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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글이 길어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순남님의 질의에 답변을 해드립니다
사람에게 자유의지가 있는 한.....
모든 선과 악은 자기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위 삼전님의 글입니다.
질의합니다.
1. 말씀 어디에 근거하는 지요 ?
2. 선과 악을 어떻게 정의하시는지요
3. 인간에게 선악을 구별하여 선을 행할 능력이 있나요 ?
성경에 근거하여 답해 주셨으면 합니다
첫 번째 질문 “1. 말씀 어디에 근거하는 지요?” 에 대한 답변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셨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다음 두 개의 글을 읽어보시면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전체 맥락을 알고 스스로 성경으로 확인 하시는 시간이 필요 할 것 같습니다
<첫 번째 글입니다>
자유의지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공평" 이라는 원리를 따른 "공의" 즉 객관적인 "옳음의 의" 원리를 따라 주신 것입니다.
그 공의의 섭리 안에서 십자가 사건은 공의를 실현했다고 말하는데
이 설명은 성경전체구조를 설명하는 것과도 같으므로 최대한 축약하겠습니다.
1, '공의'란 창조자인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생 사이'의 '일'에 대하여'공평'하게 처리하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2, 하나님이 만물과 사람을 창조한 것은 '자기가 좋기 위해서'가 먼저입니다.
그 일환으로 '자식을 얻기 위해서' 만물과 사람을 창조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을 따라서 사람을 만들었고 또 하나님과 같은 '심성'의 상태로 만들었다는 논리를
바탕으로 사람이 본능적으로'자식을 원하는 마음'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신'으로 '완전체'인데 사람은 흙으로 만든 피조물로'불 완전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식'을
얻기 위해서는 피조물인'사람'이 '신'이 되는 결과를 도출해야 합니다.
4, '천사'는 선의 코드만 가지고 있고 사탄은 악의 코드만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과 사람은 선과 악의 코드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사람'이라는 피조물이 '자유 의지'가 없으면 '인형'에 불과하므로 '자유 의지'를
발현시킬 수 있도록 마음에 '선과 악'을 분별하도록 하였고 그 선과 악에 대한 분별 기능을 발현시키기 위하여
'선악과' 라는 금기사항을 부여했습니다. (공의실천의 일환입니다)
선이나 악은 '상대성'을 가진 구분이므로 선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대적으로 악이 존재해야 합니다.
'신'이라는 조건은 하나님처럼 선악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 악을 행하지 않고 선만 행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5, 그래서 선악을 모두 부여하고 부여한 것을 가동시키기 위해서 선악과라는 상대적 악을 부여한 것입니다.
6, 그런데 사람이'불 완전체'이므로 '필연적'으로 선악과를 따 먹었고 역시 당연한 귀결에 따라 신이 아니면
거할 수 없는 에덴에서 쫓겨나면서 신이 되는 훈련장으로 '입소'를 하게 됩니다. 그것이 세상입니다.
7, 세상에는 선의 코드를 가진 천사와 악의 코드를 가진 사탄이 활동하게 하고 뱀은 사람을 그 근원인 흙으로 돌아가게
하는 '임무'를 띠게 되었고 천사는 흙으로 돌아가지 않고 다시 신으로 복귀하는 것을 돕는 임무를 띠고 파견이
된 것입니다.
8, 그래서 이제 선악을 모두 마음에 가진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고 말 것인가', 아니면 '마음에서 악을 온전히 이기고
신의 상태가 될 것인가'를 선택하는 '한판의 권투경기'를 하기위해 '링 위에' 올라오게 된 것입니다.
9, 그런데 '사람이 나면서부터 악한 것만 계획한다.'는 성경의 기록처럼 악에게 패하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노아홍수로 일단 노아만 남겨 놓고 인류를 흙으로 '원위치' 시킵니다. 다시 시작하기로 한 것입니다.
10, 그 후에 하나님이'이김'의 결과를 얻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악을 이기는 방법인'낮아짐과 비움'을 행하는 방법을
부여합니다. 그것이 모세율법입니다.
11, 하지만 사람들은 그 율법을 오히려 자기 배를 채우는 악의 수단으로 사용을 하면서 악에게 이길 수 있는 방법으로
제시한 '행위의 율법'인 모세율법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습니다.
12, 이제 다시 사람이 신이 될 수 있는 방법은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복음서에서 하나님의 율법의 관장 자들을 힐책한 것입니다.
13, 이번에는 마지막으로 준비한 '히든카드', 곧 '예비 된 작은 광명'으로 성경이 표현하고 있는 '마음의 율법'을
부여합니다.
이것이 사람이 신이 되게 하는 마지막 수단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의 율법을 부여하는 것에는 맹점이 있습니다.
이것을 따라서 살면 사람이 신이 될 수 있기는 한데 이것을 사람에게 부여하는 것은 '공의'라는 규칙에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라는 규칙으로서의 대전제를 어기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자기 맘대로 이랬다, 저랬다'하는 하나님이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14,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이 낸'공의'를 지키기 위하여 자신이 먼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와서
이제 부여할 '마음의 법'을 따라서'선으로 악을 이기는 본'을 보이고 공의를 하나님 자신이 먼저 지키는 순서를 따릅니다.
그것이 육신으로 와서 '마음의 법'을 따라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 악을 이기고 영이 사는'시범'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그 법을 따라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로 따라가면 영이 살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이'공의 실현'이 되는 이유는 죽음에 대한 '철회'와 살 수 있는 길의 '부여'라는 두 가지를 충족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결자해지'는 공의라는 하나님의 뜻을 수호하고 '정녕 죽으리라'한 법을 철회하고 살수 있는 방법인
'마음의 법'을 부여하는 근거를 마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고 말을 한 것입니다.
결국 그 말은 "하나님의 공의도 지키면서 사람에게 신이 되는 방법도 부여하게 되었다" 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두 번째 글 입니다>
'자유의지'란 선악과의 대두로 인하여 발현된 사람의 상대적 사고에서 기인한 마음입니다.
선악과 없이 자유의지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선악과를 따먹고 선과 악을 알게 된 것이 아닙니다.
'먹지 말라'가 선이고, 그것을 어기는 것이 악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단지 악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불법을 행하였으므로 벌을 받은 것입니다.
에덴 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자유의지의 발현'이란 부인이 안 된 '자기'가 주변의 여러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기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혼동하면 안됩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에 대한 자기의 분별력과 그로 인한 선택을 '자유의지'로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자유의지란 선과 악이 공존하는 상태에서 선을 버리고 악을 택하든지,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하든지를 결정하는
기능적 사고입니다.
인생들이 가지고 있는 취향으로써의 선택이나 판단은 말씀 안의 '자유의지'의 기능과 또 그 부여하신 목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사고 판단 능력이지 하나님이 부여하신 '자유의지'의 발동력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자유의지는 반드시 선과 악, 그것도 윤리나 도덕적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이 옳다고 하시거나
그릇되다고 하시는 선과 악의 기준 하에서만 발동되는 기능입니다.
아벨의 제사법이 있을 때에는 '제사를 어떻게 드릴 것인가?' 하는 것, 즉 "양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곡식으로 할 것인가?"를 판단함에 있어서 그 자유의지 기능이 작용을 하여 가인은 악을 택하고
아벨은 선을 택하는 결과를 냈습니다.
그리고 모세율법 하에서는 "모세율법을 지킬 것인가? 말 것인가?"에 작용을 하는 마음이 자유의지의 발현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 이후에 그 기준은 "성령의 법"이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을 하게 하는 기준입니다. 그러므로 법이 없이,
다시 말해 하나님의 선과 악의 분별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는 자유의지가 발현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경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사람은 모두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과 악을 구분하는 법을 모르고 있는 사람에게서는 자유의지는 발현되지 않습니다.
무엇을 해도 다 악인데 어찌 그 악 속에서 자유의지가 발현이 될 수 있겠습니까?
선과 악의 기준을 모르고 하는 모든 일련의 행위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행하는 하나님의 선에 속한 일은
그것이 하나님의 선에 속한 것이라도 실상은 악에 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에 귀를 돌이키면 그 기도도 가증하니라"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기도를 한다는 것은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타인이 생각하기에도 하나님의 의를 기준으로 선에 속한 것이라고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다.
하나님의 선과 악의 기준을 모르는 사람이 그 기도로 바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바라는 내용은 반드시 악, 즉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가 세상에 속한 행사를 악하다 하므로
저희가 나를 미워한다" 하신 말씀에서의 "세상에 속한 일"을 구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반드시 하나님께 가증함을 보이는 것이 됩니다.
무릎으로 사는 사람이라든지, 그리스도인의 리더쉽이라든지, 세상에서 잘 나가는 방법을 가르치고,
기복을 가르치는 모든 글과 말들이 실은 모두 악에 속한 말과 글들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의, 곧 성령의 법, 선과 악의 기준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하는 모든 것은 선처럼 보이는 것들이라도 모두 하나님께는 가증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부여하신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기준인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나 분별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셨다."라고 합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셨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성령의 법을 모르는 사람에게 자유의지란 절대로 발현될 수 없는 것입니다.
자유의지를 가지지 못한 것은 기식이 없는 물건의 상태에 불과합니다.
성경에는 티끌과 같다는 표현이 많이 있습니다. 또 미물이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무생물'이라고 하는 것을 성경은 '물건'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흙과 성령의 법을 모르고 있는 사람은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사람만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하루 일과를 지내는 것이 아닙니다.
만물도 일과가 있습니다. 그리고 인생은 그 만물의 일과에 따라 움직입니다. 어떤 땅은 마른 땅이고,
어떤 땅은 기름집니다. 마른 땅에 물을 대고 거름을 주면 그 땅은 사람에게 유익을 줍니다.
그러나 사막이라도 모래에게 일과는 있으며 그 속에서 그 일과를 따라 살아가는 생물들도 있습니다. 하늘은 어떠합니까? 그 역시 일과가 있습니다.
전도서는 보이지 않는 바람이 이리저리 불다가 나온 곳으로 돌아간다고 가르치고 있으며, 그 일과로 인하여
사람의 일과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는 전도서 초장에는 "만물은 이제 있는 것이
오래 전에도 있었다."라고 말하고 있으며 "반복하므로 피곤하다."라고도 표현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무생물로 분류하고 있는 물건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흙에서 나온 것이고 사람도
그 흙으로 지어졌고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 중에 '사람'이라는 흙으로 만들어진 물건은 사고하는 능력이 있어서
영을 살리는 하나님의 법, 성령의 법을 보고 하나님의 선과 악의 기준을 알아서, 육은 죽은 것과 다름없는 것으로
여기고 "영이 사는 길을 택할 것이냐? 아니면 흙으로 살다가 흙으로 그대로 남을 것이냐?"를 선택하게 되는데
이때에 작용하는 것이 바로 "자유의지"인 것입니다.
영이 사는 길을 택하여 가는 자, 영이 살아나는 자만이 '기식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코로 호흡하는 모든 것이 기식이 있는 것,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머리에서 지우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스스로 기식 있는 사람, 곧 아담으로 자라가셔야 합니다.
오늘도 기식없는 물건들이 무수한 말과 글을 쏟아 내며 하루 일과를 보냈습니다.
그와 동일하게 마당 한 켠에 있는 땅 속에서도 기식없는 벌레들의 일과는 있었습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매스컴에 보도가 된다는 것과 안 된다는 것뿐입니다.
'바알세불'이라고 하는 '파리 대왕'은 대왕이라도 파리입니다. 예수님은 "하물며 그 집안 사람들이랴."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벌레대왕도 벌레일 뿐이라는, 왕릉에 묻힌 자도, 평토장 당한 자도
그저 흙에 불과할 뿐이라는 이성 있는 사고를 하여야합니다.
그리하여 '기식 있는' 사람, 자유의지를 발현하는 하루 일과를 살아야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생존 세계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케 하소서" 아멘.
법을 몰라 자유의지를 발현할 수 없는 상태가 곧 "지옥에 갇혀 있는", 평토장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두 번째 질문 “2. 선과 악을 어떻게 정의하시는지요?” 에 대한 답변입니다
성경은 " 살리는 것은 영이며 육은 무익하다 " 는 것이 대전제입니다
선(善(착할 선))은 창세기에 “좋았더라”에서의 좋음입니다
아들을 얻으시려고 성경을 주신 하나님께 좋은 것은 모든 사람이 성경대로 영을 살리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영을 살리는 길을 가는 것이 하나님의 선(善)이며 이를 성경대로 행하는 것이 선행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에 반하는 것이 악(惡)이기에 예수님은 “세상에 속한 행사가 악하다”고 하신 것이고요
성경 안에 언급하고 있는 선과 악은 "진리" 라는 잣대를 전제로 한 분별입니다
진리란 상황따라 변하고 지역따라 변하며 시대따라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윤리적선이란 그 모든 상황에 따라서 정의가 변하므로 그것은 비 진리입니다.
나라마다 다른 인간관, 사회적 가치관에 따라 변하는 것이 인간의 윤리적 선의 척도이며 법의 척도입니다.
그것은 진리를 전하고 있는 성경 안의 선의 척도일 수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반 사회적인 사상을 주입하신 것인가? 하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폐하는 유태 민족이 자기의 집, 곧 성전에서 자신에게 조차 내라고 요구하는
성전세를 " 저들이 오해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내셨습니다.
그것이 곧 준법이며 윤리와 도덕에 합한 행위인 것입니다.
그 다음의 것, 즉 구원을 위하여 "죽은 자는 죽은 자들에게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 하신 것을
사회 구성원은 반 윤리적인 것이라고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이 가족을 돌보지 못하고 떠나는 것과 같으며 출가를 하는 불자가
집을 떠나는 것과도 같은 것이면서 계속적인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입니다.
스님이나 신부에게 반 사회적이라는 주장을 펴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 입니까? 그들이 사회 구성원들의 중생을 돕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은 일단은 마음으로 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의 도와 선을 깨닫고 다시 세상으로 가서 전도라는 것을
할 때에는 인생들이 베푸는 "상대적 선" 이나 상대적인 "사랑"이 아니라 모든 행함의 대가를 하나님게 받으려고 하며
사람에게는 기대하지않는 " 절대적 선과 절대적 사랑" 을 전하게 됩니다.
그 절대적으로 베푸는 선과 사랑으로 사회가 어지러워지겠습니까?
물론 현재의 기독교 안에는 그 하나님의 교훈과 도가 실종된 상태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선과 악, 그리고 절대적 사랑을 가르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이 잠언과 전도서이며 복음서입니다.
복음서의 예수님의 말씀은 모두 잠언의 가르침과 동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셨다는 복음서의 기록이 있는 것입니다
잠언은 선과악, 의인과 죄인을 구분하는 기준, 즉 법으로 가득한 책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왜 기독교 안에서 기독교의 교회법으로 자리하고 있지 못할까요?
만일 그것이 법으로 자리하고 있었다면 교파마다 다른 교회법은 존재하지 않았어야합니다.
그들이 그것을 잃어버렸기에 교회법이 따로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영을 살리는 목적으로 주신 성경 말씀을 육을 살리는 가르침으로 변개하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기독교 안에서 잠언은 윤리책으로 치부되어 그것으로 육신이 사는 처세술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받아서 한 일은 모세의 율법이 이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선과 악을 분별해주는 일을 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율법은 행위의 율법이며 솔로몬의 지혜, 곧 잠언은 마음의 법입니다.
다만 그것이 효력이 발휘될 수 없었던 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 공평"이라는 원리를 따라
"결자해지"를 가르치고 있고 그것이 법적으로 효력이 있게 되려면 하나님이 먼저 사람을 지으신 것에 대한
"결자해지"를 해야하는 선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책은 현재까지도 유태인에 손에서도 , 천주교인의 손에서도 개신교인의 손에서도
"성문서"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결자해지" 사건이며 공평의 원리를 따라서 이제 사람은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죄가 아닌 악을 향한 마음에 대한 결자해지를 통하여 구원의 길을 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 마음의 법은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자기부인의 길을 갈 수 없기 때문에 잠언은 성령이 가르치시는 말씀, 곧 사람이 의지하여
구원의 길을 갈수 있게 하는 가르침이 들어 있는 것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의 선과 악을 구분하는 법이며
그 안에서 가르쳐지는 선을 따라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선행" 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선행" 인 것입니다
세 번째 질문 “인간에게 선악을 구별하여 선을 행할 능력이 있나요 ?”에 대한 답변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의 첫 번째 조건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을 하고 포기를 합니다.
아마 그것은 상징적인 말 일 거야.’ 라고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그 따름의 조건은 상징이 아니라 현실적인 말씀입니다.
정말로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구원을 위해서는 제일 먼저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자기 부인의 방법을 찾을 수가 없으므로 “사람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를 전제로
하여 “노력하며 살자”로 귀결하고 끝을 맺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성경을 아무리 뒤져봐도 자기를 부인하게 하는 성령의 가르침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가려 놓으셨기 때문에 성령을 받지 않으면 그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가려 놓으셨다"고 말씀하셨으며 “보이겠다.”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책을 읽어서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비밀입니다.
성경을 아무리 보았어도 잠언이 성령의 법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유가 바로 가려 놓으셨다는 그 말씀의 실현입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경엔 거짓이 없습니다. 절대로 사람이 글을 읽는 것으로만
성경을 읽는다 해서 깨달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지혜를 구하라.”라고 하십니다.
또, “하나님으로는 할 수 있느니라.”, “세상으로부터 돌이켜라, 내가 나의 신을 너희에게 부어 주겠다.”,
“지혜가 광장에서 거리에서 부른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바로 이어서 “나 지혜가 손을 펼지라도 나를 돌아보는 자가 없다.”라고 잠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님이 알고 있는 성경의 지식은 하나님께 구하여 성령이 깨닫게 하셔서 안 것입니까, 아니면 사람에게 배운 것입니까,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요한1서 2장]
27 너희는 主(주인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居(있을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必(반드시 필)要(구할 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主 안에 居하라
[골로새서 2장]
2 이는 저희로 마음에 慰(위로할 위)安(편안할 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聯(잇닿을 련, 연)合(합할 합)하여
圓(둥글 원)滿(찰 만)한 理(다스릴 리 이)解(풀 해)의 모든 富(부유할 부)饒(넉넉할 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秘(숨길 비)密(빽빽할 밀)인 그리스도<기름부음>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3 그 안에는 智(슬기 지)慧(슬기로울 혜)와 知(알 지)識(알 식)의 모든 寶(보배 보)貨(재화 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 감추어 있는 것입니다. 드러나 있지 않으므로 하나님께 구하지 않으면 그것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
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기름부음> 예수<여호와는 구원이시다>를 主(주인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行(갈 행)하되
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敎(가르침 교)訓(가르칠 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感(느낄 감)謝(사례할 사)함을 넘치게 하라
8 누가 哲(밝을 철)學(배울 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擄(사로잡을 노)掠(노략질할 약, 략)할까 注(물댈 주)意(뜻 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遺(끼칠 유)傳(전할 전)과 世(대 세)上(위 상)의 初(처음 초)等(무리 등)學(배울 학)問(물을 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기름부음>를 좇음이 아니니라
❧ 바로 사람이 자기의 생각으로 스스로 성경을 연구하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쌓은 바벨탑인 하나님에 대한,
신을 연구한 학문으로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성령이 가르치시는 자기를 부인하는 길을 성경에서 찾지 못한 것입니다. "구하라, 두드리라"는 말씀은 모두 지혜에 대해서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6 우리가 穩(평온할 온)全(온전할 전)한 者(사람 자)들 中(가운데 중)에서 智(슬기 지)慧(슬기로울 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世(대 세)上(위 상)의 智慧가 아니요 또 이 世上의 없어질 官(벼슬 관)員(수효 원)의 智慧도 아니요
7 오직 秘(숨길 비)密(빽빽할 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智(슬기 지)慧(슬기로울 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榮(꽃 영)光(빛 광)을 爲(할 위)하사 萬(일만 만)世(대 세) 前(앞 전)에
미리 定(정할 정)하신 것이라
8 이 智(슬기 지)慧(슬기로울 혜)는 이 世(대 세)代(대신할 대)의 官(벼슬 관)員(수효 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萬(일만 만)一(일) 알았더면 榮(꽃 영)光(빛 광)의 主(주인 주)를
十(십)字(아이 밸, 글자 자)架(시렁{물건 걸어두는 기구} 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9 記(기록할 기)錄(기록할 록)된 바 하나님이 自(스스로 자)己(자기 기)를 사랑하는 者(사람 자)들을 爲(할 위)하여
豫(미리 예)備(갖출 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더라 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聖(성스러울 성)靈(신령 령, 영)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聖靈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通(통할 통)達(통달할 달)하시느니라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방법이 없을까요? 있습니다.
자기의 부인을 완성하게 하시기 위해서 마련하신 것이 바로 성령의 법입니다.
그 법을 따라가면 자기를 부인할 수 있게 됩니다. 성령의 법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마련된
구원의 길을 따라갈 수 있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성령은 구하면 주신다고 했습니다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신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나의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잠1:23
법은 기준입니다
성령의 법은 하나님의 선과 악의 기준이며 그것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면 사람이 선택을 하며
길을 가는 것입니다
첫댓글 길면서 난해하군요.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선악에 의해서만 발동된다.
.하나님의 선과악을 구분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자유의지가 발현되지 않는다.
.사람에게 자유의지가 있는한 모든 선과 악은 자기가 선택하는 것이다.
위 제가 요약한 내용이 님의 생각과 다르지 않겠지요.
1.그렇다면 자유의지가 있는자는 어떤 자입니까?
2.이 자유의지는 선악과를 먹기 이전과 이후 중 어느때 누구에게 존재한다는 것입니까
1.그렇다면 자유의지가 있는자는 어떤 자입니까?
->사고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자유의지의 작용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의지’가 발현(發現 1) 구체적으로 드러나다 2)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을 밖으로 드러나게 함)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기준 곧 영을 살리는 하나님의 법, 성령의 법을 보고 하나님의 선과 악의 기준을 알아서, 육은 죽은 것과 다름없는 것으로 여기고 "영이 사는 길을 택할 것이냐? 아니면 흙으로 살다가 흙으로 그대로 남을 것이냐?"를 선택하는 상황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때에 발현(發現)하는 것이 바로 "자유의지"인 것입니다.
따라서 자유의지의 작용은 사고능력만 있다면 누구나 가지고 있고 할 수 있으나, 자유의지를 발현할 수 있으려면 하나님의 선악의 기준인 하나님의 법(바울이 말한 성령의 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이 자유의지는 선악과를 먹기 이전과 이후 중 어느때 누구에게 존재한다는 것입니까?
--->'자유의지'란 선악과의 대두(擡頭:1) 두드러지게 나타나거나 일어나게 되다 2) 어떤 현상이나 세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거나 일어남)로 인하여 발현된 사람의 상대적 사고에서 기인한 마음입니다. 선악과 없이 자유의지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그리고 사람은 선악과를 따먹고 선과 악을 알게 된 것이 아닙니다.
'먹지 말라'가 선이고, 그것을 어기는 것이 악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단지 악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불법을 행하였으므로 벌을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 이미 사람에게는 자유의지를 작용할 수 있는 사고능력이 있다는 것이고, 선악과를 먹을 것이냐(악을 행할 것인가?) 먹지 않을 것이냐 (선을 행할 것인가?)는 선택의 순간에 자유의지가 발현되는 것이며, 그런 선택의 순간을 맞이 할 수 있는 하나님의 기준인 ‘법’을 아는 사람만이 자유의지를 발현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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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폴리스 1. 천사가 선의 코드만 가지고 있다면 천사였다 타락후 사탄이 되는 개연성에 대한 설명이 부족해 보이네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시에게도 자유의지를 부여했다가 더 맞지 않을까요
-->천사란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전달하는 자 " 라는 뜻과 하나님의 뜻을 수호하는 " 영 " 이라는 의미만 있습니다.
성경에서 타락한 천사라든지 혹은 유리하는 별이라고 표현되는 것은 하나님의 전령으로 세상에 보내진 하나님의 빛을 전하는 선지자로서 발람과 같이 자기배를 채우는 길로 간 사람을 뜻하는 말입니다.
사람에게는 선과 악을 아는 마음이 있고 하나님과 사람이 그렇게 같습니다.
@메트로폴리스 그리고 천사는 선만 알며 사단은 악만 아는 영입니다.
영적인 사단은 악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영으로서의 천사가 타락을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자식'을 얻기 위해서는 피조물인'사람'이 '신'이 되는 결과를 도출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은 어떤 신이 되는걸 말하나요 엘리야나 에녹 또는 12제자와 같은 경지에
이르러 하나님 나라 의 천사가 되거나 그와 같은 존재가 될 수는 있겠지만 신이 된다는 개념은 이해가 않됩니다
--->변화 산에서 베드로가 인식이 가능하도록 승천한 엘리야와 모세가 그 몸을 입고 나타났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메트로폴리스 ?육신을 입고 승천을 한 사람은 에녹과 엘리야와 모세와 그리스도인데 이것은 육신을 입은 채로 구원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을 나타내며 육신을 입고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감’을 나타내는 것으로 천국은 죽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가는 것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기록입니다. 그래서 시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시편
내가 그를 장자로 삼고 세계 모든 왕의 으뜸이 되게 하며 그를 위하여 나의 인자함을 영구히 지키고 그와 한 나의 언약을 굳게 세우며 또 그 후손을 영구케 하여 그 위를 하늘의 날과 같게 할 것이다.
@메트로폴리스 -->영이신 하나님은 신(神)입니다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에서의 ‘신’이란 사람보다 뛰어난 영적 존재를 말하는 것으로 사람이 의지하는 모든 대상을 의미하나
“[고전] 8:5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의 말씀의 의미대로 ‘칭하는’ 것뿐입니다
영이신 하나님 아들로서의 ‘신(神)'이라는 조건은 하나님처럼 선악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 악을 행하지 않고 선만 행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잠] 1:23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신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나의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메트로폴리스 하나님의 신(神)인 성령을 받으면 선악의 기준을 알고 신(神)이 되기 위하여 자기부인의 길을 갑니다 . 이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신(神)이라 불러주시는 것이나 온전한 자기부인을 이루어 다시나감이 없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때가 신(神)이 된다 할 것입니다.
[롬] 8: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계] 21: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사람이 어찌 신(神)이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느냐하는 말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사람을 신이라 했습니다
@메트로폴리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볼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신을 받지 않고는 불가능 하기 때문입니다
[요] 10:3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요] 10: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요] 10: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나님의 신인 성령을 받아 예수님이 명하신대로 영이 사는 길인 자기부인의 길로 갈 때에 그날이 오지 않겠습니까?
@메트로폴리스 [요]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을 받은 내가 ‘하나’인데 어찌 신(神)이 아니겠습니까?
3 선과 악을 다 가지고 있다는 개념 보다는 완전한 선이신 하나님으로 부터 자유의지로 멀어져 선이 결핍된 상태를 악으로 보는게 더 타당하지 않을까요
악의 존재를 인정 하는건 하나님이 완전하시다는 명제를 부인하는 비논리적인 모순입니다
---->하나님은 악(惡)의 영인 사단을 선을 이루는 도구로 쓰시는 것입니다.
선과 악의 코드를 다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악을 들어 선을 이루는 결과조차도 내신다는 것입니다
@메트로폴리스 악의 코드가 없다면 악을 알 수 없다는 것인데, 완전하신 하나님께서는 악을 선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이고 결국 말씀을 따라가는 길에서 사람도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악에 대하여 그것이 "안 좋음"이라는 생각, 혹은 "나쁨"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세상에서의 법 앞에서는 죄나 악이 "나쁜 것"이지만, 하나님의 법 앞에서 죄나 악은 모두 "본질적 안 좋음"이나 당장 그것을 행하는 이들에게는 "좋음"입니다
죄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악"이라는 것도 "나쁜 것"이 아닙니다. 죄란 "본질적으로 안 좋게 하는 원인"이며 악이란 "본질적으로 안 좋은 것"을 뜻합니다
@메트로폴리스 메트로 폴리스스님이 성경에서의 죄와 악에 대한 개념에 대한 오해를 하신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한 답변은 글이 길어지는 관계로 다시 올려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맏아들 이십니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 후에 삼일 후에 부활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신이 되었습니까? 아니면 무엇이 되었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과 같은 신이 되었으면 예수님을 따라 가는 길에서 온전한 자기부인을 이룬 바울과 같은 사람이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인 신이 되어 영생을 누리며 예수님과 동일한 영광을 누리겠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내일 알 수 없는 지옥에 거하는 사람에 머물러 있는 상태에 있는 것입니까?
@메트로폴리스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인 신이나 예수님과는 다른 양자의 영을 받은 신이 되는 것입니다
사단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선을 위한 도구입니다.
사단은 하나님과 적대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이 선을 이루시는 ‘도구’ 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사단은 죽지 않고 ‘물러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사단이 마음을 장악하는 것은 사단에게는 악을 위한 것이 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악을 인식하고 선을 향하게 하시기 위한 것이므로 선을 위한 도구가 됩니다. 단지 사람이 그것을 이기지 못하고 따라감으로 인하여 악하게 되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악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선뿐인 것이 되는 것입니다.
@메트로폴리스 행위의 법안에서는 주어진 법으로 악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보는 관점에서는 악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법은 선이므로 행위의 법의 실천은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됩니다.
행위의 법에서는 그렇게 되었었으나 이제 마음의 법으로 바뀐 상태에서는 악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불가능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이렇게 들었으나 이제는 이렇게...” 라는 패턴으로 법을 다시 설명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도 “악에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라고 한 것입니다
@메트로폴리스 또한, 시편에 모든 사단도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보더라도 사단은 선을 위한 수단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메트로폴리스 저는 어느조직의 채움과 높음을 위하여 전함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신천지가 어떤 조직인지도 관심도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길에서 오직 성경대로 예수님이 가라하시는 길만 가기도 벅차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길에서 하나님의 아들인 신이 되지 못하여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저는 하나님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채음과 높음을 더하며 인생을 더욱 즐길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경대로 영생을 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영생얻기를 소망하며 성령의 법대로 성령의 지혜로 바울에게 생명을 준것처럼 저에게도 비움과 낮아짐의 지혜를 주시어 온전한 자기부인의 길을 갈수있기 만을 소망합니다
@메트로폴리스 계시록에 대해서는 답변을 하지 않으려 했는데 다시 질문을 하시니 아니 할 수 없어 올려 드리겠습니다
계시록은 성경전체의 하나님 섭리 전체를 다르게 표현 하였을뿐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온전한 자기부인을 한 사람이 거룩함에 나아가 흰 옷을 입고 영이 살아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내용입니다
지금까지 삼천님의 글 , 잘 읽었읍니다.
저는 구태여 자유의지, 성경에 언급되지도 않은 용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느냐 , 그럴 이유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이므로 자칫 인간의 생각들로 곡해되거나, 이용당할 여지가 크거든요.
어떤 분들의 생각처럼 성경으로 기록된 내용인데도 불구하고 구태여 어느 누구의 신학논리를 인용하는 것이 일상화된것이 오늘의 현실이거든요.
심지어는 유명하다는 신학대교수들의 정기적인 박사학위 발표때도 성경을 연구하고 함께 논하는 것이 아니라 외국의 어느 누구의 신학논문에 대한 각자의 이해를 논하는 자리더라구요.
인간들의 신학만 있고 말씀에 대한 연구, 즉 과연 그러한가? 하는 하나님을 알려는 치열한 과정이 없는 것이 현실이더라구요.
자유의지 , 저는 쓰지 않읍니다만,
이것이 왜 모든 이들이 당연시 하느냐?
아마도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을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도입된 논리라 여겨집니다.
즉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하셨는데, 사단의 유혹에도 선택은 아담에게 있었는데, 안 따먹는 것이 선인데 그는 따먹었다는 것이죠. 즉 악을 행한 것이지요.
그런데 간과 한것이 있읍니다.
하나님은 이미 천지창조 이전부터 예수를 그리스도로 이 땅에 보내실 것을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엡1장4절, 딤후 1장9절
만약 아담이 선악과를 안 따먹는다? 그러면 위 말씀이 모순이되죠.
그러면 많은 사람들의 생각처럼,
그러면 하나님이 병도주고 약도 주는 분이냐? 사랑의 하나님이신데 모든 사람을 죄에 집어 넣는 하나님이신가? 하나님은 선한 하나님이신데 그럴수는 없다 ! 하지요
그런데 성경을 전체로 못 보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못할 몰 인정한 하나님으로 비쳐지는 말씀이 많지요. 아말렉을 ? 진멸할때 남녀노소 젖먹이까지 모든 가축이라도 남김없이 진멸하라 명하시지요.
가나안 땅 거민들도 하나도 남김없이 진멸하라 하십니다.
그런 하나님이 선하신 분인가?
예 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제가 님에게 선과 악에 대한 질의를 드렸읍니다.
선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이면 선입니다.
악은 언제나 하나님싀 뜻을 벗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애석히도 피조인간에게 선이 없읍니다. 모든 것이 악입니다. 선악과 이후죠. 창6장5절. 그래서 심판하시죠. 모형적,
누구든 스스로는 구원받을수 없음을 말씀하시지요
하나님이 행하심은 인간의 생각으론 악한것 같으나 언제나 선입니다. 그러니 악한 인간들이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보고 악하다 하지요. 그것이 로마서에 말씀하시지요. 이유없이 아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시는 하나님, 여기서 사랑과 미움은 택함과 버림이지요. 사람들이 이해할수 없다하니.....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은 선하시다 ! 누가 감히 하나님께 불의하다 하느냐? 로마서9장.
그래서 성경은 세상 지식이나 잣대로는 접근이 전혀 안 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이순남 님은 성경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이 미리 예정하셨다는 것만 보이시고 히스기야왕의 경우처럼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고 회개하면 돌이키시는 것은 보이지 않습니까? 성경에 하나님이 하기로 하시고 인간의 반응에 따라 늦추고 돌이켜 벌을 내리시지 않고 사하시는 것이 너무 많이 나옵니다. 이런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인간이 회개하는 것도 예정 하신것인가요? 성경을 한쪽면만 보고 모든것을 거기에 맞추면 오류가 생깁니다. 전체적인 하나님의 계획은 있지만 자세한것은 감추어놓았고 때로는 허용하시며 인간은 하나님 형상대로 만든존재로 자유와 자기의지로 살 수있으며 결정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maple 구약 예언서를 보면 죄를 짓고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백성에게 끝까지 돌아오라고 대언자를 계속 보내고 멸망전까지 돌이키면 사해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대언자를 통한 하나님말씀을 끝까지 듣지않고 결국 열방으로 흩어져버리는 벌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신명기 28장 (복과 저주)의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이 미리 이스라엘이 멸망을 정해놓고 장난으로 명령한 것입니까? -결국 이스라엘백성이 하나님께 순종했을때 복을 받고, 하나님과 말씀을 떠나 우상을 섬김에 따라 멸망한 것입니다.- 그럼 이것도 하나님이 그렇게 되게 미리 정한 것입니까? 만약 그런 하나님이라면 야비하고 불의한분입니다.
@maple 할렐루야, 정의와 공의하나님 차별이 없으신,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주와 구주로 믿고 말씀에 순종하면 이세상에서 복과 영혼의 구원까지 약속하신, 그가 하신 말씀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을 믿고 순종할 수 있습니다.
@maple 매플님 참 좋은 지적이십니다. 성경을 액면그대로 보면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 역사가 이루어지는 부분들도 있고 인간의 순종과 결단에 따라 이루어지는 부분들도 있고 때로는 인간의 행위에 따라 하나님께서 하시기로 하신결정을 바꾸시는 내용도 나옵니다.
예정론, 자유의지론 어느 하나만으로 다 설명되지 못하고 이해되지 못하는 부분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예정론이니 자유의지론이니 따지는것은 현명하지는 못하다 판단됩니다.
불완전한 이론이면서 또 많은 걸 설명해주는 이론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예정론과 자유의지론을 복합적으로 보는게 현명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삼천님의 말씀에 상당히 공감합니다.
성경에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수 있다는 말씀은 오직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감동인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해할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비밀인 것입니다. 선은 하나님과 가까와 지는것이 아닌 하나님으로 온전히 채워진 상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전하시기 때문입니다. 주의 보혈로 우리 죄가 눈보다 희게 된다는것이 이런 의미입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깨우쳐 주시는 진리인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성령께서 알게하시고 그리하여 회계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움없이 하는 행위는 선하다고 볼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가운데서 낫기때문입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 영혼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게되어 죄가운데 있던 우리 자신을 알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후로는 죄사함 받은 영혼들이 영원히 주를 찬송하기를 갈망합니다.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수 있다는 의미가 곧 십자가의 도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