과 태상전하께서 어찌 서로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끝내 부르지 못하였고 승하하신 뒤에도 분상(奔喪)하지 못한 것은 오직 공의를 사사로이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헌집의(司憲執義) 이관의 상소다. 태조 이성계도 임종 시에 보고 싶은 아들을 만나지 못했는데 하물며 민무구냐는 항변이다. 여흥과 대구에서 귀양살이 하고 있던 민무구 형제를 한양으로 불러 올린 것은 태종이었다.
여흥부원군 민제의 병환이 위중하다는 전갈을 받은 태종은 내관 박성우로 하여금 역마를 이용하여 민무구 형제를 불러 오도록 했다. 시각이 화급하다는 것이다. 역마를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관용차다. 중앙에서 지방으로 오가는 문서와 긴요한 군사정보와 같은 국가적인 용무에 쓰이는 교통통신 수단이다.
"여흥 부원군의 병이 위독하므로 임종할 때 서로 만나보게 하려는 것이다. 만나본 뒤에는 곧 돌려보내겠으니 아직 둬두고 논하지 말라. 또 태상왕의 병환에 내가 회안군을 부르려고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태상왕의 승하가 너무 급작스러워 상왕께서는 서울에 계시면서도 종신하지 못하셨다. 그러므로 회안을 부르지 못한 것이다."
"무구 형제는 나라에 득죄하였으니 여흥이 자식으로 여길 수도 없고 전하께서 인친으로 여길 수도 없습니다. 어찌 다시 국문(國門)에 들어올 이유가 있겠습니까?"
죄인과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으니 돌려보내시오.
임금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좌사간대부(左司諫大夫) 안속을 필두로 대간의 상소가 줄을 이었다. 심지어 사헌부(司憲府)에서 민제의 집에 아전을 보내어 수직(守直)하고 민무구 형제를 감시했다. 연금 상태다.
"민무구와 민무질이 생명을 보전한 것은 오직 인정 때문이다. 지금 그 아비의 병이 위중하니 조금만 나으면 마땅히 돌려보낼 것이다." "무구와 무질의 죄는 용서할 수 없사온데 지금 전하께서 그 아비의 병을 칭탁하여 한양으로 소환하시므로 신 등이 죽음을 무릅쓰고 계문(啓聞)하고 대궐에 나아가 두번이나 청하였사온데 유윤(兪允)을 입지 못하였으므로 사직하고자 합니다."
유배지에 있어야 할 죄인을 한양에 불러들인 것은 부당하다며 대간과 사헌부에서 상소를 올렸으나 임금이 들어주지 않자 대간이 줄줄이 사직했다.
"지금 대간이 사직을 하니 어찌할꼬?"
의정부에 삼정승을 불러놓고 탄식했으나 삼정승(三政丞) 역시 상소를 윤허하라고 주청했다. 대간에 이어 승정원도 술렁거렸다. 좌정언(左正言) 이종화가 항의표시로 정원직을 사직했다. 이러한 와중에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가 세상을 떠났다. 국구이고 왕비의 아버지다. 차세대를 이끌어 갈 세자의 외할아버지다. 태종은 조회(朝會)를 정지하고 친히 문상했다.
민제의 장례가 끝나자 형조에서 민무구 형제의 죄를 다시 청했다. "자고로 난신적자(亂臣賊子)는 베어야 합니다. 무구형제는 불충한 죄를 짓고서도 다행히 주상의 은혜를 입어 각각 성명(性命)을 보전하여 편안히 살고 있사온데 아비의 병으로 인하여 무구 무질이 부름을 받아 역마를 타고 와서 부친을 보았으니 부당합니다. 불충한 무리로 하여금 왜 도성에 발을 붙이게 하십니까?"
곧 돌려보내겠다. 조금만 기다려라.
"대간이 여러 날 죄주기를 청하였사온데 전하께서는 윤허하지 아니하고 언로를 막으셨습니다. 대간은 하루라도 없어서는 아니 되는 것 이온데 어찌하여 오랫동안 비어두고 계십니까? 불충한 자와는 한 하늘아래 있을 수 없습니다. 신 등은 직책이 집법(執法)에 있어 법을 폐할 수 없습니다."
대간과 승정원에 이어 형조가 들고 일어났다. 민무질 민무구 형제를 순군옥에 가둘 태세다. 신하와 임금의 힘겨루기다. 하륜과 이무가 대간을 출사시켜야 한다고 거들었다. 임금이 계속 밀리는 형국이다. 태종이 타협안을 내놓았다.
"부원군의 초재(初齋)를 지내면 돌려보내겠다." "두 사람은 죽어도 남는 죄가 있는데 목숨을 보전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역시 방자하니 해상(海上)으로 옮겨 붕비(朋比)를 끊게 하소서."
대간의 강경책이다. 임금의 명을 받은 대간이 사직을 철회하고 출사하며 임금이 제시한 타협안에 강공책을 들고 나왔다. 돌려보내긴 보내되 원위치로 보내면 안 된다는 얘기다. 민무구 형제를 먼 바다에 있는 섬으로 내치라는 것이다. 부친의 장례를 참칭하여 도성에 머물고 있는 민무질이 옛 동료와 수하들을 만나며 작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구현령 옥고가 민제의 문생인 까닭으로 제일 먼저 부하뇌동 하였고 전 계림부윤 이은, 성주목사 윤임, 지선주사 윤개, 지청도군사 강해진, 계림판관 은여림, 경산현령 정구당, 전 지영주사 강만령, 판동래현사 송극량, 하양감무 김도생, 지양주사 이승조, 인동감무 김타, 진성감무 최예 등은 모두 붕비(朋比)하여 경계를 넘어 아부하였사오니 전하께서는 위 사람들의 직첩을 거두고 국문(鞫問) 하게 하소서."
하륜의 출사, 민무구 형제의 죄상이 밝혀지고..
일이 점점 꼬여갔다. 민무구 형제의 사건이 전국으로 확대 되었다. 들불처럼 번진 것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직감한 태종은 재야에 있는 하륜에게 출사하라 명했다. 소방수가 필요한 것이다. 사건 당사자들에게는 구원투수가 될지 저승사자가 될지 알 수 없다.
"지금 국가에 일이 많아서 이미 하륜으로 하여금 출사(出仕)하게 하였다." 태종은 급했다. 삼정승과 의논할 겨를도 없었다. 의정부에는 사후에 통고했다. 재야에 있던 하륜이 영의정으로 컴백했다. 도참의 대가 하륜은 왕심(王心)을 읽어내는데도 도사다. 이제 하륜의 능력을 보여줄 시기가 닥쳐온 것이다.
조정에 출사한 하륜이 사태를 점검해 본 결과 사건의 흐름이 심상치 않았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종합보고서를 올렸다. 하륜의 주청을 받아들인 태종은 교서(敎書)를 발표했다. 민무구 형제의 죄상을 나열한 10개항의 교서다.
조서(詔書)라고도 불리는 교서는 전지나 전교와 격이 다르다. 즉위교서, 공신녹훈교서, 책봉교서가 있듯이 임금이 만백성을 상대로 선포하는 명령문서다. 요즘 말로 해석하면 대국민 담화문이다. 태종이 이러한 교서를 발표한 것은 민무구 형제 사건을 현 시점에서 일단락 지으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소방수의 지원을 받은 진화작업이다.
"무구와 무질은 중궁의 지친으로서 훈신의 열(列)에 참여하였으므로 그 작질을 높이고 녹봉을 후하게 하였으니 그 마음의 욕망이 대체로 족했을 것이다. 허나, 은혜를 잊고 덕을 배반하여 불충하고 만족함이 없는 죄이니 극형에 처하여 중노(衆怒)에 대답하고 후인을 징계하는 것이 실로 지극히 공정한 도리나 또한 인정에 있어 차마 그러하지 못하는 바이다.
헌데, 어찌하여 무구, 무질이 개전의 마음이 없고 붕류(朋類)들을 끌어들여 우매한 사람이 왕래하고 아부하여 죄고(罪辜)에 빠져 마침내 대간이 소장을 올리어 과인의 청단(聽斷)을 번거롭게 하는데 이르렀는가? 이것은 다만 제 몸에 재앙을 부를 뿐 아니라 무구 무질로 하여금 그 멸망을 스스로 재촉한 것이니 또한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그들을 폐하여 서인을 만들고 종신토록 상종하지 아니하여 군신의 죄를 청하는 의논에 종지부를 찍겠다. 다만 그 생명을 보전하여 수령을 마치게 할 것인바 이는 과인이 차마 못할 정을 폈으니 사은(私恩)과 공의(公義)가 아울러 행해져서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태종실록>
민씨 형제를 귀양처로 원위치 시키는 것이 아니라 서인(庶人)을 만들어 민무구를 여흥에서 풍해도 옹진으로, 민무질을 대구에서 강원도 삼척으로 안치하라 명했다. 처남들과 인친의 인연을 끊고 평생 상종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결의다.
민무구 형제가 임금의 처분을 받아 새로운 귀양처로 떠난 후 사건은 오히려 확대 되었다. 원평군(原平君) 윤목과 한성소윤 (漢城少尹) 정안지를 국문하던 중 호조판서(戶曹判書) 이빈과 평강군(平江君) 조희민이 민무질 사건에 연루된 사실이 드러났다. 판서는 오늘날의 장관급이다. 단순한 사건이 정치문제화 된 것이다.
태종•이방원^다음 제119편~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