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당신 백성을 당신의 지팡이로 보살펴 주소서
미카 7,14-20; 루카 15,1-32 / 사순 제2주간 토요일; 2024.3.2.
오늘 독서에서 미카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하느님께 간절한 소망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과수원 한가운데 놓인 양 떼처럼 강대국들 틈바구니에서 부대끼고 있는 이스라엘을 보호해 달라고, 마치 숲속에 홀로 살아가는 듯 하느님을 섬기는 무리로서는 독보적인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시어 그 옛날 이집트 손아귀에서 탈출시키실 때처럼 놀라운 일을 보여 달라고 탄원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미카 예언자가 간절하게 탄원한 그 소망대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지팡이로 당신 백성을 이끄시고 자비를 베푸실 미래에 대해 돌아온 아들의 비유로 계시하셨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미카가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달라고 청했던 이스라엘의 죄악을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 같은 이스라엘의 우두머리들은 버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기들 가운데 오신 메시아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배척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세리와 죄인으로 취급받던 유다인들이 메시아를 알아보고 그분의 백성이 되겠다고 그분 주위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습니다.
이 비유는 루카 복음사가가 소개하는 되찾은 비유 이야기들 가운데에서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흔히 ‘탕자의 비유’로도 불려온 이 이야기의 초점은 바로 아버지의 자비입니다. 초점은 돌아온 아들이 아니라 그를 기다리다가 맞이하는 아버지에 있습니다.
돌아온 아들의 비유(램브란트, 1609~1669)
복음을 선포하신 활동과 세상의 반응을 담은 이 비유에 드러나 있듯이,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실 때 만나신 사람들은 크게 보아 두 부류였습니다. 그분을 기다리다가 환영해 주고 맞이한 첫째 부류는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처럼 죄인으로 낙인찍혀서 고생하며 소외되었던 이들로서, 세리와 창녀들을 비롯하여 온갖 질병을 앓거나 마귀 들려서 고통 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비주류(非主流)로 취급받던 사람들에게 갈릴래아에서는 당신께서 직접 선포하기도 하셨고 제자들을 시켜서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복음을 선포하게도 하셨는데, 이들이 하느님께 돌아오자, 예수님께서는 기쁘게 맞이하셨고 기꺼이 용서하시는 뜻으로 ‘신발’을 신겨주셨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로 받아들여주시는 뜻으로 ‘반지’도 끼워주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주류를 자처하면서, 율법을 글자 그대로 철저하게 준수하던 바리사이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며 경건하게 처신하던 사두가이들은 자신들과 달리 살아가던 죄인들을 가까이하고 어울리시던 예수님의 처신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메시아로 대접하기는 고사하고 율법을 어긴다고 험담을 하거나 마귀에 들려 기적을 일으킨다고 중상모략을 하기도 했으며, 종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렸습니다. 이들에게는 관용을 찾아보기 어려웠으며 더군다나 하느님의 자비를 배우려는 생각조차 아예 없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폐막된 지 50년이 되던 지난 2016년에 모두가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을 닮자”(에페 2,4)는 취지로 ‘자비의 희년’을 선포하면서, 회칙 ‘자비의 얼굴’(Misericordiae Vultus)을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반포하였습니다. 이 희년 선포 미사에서 교황은, “지금은 자비의 시대입니다. 평신도들이 자비를 실천하고 다양한 사회 환경에서 자비를 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하고 강론하였습니다. 또한 회칙에서는,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이들에게 마실 것을 주며,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고, 나그네들을 따뜻이 맞아주며, 병든 이들을 돌보아 주고, 감옥에 있는 이를 찾아가 주며, 죽은 이를 묻어 주는” 육체적 자비 활동을 먼저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전통적 자비 활동에 더하여 새로운 강조점을 보탰는데 그것은, “의심하는 이들에게 조언하고, 모르는 이들에게 가르쳐 주며, 죄인들을 꾸짖고,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하며, 우리를 모욕한 자들을 용서해 주고, 우리를 괴롭히는 자들을 인내로이 견디며, 산 이와 죽은 이를 위하여 기도해 주는 활동에 나서달라.”고 호소한 메시지입니다. 이 새로운 호소는 영적인 자비 활동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황의 이 호소는 하느님의 자비를 보여주신 예수님의 지팡이입니다. 새로운 메시아 백성으로 불림 받은 우리가 이 지팡이가 가리키는 자비를 외면하게 되면, 그것이 또 다른 죄를 저지르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육체적이고도 영적인 자비를 베푸는 길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패권 추구에 골몰하는 강대국들에 둘러싸인 과수원 한가운데에서, 숲속에 홀로 살아가는 듯한 우리 교회와 우리 민족이 하느님의 자비를 받는 길입니다.
이 두 가지 종류의 자비 활동 가운데에서 육체적인 자비를 베푸는 일이 평신도 사도직에 더 어울린다고 봅니다. 신앙인 각 개인들은 물론 사도직 단체들에서 육체적인 자비를 베푸는 일이 평신도들의 기본 활동이 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자비를 베푸는 일 또한 본당 사목에서든 사회 사목에서든 성직자, 수도자들의 필수 활동이 되어야 하며, 적절한 은사를 받은 평신도들도 참여하면 좋겠습니다.
어제가 바로 105년 전 삼일독립선언이 발표되어 2천만 동포 가운데 2백만 여명이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뜻깊은 삼일절이었습니다. 육당 최남선이 기초하고 민족대표 33인이 공동으로 발표한 삼일독립선언문에는 새 시대를 내다본 혜안이 이렇게 담겨 있었습니다.
아아, 새로운 시대가 눈 앞에 펼쳐지도다. 위력의 시대가 가고 도의의 시대가 오도다. 과거 전세기에 갈고 닦아온 인류적 정신이 바야흐로 새 문명의 빛을 인류의 역사에 비추기 시작하도다. 새 봄이 세계에 와 만물이 되살아나기를 재촉하는도다. 매서운 추위에 숨을 겨울잠 자듯 쉰 것이 그 시대의 형세라 하면, 따뜻한 바람과 볕에 위세와 명성을 떨치는 것은 이 시대의 형세이니, 천지에 돌아온 운수를 만나고 세계의 변하는 흐름에 탄 우리는 아무 주저할 것이 없으며 아무 거리낄 것 없도다. 우리의 고유한 자유권을 보전하여 자유로운 삶을 누릴 것이며, 우리의 넘쳐나는 독창력을 발휘하여 봄기운 가득한 세상에 민족적 우수성을 맺어나갈지로다. 우리가 이에 일어나도다. 양심이 우리와 함께하며 진리가 우리와 함께 나아가는도다. 남녀노소 없이 암울한 낡은 옛집에서 활발히 일어나 만물의 현상과 더불어 흔쾌한 부활을 이루게 되도다. 오랜 조상이 우리를 도우며 전세계 기운이 우리를 밖에서 지켜주니 시작이 곧 성공이라. 다만 눈앞의 빛으로 힘차게 나아갈 따름이다.(삼일독립선언문에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을 받아 국권을 빼앗긴 비운의 처지에서도 우리 민족에게는 이러한 새로운 시대와 문명을 향한 상서로운 기개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양심과 진리의 가치에 충실하면서 민족의 부활을 향한 믿음이 듬뿍 묻어있었음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선언이 발표되었던 백여 년 전이나 오늘날이나 우리나라 주변의 강대국들은 여전히 패권 추구에 골몰한 탐욕스런 처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보이지만, 우리 민족은 하느님의 최고선에 입각한 가치를 추구하는 데 한결 같았음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기는 했으나 빈부양극화가 커져가고 있는 대한민국 내부의 사회 복음화에 있어서나,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공산주의 이념을 부여안고 삼대째 권력을 세습하고 있는 왕조국가 북한 체제 하에서 생존의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 북녘 동포를 껴안아야 하는 민족 복음화에 있어서나, 그리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지 못하고 빈곤의 굴레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아시아 대륙의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나, 위와 같은 상서로운 기개와 가치 실현의 의지는 여전히 아니 지금에서야 더욱 절실하게 필요한 시대적 요청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민족이 앞장서서 아시아 대륙에서 사랑의 문명을 이룩하기 위하여 하느님의 자비를 전합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지금은 자비의 시대입니다. 평신도들이 자비를 실천하고 다양한 사회 환경에서 자비를 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하느님, 당신 백성을 당신의 지팡이로 보살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