똬리 튼 뱀, 모실 것인가 내칠 것인가 뱀의 청혼을 받아들인 여성 허물벗고 선비로 변한 뱀 민담 ‘구렁덩덩신선비’ 는 재생의 힘이 세속화 된 모습 뱀 하면 당신은 무슨 느낌이 드시는가? ‘징그럽고 끔찍하다’, ‘두렵지만 모셔야 한다’, 어느 쪽인가? 우리들 대부분은 틀림없이 전자에 손을 들리라. 어린 시절 뱀을 보면 한사코 잡으려고 달려들거나 아니면 뺑소니를 쳤던 경험도 전자의 느낌이 촉발시킨 원초적 반응일 것이다. 그러나 한쪽에는 후자의 반응도 없지 않다. 민속 관념으로 여전히 남아 있는 업구렁이에 대한 민간의 태도를 생각해 보라. 뱀에 대한 이런 두 갈래의 반응은 자연 혹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인간의 두 가지 태도를 함축하고 있다. 물리칠 것인가, 모실 것인가? 물론 신화는 후자의 산물이다. 동화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뱀 신랑 이야기에도 뱀에 대한 두 반응이 존재한다. 이 이야기는 민담학자들이 세계적인 분포를 보이는 민담으로 주목하고 있는데 <구렁덩덩신선비>는 이 유형의 한국판이다. 어떤 할머니가 자식을 소원하다가 어찌된 영문인지 큰 뱀을 낳았는데 이웃 부잣집의 세 딸이 구경을 온다. 첫째와 둘째는 기겁을 하고 물러나지만 셋째 딸은 호감을 보이면서 칭찬을 한다. 뱀에 대한 전형적인 두 갈래의 반응이다. 상식적으로 볼 때 언니들의 반응이 자연스럽다면 막내의 태도는 뭔가 수상하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이야기는 막내딸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후에 구렁덩덩신선비의 청혼을 받은 두 언니는 첫 반응대로 거절하지만 막내딸은 선뜻 받아들인다. 다 아는 이야기지만 바로 이 대목에서 운명의 역전이 일어난다. 뱀 신랑은 허물을 벗고 멋진 선비로 변신한다. 그리고 허물을 잘 간수하라면서 ‘허물이 없어지면’이라는 금기도 준다. 이제 나서야 할 인물이 두 언니. 멋진 선비를 보게 되자 질투심에 사로잡힌 언니들은 선비가 과거보러 간 사이 동생 몰래 허물을 태워버린다. 돌아오는 길에 허물 타는 냄새를 맡은 구렁덩덩신선비는 사라져 버린다. 이제 남은 것은 ‘허물-옷’을 지키지 못한 신부의 신랑 탐색담이다. 물론 민담의 문법대로 셋째 딸은 신랑을 되찾아 행복한 결말에 이른다. <구렁덩덩신선비> 이야기는 마치 남자를 뱀처럼 징그럽지만 끌리는 존재로 느끼는 소녀가 일련의 시련을 거처 남자를 맞이하는 과정처럼 보인다. 소녀들의 성인식 말이다. 백마 탄 왕자에 대한 환상이나 <미녀와 야수> 유형의 이야기들에 보이는 소녀의 모습도 이와 유사하다. 그래서 뱀 신랑 이야기는, 민담에서 인간심리의 원형을 찾으려는 분석심리학자들에 의해 여성의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부정적인 아니무스(여성의 마음 속에 있는 남성)가 시련의 과정을 통해 순화됨으로써 여성이 자아를 획득해가는 이야기로 해석된다. 구렁덩덩신선비를 여성의 무의식 속에 내재해 있는 남성상, 곧 아니무스를 상징한다고 보는 해석이 그런 것이다. 불을 창조한 뱀 신랑과 생명을 낳는 여성의 결합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한 대지의 창조적 리듬 꿈틀 그러나 그렇게만 해석하고 말면 속옷 입고 거리에 나서는 것처럼 뭔가 허술하다는 느낌이 든다. 뱀(동물)과의 결혼, 허물을 입고 벗거나 지하세계로 내려가는 뱀의 형상 등은 우리에게 이 민담의 신화적 근원을 되짚어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신화 유형은 초문화적 보편성을 갖는다기보다는 특정한 문화의 산물이다. 뱀 신랑 이야기 역시 그러하다. 이 이야기는 신석기 초기의 원시농경문화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뱀 신랑이라는 소재는 아프리카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동남아시아와 인도네시아를 거쳐 멜라네시아에 이르는 원시농경지역에서 두루 발견된 바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20세기 초에 독일 인류학자 J.마이어가 보고한 바에 따르면 이들 지역의 뱀 신랑 신화는 이렇다. 한 여자가 숲에 들어갔다가 뱀의 청혼을 받는데 처음에는 거부하다가 받아들인다. <구렁덩덩신선비>의 뱀 신랑에 대한 이웃 딸들의 엇갈린 반응과 다르지 않다. 여자가 아들과 딸을 낳자 뱀은 여자를 돌려보내고 스스로 키운다. 뱀 신랑 이야기와 달라지는 부분이다. 신화와 민담의 갈림길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뱀은 아이들이 물고기를 잡아 날 것으로 먹는 것을 보고는 자신을 잡아먹을지도 모르겠다면서 사내아이에게 자기 뱃속으로 들어와 불을 꺼내 누이에게 주라고 말한다. 소년이 불을 꺼내오자 소녀가 물고기를 요리했고 둘은 익힌 음식의 맛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익힌 음식을 먹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 뉴기니 북부 애드머럴티 제도의 뱀 신랑 신화는 일종의 창조신화라고 할 수 있다. 불이나 익힌 음식 등 문화의 기원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신화에서 뱀 신랑은 그저 뱀의 허물을 쓴 선비(유럽의 경우 왕자)가 아니라 창조신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뱀이 창조신으로 등장하는 신화는 그리 드물지 않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가운데 쟈우앙족의 창조신화는 에잉가나라는 뱀을 만물의 어머니라고 말한다. 새끼줄에 진흙을 묻혀 인간을 만든 중국 신화의 여와도 그런 존재다. 한나라 시대 화상석(畵像石)에 새겨진 여와의 하반신이 바로 뱀이 아니던가. 창조신화에 뱀이 등장하는 것은 뱀이 가진 재생 이미지와 관계가 깊다. 창조의 본질은 재창조이고, 재창조를 통해 세계는 새로워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허물을 벗는 뱀처럼. 그런데 달거리와 출산을 통해 재생 이미지를 몸으로 보여주는 것이 또한 여성이다. 불을 창조한 뱀 신랑과 처녀의 결합은 재생 이미지의 중매에 의한 것이다. 또 이런 신화가 신석기 초기의 원시농경문화를 공유한 지역에 퍼져 있었던 것도 농경 양식이 지닌 죽음과 재생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재생 이미지를 고리로 삼아 ‘뱀-여성-농경문화’가 보물처럼 하나의 이야기로 꿰어진 셈이다. <구렁덩덩신선비> 이야기는 이런 뱀 신랑 신화가 오랜 전승과정에서 세속화된 모습으로 바뀐 형태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그런데 우리 신화에는 아직 세속화되지 않은 뱀도 남아 있다. 제주도의 뱀 신들이 그렇다. 한반도의 <칠성본풀이>와 이름은 같지만 내용은 다른 본풀이가 대표적인 제주 뱀 신들의 이야기다. 옛날 장설룡 송설룡 부부가 뒤늦게 딸아이를 낳았는데 이 딸이 부모의 부재중에 실종된다. 다시 나타난 딸은 중과 관계를 맺었는지 배가 불룩하다. 부모는 딸은 무쇠함에 담아 바다에 버린다. 한반도의 <제석본풀이>나 <석탈해> 신화 등과 유사한 부분이다. 석탈해가 처음에 바다를 건너 가락국으로 들어왔다가 김수로와의 싸움에서 패배해 쫓겨나듯이 딸아기씨를 태운 무쇠함도 제주도로 흘러와 산지포·화북·가물개·조천 등 들어가려는 곳곳에서 쫓겨난다. 마을마다 이미 신들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마지막으로 닿은 곳이 함덕 신흥이었다. 한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무쇠함을 발견한 일곱 해녀와 송첨지 영감이 함을 열자 그 속에서 뱀이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던 것. 쫓겨난 딸은 신이한 중과 관계를 맺고 함속에 갇힌 채 뱀 딸을 일곱이나 낳았던 것이다. 새끼 뱀을 낳은 아기씨도 기실 뱀이었다. <칠성본풀이>의 서두에서는 분명하지 않지만 부모가 천지공사를 살러 떠났을 때 하녀가 가둬놓고 구멍으로 밥을 주었다거나 중이 아기씨를 노둣돌 아래 파묻어 놓고 장설룡을 만나는 장면이 이미 아기씨의 정체를 암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느닷없는 사태에 대한 일곱 해녀와 송첨지의 반응이 흥미롭다. 처음에 이들은 “더럽고 재수없다”며 달려들어 해코지를 한다. 그러나 결과는 즉시 나타난다. 이들은 모두 가슴에 트림이 일어나고 안질이 생겨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된다. 심방의 점괘에 나온 것은 ‘남의 나라에서 온 신을 소홀히 대접한 죄목’이다. 이를 보면 칠성신은 분명 외래신이다. 어쨌든 이들은 심방의 말대로 칠성새남굿을 한 후에야 병이 낫고 천하 거부가 된다. 소문을 듣고 함께 모신 함덕 마을도 부촌이 된다. 같은 사태는 반복된다. 딸아기가 일곱 딸을 데리고 도성 안 송대장 집으로 들어갔는데 잘 모신 송대장 부인 덕에 송대장은 천하거부가 되고 “더럽고 추잡하다”고 침을 뱉은 관원은 입이 아프고 가슴이 답답해 굿을 아니 할 수 없게 된다. 물리칠 것인가, 모실 것인가? 신화는 모셔야 새로운 생산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이들 여덟 뱀 여신은 마침내 신직을 맡아 좌정하는데 모두 가옥신(家屋神)이 된다. 그런데 판본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옥지기나 사령방 등 관청의 한 공간을 차지하는 신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고방의 곡식을 지켜주는 안칠성신, 집 뒤 귤나무를 지키는 부군칠성신, 과수원을 지키는 과원할망, 광청못을 지키는 광청할망, 추수못을 지키는 추수할망 등 농경과 관련된 신직을 차지한다. 제주도 신화에서도 ‘뱀-여성-농경문화’는 하나의 고리로 연결돼 있다. 뱀 신랑의 창조신화든, 뱀 신의 기원신화든, 아니면 뱀 신랑 민담이든 뱀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결국 두 가지다. 하지만 뱀을 받아들이고 모신다는 것은 단지 잡신 하나를 섬기는 어리석은 행위만은 아니다. 그것은 뱀과 여성으로 상징되는 낳고 낳는, 태어나고 다시 태어나는 창조의 능력을, 다시 말하면 대지가 지닌 재생의 리듬을 소중히 여긴다는 뜻이다. 무속의 모심에는 물론 천하거부가 되려는 세속적 욕구가 스며 있지만 그 너머에는 대지의 창조적 리듬을 노래하려는 또 다른 힘이 뱀처럼 꿈틀대고 있는 것이다. [출처] 똬리 튼 뱀, 모실 것인가 내칠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