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장마 외 1편
강기희
배낭 메고 읍에 간다
철벅철벅 물길을 걸어 읍에 간다
내리는 비를 맞으며 간다
먹을 양식도 사고 어머니 혈압약도 타 드리러
비 내리는 물길을 걸어간다
발도 시렵고 손도 시려운 봄장마
내가 태어나던 해에도 봄장마가 덜컥 졌다지
읍에 미역 사러 갔던 아버지 아흐레 만에 돌아왔다지
비는 내리고 땔감은 없고 먹을 것도 없던 때
죽을 고비를 넘겼다 했지
어머니는 내가 살아난 게 기적이라고 했지
봄장마는 또 덜컥 지고 읍에 가야 하고
사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같다지
통일책방 1
살다가 생이 지루해질 무렵 덕산기 숲속책방 접고 북녘땅 물빛이 순하고 고운 어디쯤에다 작은 ‘통일책방’ 하나 열었으면 좋겠다
경상도 말투를 쓰는 시인과 전라도 말투를 쓰는 소설가와 충청도 말투를 쓰는 화가와 함경도 말투를 쓰는 무용수와 평안도 말투를 쓰는 소설가와 황해도 말투를 쓰는 소리꾼과 경기도 말투를 쓰는 장구잽이와 정선 말투를 쓰는 내가 책방 앞 평상에 모여 앉아,
통일을 꿈꾸다 죽어간 이들도 떠올리고 황진이와 논개 매창도 불러내고 백석과 소월도 불러내고 안중근도 불러내고 김일성도 불러내고 호치민과 모택동 레닌 스탈린 김구도 불러내어, 731부대 출신 왜놈 두엇과 노덕술 등 악질 친일파 몇 놈도 끌어내 술심부름 시키면서 몇 날 며칠 책 읽다 술 먹다 노래하다 춤추다 어느 순간 숨이 딱 멎었으면 좋겠다
― 강기희 시집, 『우린 더 뜨거워질 수 있었다』 (달아실/2022)
강기희
강원도 정선에서 태어나 강원대학교 무역학과를 졸업했다. 1998년 『문학21』 신인상으로 등단한 이후 장편소설로 『아담과 아담 이브와 이브』(1999), 『동강에는 쉬리가 있다』(1999), 『은옥이 1, 2』(2001), 『도둑고양이』(2001), 『개 같은 인생들』(2006), 『연산-대왕을 꿈꾼 조선의 왕』(2012), 『원숭이 그림자』(2016), 『위험한 특종-김달삼 찾기』(2018), 『연산의 아들, 이황』(2020), 『이번 청춘은 망했다』(2020) 등을 출간했으며, 시집으로는 『우린 더 뜨거워질 수 있었다』(2022) 등 출간했다. 한국 최초 전자책 전문업체인 바로북닷컴이 주최한 ‘5천만원 고료 제1회 디지털문학대상(수상작 『도둑고양이』)을 수상하였고, 2018년 레드 어워드상(수상작 『위험한 특종』)을 수상하였다. 2001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전업작가 창작기금을, 200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예창작기금을 수혜하였다. 민족작가연합 상임대표로 활동 중이며 한국작가회의 이사를 역임했다. 현재 대한민국 최고 오지 마을인 정선 덕산기계곡에서 창작 활동과 함께 ‘숲속책방’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