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가 한국전쟁 폐허로부터 다시 일어선지 70년이 흘렀습니다. 물론 제주는 한반도 최남단이라는 지리적 환경으로 6.25의 직접 피해지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 같은 환경은 6.25 전란 기간 동안 한국전쟁과 연관된 시설·기관들은 물론, 육지부의 피난민과 전쟁 포로들까지 대거 제주로 집중하게 하는 요인이 됐습니다. 4.3이라는 현대사의 비극을 치르고 있던 당시의 제주사회는 한국전쟁으로 유사 이래 정치·군사·외교뿐만 아니라 가장 큰 지역사회 격변까지 경험하게 됩니다. [제주의소리]가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전쟁기 육지에서 제주로 피난이 이뤄지는 과정과, 정부와 군에서 제주도를 적극 활용하면서 남긴 ‘사람과 장소’들을 재조명해보는 [70주년, 한국전쟁과 제주] 기획을 연재합니다. 전쟁의 실상과 전후의 변화상을 살펴보는 이번 기획을 통해 한국전쟁기의 제주역사는 물론 제주인들의 삶을 되돌아봄으로서 ‘항구적 평화’의 중요성을 미래세대에게 전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글] |
유월이다. 이 땅을 통째로 피로 물들이고, 동포끼리 총구를 겨누고 남북으로 나뉘어 삶의 뿌리가 송두리째 뽑혔던 70년 전 6.25전쟁은 한반도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제주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직접적인 전투가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제주, 특히 서귀포시 대정읍(모슬포) 일대는 당시 전시상황에서의 대한민국 핵심 군사적 요충지였다.
이 곳의 지정학적 중요성은 일제강점기 당시 모슬포 일대에 만들어진 알뜨르비행장이 잘 말해준다. 2차대전 말기 일본은 당시 넓게 펼쳐진 대정읍의 벌판에 비행기 격납고와 활주로, 동굴진지 등을 조성했다.
이 곳은 6.25전쟁 때도 군사적 요충지였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1951년 1월 22일 대구에서 창설된 제25연대가 최후방인 대정 모슬포로 이동하면서 육군 제1훈련소가 설치됐다. 1956년 1월 1일 해체될 때까지 이곳은 전방에 배치할 신병을 교육하는 게 주 임무였다.
이 시기 배출한 신병 수는 50만명으로 추산된다. 이들은 서울 재탈환을 비롯해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1953년에는 강병(强兵)을 육성하는 곳이라는 뜻으로 ‘강병대(强兵臺)’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반도 곳곳에서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군사력을 보충하는 후방 전략기지의 핵심이었던 셈이다.
현 해병대 제9여단 91대대 안에는 당시 육군 제1훈련소 지휘소 건물이 남아있다. 2008년 등록문화재 제409호로 지정된 이 건물은 중앙에 출입구가 있는 1층짜리 좌우 대칭형 건물로 외관은 제주 현무암으로 구성돼있다.
이 곳을 중심으로 대정읍 곳곳에는 당시 시대상을 느낄 수 있는 흔적들이 남아있다. 일주도로에서 상모대서로로 들어가는 지점에서 도로 양 쪽에 우뚝 선 기둥을 만날 수 있는데, 이게 1951년 당시 지어진 육군 제1훈련소 정문이다.
이 곳에서 불과 300m 거리에는 장병들의 종교생활을 위해 1952년 세워진 강병대교회가 자리하고 있다.
지금의 대정초등학교는 6.25 당시 공군사관학교 임시기지로 활용됐는데, 학교 한 켠에 남은 상징탑에 그 이야기가 깃들어있다.
당시 제98육군병원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공간이다. 이 병원은 의무대와 후송 병원의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 제1훈련소 관할 아래 건립됐지만 당시 제주도민과 피난민을 치료하는 도내 유일한 3차 의료기관의 기능도 수행했다. 1964년 3월 이 자리에 대정여고가 생기면서 50여개의 병동 건물이 차례대로 철거됐고, 현재는 학교 안에 1개의 건물이 남아있다.
학교 동쪽으로 약 100여미터에는 당시 이 병원에서 격무로 순직한 의료진들을 기리는 충혼비가 세워져있다.
이 밖에도 소위 주먹탑으로 불리는 제29사단 창설기념탑, 현재 마늘밭 한 가운데 자리 잡은 중공군포로수용소터, 해병대 3기생들이 훈련을 받았던 구 해병훈련시설 등 한국전쟁의 대표적인 상징물들이 자리잡고 있다.
대정에는 이처럼 많은 역사적 가치를 지닌 공간들이 산재해있지만 이를 하나로 엮어내 생활 속 교육 등 적극적인 움직임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1980년대부터 미국의 대형 아카이브를 넘나들며 제주 관련 자료를 모아온 김웅철 대정현역사문예포럼 이사장은 “교육현장 등에서 생활과 연결이 안되면 모든 것이 단절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다”며 “일회성으로 당장 발등의 불만 생각하고 소중한 역사적 자원들을 어떻게 유지시켜야 할지에는 관심이 많지 않은 현실이 아쉽다”고 말했다.
잊혀진 제98육군병원의 순직충혼비가 대표적인 예다. 이 충혼비는 당시 열악한 환경 속에서 격무에 시달리다 순직한 의료진들을 기리기 위해 육군병원 소속 장병들이 십시일반 힘을 모아 세워졌다. 병원 건물이 남아있는 대정여고에서 불과 동쪽으로 100여 미터에 위치한 이 충혼비는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채 안내판 하나 없이 사유지에 방치됐다는 지적이 이어져왔다.
김 이사장은 조선시대에는 유배지로, 일제강점기에는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의 아픔을 지녔던 대정에 살던 주민들이 6.25전쟁 당시 다양한 방식으로 나라를 지키는 일에 동참한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표적으로 당시 대정읍 상모리 산이수동 주민들은 중공군포로수용소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어야 했다.
그는 “그 당시 대정의 많은 땅이 징발돼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나라를 위해 내놓았고 후에 복구하는 데도 손해를 많이 보고 많이 아팠다”며 “이 지역주민들은 그 당시 어려움을 오롯이 다 받아넘겼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