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문경으로 돌아와 만일준비위원회 위원들과 화상으로 회의를 하고 오후에는 정토대전 편찬회의를 했습니다. 저녁에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온라인 즉문즉설 강연을 했습니다.
새벽에 서초 법당을 나와 병원에서 검진을 받고 문경 수련원으로 갔습니다. 짐을 풀고 잠시 쉬었다가 11시부터 만일준비위원회 위원들과 화상으로 회의를 했습니다. 내일 전국대의원회의를 앞두고 어제 정회원 설문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온라인 정토회 개편 절차와 모둠 편성 방안에 대해 쟁점을 점검했습니다.
점심 식사를 하고 오후 1시부터 저녁 6시까지는 정토대전 경전팀과 불교사상팀, 사회사상팀이 합동으로 회의를 했습니다. 바깥에는 함박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지금까지 각 팀에서 진행한 내용을 공유하고 앞으로 계획을 정리한 후 스님에게 궁금한 점을 질문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특히 사회사상팀에서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주식과 부동산 투기 열풍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는지 질문했습니다. 스님은 노동 가치설이 아닌 부의 재분배 관점에서 보면 좋겠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주식이나 부동산 투기 열풍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노동으로 인한 소득이 아니라 불로 소득을 갖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자 수익, 주식 수익, 부동산 수익을 많이 갖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별로 문제의식이 없고, 그런 방식으로 자산을 늘려나가는 것을 정상적으로 여기는 것 같아요. 이런 부분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비춰 보았을 때 어떻게 봐야 할까요?"
“우리들의 가치관이 바뀌어야 하는 문제입니다. 경제적 가치가 어떻게 형성되느냐는 질문에 ‘인간의 노동만이 가치를 창출한다’ 하는 것이 노동가치설입니다. 노동가치설은 두 가지 맹점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 자연환경이 생산하는 것을 무시하고 인간의 노동만 계산한다는 것입니다. 환경의 가치를 고려하지 않고 노동에 의한 이윤 창출이나 성장만을 가치로 보는 관점은 환경파괴의 주원인이 됩니다. 환경의 가치까지 계산하면 노동가치설은 맞지 않습니다. 둘째,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대부분의 업무가 자동화되면서 경제적 가치가 노동에 의해서만 생산된다고 말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입니다.
부의 불평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질문하신 문제는 노동가치설보다 부의 재분배 차원에서 접근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불로소득이라는 관점보다는 부의 재분배 관점에서 살펴봐야 합니다. 노동가치설이 나왔을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사회적 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로봇이나 자동화, 인터넷 등에 의해 경제적 가치가 생산된다면 오히려 노동가치설은 소수의 창조적 사람에게 부가 과다하게 집중되는 것을 용인하는 결과를 빚게 되는 위험이 있습니다.
노동가치설을 얘기했던 당시에는 생산자에게 돈이 적게 가고 자본가에게 돈이 너무 집중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도 아무것도 안 하고 사회경제적인 조건 때문에 주식이나 부동산 투기에 의해서 돈이 집중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요즘 주식이나 부동산 투기에 의해 늘어난 부가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노동해서 버는 월급보다 많다고 하잖아요. 이건 분명히 잘못됐죠.
부동산이나 주식에 돈이 몰리는 현상이 이미 투자의 범위를 넘어 투기가 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돈 있는 몇몇 사람들이 돈을 투기해서 번다’ 이렇게 이해했는데,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재벌만이 아니라 중산층과 심지어는 20대나 30대 젊은 층과 초등학생까지 주식에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오르는 장세이니까 어떻게 투자해도 돈이 벌리기 때문이에요. 눈 감고 투자해도 돈이 벌린다는 거죠. 지금은 인구 10명 당 3명꼴로 주식 투자에 참여한다고 합니다. 즉문즉설에까지 계속 질문이 올라오거든요. 요즘은 벼락부자가 아니라 벼락 가난이라는 말까지 생겼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다 부자가 되니 자기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가난뱅이가 되어있는 기분이 드는 거예요.
이런 문제를 풀어나가야 하는데 풀기가 쉽지 않습니다. 주식이나 부동산이 오르는 현상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잖아요. 투기의 시작은 돈 있는 사람들이 했는데, 온 국민이 빚을 내서 따라붙은 겁니다. 부동산도 처음에는 강남 일부나 서울만 좀 오른다 하다가, 이제는 전국이 다 투기열풍에 참여를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즉문즉설에서는 어떤 공무원이 이런 질문을 했어요. 20년 넘게 월급을 저축해서 집을 사려다가 정부에서 사지 말라고 해서 안 사고 기다렸는데, 그 사이 두 배 넘게 집값이 올랐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정부에 대한 비판을 사정없이 하면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묻는 사람이 생길 정도로 지금 상황이 그렇습니다.
이런 현상을 보면 분명히 이 상황은 투기입니다. 이런 투기 과열을 꺼트리는 정책이 필요합니다. 너무 많은 국민이 투기에 참여하면 정치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투기 과열을 꺼트리려고 할 때 국민적 저항을 받게 됩니다. 그렇다고 정부가 인플레이션(물가상승)으로 문제를 풀면 투기를 안 한 많은 사람들이 손해를 보게 됩니다. 통화량이 늘어나고 물가가 상승하니까 내가 가진 돈의 가치가 줄어드니까요.
지금 투기 열풍이 부는 이유
부동산이나 주식 시장이 막 올라가다가 어느 순간 내려가기 시작하면 폭락하게 됩니다. 그럴 때 투기한 사람 중에 이익이나 손해를 보는 사람들이 생기는데, 대부분 후발 주자들이 손해를 보죠. 그런데 지금은 투기에 참여한 사람의 숫자가 너무 많으니까 인플레이션으로 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투기 바람이 일어나는 거예요. 인플레이션으로 간다면 현금 가치가 떨어지니까 그에 대비해서 땅이나 금, 부동산 등 무엇이든 물건으로 갖고 있어야 된다는 인식이 팽배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투기가 더 기승을 부리고 있어요.
코로나 사태로 어려워진 사람들이 많아지니까 정부에서 돈을 엄청나게 풀었는데, 지금 그 돈을 회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부 빚을 내서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데, 그것을 회수하면 서민들이 죽어나니까요. 지금 미국도 금리를 올리지 못하고 제로 금리 상태입니다. 거기다 계속 돈을 풀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돈을 푼다고 경제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가게 운영이 힘든 사람에게 천만 원을 지원해주면, 이 사람이 천만 원을 갖고 어떤 곳에 사용하느냐면 대부분 건물세를 냅니다. 정부가 푼 돈이 결국 건물주와 같은 돈 있는 사람들에게 다 가게 되는 겁니다. 풀린 돈이 한 번 돌고 나면 다 돈 있는 사람에게 가게 되어 있어요. 서민을 살리려고 지원을 해줬는데 돈은 돈 있는 사람이 버는 거예요.
가게가 망해야 건물주도 따라서 망하는데, 가게를 살리려고 하다 보니 건물주가 더 살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건물주는 그 돈을 갖고 부동산이나 주식 시장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은행은 금리가 낮으니까 투자할 곳이 주식과 부동산밖에 없는 거예요. 금리를 올리면 돈이 저축하는 쪽으로 흘러갈 수 있지만, 그러면 대출한 서민들이 힘들게 됩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풀기가 굉장히 어려운 상황입니다. 정부가 부동산 정책을 잘못했다는 것은 부차적인 일이에요. 결국 이 문제는 코로나 사태 때문에 돈을 많이 풀어서 생긴 문제입니다.
사회정의 측면에서 보면, 부의 불평등이 빠른 속도로 심화되고 있습니다. 정부는 그걸 개선하려고 노력하는데 갈수록 더 벌어지고 있죠. 온라인 관련 사업은 수요가 폭발하고 있고, 여행업이나 구멍가게는 망해갑니다. 아직은 물가가 안 오르고 있는데 곧 전부 오를 거예요. 인플레이션으로 물가가 올라가야 되는데, 아직 안 오르는 이유는 손해를 보면서도 공급하는 사람들이 많아서입니다. 짜장면 값도 아직 그대로인데 이런 품목은 공급하는 사람이 많을 뿐만 아니라 누구나정부가 다 공급할 수 있어서 그렇습니다. 벌써 채소값은 많이 올랐다고 해요.
이런 현상들을 보면, 사회적 정의란 개인이 아껴 쓰고 열심히 산다고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적 차원에서는 ‘세상이 그렇든 말든 나는 편안하게 산다’ 이렇게 마음을 가지면 되지만, 사회적 정의 측면에서는 그것만 갖고는 안 된다는 거예요. 사회적 정의 측면에서는 부를 재분배하는 시스템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검소하게 살면 나에게 좋다
수행을 ‘착하게 살면 복 받는다’ 이렇게 해석하면 안 됩니다. 수행을 가르칠 때도 ‘검소하게 살면 다음에 부자 된다’ 이렇게 가르쳐서도 안 됩니다. ‘검소하게 살면 내가 좋다’ 이렇게 가르쳐야 합니다. 인연 과보를 인과응보로 잘못 알고, 수행을 ‘이렇게 하면 복을 받는다’ 하는 개념으로 가르치기 때문에 불교가 사회 정의를 위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겁니다. 검소하게 살면 내가 좋은 것이지 복을 받거나 부자가 되는 것과 연결시켜서는 안 됩니다.”
회의를 마치자 펑펑 내리던 눈이 그치고 파란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법사님들과 문경수련원의 행자님들은 눈쓸기 울력을 시작했습니다. 기와지붕 추녀 끝에는 고드름이 생겼습니다.
저녁 7시 30분부터는 일반인을 위한 온라인 즉문즉설 강연이 열렸습니다. 2백여 명이 온라인 방청객으로 참여하고, 최대 7천8백여 명이 동시에 시청했습니다.
오늘은 8명이 질문을 했습니다. 그중 얼마 전 아들을 떠나보내고 자신마저 암 말기 진단을 받아 사는 게 고통스럽다는 분의 질문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아들은 뇌사 판정을 받고 하늘로, 저는 암 환자가 되었습니다
“얼마 전 14살 아들이 뇌종양으로 투병 중 뇌압 상승으로 뇌사 판정을 받아 연명치료를 중지하고 하늘의 별로 보냈습니다.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하니 잔인한 부모라는 생각에 고통스럽고, 이런 선택이 과연 옳은 것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저 또한 아이가 투병 중에 유방암 4기 환자가 되어 자식도 잃고 건강도 잃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곧 아들의 생일이 다가와 더 그립고 보고 싶어 집니다.”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아픔을 누가 대신할 수도 없고, 참 힘드실 것 같아요. 먼저 위로를 드립니다. 여기 모인 대중들도 다 같이 함께 위로를 드리겠습니다.”
스님은 합장을 하고 잠시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방청객들도 함께 두 손을 모았습니다. 질문자는 흐느껴 울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자리가 불교인들끼리 모임이라면 제가 영가를 위해서 해탈주라도 독송해 드리겠는데, 오늘 자리는 종교적인 자리가 아니고 일반 국민들과 함께하는 자리여서 종교적인 의식은 하지 않는 점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네.”
“이미 일어난 일이고,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지금 운다고 아들이 다시 살아올 수도 없고, 하느님께 빈다고 아들이 다시 살아올 수도 없고, 돈을 많이 준다고 아들이 다시 살아올 수도 없습니다. 이미 지나가버린 일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이미 지나가버린 일인데, 이걸 갖고 계속 슬피 울면 첫째, 나한테 큰 고통입니다. 둘째, 남편, 부모, 다른 자식들을 비롯해 나를 보는 나머지 가족들에게도 큰 고통을 안겨줍니다.
부처님 말씀 중에 ‘제1의 화살은 맞을지언정, 제2의 화살은 맞지 마라’ 이런 말씀이 있어요. 아들이 병사한 것이 제1의 화살이라면, 그로 인해서 질문자와 가족들이 또 제2의 화살을 맞고 있습니다. 제1의 화살은 어쩔 수 없이 맞았지만, 제2의 화살은 현명한 사람이라면 맞을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슬퍼한다고 살아오거나, 괴로워한다고 살아오거나, 보고 싶다고 살아온다면, 그렇게 해도 좋아요. 그러나 내가 어떻게 해도 이 일은 돌이킬 수가 없는 일이라면, 지금부터 나라도 잘 살아야 됩니다. 나라도 잘 살아야, 남편이나 부모, 다른 자식들이 슬퍼지는 2차 피해를 막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제 말이 맞는데, 지금 질문자는 슬픔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제 말이 귀에 안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보세요. 지금 같은 슬픔이 1년 지나고 2년 지나고 3년 지나도 계속 유지될까요? 그래도 시간이 흐르면 조금 나아질까요?”
“시간이 지나면 좀 나아지겠죠.”
“그럼 아들이 살아와서 나아졌어요? 그대로인데 나아졌어요?”
“그대로인데 나아졌습니다.”
“그대로인데 3년 후에는 나아진다면, 3년 슬퍼하다가 나아지는 게 좋아요? 지금 나아지는 게 좋아요?”
“지금요.”
“그래요. 바로 그것을 자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굳이 3년을 슬퍼한 뒤에 나아지는 것보다 지금 바로 나아지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럼 종교적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들이 빨리 좋은 곳으로 갈 수 있게 보내줘야 됩니다. 사람이 죽어서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 사실은 아무도 몰라요.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죠. 종교에 따라 천당에 간다고 하기도 하고, 극락에 간다고 하기도 하고,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난다고도 합니다. 이미 돌아가신 분이 천당에 가든, 극락에 가든, 환생을 하든 빨리 어디론가 가야 되는데, 엄마가 계속 울면 미련이 남아 못 가겠죠. 가지도 못하고 오지도 못하면 무주고혼이 됩니다. 이것은 아들에게 2차 가해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아들이 빨리 가라고 보내줘야 돼요. 그래야 극락을 가든 천당을 가든 환생을 하든 할 거 아닙니까?
어떻게 돌아가셨든 돌아가신 분에 대해선 ‘잘 가! 안녕’ 하고 인사를 해줘야 돼요. 이것을 천도라고 합니다. 천도란 돌아가신 분을 빨리 좋은 곳으로 보내주는 것입니다. 지금 엄마가 해야 될 일은 우는 것이 아니고 빨리 가라고 아들을 떠나보내주는 겁니다. 아들을 미국에 유학을 보낼 때도 아쉽지만 떠나보내잖아요. 그곳이 좋은 곳이니까요. 그것처럼 좋은 곳으로 가는 것이니까 아쉽지만 떠나보내야 하는 거예요. 딸이 시집을 갈 때도 아쉽지만 더 좋은 곳으로 가니까 떠나보내잖아요. 이렇게 더 좋은 곳으로 간다고 생각하면 헤어짐이 덜 슬픕니다.
만약 질문자가 기독교인이라면 ‘우리 아들이 천당에 갔다’라고 믿고, 불교인이라면 ‘극락에 갔다’라고 믿고, 윤회를 믿는 사람이라면 ‘병든 몸 대신 건강한 몸을 받아서 환생한다’라고 믿으셔야 합니다. 헤어짐은 아쉽지만 아들이 더 좋은 곳으로 가는 것이니까 엄마는 기뻐하면서 보내줘야 됩니다. 그럼 저를 따라 해 보세요. ‘아들, 잘 가!’ 이렇게 한 번 해보세요.”
“아들, 잘 가!” (질문자 울먹임)
질문자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흐느끼며 울었습니다.
“계속 잡고 계실래요? 오도 가도 못하게 잡고 있기 때문에 무주고혼이 되는 거예요. 아들을 무주고혼으로 만드는 게 나아요? 좋은 곳으로 보내주는 게 나아요?”
“좋은 곳으로 보내주는 것이 낫습니다.”
“엄마라면 잘 가라고 인사를 해야죠.”
질문자는 용기를 내어 큰 목소리를 인사를 했습니다.
“아들, 잘 가!” (질문자 울음)
큰 목소리에 화면 속 방청객들이 큰 박수를 쳐주었습니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방청객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요. 그렇게 딱 떠나보내고 울지 마세요. 울면서 잘 가라고 인사하는 것은 가지 말라고 하는 것과 똑같아요. 그러니 정신을 차리고, 이제부터는 자기 인생을 살아야 됩니다.
아들이 뇌사한 상태에서 산소 호흡기를 뗀 것이 엄마의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생명존중’이란 생명의 원리대로 살도록 하는 거예요.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거나, 죽어가는 생명을 억지로 살리는 것은 생명의 원리에 어긋납니다. 뇌사를 했거나 이미 늙어서 죽었는데 산소호흡기를 껴서 억지로 살리는 연명치료는 생명의 원리에 어긋납니다. 그러니 질문자는 잘하신 거예요.
연명치료는 육신을 붙들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죽었으면 땅에 묻어야지, 내가 아직 정이 남아 있다고 해서 한 달이고 일 년이고 방안에 놔두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은 땅에 묻으면 안 되고 방에 놓아두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냄새나는 것 밖에 더 있겠어요. 아무리 사랑해도 이미 죽은 사람은 장례를 치러야 됩니다.
뇌사를 했으면 산소호흡기를 떼주는 것이 환자를 위해서도 좋고, 살아있는 사람을 위해서도 좋아요. 그것은 털끝만큼도 잘못한 일도 아니고, 죄책감을 가질 일도 아닙니다.
그리고 질문자 자신도 암이라고 했잖아요. 보통은 건강한 사람이라 해도 자식이 먼저 죽으면 같이 죽고 싶죠?”
“네.”
“그렇다면 질문자는 안 그래도 같이 죽고 싶었는데 잘 됐잖아요. 죽고 싶다고 억지로 죽으려고 해봐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질문자는 죽으려고 노력을 안 해도 가만히 있으면 죽게 돼요.
자살을 하지 말라고 하는 이유는 인생은 자살할만한 가치도 없기 때문입니다. 자살하려면 일이 많잖아요. 약 사 와야지, 먹어야지, 괴로워해야지, 또 천장에 목을 매달려면 밧줄 사 와야지 걸어야지 일이 많아요. 살아 있는 것은 살게 해주는 것이 쉽지, 죽으려면 힘이 들어요. 반대로 죽을 때가 되었는데 살리려는 것도 힘이 듭니다. 그때는 죽는 것이 쉬워요.
자연스러움이라는 것은 살아있을 때는 살게 하는 것이고, 죽을 때는 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암에 걸린 것도 걱정하지 마세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죽은 뒤에 생길까요? 살아있을 때 생길까요?”
“살아있을 때요.”
“두려움이 생긴다는 것은 질문자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앞으로 1년을 살 지 10년을 살 지 모르지만, 암이 심하다면 자연수명에 비해서 좀 빨리 죽을 것 같아요? 더 오래 살 것 같아요?”
“좀 빨리 죽을 것 같아요.”
“다른 사람보다 짧게 살게 되겠죠. 그러면 그 짧은 인생을 이렇게 괴로워하면서 살다 죽는 것이 나아요? 아니면 웃다가 죽는 것이 나아요? 다른 사람들은 좀 괴로워하더라도 인생이 기니까 괜찮지만, 나는 인생이 짧으니까 더 웃으면서 살아야 되지 않을까요? 어떻게 생각해요? 1년 안에 죽는다고 하면서 계속 울다가 죽는 것이 나아요? 아니면 하루를 살더라도 웃다가 죽는 것이 나아요?”
“웃다가 죽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웃어요. 질문자는 남보다 빨리 죽을 사람이니까요. 다른 사람이 ‘너는 암 걸렸다면서 왜 그렇게 웃냐?’라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세요.
‘아무래도 내가 너보다 좀 짧게 살 거 같아서 그런다. 너는 성질 낼 시간도 있고, 울 시간도 있지만, 나는 지금 웃다가 죽어도 시간이 모자란다. 그러니 나는 웃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말하고 오늘부터 웃으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쉽지는 않아요. 그러나 제 말은 맞아요? 안 맞아요?”
“맞아요.” (웃음)
“인생이 짧을수록 웃어야 돼요. 내일 죽는다면 오늘은 하루 종일 웃어야 돼요. 울고 성질 낼 시간이 없어요. 웃을 시간도 부족하니까요. 1년을 살더라도 늘 행복하게 살아야 돼요. 울 시간이 없어요.”
“감사합니다. 잘 알았습니다.”
“종교적으로 생각하면 질문자가 1년 후에 죽는 것이 나쁜 일이 아니잖아요. 아들을 빨리 만날 수 있으니 좋은 일입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죽을 일도 아니에요.
‘오래 살면 오래 산 대로 현재 있는 가족과 같이 보내서 좋고, 때가 돼서 하늘나라로 가면 아들을 만나게 되어서 좋다.’
이렇게 생각하면 아무 문제도 아니에요. 다만 살아있는 동안에는 지금처럼 바보 같이 울면서 살지 말고 웃으면서 사시라는 겁니다. 이렇게 관점을 한 번 바꿔보세요.”
“네.”
“대답을 하면서 웃어야지요. 대답을 안 해도 웃는 게 중요한 거예요. 두 가지를 꼭 기억하세요. 첫째, 아들한테는 ‘잘 가! 안녕’ 인사를 해야 됩니다. 둘째, 나는 짧은 인생을 사니까 더 웃고 살아야 된다. 다시 한번 해볼까요? ‘아들아, 잘 가! 안녕’ 해봐요.”
“아들아. 잘 가! 안녕.’
“네. 그다음에는 ‘짧은 인생 웃고 살자’ 해봐요.”
"짧은 인생 웃고 살자!"
“네, 모두 손뼉 쳐 주세요. 질문자도 웃으세요. 이제 입가에 약간 미소가 도네요.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흐르는데,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어요.” (웃음)
스님도 크게 박수를 치며 질문자를 격려해 주었습니다. 실시간 댓글 창에도 질문자를 응원하는 댓글이 빗발쳤습니다.
이외에도 친구관계가 고민인 초등학생, 생계가 걱정되는 40대 가장, 사후세계가 궁금한 기독교인, 장인과 갈등하는 사위, 어린아이들에게 짜증을 내서 고민인 30대 여성 등 다양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8명의 질문을 받고 마지막으로 질문한 사람들의 소감을 들어보았습니다. 아들을 떠나보낸 질문자는 눈물이 마른 얼굴로 소감을 말했습니다.
“스님 말씀대로 다시 용기 내서 살아보겠습니다. 저나 저희 가족에게 두 번째 화살을 쏘아서 괴롭히지 않고 현명하게 살아가겠습니다.”
“박수 쳐주세요.”
스님과 시청자들은 응원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어서 다른 질문자들도 소감을 말했습니다.
“가족과 함께 해결해보겠습니다.”
“오늘 또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돼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통쾌한 말씀 감사합니다.”
“따끔한 말씀 감사합니다. 아이들과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어리석은 질문이라 혼날 줄 알고 긴장했는데 격려해 주셔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살겠습니다.”
질문자들의 소감을 듣고 방청객들에게도 소감을 들어보았습니다.
“질문하신 분들의 이야기와 스님의 답변을 듣다 보니 고민이 다 사라졌습니다. 스님께서 ‘00아, 잘하고 있다!’고 한 마디만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00아, 너 잘하고 있다!” (웃음)
“고맙습니다. 스님!”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온라인 즉문즉설 강연을 마쳤습니다.
내일은 3차 전국대의원회의 입재법문을 하고 저녁에는 금요 정기법회를 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