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시 포남동 일대는 전부 논이었다.
강릉역을 지나서 동해 바다 海松林까지가 논으로 가득 차 있었다.
봄에 논에 물을 대면, 개구리 뒷다리를 구워먹었다. 먹다 남으면, 키우는 닭에게 나누어 주었다.
여름에서 가을까지는 메뚜기를 잡아 와서 소금에 볶아 먹었다. 그 당시 술집에서도 메뚜기를 안주로 팔았다.
아이들은 도시락 반찬으로 메뚜기를 싸 갈 정도였다.
메뚜기와 같이 잡은 것은 물방개였다.
물방개를 잡아와서 세숫대야에 풀어서 장난을 쳤다.
단오 때면 물방개로 상품을 맞추는 야바위꾼들도 많았다.
논물 속에는 주먹 만한 우렁이가 가득 차 있었다. 우렁이를 주워다 어머니를 갖다 주면 여러 가지 요리를 해 주신 기억이 난다.
겨울이면, 삽을 들고 논에 가서 미꾸라지를 잡았다. 따로 힘들게 잡을 필요도 없었다. 엄지 손가락 보다 굵은 미꾸라지가 오골거렸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미꾸라지는 기가 막힌 단백질이었다.
그래서 나는 鰌魚湯이라는 말이 가을 秋收가 끝나고, 겨울에 먹는 음식이라서 秋魚湯으로 변했을 거라고 짐작을 한다.
秋魚湯이 아니라면 冬魚湯으로 불러도 무방 할 것도 같다.
포남동 막대한 논이 끝나는 지점에는 넓은 海松林이 있었다.
가을 바람이 솔솔 불어오면, 그곳에는 해송이가 들 불처럼 돋아 났다.
약간 높은 지역은 국수버섯이 至賤이었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면, 아이들과 강릉역에서 철로를 걸어서 경포대까지 갔다.
어머니 몰래 부엌에서 고추장과 보리밥으로 밴또를 만들어 보자기에 넣어 허리춤에 차고 아이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면서 철길을 걸었다.
바다에서는 째복과 섭을 잡았다. 알고 보니 우리가 째복이라고 부르는 조개가 민들조개와 백합이었다.
섭은 강릉 사투리이고, 홍합을 말한다.
째복을 잡아 生으로 먹기도 하고, 도시락을 꺼내서 고추장과 함께 비벼서 먹기도 했다.
어느 날인가, 모래 속에 묻어 놓고 작대기로 표시해 둔 밴또와 옷을 찾을 수 없었다.
아이들은 밥을 먹고 있는데 굶을 수 밖에 없었다.
문제는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같이 묻어 두었던 옷이 없어져서 맨발에 발가벗고 철길을 걸어서 옥천동 강릉 역까지 왔고, 철길은 여름 햇살에 벌겋게 달아서 발 바닥이 아파서 철길을 걷다가 풀 숲으로 옮겨 아픈 발바닥을 달래야 했다.
아이들은 발가벗고 가는 나를 놀렸고, 나는 울면서 대관령을 넘어가는 여름 해를 쳐다 보다가 가끔 울음을 멈추었던 기억이 있다.
집에 돌아와서는 어머니로부터 야단을 맞았다. 밴또와 옷을 잃어 버리고 온 나는 온 동네에서 놀림감이 되었다.
아이들의 놀림감이자 동네 놀림감이 된 셈이다.
그런 날이면, 나는 꼭 이불에 오줌을 쌌다.
그러면, 어머니는 쌀을 이는 키를 뒤집어 쓰게 하고 동네방네 놀림감이 다시 되곤 했다.
강릉 역 앞의 넓은 길은 염소(산양)들이 풀을 뜯어 먹었다.
아이들과 놀다 보면, 어머니가 산양유를 가져와 먹으라고 닦달을 하고 나는 먹지 않으려고 도망을 치곤했다.
산양유 먹는 것이 아이들과 노는 일에 방해가 된다는 생각 뿐이었던 것 같다.
요즘 단백질이 전 국민의 관심사다.
방송에서도 온통 단백질이 이야기 뿐이다.
늙어 가면 근육이 빠져서 단백질을 더욱 먹어야 한다는데, 나는 그 이야기를 들을 때 마다 과거가 생각난다.
격세지감이다!
과거 놀면서 재미로 먹었던, 메뚜기 개구리 우렁이 째복 섭 해송이 우렁이 미꾸라지가 그립다.
그리고 어머니의 산양유를 먹지 않았던 것이 후회가 된다.
다시 한번 물방개 놀이를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