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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야호♬ (lil_ili@hanmail.net)
친정 ★ 야호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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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의 법칙>
법칙 29. 당신을 위해 울어주는 여자.
“진짜 잘자네.”
죽을 끓이기 위해 앉혀놨던 밥은 이미 뜸까지 다 들인 후라 먹고 싶을 때 끓이면 그만이고, 국은 데워먹기만 하면 된다.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술을 마신 사람을 위한 숙취해소 식단은 이미 준비되었지만 독고산하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술 냄새가 진동하지만 곁을 떠날 수가 없어서 침대 옆에 앉아 가만히 독고산하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어이, 독고산하.”
“……으음.”
“자면서도 들리나? 자기 이름에 반응하는 걸 보니 연예인은 연예인이구먼.”
키득키득 웃으며 독고산하의 머리를 쓸어넘겼다. 보일러를 좀 켰는데 더운지 독고산하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손바닥으로 쓰윽 닦아낸 후 이불에 손을 쓱쓱 문질렀다.
애타게 주아의 이름을 부르며 사랑한다, 없어지지 말라 말하던 녀석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물끄러미 녀석의 모습을 쳐다보다가 녀석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녀석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아서 두 눈을 꽉 감았다.
귓가에서 자꾸만 매니저가 남긴 말들이 어지럽게 들려왔다.
*
매니저는 잠깐 망설이는 눈치였으나 곧 입을 열었다. 이미 주아라는 이름이 독고산하를 통해 거론 된 이상, 내게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더 이상하게 소문이 날 것이라 생각한 듯 했다.
“주아는 산하가 많이 사랑했던 사람이에요. 더 많은 것을 주지 못하는 것을 안달낼 정도로… 아주 많이 사랑했죠.”
요컨대 첫사랑이라는 걸까.
하긴 잠결에 날 끌어안고 ‘주아야. 사랑해.’라고 말할 정도면 주아라는 여자와 보통 사이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곽하주와 약혼한 사이이고, 곽하주를 자신의 전부라 말하던 독고산하였다.
애써 평정심을 유지한 채 매니저의 말에 귀 기울이려 했으나 나도 모르게 주먹이 꽉 쥐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산하는 주아를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을 정도였어요. 원한다면 목숨도 바칠 기세였죠.”
지금의 독고산하라면 상상도 못할 순애보다. 아니, 어쩌면 곽하주에게 다시금 똑같은 순애보를 펼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씁쓸한 미소가 퍼지는 것을 어쩌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매니저는 커피를 한모금 마신 후,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산하가 주아를 만난 건 고아원에서였어요. 산하의 아버지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면서 봉사를 다니실 때 고아원에 간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 산하가 17살이었나? 그쯤 됐을 때였는데, 주아는 산하랑 동갑내기인 고아원 아이였어요.”
“독고산하랑 레벨이 달랐겠네요.”
“네, 근데 어쩌다 둘이 눈이 맞은 건지 무척 가까워졌어요. 학비가 없어서 고등학교 자퇴를 생각하고 있던 주아를 무사히 졸업까지
이끌어낸 것도 산하가 한 일이에요. 아버지를 설득해서 주아의 후견인으로 만든 거죠. 대학교 학비까지 대주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왜 헤어졌어요? 그렇게나 사랑했는데? 설마 약혼녀가 이미 있으니 부모님이 반대를 하신 건가요? 그래서 강제로…”
드라마에서 흔히 나오는 싸대기 때리며 ‘니가 뭔데 우리 아들 앞길을 막아! 나쁜 년!’의 분위기로 몰아낸 건가? 아니면 돈 쥐어주며
‘이거 먹고 떨어져, 본데배운데 없는 년!’이라든지.
매니저는 내 물음에 하하 웃더니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산하 부모님은 주아를 아주 좋아하셨어요. 어려운 환경에서 컸는데도 밝고 영리하고 얼마나 싹싹한지 모른다며 매일
칭찬하셨으니까요. 게다가 산하의 어머님, 그러니까 김수옥씨는 딸이 없으셔서 친근하게 다가오는 주아를 딸처럼 아끼셨어요.”
“하긴, 김수옥씨 뵌 적 있는데 사람 차별하실 분은 아닌 것 같았어요. 친절하셨고…….”
피부 미용 무료 쿠폰까지 주셨는데.
엠티 때 뵌 것이 생각나 피식 웃었더니, 매니저가 ‘참 좋은 분이죠.’라며 내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럼 헤어질 이유가 없잖아요. 부모님 반대도 아니고 서로 좋아하면… 설마 주아라는 여자가 떠났나요? 독고산하를 버리고?
그러고보니까 아까 ‘돌아왔구나, 없어지지마.’ 뭐 이런 얘길 한 것도 같은데.”
“네, 주아가 떠났어요. 정말 갑자기.”
“어머 독고산하가 차인 거에요? 어쩜 사람 단물은 다 빨아먹고 버리…”
“죽었어요. 5년 전 오늘.”
고개를 들었다. 너무 급히 든 탓에 목 뒤가 뻐근하게 아파왔지만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내 시선은 매니저에게 고정됐다. 심장이
요란스럽게 뛰기 시작했고, 도도하게 꼈던 팔짱은 스르륵 풀려 손바닥이 허벅지 위로 추락했다.
크게 당황한 내 표정을 읽은 매니저가 씁쓸하게 웃더니 들고 있던 커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가볍게 탁- 소리가 났다.
“사고였어요. 길을 건너던 주아가 차에 치였죠. 그때가 주아의 나이는 스무살이었어요.”
“…마, 맙소사. 즉사… 한 건 가요?”
매니저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손 끝이 가볍게 떨려왔다. 독고산하의 나이가 나와 같은 것을 생각하면 불과 5년 전
이야기라는 소리 밖에 안된다.
내 손 끝이 떨리는 것을 본 매니저가 물끄러미 날 쳐다보았다. 말 해야할지 말하지 않아야 할지 한참을 망설이는 눈치였다.
이내 그는 마음을 다부지게 먹은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그리고 죽고나서 안 사실이지만, 주아는 그때 임신중이었다고…….”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경악한 표정으로 매니저를 쳐다보자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미
끝난 일이지 않느냐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일어선 채로 매니저를 쳐다보다가 굳게 닫힌 방 문으로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심장이 쿵쿵쿵- 밖으로 터져나올 듯이 뛰었다.
“그, 그렇다면 아이 아빠는…”
“몇 번을 다그쳐 물어도 산하는 부정하지 않았어요. 산하가 주아를 만났을 땐 이미 연예인으로 데뷔를 한 후라 이 사실이 밝혀지면
우리가 입을 타격은 상상할 수 조차 없었죠. 주아에게는 미안하지만, 고아원에 후원금으로 돈을 건네고 사건을 마무리 지었어요.”
“…입을 막은 거군요.”
“산하마저 죽일 순 없었으니까요.”
사랑하는 여자가 죽었다. 차에 치여서. 숨 한번 내쉬곤 그 싸늘한 아스팔트에서.
…자신의 아이를 가진 채.
“산하씨는 그걸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네. 녀석은 주아를 사랑했으니까요. 장례식에 가겠다고 했지만 우리가 막았고, 산하는 바로 활동을 쉬었어요. 한참 몸값이 높을
때라 이상한 소문들이 돌았고, 그걸 막기 위해 우리가 산하에게서 잠깐 시선을 뗀 사이에 산하가 자살 시도를 했어요.”
“설마 저번에 의식불명이었다는 게…”
“차에 뛰어들었죠. 주아가 죽은 그 자리에서.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한달 가까이 의식불명이었어요. 의식이 돌아왔을 땐… 아예
입을 닫았어요. 다시 죽을 것만 같아서 모두 불안해했고, 결국 산하에게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게 해주자고 의견을 모았어요.”
“그래서 약혼을 시켰군요.”
매니저는 내 말에 씁쓸한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혼을 하고 나서 산하는 눈에 띄게 나아졌어요. 말도 하고, 웃는 것도 늘었죠.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 것 같다고 했어요.
약혼녀를 자주 만나고 싶어했고, 또 자주 만났죠. 사랑한다는 얘기도 자주해요. 다정한 녀석이니까요.”
그래, 자신의 전부라 말했으니까. 자신을 위해 울어주지 않을 지라도 곽하주를 사랑한다 말하던 녀석이니까.
입 안에 씁쓸한 맛이 감돌았다.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다시 소파에 앉는 순간, 매니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만약 아니라면 미안한 이야기지만, 난 산하가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네?”
“산하를 데뷔시킨 게 나에요. 데뷔 전부터 녀석을 쭉 지켜봤고 데뷔하고 난 후에도 녀석을 담당했죠. 그래서 주아와 산하가 만나는
걸 모두 지켜봤고, 지금 약혼녀를 만나는 것도 봤어요. 그런데 예전하고 달라요. 꼭 지금의 산하를 보면, 약혼녀에게 매달리는 것
같아요. 어떻게든 떨어지지 않으려고.”
설마.
의아한 표정 반, 놀란 표정 반으로 매니저를 쳐다보자 그가 진짜라는 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말했다.
“꼭 주아의 그림자를 지워버리려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사랑하는 사람 같아요. 지금의 산하는.”
“설마요, 제가 약혼녀를 사랑하냐고 물었더니 자신의 전부라고…”
말을 내뱉다말고 점점 목소리를 낮췄다. 이내 내 말이 뚝 끊키자 매니저가 ‘내 말이 맞죠?’하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해서 자신의 전부일 수도 있겠지만,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든 사랑해야 할 전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만약 그렇다면……?
“그, 그럼 약혼녀는요? 약혼녀는 산하씨를 사랑하는 것 같나요?”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죠. 하지만 산하가 주아를 잊으려고 할 때 곁에 있어준 건 분명해요. 산하의 모든 걸 받아준 거죠.”
매니저의 말을 들으며 시선은 굳게 닫힌 독고산하의 방문에 고정시켰다. 그러고보니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녀석의 말이 있다.
내 마음을 거절하던 날, 독고산하가 얘기했다. 약혼녀는 자신을 위해서 울어주지 않는다고, 그런 녀석이라고.
그건 어쩌면, 어쩌면 곽하주도 독고산하를 그렇게 열렬히 사랑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가 아닐까?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 같았다.
“…으음.”
갑자기 뒤척거리는 독고산하의 행동 때문에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아직도 귓가에 울리는 매니저의 목소리를 지우기 위해
머리를 두어번 가로 저었다.
매니저는 오늘 들은 얘기를 모두 잊으라 했지만 사람이 컴퓨터인가? 지우란다고 지워지게.
…심지어 컴퓨터마저 복구가 되는 세상인데.
“일어나서 밥 먹는 거 보고 가야할 텐데.”
독고산하의 손을 꼭 잡은 채 시계를 쳐다보았다. 바깥은 벌써 어둑어둑해졌고, 곧있으면 지하철마저 끊킬 시간이었다. 멍하니
어두워진 창밖을 쳐다보다가 그제야 유진태 감독과 다솔이에게 연락해주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
이대로 계속 연락하지 않으면 걱정할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 독고산하의 손을 놓고 방 밖으로 나가려는데, 느닷없이 강한 힘이
내 손을 확 잡아 끌었다.
“…주아야.”
또냐.
아, 글쎄 나 주아 아니라니까.
“독고산하씨, 저 주아 아니…”
“주아야, 미안해. 미안해…….”
유진태 감독이랑 다솔이한테 전화해야하는데.
술에 취해 환상을 보는 것인지, 아니면 잠결에 헛것을 보는 것인지 독고산하는 두 눈까지 뜬 상태였지만 내 손을 잡고 주아의
이름을 불러댔다.
뿌리치고 나갈까 생각했지만 매니저에게 들은 얘기도 있고, 독고산하의 눈빛이 워낙 간절했기에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전화대신 문자를 남겨야겠다 생각하며 다시 침대 옆에 엉덩일 붙이고 앉았다.
핸드폰 폴더를 열고 메세지 박스에 문자를 입력하며 힐끔 독고산하를 쳐다보았다. 독고산하는 내가 곁에 다시 앉자 안심한 듯
희미하게 웃었다.
“주아야, 니가 돌아와줘서 내가 얼마나 기쁜 지 몰라.”
그래그래, 마음대로 착각해라.
유진태 감독에게는 독고산하가 열이 많이 났었는데 괜찮아졌다는 내용의 문자를 보내고, 다솔이에게는 아무래도 늦을 것 같다는
문자를 보냈다.
“사람들이 자꾸 니가 죽었다고 하는 거야. 믿을 수가 없어서… 그래서…… 널 찾아다녔는데 정말 아무 곳에도 없는 거야.”
전송이 끝난 핸드폰을 닫고 주머니에 넣었다. 물끄러미 독고산하를 쳐다보자 녀석은 나와 시선이 마주친 것이 꽤 기분 좋았는지
부드럽게 웃으며 내 손을 더 꽉 쥐었다.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얼마나 꽁꽁 숨었는지 찾을 수가 없더라. 그래서 마지막으로 나도 차에 뛰어들었어. 니가 죽은 거라면 나도 죽으면 되니까.
그럼 널 찾을 수 있겠지 싶었어.”
“…….”
“그런데 주아 니가 화가 많이 났는지 난 죽지도 못하게 하더라. 다시는 널 못보는 줄 알았어. 그런데 니가 이렇게 찾아와줘서
기뻐. 정말 기뻐 주아야.”
“…….”
“주아야, 아직도 화났어? 내가 미워? 무슨 말이라도 해봐. 응?”
내가 무슨 말을 해. 당신들이 어떤 사랑을 속삭였는지, 얼마나 깊었는지 모르는데.
입만 벙끗거리며 독고산하를 쳐다보다가 결국 한숨을 쉬며 입을 닫았다. 그러자 독고산하가 내 손을 더욱 꽉 쥐며 울음을 참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날 아직도 용서하지 못한 거야? 미안해, 그건 정말 진심이 아니었어. 죽으라고 해서… 그래서 네가 정말 죽어버릴 줄은…….”
뭐?
깜짝 놀라 독고산하를 쳐다보자 독고산하의 눈에선 이미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누워있던 탓에 눈물은 턱 끝으로 흐르지 못하고
사선으로 흘러내려 베게를 적셨다.
멍하니 녀석을 쳐다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를 통해 주아라는 여자의 환상을 보고 있는 독고산하에게는 정말 미안한
일이었지만, 어쩌면 매니저가 해준 얘기 또한 모두 진실이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술에 취해 독고산하가 내뱉는 말만이… 온전한 진실일 테니까.
“왜… 그랬어? 아이를 가진 내가, 미웠어?”
“아니야, 미운 게 아니었어. 미워서 그런 게 아니라 슬펐어. 네가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내가 어떻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어. 그래서 그랬어, 그래서 홧김에 죽으라고 했던 거야. 진심은 아니었어. 죽지않고 기다렸다면 내 아이로 받아들였을거야.
왜… 왜 그렇게 빨리 죽었어. 왜, 왜…….”
“…다른 사람의 아이라고?”
나도 모르게 내뱉어진 말에 깜짝 놀라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산하는 그런 나를 가엾다는 듯이 쳐다보더니 한 손을 뻗어 내 뺨을
쓰다듬었다.
힘을 주면 깨질까, 놓치면 떠나버릴까 초조해하는 녀석의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산하의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야. 내 아이야, 내 아이야 주아야. 내가 아이의 아빠가 될게. 모두 받아들일게. 어떻게 하면 날 용서하겠니? 널 죽인 나를,
그 죽음조차 지키지 못한 나를… 어떻게 하면…….”
독고산하의 말이 점점 흐려진다 싶더니 이내 끊어졌다. 잠이 들었나 싶어 뺨을 흔들어깨웠으나 일어나지 않았다. 잠이든 것보단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녀석의 이마에 맺혀있는 땀을 닦아주며 한참을 쳐다보았다.
고작 스무살의 나이에 사랑하는 한 여자를 여러 형태로 잃고, 그것을 고스란히 지금까지 짊어지고 있는 독고산하를 보니 마음이
착잡했다.
주아라는 여자가 가진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세상 사람들에게서 그 여자를 보호해주기 위해 모든 죄 값을
고스란히 받아낸 녀석을 보니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주아라는 여자가 무척이나 원망스러워졌다.
“왜… 죽은 거야. 죽으란다고 진짜 죽어? 멍청한 여자 같으니라고.”
독고산하의 손을 꽉 잡았다. 그러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부스럭거리며 침대로 기어올라갔다. 녀석의 침대는 꽤
큰 사이즈라서 둘이 눕기에 좁지는 않았다.
독고산하가 덮고 있는 이불 안으로 파고들어 두 손으로 녀석의 등을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녀석을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당신을 위해 울어주지 않는 여자보단 그래도 울어주는 여자가 낫다고 생각해, 난.”
다시 당신이 눈을 뜨면, 그때는 부디 당신을 위해 울어주는 여자의 눈물을 봐주길 바라.
*
“… 무거… 워…….”
산하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무언가를 팍 밀어냈다. 침대 스프링이 가볍게
일렁이는 느낌에 산하는 미간을 찌푸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을 떴음에도 눈을 감은 것처럼 새카만 시야에 산하가 두 눈을 가볍게 비볐다. 그래도 변함없이 새카만 시야에 두 눈을 몇 번
깜빡이던 산하는 그제야 밤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건 뭐야.”
침대에서 손을 뻗어 스위치를 누른 산하는 몇번 깜빡이던 형광등에 환한 불빛이 들어오자 당황스러운 얼굴로 옆자리에 누워
곤히 자고 있는 초하를 쳐다보았다.
초하를 쳐다보며 미간을 찌푸리던 산하는 혹시 실수했나 싶어 이불 속을 쳐다보았다. 다행히 실수는 하지 않은 듯 자신도 옷을
입고 있었고, 초하 또한 모든 옷을 반듯하게 입고 있었다.
산하가 나지막이 하품을 하다가 자신에게서 느껴지는 술냄새에 얼굴을 확 찡그리며 방 밖으로 나왔다. 양치질을 할 생각인지
화장실을 향해 걸음을 옮기던 산하는 부엌에서 나는 음식 냄새에 고개를 돌렸다.
가스렌지에 올려진 압력 밥솥과 냄비를 본 산하가 의아한 표정으로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압력 밥솥엔 하얀 쌀밥이 있었고,
냄비엔 북엇국이 한가득이었다.
멍하니 그것들을 쳐다보던 산하가 피식 웃으며 자신의 방을 쳐다보았다.
“벨도 없지. 싫다고 해도 커피 가져와, 국 끓여놔, 심지어 옆에서 자기까지 하고.”
나지막이 중얼거린 산하가 냄비 뚜껑을 다시 덮어두고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치약을 듬뿍 칫솔에 묻혀 입에 넣은 산하가
손을 움직여 양치질을 하며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입안이 텁텁한 것을 느끼며 미간을 찌푸린 산하가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겨
침대에 누워있는 초하를 쳐다보았다.
“야, 일어…”
발 끝으로 초하의 허리를 쿡쿡 찌르며 깨우던 산하가 행동을 멈추고 초하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너덜너덜한 밴드가 초하의
턱에 수줍게 붙어있는 것을 본 산하가 조심스레 손을 뻗어 밴드를 뗐다.
그리고는 턱에 자리잡은 영광의 피구 상처와 멍을 보고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제작 발표회날 초하의 친구이자 자신의
스타일리스트인 윤다솔을 통해 커피 운반하던 초하가 턱에 멍이들었더라, 하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클 줄이야.
하긴 넘어질 때도 요란하게 넘어지긴 했다.
산하는 피식 웃더니 초하를 깨우는 것을 관둔 듯 다시 방 밖으로 나와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입 안에 있던 것을 뱉어내고
물로 헹군 산하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구강청정제까지 뿌린 후에야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킁킁거리며 자신의 몸에서 나는 술 냄새를 맡은 산하가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거실 텔레비전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볍게
몸을 숙여 서랍을 연 산하가 구급상자를 꺼내 부시럭거리며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찾았다.”
원하는 것을 찾은 듯 산하가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켜 다시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침대 옆에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너덜너덜한
밴드와 자신이 찾은 새 밴드의 크기를 비교하니 얼추 비슷하자 산하가 새 밴드의 포장을 뜯었다.
너덜너덜한 밴드를 쓰레기통에 집어넣으며 산하가 손을 뻗어 초하의 턱에 밴드를 붙이려는 찰나였다.
“흐응…….”
“이 멍청이가… 야, 가만히 좀 있어.”
턱에 밴드를 붙이려는 산하의 손 끝이 간지러웠는지 초하가 턱을 긁적이더니 몸을 옆으로 팩 돌려누웠다. 산하가 짜증스레
미간을 찌푸리더니 결국 침대 위로 올라와 초하를 바로 눕히고 그 위에 앉았다.
“으윽.”
“이렇게 붙이면 되나? 그래도 좀 삐져나오는데.”
“으, 무거… 워……”
“아까 나도 그랬거든?”
산하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졌는지 초하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리더니 허공으로 손을 뻗어 산하를 밀어내려 했다.
가볍게 초하의 손을 붙잡으며 초하의 턱에 밴드를 붙인 산하가 만족스러운 듯 밴드를 꾹꾹 눌렀다.
아직 멍이 없어지지 않은 초하가 산하의 손가락이 누르는 미묘한 아픔에 ‘윽!’ 소리를 내는가 싶더니 두 눈을 번쩍 떴다.
“도, 독고산하씨!”
“…깼냐?”
턱이 간질간질하고 사람 숨결이 가까운 곳에서 느껴진다 싶어 두 눈을 번쩍 떴다. 억! 소리가 나오려는 것을 너무 놀란 나머지
집어 삼키며 두 눈을 꿈뻑거렸다.
어째서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게 날 깔고앉은 독고산하인거지?
어버버거리며 독고산하의 이름을 외치자 독고산하가 한심한 듯 날 쳐다보더니 심드렁하게 말했다.
“이, 일어나셨어요? 밥 먹어야죠! 국 해놨… 컥!”
“윽!”
당황한 것이 탈이었다. 당황한 나머지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나려 몸을 일으킨 탓에 아직 내 위에서 비켜나지 않은 독고산하와
보란 듯이, 아주 요란하게 이마를 찧었다.
퍽!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곧 이마가 욱신거리며 아파왔다.
뭐야, 잘생긴 주제에 머리는 돌대가리냐!
“독고산하씨 머리… 왜이렇게 단단해요? 아오, 아파.”
“뭐? 야, 나 혹 났어.”
내 말에 빈정이 상했는지 독고산하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자신의 이마를 가리켰다. 얼떨결에 녀석의 이마를 쳐다보고 있으려니
내가 그 이마에 뽀뽀를 한 것과 땀을 닦아주었던 것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대로 독고산하를 확 밀어버린 것은 당황함에서 비롯된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비, 비켜요! 무겁게!”
“…뭐? 야, 너… 악!”
내가 힘이 센건지 독고산하가 약한건지.
확 밀었다고 정말 밀릴 줄이야. 독고산하는 내 손바닥에 밀려 그대로 뒤로 자빠졌고 아슬아슬하게 침대에 매달리는가 싶더니
곧 쿠당탕하고 침대 아래로 떨어져버렸다.
…이제 난 죽었다.
“헉. 독고산하씨 괜찮으세요? 아, 아니 내가 고의로 그런 건 아니고…”
“야, 너 죽을래?”
독고산하가 한 손은 이마를 문지르며, 다른 한 손은 뒷통수를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녀석은 진심으로 짜증스러운 듯
날 쳐다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한톤 높아진 녀석의 목소리에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아직 난 죽고싶지 않은데, 난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 건데.
“죄송해요. 넘어가실 줄 몰라서…”
“니 힘을 생각해봐! 안넘어가고 버티는 사람이 어디있어? 게다가 그렇게 갑자기 밀었는데!”
“많이 아파요?”
“그럼 간지럽겠냐? 아, 소리 질렀더니 머리 울려. 소주는 마시는 게 아니었는데…”
머리가 아픈 듯 독고산하가 머리를 감싸쥔 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속을 해장할 북엇국이 절실하게 필요할 것 같아
녀석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얼른 죽도 끓이고, 국도 다시 데워야지.
“야.”
“에?”
부엌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독고산하가 느닷없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붙잡을 이유도 없고, 붙잡을 거란 생각을 못했기에
깜짝 놀라 녀석을 쳐다보자 녀석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린 채 날 쳐다보고 있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왜, 왜요?”
“너…”
나, 왜?
…설마 잠결에 내가 주아라는 여자인 척 한 거 들켰나? 기억해냈나?
독고산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침을 꿀꺽 삼키자 녀석이 미간을 더 찌푸리더니 입을 열었다.
“나 자는 동안 덮친 거 아니지.”
“네에?”
뭐, 이 자식아? 나도 여자야, 자존심이 있지. 잠자는 남자를 덮치진 않거든?
…이, 이마에 뽀뽀는 좀 했지만 그건 뭐 덮친 게 아니잖아!
움찔거리며 독고산하를 쳐다보자 독고산하가 의심의 눈초리로 날 쳐다보며 쐐기를 박듯 말했다.
“진짜 안 덮쳤어?”
“제가 미쳤어요? 독고산하씨를 왜 덮쳐요!”
“나 좋아하니까. 이때다 하고 술취한 나 덮친 거 아냐? 아니면 왜 내 침대에서 잔 건데?”
“그, 그건…”
“그건?”
니가 주아라는 여자 찾으며 괴로워하길래 위로차 등짝 좀 껴안았다, 라고 얘기하면 날 죽이겠지?
‘이게 뭔가 있긴 있나본데.’하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는 독고산하의 시선에 고개를 돌리자 독고산하가 다른 한 손으로 내 턱을
잡더니 다시 자신의 쪽으로 돌렸다.
“거짓말 할 생각말고 내 눈 보고 말해. 왜 시선 피해? 너 진짜 나 덮쳤어?”
“그, 그게… 덮친 건 아니고요……”
“덮친 건 아니면 뭐.”
“…이, 이마에……”
“이마에?”
쭈뼛거리며 대답을 머뭇거리자 독고산하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내 말을 따라했다. 거참, 엄청 재촉하네.
결국 에라이, 모르겠다 라는 심보로 두 눈을 질끈 감고 빠르게 말했다.
“뽀뽀 좀 했어요!”
“뭐?”
“이마에 뽀뽀 좀 했다구요! 이마가 얼마나 예쁘던지 뽀뽀를 부르더라구요. 조, 좋아하니까 뽀뽀하고 싶을 수도 있잖아요!
이건 엄밀히 말하면 술에 취해 무방비했던 독고산하씨 탓이에요. 누가 무방비하래요? 누가 뽀뽀 부르는 이마로 태어나래요?”
내 탓은 하나도 없어! 라고 외치자 독고산하가 어이없는 듯 날 쳐다보더니 순간적으로 내 손목을 잡았던 손에 힘을 풀렀다.
이때다! 싶어 후다닥 녀석의 방에서 빠져나와 부엌으로 달려갔다. 부엌 냉장고 옆으로 코너를 돌며 힐끔 고개를 돌려 녀석을
쳐다보자 독고산하는 한방 먹었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날 쳐다보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다행히 화내지 않는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국을 데우고 죽을 만들기 위해 가스렌지에 불을 켜자, 독고산하의 어이없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성추행으로 확 고소할까보다.”
***
주아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조금 궁금증이 풀리셨나요. 하지만 긴장의 끈을 놓지는 말아주시어요. 앞으로도 벗겨질 껍질이
넉넉히 준비되어 있답니다. -.,-으힛힛.
오늘부터 날씨가 꽤 추워질 거라고 하니 모두들 옷 두툼이 챙겨입으시고 감기 조심하셔요.
읽어주신 분들과 꼬리말 달아주신 모든 분들♡_♡ 언제나 챙겨읽고 있어요. 모두모두 알라뷰. 으허허으허허.
야호♬ 올림.
(+ 이미지 작품은 ‘S A H R A’ 님께서 친정에 선물해주신 가싱이미지에서 가져왔습니다^^)
(+ 인소닷 가상 게시판에서 가상이미지를 만나보실 수 있답니다!)
첫댓글 오예 1등이다!와 가상이미지 여주 진짜귀엽게 생겼어요 ㅋㅋㅋㅋ산하가 좋아했던 여자라고는 생각했지만 저런과거일줄은 전혀몰랐어요ㅋㅋ근데 아직도 벗겨질 껍질이 남아있다니..작가님도 감기 조심하세요 잘읽고갑니당
크큭... 저 독고산하에게도 사랑이 있었군요.... 그런데 좀 충격이었어요... 주아란 사람이 딴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니... 하하... 그리고 왠 자살..ㅠ,ㅠ
가상 이미지 참 이뻐요... ^^ 다음편 기대합니다.
내일읽고코멘달께여ㅠ.ㅠ
왓어용!와 의외로산하가정이많네여ㅋ.ㅋ주아가산하의아이를가지지안앗던게왜케다행인건지여...ㅋㅋㅋㅋㅋㅋㅋㅋ어쨋든너무잘읽엇어요 초하가산하한테대놓고반말은못하눈군여..언젠가한번초하가반말을해서한번...ㅋ..ㅎ..담편에서뵈영@!
독고산하도 썩 싫은눈치는 아닌듯? 호호호 그래도 주아라는 사람의 궁금증도 풀렸고~ 곽하주를 진심으로 사랑하는것도 아니니깐 안심안심 ㅋㅋㅋㅋ
과거가많이슬펐네요ㅠㅠ근데산하의저런모습상상이안가요흐흐흐
아 너무 재밌어욤ㅠㅠㅠ
★
꺄 ㅠㅠㅠㅠㅠㅠㅠ우리산하정말멋져 ㅠㅠㅠ주아흐음...왠진모르지만 음 몰라요 ㅠㅠ다른남자애를가졌다는데 뭐랄가 나쁘게느껴진다기보다는 그럴만한이유가있엇던거같다는느낌이....ㅠㅠ/ 힝힝 ㅠㅠㅠㅠ산하가여우
ㅋㅋㅋ 넘귀여워용 >_< 산하가 빨리 초하를 좋아해야할텐뎅 ㅋ
※ 아미치..ㅋㅋㅋㅋㅋㅋㅋ그 임신얘기듣고. 산하이쉐키! 이랬는데. 뭐 자기애가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제길..진짜놀랬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크흐흐. 이제 산하야^^ 그 거지같은년 곽하주를 잊고^^ 초하를 사랑하는거에ㅑ~~~~~~~에헤라디야~
잘보고 있어요~~ㅋㅋ 산하는 언제쯤 초하를.........ㅋㅋ
아직 벗겨질 껍질이 있다니..궁금... 담편도 기다릴께요-
휴.......................
벗겨질 껍질.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재밌어요~근데 주아라는 애도 불쌍해요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