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3일 [사순 제4주간 수요일]
요한 5,17-30
내가 사목회에게 『하.사.시.』를 읽히는 이유
2005년 영화 ‘아일랜드’에서 줄거리는 두 명의 주인공인 링컨 식스 에코(Lincoln Six Echo)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링컨은 유토피아처럼 보이지만 고도로 통제된 시설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구 오염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라고 믿습니다.
외부 세계로의 유일한 탈출구는 지구상에서 마지막으로 오염되지 않은 곳으로 추정되는
‘섬’으로 가는 선택을 받는 것입니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링컨은 시설의 주민들이 실제로 외부 세계의 부유한 기증자에게 장기 이식 및 기타 생물학적 요구 사항을 제공할 목적으로 자란 복제품이라는 충격적인 진실을 발견합니다. 그들이 가고 싶어 하는 섬은 조작된 개념입니다.
선택된다는 것은 실제로 장기 적출이나 대리모 역할을 위해 파견되어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초래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링컨은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 조던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고 합니다. 조던은 좀처럼 믿지 않습니다.
조던이 섬으로 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링컨의 끊임없는 설득과 여러 정황을 통해
조던도 조금씩 링컨을 믿어갑니다.
그래서 아일랜드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함께 탈출을 감행합니다.
본래 세상은 오염되지 않았고 그들은 자기들에게 유전자를 준 이들에게 장기를 주기 위해 키워지는 클론에 불과했습니다.
만약 조던이 링컨의 조언을 귀담아듣지 않았다면 둘은 사랑하는 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더라도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에 관한 판단이 일치하지 않으면 둘의 사랑은 지속될 수 없습니다.
누구는 사탄이 좋다고 하고 누구는 하느님이 좋다고 한다면 둘의 관계가 지속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미움을 받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하느님과 대등한 존재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증명하기 위해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라고 하십니다.
심판의 권한을 넘긴다는 말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당신과 대등한 존재로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라고 하십니다.
어차피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만 심판할 것이면 아버지가 심판하면 되지 왜 아드님께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을까요? 아드님의 심판이 당신의 심판과 일치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고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당신과 대등하게 대하시는 방식입니다.
저도 조원동 성당에 왔을 때 주교님께서 “전 신부가 하고 싶은 대로 해봐!”라고 하셨습니다.
주교좌 성당의 주인은 주교님입니다.
주교님께서 저에게 전 권한을 주신 것입니다.
이는 제가 판단하는 것을 주교님께서 인정해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주교님께서 저를 대등한 위치로 올려주시는 방법이셨습니다.
아기들이 음식을 먹을 때 손으로 집어 먹으며 자신과 주위를 더럽힙니다.
이는 부모가 보기에는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모릅니다.
그러면 아기와 부모는 온전한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부모는 아기에게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것이 일치할 때 그들은 비로소 인격적인 관계를 맺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도 이 수준으로 우리가 올라오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저는 사목회 위원들에게 ‘하.사.시.’를 읽힙니다. 저의 삶의 옳고 그름은 이 책을 기준으로 합니다. 만약 이분들이 매일 이 책을 읽고 자신들의 삶을 이 책의 모범과 일치시킨다면 저는 이분들에게 저 자신의 모든 권한을 맡길 수 있습니다.
어차피 저 혼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심판하시는 대로 심판하실 분이기에 아버지의 모든 영광을
차지하게 되는 것처럼, 신자들은 사제의 옳고 그름에 일치해야 하고, 사제는 주교의 옳고 그름이 일치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대등해지기 위해 우리의 모든 옳고 그름에 관한 판단이 그리스도의 그것과 일치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13일 [사순 제4주간 수요일]
복음: 요한 5,17-30
오늘도 예수님을 통한 구원과 영생은 매일 우리 눈앞에 선물처럼 펼쳐지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무상으로 베푸신 선물이 있는데, 그것은 너무나 큰 것이어서, 믿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바로 구원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놀랍게도 그 선물은 이 세상 그 누구도 제외되지 않는 공평한 선물입니다.
마치 눈이 그 어디든 골고루 내리듯, 아침 서광이 세상 방방곡곡을 고루 비추듯, 그렇게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한 선물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있습니다. 선물을 주고자 하는 쪽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끝까지 거부하고 도망가는 사람에게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아침이 되어 밝은 태양 빛이 비칠 때, 온몸으로 만끽하지 않고, 두꺼운 커튼으로 창을 막아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동족 유다인들이었습니다.
물론 모든 유다인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주로 고위층 인사들, 나름 많이 배웠다는 사람들, 율법의 대가들로 자칭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이 저지른 치명적인 실수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의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려도 부족할 터인데, 그들은 예수님을 범법자로 몰고 갔습니다.
안식일 규정을 위반한 죄, 신성 모독죄를 들이대며 예수님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반면에 너무도 쉽게 선물을 받아안고 기뻐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가난하고 고통받던 백성이었습니다.
천대받고 무시당하기를 밥 먹듯이 하던 세리와 창녀, 죄인들이었습니다.
비록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단순하고 소박했던 그들은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존재 자체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분께서 선포하시는 말씀 앞에 의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기꺼이 수용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그들은 살아생전 하느님을 뵙는 지복직관의 은총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오늘도 예수님을 통한 구원과 영생이 매일 우리 눈앞에 선물처럼 펼쳐지는데, 우리 스스로 눈을 막고 돌아서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수시로 주님 축복이 우리 머리 위로 폭포수처럼 내려오고 있는데, 그것을 피하려고
어둡고 깊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순 제4주간 수요일 강론>
(2024. 3. 13. 수)(요한 5,17-30)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요한 5,17-18ㄱ).”
예수님께서 ‘안식일’인데도 벳자타 못 가에서 병자를 고쳐 주시자(요한 5,9),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고 생각해서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요한 5,16).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이 안식일에 쉬지 않고 병자를 고쳐 주는 일을 하시는 이유를 설명하신 말씀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는,
하느님께서는 단 한 순간도 쉬시지 않고 일하신다는 뜻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창세 2,2).”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하시던 일’은 천지창조 작업을 가리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일’은
인간들을 보살피시고 보호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뜻합니다.
창세기의 ‘쉬셨다.’ 라는 말은, 천지창조 작업을 마무리하셨다는 뜻일 뿐이고, 하느님께서는 그 작업 후에도 쉬시지 않고 인간들을 사랑으로 보살피시고 보호하시는 일은 계속 하고 계신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나도 일하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아버지께서 쉬시지 않고 일하시기 때문에 당신도 요일과 상관없이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단 한 순간도 중단되지 않습니다.
만일에 한 순간이라도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중단하신다면, 그 순간 우주 전체가 얼어붙을 것입니다.
(생명력을 잃어서 모든 것이 소멸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날마다 숨을 쉬는 일과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의식을 하든지 안 하든지 간에
끊임없이 숨을 쉬고 있습니다.
만일에 숨 쉬는 것을 멈춘다면, 그것은 곧 죽음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바로 그 ‘숨’과 같은 것, 또는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또는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존재하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갑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은 생명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생명력을 받아야만 존재할 수 있고, 살 수 있습니다.
그 생명력이 끊어지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랑을, 끊임없이 뛰고 있는 ‘심장’으로, 또는 온 몸 속을 흐르는 ‘혈액’으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심장이 뛰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때가 많은데, 만일에 심장이 뛰는 것을 멈추고 혈액이 흐르지 않으면, 극심한 고통과 함께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않아도, 잊어버리고 있어도,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우리에게 생명력을 주고, 우리를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들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히브 1,3).”
이 말을 간단하게 줄이면,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모습’이신 분”입니다.
더 줄이면,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8).
이 말은 예수님에 대해서도 그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신 분입니다.
사랑이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과 모든 말씀은 사랑 그 자체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사랑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요한 5,25).”
신앙인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오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방법은,
복잡하고 어렵게 말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곧 예수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방법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은 나중으로 미루어도 되는 생활이 아니라 ‘지금’ 당장 서둘러서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지금’이 곧 ‘영원’의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나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를 믿어라. 내 말을 믿고 내 뒤를 따라라.”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신경 쓰고 관심 갖고 걱정하다가 정말로 중요한 것 하나를 놓칠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거나 버려도 절대로 놓치면 안 되는 것 하나는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생명’이고, 그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영원한 것이 아니라면, 또는 하느님 나라에 가지고 들어갈 수 없는 것이라면, 지금 내가 신경 쓰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은 아무 쓸모도 없고 가치도 없는 것들, 우리가 능동적으로 버려야 할 쓰레기들입니다(필리 3,8).>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