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여해 선조는 고려말에 판서를 역임한 박상충 선조와 문화류씨 사이에 3남 3녀중에 3남으로 탄생하셨습니다.
탄생한 지역은 1373년 당시 호구 조사기록이라 할 수 있는 계축호적에 근거해 개성 북부 오관산방 3리에서 탄생하신 것으로 추정합니다.
형님이 두분 계신데, 장남 박여항 선조는 군사를 역임하셨고 차남 박여위 선조는 현감을 역임하셨습니다.
매부가 세분인데, 여흥민문의 민약손, 덕산 이문의 이조, 광주이문의 이양몽 선생이십니다.
특히 암탄 이양몽 선생은 고려말의 충신으로서 태종이 여러차례 벼슬을 제의했으나 거절하고 고려에 대한 절의를 끝까지 지킨 분입니다.
암탄 선생의 형님이 되시는 석탄 이양중 선생은 두문동 72현중의 한분이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박여해 선조의 백부는 문정공 박상충 선조로서 1375년 김의사건을 둘러싼 친명파와 친원파의 대립시에 친원파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이인임 세력에 의해 동생인 박상진 선조와 함께 귀양을 가는중, 문정공은 귀양중에 별세하고 박상진 선조는 귀양을 가신 이후 행적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문정공의 아들이 바로 평도공 박은 선조로서 박여해 선조의 사촌형이 되십니다.
이와 관련해 족보에 있는 박여해 선조와 관련된 기록이 감찰을 지내셨다는 것입니다.
박여해 선조는 소과를 비롯해 대과에 급제한 기록이 전혀 없으며, 과거에 응시하셨는지 여부도 알 수 없습니다.
감찰은 사헌부에 속한 관원으로서 정6품에 해당되는 관직으로서 품게는 높지 않으나 당시 요직으로 분류되었던 관직인데 박여해 선조가 이러한 관직을 어떻게 제수받게 된 것인지 확실한 내력이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덧붙이면 하나의 단서가 사촌형이 되는 평도공이 당시 태종의 최측근으로서, 대사헌을 두차례나 역임하고 친척들을 등용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박여해 선조께서 감찰이 되신 배경에 평도공의 역할이 컸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러나 감찰을 정확히 언제부터 근무하였고 언제 그만두었는지 여부는 전혀 모릅니다.
박여해 선조의 처가는 강름김문인데 고려말의 충신이었던 운암 김윤남 선생이 박여해 선조의 장인이 되십니다.
운암 선생은 고려말에 낭천감무의 관직을 수행하다가 고려가 망한 이후 더 이상의 벼슬을 하지 않고 파주에 은거하였는데, 근처에 있는 산봉우리에서 매일 고려를 생각하면서 개성을 향하여 절을 하였다고 해서 그 봉우리를 국사봉이라 하였다고 전합니다.
운암 선생이 정확히 언제 별세하셨는지 모르나, 독곡 성석린 선생께서 만시를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성석린 선생은 영의정까지 이른 분으로서 사육신 매죽헌 성삼문의 종증조부가 되시기도 합니다.
또한 운암 선생의 증손이 진사를 지낸 김사기 선생이신데 그 장인이 매죽헌 선생의 6촌동생이 되는 문두 성담수 선생이십니다.
이러한 충신 가문에 박여해 선조가 사위가 되신 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나 어떤 계기로 사위가 되실 수 있었던 것인지 그 내력을 전혀 모릅니다.
박여해 선조의 외가는 문화류문인데, 외조부는 군사를 역임한 류안우 선생이시며, 외숙은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문인으로서 1396년 장령의 벼슬을 거절하고 경상도 초계군 성산리에 은거하신 남정 류희 선생이십니다.
또한 외당숙이 청백리로 널리 알려진 하정 류관 선생이 되십니다.
박여해 선조의 조카사위가 정암 정척 선생이신데, 특히 정척 선생 가문은 3대가 청백리에 녹선될 정도로 대단한 가문이라는 것이며, 그 이후 몇 대에 걸쳐서 효자와 열녀가 배출된 가문이라는 것입니다.
박여해 선조의 탄생연도와 별세연도를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며, 후손들의 묘소가 황해도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된 것으로 볼 때 처음에는 개성에 거주하시다가 어느 시기에 황해도 지역으로 이주하신 것으로 추정됩니다.
덧붙이면 별세하신 이후 묘소가 어느 지역에 안장된 것인지 전혀 모르는 것이 후손으로서 통탄스러운 심정 금할 수 없습니다.
이상과 같이 2개월동안 연구한 박여해 선조의 생애를 간략히 정리하였습니다.
2024년 7월 9일(화) 문 암 올 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