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려도 남는 장사”… 주가조작에 취약한 한국 증시
끊임없이 반복되는 주가조작 범죄《금융당국이 ‘증권 범죄와의 전쟁’을 선언할 만큼 올 한 해 국내 증시는 주가조작으로 시끄러웠다. 올 4월 라덕연 세력의 주가조작에 이어 6월 ‘제2의 라덕연 사태’로 불리는 5개 종목 주가 하락 사태가 터졌다. 지난달에는 영풍제지, 대양금속 주가조작이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한국 증시가 주가조작에 취약한 배경에 대한 궁금증이 일고 있다.》
● 폰지사기·CFD로 진화된 주가조작
올 들어 주가조작에 대한 경각심이 커지게 된 것은 1월 김성태 전 쌍방울그룹 회장 구속으로 관련 의혹들이 드러나면서부터다. 김 전 회장 측은 무자본 인수합병(M&A)을 통해 다수 상장사 지분을 확보한 뒤 유상증자, 전환사채(CB) 발행을 통해 대주주 혹은 우호세력의 지분을 불렸다. 이후 호재성 공시를 통해 주가를 조작한 뒤 시세차익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주가조작에 동원된 쌍방울, 광림은 상장폐지 위기에 몰리면서 거래가 정지됐다. 쌍방울 사태로 입은 일반 투자자들의 피해 규모는 수천억 원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올 4월에는 외국계인 소시에테제네랄(SG) 증권사발 8개 종목(삼천리 다우데이타 하림지주 대성홀딩스 세방 선광 서울가스 다올투자증권)이 연속 하한가를 기록해 증시가 요동쳤다. 이들 종목은 자산가치는 있지만 유통 물량이 적어 시장에서 소외된 종목들이었다. 시장 참여자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가운데 이들 주가는 수년간 최소 4배에서 최대 17배까지 급등했다. 신종 주가조작을 주도한 인물은 투자 컨설팅사 대표로 있던 라덕연 씨였다. 과거 주가 조작범들이 단기 차익을 노린 것과는 달리 라 씨 일당은 ‘통정거래’(매수자와 매도자가 사전에 가격을 정해 놓고 일정한 시간에 주식을 거래하는 것)를 통해 장기간 주가를 조금씩 올리는 수법을 동원했다.
주가조작 방법이 고도화되면서 대상 종목의 특징도 바뀌었다. 기존에는 손쉽게 경영권을 확보할 수 있고, 단기간 주가 등락이 가능한 종목을 주로 노렸다. 이에 비해 라덕연 일당은 유통 물량이 적고, 자산가치가 있는 종목을 타깃으로 삼았다. 통상적인 주가 조작범이 사채업자 등을 통해 자금을 조달한 것과는 달리 라 씨 일당은 폰지사기(다단계 금융사기) 방식을 이용해 투자자를 모았다. 이 과정에서 ‘차액결제거래(CFD·투자상품을 보유하지 않으면서 차후 가격 변동에 따른 차익만 정산하는 장외 파생상품)’로 피해액을 키웠다.
두 달 뒤인 6월에는 온라인 주식카페 운영자인 A 씨가 라덕연 일당과 유사한 방식으로 동일산업 동일금속 만호제강 대한방직 방림 등 5개 종목에 대해 장기간 주가를 조작했다는 의혹이 일었다. 이어 지난달에는 영풍제지 대양금속 하한가 사태로 파문이 일었다. 영풍제지 건에도 소수 계좌로 통정거래를 하면서 장기간 주가를 끌어올리는 신종 방식이 쓰였다. 라덕연 일당이 CFD를 활용했다면, 영풍제지 대양금속의 경우 증권사 미수거래를 통해 피해 규모를 키웠다.
● ‘솜방망이 처벌’이 재범률 높여
주가조작은 시장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고 선량한 투자 피해자를 낳는 범죄다. 주가조작이 횡행하면 기업의 정상적 투자 행위와 원활한 자금 조달을 방해하는 등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초래한다. 주요 선진국들이 주가조작 행위에 대해 강력하게 처벌하는 이유다. 이에 비해 한국의 처벌 수위는 상대적으로 낮아 주가조작이 기승을 부린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행 자본시장법에 따르면 불공정거래로 인한 이득이 5억 원 이상 50억 원 미만이면 3년 이상의 유기징역, 50억 원 이상일 경우 무기징역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부당이득 액수 산정 기준이 불명확하고, 주가를 움직이는 변수가 많아 중형이 선고되기 어려운 구조다. 게다가 법원 판결의 지침이 되는 대법원 양형기준을 보면 증권 범죄의 경우 가중처벌을 해도 최대 징역 15년까지만 선고할 수 있다. 2020∼2021년 대법원이 불공정거래 사건에서 실형을 선고한 비율은 51.46%에 불과하다. 피고인의 절반 가까이는 실형을 면한 것이다.
범죄 수익을 환수하기 어렵다는 점도 주가조작 범죄가 빈발하는 배경이 되고 있다. 불공정거래로 얻은 부당이익은 최대 5배 이하의 벌금을 내야 하지만, 수사기관이 부당이득을 산정하지 못하면 5억 원 이하의 벌금만 물릴 수 있다.
이렇다 보니 주가 조작범들 사이에서는 ‘걸려도 남는 장사’, ‘안 걸리면 생큐’라는 말이 나돌 정도다. 실제로 갈수록 재범률이 높아지고, 범죄 수법도 고도화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강병원 의원에 따르면 2019∼2022년 4년 동안 3대 불공정거래(미공개 정보 이용, 주가조작, 부정거래)로 제재를 받은 643명 중 149명(23.1%)이 재범 이상 전과자였다. 정준혁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올 6월 자본시장법이 개정돼 부당이득 산정 기준을 법제화하고 과징금 제재를 신설하는 등 처벌이 강화됐다”며 “처벌 강화가 주가조작 범죄를 억제할 수 있을지는 법이 시행되는 내년 1월 이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낮은 시가총액 등 조작에 취약한 구조
증권업계 관계자들은 국내 증시 환경이 주가조작에 취약하다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시장 규모에 비해 현저하게 낮은 상장사당 평균 시가총액이 대표적이다. 이로 인해 적은 돈으로 회사 경영권을 확보하고, 주가를 조작하기 쉽다는 것이다. 한국상장회사협의회에 따르면 한국 상장사(코스피+코스닥)의 평균 시가총액은 2일 기준 5억8046만 달러(약 7615억)로 주요 7개국(G7) 중 시가총액이 가장 적은 캐나다(7억4677만 달러)보다도 20%가량 적었다. 한국과 증시 규모가 비슷한 독일(26억3718만 달러)에 비해서는 약 4분의 1 수준이었다. 한국의 상장사 시가총액 합계액은 1조5765억 달러(약 2068조 원)로 이탈리아를 제외한 G7 국가들보다 적었다. 반면 상장사 수는 한국이 2716개로 G7 중 미국, 일본, 캐나다에 이어 4번째였다. 국내 증시에서 시가총액 1000억 원에 미치지 못하는 종목 비율은 전체의 44%에 달한다.
주가조작에 취약한 환경인데도 금융당국의 제재 권한은 주요국에 비해 약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증권 범죄에 대한 조사, 제재, 고발 권한을 모두 갖고 있다. 영국 금융감독청(FSA)과 프랑스 금융시장청(AMF)도 불공정거래 관련 조사권과 징계권, 기소권을 확보하고 있다.
이에 비해 한국은 조사권과 제재권, 기소권이 검찰, 금융위원회, 금융감독원 등으로 나뉘어 있다. 주가조작 조사를 담당하는 인원도 부족한 편이다. 상장사가 2000개가 넘지만, 금감원의 조사 전담 인력은 69명에 불과하다. 1인당 맡아야 하는 상장사가 약 40개에 달한다.
최근 개인투자자 비율이 높아지면서 이들을 겨냥한 주가조작도 늘고 있다. 불법 리딩방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동원한 신종 사기법이 활개를 치고 있다. 10년 전인 2013년 59.79%였던 개인투자자 비중은 지난달 말 기준 67.94%까지 높아졌다. 같은 기간 기관투자가 비중은 17.77%에서 11.21%로 낮아졌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국내에서 소외된 상장사들의 개인투자자 비중이 높아지면서 주가조작이 수월해진 측면이 있다”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주가조작에 대한 처벌 강화와 더불어 적발 시스템 개선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또 개인투자자들이 달성 가능한 목표 수익률을 정하고, 상장사의 본질적 가치를 분석하는 등의 성숙한 투자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준서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주가조작을 전담하는 별도의 독립기구를 만들어서 모니터링부터 사후 조치까지 할 수 있어야 한다”며 “주식 투자에 대한 국민들의 의식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한 교육이나 캠페인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동훈 기자, 소설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