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느님 창조 사업의 완성은 평화입니다.
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제주도의 산과들에 고사리가 한참입니다.
제주도내 당뇨병 고혈압 환자들이 약을 적게 처방받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고사리를 꺾습니다.
겨울 그 춥고 음산한 시간을 지낸 땅에서 고사리가 올라옵니다.
자연이 주는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화의 선물이기도 합니다.
오늘 고사리를 꺾고 그 자리에 2~3일 뒤에 가면 다시 올라와있습니다.
강정 공소 쟌다크 회장님께서 산으로 들로 다니며 고사리를 꺾습니다.
그 고사리를 삶아서 햇빛에 잘 말려서 여러 지인들에게 판매를 합니다
그 말린 고사리가 이번에는 제주 강정에 지어지는
강정 평화 사목센타를 위한 기금으로 마련하신다고 합니다.
작년에는 서귀포 복자성당 유치원 설립 기금 마련을 위해서
고사리 작업을 하셨는데 .......
언제쯤 쟌다크 공소회장님이 본인을 위하여 고사리를 꺾을 수 있을까?
강정의 양희은 쟌다크 회장님의 삶을 보면서 많은 묵상을 하게합니다.
한편에서는 경제논리와 무장의 평화를 이야기 하면서 바다를 파괴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세월호 실종자들과 희생자들 그리고 그 가족들과
많은 봉사자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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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6일 부활 팔일 축제 내 토요일
주례 강론 현우석
찬미 예수님!
제자들은 예수님이 직접 뽑으신 제자들은 믿지 못합니다.
거듭된 증언에도 요지부동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아녀자의 헛소리라 생각하고
다른 제자들은 환영을 본거라 넘겨버립니다.
당시에 남녀차별은 지금의 비 할 바가 아니었기 때문에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증언 그것은 그냥 넘어 가는 게
이상하지는 않았다 치더라도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그들 가운데 있었던 두 제자가 엠마오로 가면서
부활하신 되살아나신 예수님을 보았다는 이 증언조차 믿지 못합니다.
이 제자는 한명도 아니고 두 명이나 헛것을 본거라고 치부해 버립니다.
그러니 이상합니다.
그렇게 계속되는 증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제자들의 모습이 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왜 일까요? 왜 제자들은 이들의 증언을 믿지 못했을까요?
왜 믿지 않았을 까요?
정답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그들의 불신과 완고함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들의 불신과 완고함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언을
예수님을 보았다는 증언을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생각이 굳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마리아와 두 제자의 증언을 흘려버리고 넘겨 버렸던 것입니다.
우리는요 우리 사람은 말이죠.
어떤 것은 믿고 어떤 것은 믿지 않습니다.
혹은 믿지 못합니다.
우리가 같은 믿음을 가졌다고는 하지만
그 폭과 깊이는 각자가 다 다릅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이 강론을 쓰면서 문규현신부님이 떠올랐습니다.
우리 문규현신부님은 지금 우주를 가지고 피정을 간간히 하고 계신다고 합니다.
우주에 대해서 하지만 저는 우주에 대해서는 생짜 초보입니다.
저는 잘 몰라요. 온 우주가 나를 도와주고 있다고 하는데
저도 공감이 가면서도 그렇게 철석같은 믿음은 없습니다.
제자들도 우리처럼 모든 걸 다 불신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걸 안 믿으면 그동안 그들이 믿어 왔던 것들이
다 소용없어 지기 때문에 다 허망해 지는 그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에게 있어서 믿고 따르던 스승이 죽었다는 것은
그가 가르친 모든 것이 소용없다는 것을 의미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난 다는 것은
그분이 부활하신다는 것은 그분에 대한 믿음이 다시 생긴다는 것을 뜻했습니다.
따르던 스승이 죽어 버리면 그는 실패자가 되는 것이고
그가 다시 살아나면 승리자가 되는 것이 그 당시에 생각이었습니다.
그것도 예수님께서는 실패한 이의 기준이었던 죽음을
이기셨으니 그분은 진정한 승리자가 되셨던 것입니다.
실패 죽음 여러분 이 표현 이 말 어디서 많이 들어봤죠.
정부 해군 경찰은 우리에게 이야기 합니다.
‘너희들은 실패하고 있다.’
‘너희들은 우리 이길 수 없다.’
‘봐라 너희들이 매일 사랑한다고 노래하는 구럼비가
이렇게 파괴되어 가고 죽어 가고 있지 않느냐?
이 세상은 힘센 자가 살아남는 거다.’
그래서 해군기지도 필요한 거라고 우리에게 얘기합니다.
하지만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당신들이 말하는 그 힘의 논리 때문에
지구상에 있는 모든 생명을 수십 번을 죽일 수 있는
핵무기를 우리 인류가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 논리 때문에 북한보다 우리가 매년 30배는 많게
군사비를 쓰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매년 북한보다 30배가 많은 군사비를 지출하고 있습니다.
그 힘의 논리 때문에 우리는 주한 미군에게
매년 9천억이라는 돈을 쓰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게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십니까?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만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즉 전쟁을 억제하는 게 곧 평화는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평화란 두루 두루 서로 서로 평온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총부리를 겨누며 내 총이 네 것보다 성능이 좋으니까
말 안 들으면 알아서 해! 이러고 있으면 그것은 평화가 아닙니다.
왜 입니까? 상대방은 다음에 더 좋은 총을 만들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만방에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십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하느님께서 너희를 사랑하듯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즉 서로를 죽이는데 협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가 바로 서로를 죽이는데
협조하지 말 것을 그것을 우리가 막으려고 이 자리에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작아 보이지만 지금은 실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가 믿는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실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셨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 합시다.
그 분께서 2천 년 전 그 작은 나라에서 다시 살아나셔서
당신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당신을 따르는 것이 더 이상
가망 없는 현실이 아니라 끊임없는
희망이라는 것을 보여주심으로서
우리가 이렇게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사실을 믿읍시다.
여러분 이 기쁜 소식 강정이 외롭지 않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함께 하고 있다는 것
이 소식을 우리만 알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전 세계 평화를 갈망하는 우리 친구들이
함께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그럴 때 우리는 지치지 않고 끝끝내 희망을 가지며
오래 오래 여기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평화를 갈망하는 우리들 서로 서로 죽이지 말며
함께 동반하며 함께 걸으며 이 여정을 계속해 나갑시다.
잠시 묵상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