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동안 꽤 많은 비가 내린 뒤라 조금 걱정스럽긴 했지만 우리는 금요일 퇴근을 하자마자 한 달 전부터 예약을 해 둔 경북 영덕군에 있는 칠보산 자연휴양림 안에 있는 산장으로 향했다. 영월을 벗어나 경북 봉화군 춘양에 도착할 무렵부터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요새는 어디든 길이 잘 나 있어 내리 계곡으로 가느라 멀미를 좀 하긴 했으나 아주 어두워지기 전에 벌써 춘양에 도착한 것이다.
춘양은 어귀부터 사과밭이 펼쳐졌다. 이차선 도로에 양 쪽으로 능금나무를 심은 것이 참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그 위아래 밭에는 향긋하고도 먹음직스러운 사과가 주렁주렁 달려 있고, 듬성듬성 새빨간 홍옥이 달린 나무도 있었다. 한 입 베어물면 달콤한 사과향이 쏟아질 것 같았다.
춘양 중심지에 들어서자 춘양목과 송이 축제가 열려 길 가에 춘양목이 가득 쌓여 있다. 그 왼쪽 옆으로는 먹을거리 장터. 사물놀이패가 저녁을 먹으러 가는지 우리 앞을 지나간다. 춘양목은 소나무의 한 종류인 금강송인데, 이곳의 금강송은 다른 지방의 것보다 훨씬 질이 좋아서 '춘양목'으로 불러 구별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가 거의 베어 가서 요즘은 순수한 춘양목을 보기가 쉽지 않고, 울진군 소광리와 몇몇 곳에서만 그 솔숲을 잘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이 춘양목은 나무 색도 붉으레한 것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굵직하고 쑥쑥 뻗어 올라간 모습이 시원스럽고 예술적이다. 불영계곡을 따라 백암 온천 쪽으로 가는 계곡은 이 나무로 하여 수려하고 정취가 깊다. 봉화는 이렇게 소나무가 잘 보존되고 많아서인지 송이도 많이 나기로 유명한데, 춘양이 그 중심지인 모양이다.
백암 온천이 있는 온정면 온정리부터 영덕게로 유명한 영덕 입구까지는 배롱나무 가로수가 또 일품이다. 구불구불하고 호젓한 좁은 산골 도로 가로수로 안성맞춤이라고 느꼈다. 영덕부터는 바다를 보면서 칠보산 입구까지 갔다.
칠보산 중턱 아래에 자리한 산장에 도착하니 밤 10시다. 바람이 시원하고 숙소 바로 아래로 계곡 물이 세차게 내려가는 소리가 웅장하였다. 하지만 산길을 가느라 멀미를 하여서 다음 날 아침에 둘러 보기로 하고 우리는 모두 곧장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주변을 둘러 보니 숙소 앞으로는 툭 트인 동해 고래불 해수욕장이고 뒤로는 병풍처럼 펼쳐진 칠보산이다. 어젯밤에 고단해서 미처 못 본 골짜기에 내려가 보니 비가 많이 내려 물이 콸콸 쏟아져 내리는 소리가 시원하기 그지 없었다.
서둘러 아침밥을 먹은 다음 간단히 김밥을 싸서 산에 올랐다. 이름이 칠보산(七寶山)이니 볼거리가 많겠지 하며 오르는데, 비가 얼마나 많이 왔는지 잘 닦아 놓은 등산길이 푹푹 패어나가 깊은 골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시작하는 곳부터 새며느리밥풀꽃이 무리지어 화사하게 피어 있고, 가을인지라 쑥부쟁이 여러 종류에 구절초에 산박하에 삽주꽃에 층층잔대에 갖가지 취꽃들이 올라가는 길 가에 소박하게 피어서 산에 오르는 이들을 반기고 있었다. 취꽃도 분취는 정말 분처럼 줄기와 꽃받침 부분이 하얗고, 당분취는 꽃잎이 달팽이 안테나 같았다. 재미있게도 이것들이 살고 있는 곳이 다 달랐다. 나무도 그랬다. 산허리까지는 솔밭이었고, 그 위부터 정상까지는 신갈나무 숲이었다. 구절초도 소나무가 있는 곳에는 이제 마악 꽃봉오리를 맺은 모습이었는데, 신갈나무가 있는 곳부터는 활짝 피어 있었다. 아마도 산 위쪽이 더 볕이 잘 들거나 따뜻한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산은 아래부터 중턱까지는 가파르고 그 위부터는 부드러운 능선인데 혹시 그 까닭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산 아래쪽에는 새며느리밥풀꽃과 산박하가 가득하더니 위에는 취꽃들이 많았다.
이 산에는 또 버섯도 많았다. 비가 내린 뒤라서 별별 버섯이 더 많이 있었는데 이름을 하나도 몰라 사진을 찍어 집에 와 찾아보니 꼭 도토리 모양 같은 '테두리 방귀 버섯', 빨갛고 도톰한 '혈색 무당 버섯', 자잘하고 노란 무슨 버섯에 죽은 나무들에 붙은 버섯들, 가지가 세 갈래인 적황색 버섯에 탱탱하게 잘 여문 밤송이같은 버섯에 찐빵같이 하얗고 둥근 버섯에 잘 썩은 나뭇잎 사이에서 솟아나온 작고 가는 버섯들에 까만 버섯에 우산처럼 쫙 퍼지고 커서 우리 아기가 그 밑으로 머리를 갖다 대 본 버섯에, 산길을 다 내려와서 본, 꼭 하드(얼음과자)처럼 생긴 버섯까지 우리가 마치 버섯 체험을 하러 간 것 같았다.
여섯 살짜리와 함께 오르는 거라서 우리는 칠보산과 등운산으로 갈라지는 갈림길에서 등운산으로 목적지를 바꾸었다. 보통 어른이 한 시간이면 오른다는 곳에 우리는 세 시간을 갔으니 등운산보다 두 배로 먼 칠보산을 가는 것은 무리이다 싶었다.
이 산은 참 재미있게도 이 갈림길부터 침엽수인 소나무 숲이 끝나고 활엽수인 신갈나무 숲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가파른 길도 끝나고 여기부터 등운산 정상까지는 아기자기하고 편안한 오솔길이었다. 그래서 등운산 정상에서는 조금도 산 정상에 오른 기분을 느끼지 못했다. 네모난 작은 화강암으로 그곳이 정상임을 말해 줄 뿐이었다. 하지만 왼쪽 아래 나뭇잎 사이로 깊고 넓게 동해가 펼쳐지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이 산이 지닌 또 하나의 매력은 시작부터 끝까지 솔 숲 사이로 또는 신갈나무 사이로 시원한 푸른 바다를 바라 보는 것, 바로 이것이었다.
정상을 내려오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나무도 떡갈나무와 나무껍질이 얼룩얼룩 회색을 지닌 어떤 나무로 바뀐다. 버섯 종류도 바뀌고, 제일 기뻤던 것은 투구꽃을 만난 것이었다. 그 예쁜 보랏빛과 정말 투구를 쓴 것 같은 꽃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책에서는 다른 비슷한 꽃들과 구별하기 어려웠는데, 이 꽃을 보는 순간 확실하게 투구꽃임을 알 수 있었다. 꽃색이 진범 같은 꽃보다 맑고 참 예뻤다. 그러고 보니 등운산 쪽에서는 올라오면서 본 그 많던 며느리밥풀꽃을 하나도 보지 못했다. 산박하도 그렇고 취꽃도 그랬다. 올라가면서 보던 것들을 내려오면서는 하나도 보지 못했다. 나무도 내려올 때에는 산 아래쪽에 초피나무와 때죽나무가 많았다. 생강나무는 양 쪽 산 모두 중턱부터 아래까지 살고 있었다.
산을 다 내려오니 다시 산장이 보였다. 올라갈 땐 산의 오른쪽으로 해서 갔는데 내려올 땐 왼쪽이었으니 산을 한 바퀴 돈 것이다. 아, 그 때 보인 마지막 버섯. 꼭 하드를 꽂아 놓은 것 같은 버섯들이 너댓 개 옹기종기 모여 솟아나 있었다. 그리고 산장을 내려오면서는 마가목, 편백나무, 회화나무 같은 것들을 가로수로 심어 휴양림의 의미를 더해 주었다. 마가목은 지금 열매가 빨갛게 익어 가고 있어 가을의 운치를 한껏 느낄 수 있었다.
등운산은 해발 700미터가 넘고 칠보산은 800미터가 넘는다. 이 둘을 다 합쳐서 칠보산 자연 휴양림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동해를 앞에 두고 두 팔을 벌린 것처럼 양 쪽으로 펼쳐져 있다. 칠보산은 옛날에 돌옷, 더덕, 산삼, 황기, 멧돼지, 구리, 철 등이 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지금도 이것들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굳이 그 까닭이 아니더라도 이 산은 나무와 꽃과 버섯, 산세와 풍경만으로도 칠보처럼 아름답다.
산행을 다 마치고 바다 쪽으로 다시 내려오다 보니 새며느리밥풀꽃이 산자락에 즐비하게 피어 있다. 짙은 분홍빛으로 화사하게 칠보산을 수 놓은 이 꽃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자연 휴양림답게 크게 힘들지 않으면서 운동이 될 만큼 알맞게 높고, 갖가지 나무와 꽃, 버섯들이 학습의 장으로도 훌룡한 이 산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멋있게 느껴진다. 특히 바닷길을 따라 능선의 오솔길을 걷는 것은 이 산만이 지닌 매력일 것 같다. |
첫댓글 산의 모든 곳에서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데, 옅게 구름이 껴서 하늘과 바다가 구별이 잘 안 돼.
단란해 보이는 가족의 산행, 즐거웠겠다. 칠보산, 역시 이름과 연관된 산이렸으니 하고 검색해 보니 일곱가지 보배가 가득한 산이라네. [돌옷, 더덕, 산삼, 황기, 멧돼지, 구리, 철] 나도 바다가 보고싶다.
칠보산은 가본적이 없는데 넘 아름다울것 같다, 아름다운가정 행복하길...
가보지는 않았지만 꽤 유명한 산이지? 재미있었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