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파란색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온통 파랗게 보입니다. 빨간색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온통 빨갛게 보입니다. 긍정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진흙 속에서 피는 꽃을 볼 수 있습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부정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자기 눈의 들보는 못 보면서 남의 눈에 있는 작은 티를 보게 됩니다. 근심과 걱정으로 늘 가슴이 답답합니다. 초등학생 때는 중학생이 부러웠습니다. 그러면 더 많이 알고, 더 잘할 것 같았습니다. 중학생 때는 고등학생, 고등학생 때는 대학생이 되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 사제 생활 33년을 했지만, 상황이 바뀐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상황을 대하는 마음의 태도였습니다. 과거의 굴레에 잡혀있으면, 오지 않은 미래를 기다린다면 현재는 늘 근심과 걱정입니다. 주어진 현실에 몸을 맡기고, 즐기면 언제나 마음은 햇살 가득한 날들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언제나 기도하십시오. 늘 감사하십시오. 항상 기뻐하십시오.
중세 시대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보속으로 인한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강생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희생하셨고,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인한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중세교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구체적인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관념의 세계를 따르기보다는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생생한 삶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십자가 없이는 우리의 구원도 없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고,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부유함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고,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현대교회는 연대와 소통의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또 우리가 죄를 범한다면 고백성사를 통해서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것입니다. 교회는 하느님 백성들의 공동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 민족, 사상의 벽을 넘어서는 분이심을 고백합니다. 자연과 생명과 연대를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테이야르드 샤르댕, 메튜 폭스, 토마스 베리, 토마스 쿤과 같은 분들은 이제 새로운 시대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구라는 작은 별을 넘어서 우주적인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라틴어 격언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오늘은 내가 내일은 네가(Hodie mihi Cras tibi)” 우리가 언제 하느님의 품으로 갈지 모르니 늘 깨어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순교성인들은 행동으로 깨어 있었습니다. 기도로 깨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고난의 순간에 박해를 견딜 수 있었습니다.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질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순교성인들에게 지복직관의 영광을 주셨습니다. 고인이 되신 부모님께서도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언제나 감사하였고, 늘 기도하였고, 항상 기쁘게 사셨습니다. 그러니 천상에서 빛나는 별이 되셨으리라 믿습니다. 우리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나가도록 해야겠습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시대와 문화가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했던 것처럼, 오늘 나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등불을 들고 예수님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첫댓글 아멘!~~~"소통의 구원" 묵상 하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