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
/정병근
빤스만 주렁주렁 널어놓고
흔적도 없네
담 넘어 다 보인다
지나가는 사람들 다 본다
한 접도 넘고 두 접도 넘겠네
빨랫거리 내놓아라 할 때
문 처닫고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겨우내 빤스만 사 모았나
저 미친 년, 백주白晝에
낯이 환해 어쩔거나
오살 맞은 년
하늘궁전
/문태준
목련화가 하늘궁전을 지어놓았다
궁전에는 낮밤 음악이 냇물처럼 흘러나오고
사람들은 생사 없이 돌옷을 입고 평화롭다
목련화가 사흘째 피어 있다
봄은 다시 돌아왔지만 꽃은 더 나이도 들지 않고 피어 있다
눈썹만한 높이로 궁전이 떠 있다
이 궁전에는 수문장이 없고 누구나 오가는 데 자유롭다
어릴 적 돌나물을 무쳐먹든 늦은 저녁밥때에는
앞마당 가득 한사발 하양 고봉밥으로 환한 목련나무에게 가고 싶었다
목련화 하늘궁전에 가 이레쯤 살고 싶은 꿈이 있었다
목련
/류시화
목련을 습관적으로 좋아한 적이 있었다
잎을 피우기도 전에
꽃을 먼저 피우는 목련처럼
삶을 채 살아 보기도 전에 나는
삶의 허무를 키웠다
목련나무 줄기는
뿌리로부터 꽃물을 밀어올리고
나는 또 서러운 눈물을 땅에 심었다
그래서 내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모든 것을 나는 버릴 수 있었지만
차마 나를 버리진 못했다
목련이 필 때 쯤이면
내 병은 습관적으로 깊어지고
꿈에서마저 나는 갈 곳이 없었다
흰 새의 날개들이 나무를 떠나듯
그렇게 목련의 흰 꽃잎들이
내 마음을 지나 땅에 묻힐 때
삶이 허무한 것을 진작에 알았지만
나는 등을 돌리고 서서
푸르른 하늘에 또 눈물을 심었다
목련
/김지나
언제 모여들었을까
나무 가지에 하얀 새떼가 둥지를 틀었다.
향기로운 지절거림으로 먹먹해진 귀
바라보기만 해도 풍성한 둥지엔
햇살로 벙싯 살이 오져 가는 흰 날갯죽지가 눈부시고
갑자기 바람난 4월 봄비에
후두둑 날아오른 하얀 새떼의 비상,
빈 둥지에는
푸른 깃털이 잔바람에 나부끼기 시작했다.
목련
/박주택
어둠을 밀어내려고, 전 생애로 쓰는 유서처럼
목련은 깨어 있는 별빛 아래서 마음을 털어놓는다
저 목련은 그래서, 떨어지기 쉬운 목을 가까스로 세우고
희디흰 몸짓으로 새벽의 정원, 어둠 속에서
아직 덜 쓴 채 남아 있는 시간의 눈을 바라본다
그 눈으로부터 헤쳐 나오는 꽃잎들이
겨울의 폭설을 견딘 것이라면, 더욱더 잔인한 편지가
될 것이니 개봉도 하기 전 너의 편지는
뚝뚝 혀들로 흥건하리라, 말이 광야를 건너고
또한 사막의 모래를 헤치며 마음이 우울로부터
용서를 구할 때 너는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며
말똥거리다 힘이 뚝 떨어지고 나면
맹인견처럼, 이상하고도 빗겨간 너의 그늘 아래에서
복부를 찌르는 자취와 앞으로 씌어질 유서를 펼쳐
네가 마지막으로 뱉어낸 말을 옮겨 적는다
하얀 목련
/양희은
하얀 목련이 필 때면 다시 생각나는 사람
봄비 내린 거리마다 슬픈 그대 뒷모습
하얀 눈이 내리는 어느 날 우리 따스한 기억들
언제까지 내 사랑이어라 내 사랑이어라
거리엔 다정한 연인들 혼자서 걷는 외로운 나
아름다운 사랑 얘기를 잊을 수 있을까
그대 떠난 봄처럼 다시 목련은 피어나고
아픈 가슴 빈자리엔 하얀 목련이 진다
목련
/홍수희
내 어릴 적
어머니
분 냄새난다
고운 입술은
항상
말이 없으시고도
눈과 눈을
마주치면
애련히
미소지으시던
빛나는 치아와
곱게 빗어 올린
윤나는 머릿결이,
세월이
너무 흘러
무정하게도
어머니 머리에는
눈꽃이 수북히
피어났어도
추운 겨울 지나고
봄볕 내리는
뜨락에
젖빛으로
피어 앉은 네
모습에선
언제나
하얀
분 냄새난다
목련 나무
/정병근
겨울답지 않은 몇 날인가 했는데
목련 나무가 꽃망울을 맺었다
일단 피어 보는 것이다
꾸물대지 말고 나가보라고 재촉하자
밥 먹던 목련 나무가
대문 틈에 꽃 촉을 끼워놓고
들어와서 먹던 밥을 먹는다
밥을 다 먹으면 대문 밖으로 나가
개울의 얼음부터 밟아 볼 참이다
아직 봄은 멀지만,
목련 나무는 한시도 쉬지 않고
바깥에 귀를 세우고
꽃 바퀴를 돌리고 있다
언제든 피면 필 태세로
머지않아 꽃이 피면
목련 나무는 지나가는 바람을 불러
한바탕 꽃 잔치를 벌일 참이다
"여기 밥 한 공기 더! 술도 더!"
꽃을 몽땅 거덜 낸 목련 나무는
바람이 떠난 자리에
넓고 푸른 잎을 드리우고
회임의 괄약근을 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