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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4일 [사순 제4주간 목요일]
요한 5,31-47
내가 누구인지는 이것으로만 증명된다
영화 ‘인투 더 와일드(Into the Wild)’는 크리스토퍼 맥캔들리스의 삶과 모험을 연대기로 기록한 논픽션 책을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크리스토퍼는 워싱턴 D.C.의 부유한 교외 지역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재능 있는 학생이자 운동선수지만, 그의 가족의 물질주의적인 생활 방식과 그들의 표면 관계 아래에서 긴장 상태로 살아왔습니다.
사실 그의 어머니는 친어머니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외도로 생기게 된 아들입니다.
그는 실력으로 아들의 자격을 증명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원하는 대로 1990년 에모리 대학교까지 졸업한 후 맥캔들리스는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아버지에게 받은 24,000달러를 자선 단체에 기부하고 가족과의 관계를 끊고 참 ‘자유’ 찾아 미국 횡단 여행을 시작합니다.
그의 목적지는 알래스카고 자연과 하나 되는 삶입니다.
그는 시간과 돈, 경쟁에 얽매이지 않는 자연이 가장 자유롭다고 여겼습니다.
여행 중 자유를 향한 그의 탐구와 자연 세계와의 강렬한 연결에 감동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사우스다코타에서 곡물 엘리베이터 운영자를 위해 일했지만 돌아올 것을 약속하며 여행을 계속하기 위해 떠나고, 자기 부모처럼 떠나버린 아들을 그리워하는 집시 아주머니도 만나고 또 만납니다.
그리고 자기를 양자로 삼고 싶어 하는 가족을 잃은 할아버지도 만납니다.
그러나 그는 자연과 하나 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1992년 4월, 맥캔들리스는 알래스카에 도착해 버려진 버스(Fairbanks 버스 142번)에 캠프를 세웠습니다.
그는 땅에서 살아가고, 작은 사냥감을 사냥하고, 식용 식물을 찾고, 자기 생각과 경험을 일기에 기록하려고 시도합니다.
여름이 진행됨에 따라 식량이 고갈되어 갑니다. 실수로 독초를 먹게 되어 몸이 약해지고 식량을 모을 수 없게 되면서 그의 상황은 더욱 악화합니다.
눈이 녹아 불어난 강 때문에 빠져나갈 수도 없게 된 그는 죽음을 직감하고 “행복은 함께 나눌 때만 현실이 된다”라는 글을 남기고 버스 안에서 외로이 생을 마감합니다.
그의 시신이 발견된 것은 그의 사망 4개월 후였습니다.
사람은 꼭 일해야만 살수 있을까요? 맥캔들리스처럼 일하지 않고도 살 수 있지 않을까요?
맥캔들리스는 꼭 일해야만 관계가 유지되는 세상을 등지고 싶었습니다.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하고 아내는 자녀를 키워야 하며 자녀는 부모의 기대대로
공부해야 합니다.
일하지 않으면 관계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맥캔들리스가 깨달은 것은 결국 일해야 행복이 실현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가 일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그는 자기 자유를 위해 일하였습니다.
결국 자연이라는 공간에 갇혀버렸지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증명하는 가장 큰 증거는 바로 당신이 하시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성경 또한 당신이 하시게 될 일들을 증언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에덴동산의 가죽옷이 되기 위해,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집안을 구원할 어린 양이 되기 위해,
광야에서 불만에 찬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끝까지 갈 힘을 주기 위한 구리뱀이 되기 위해서 예수님은 수난 하셔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로 가심이 바로 성경에서도 증명하는 메시아의 일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성경은 외우다시피 하면서도 그 속에서 하느님의 일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두 어린 딸을 잃고 심한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막내아들은 아빠의 마음도 모르고 계속 배를 만들어달라고 합니다.
아빠는 겨우 몸을 추슬러 물에 뜨는 작은 배를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자기가 배를 만드는 세 시간 동안 우울증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사실을.
사제는 미사와 고해성사를 해야 하고 의사는 치료를, 선생님은 가르쳐야 합니다.
일하지 않으면 정체성을 잃습니다.
반대로 일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확고히 합니다.
내가 누구인가는 결국 내가 하는 일로 결정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고 한다면 그분의 일을 할 것입니다.
그 일이란 이웃의 행복을 위해 작은 배 하나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느님 자녀라는 정체성에서 오는 감정의 평화를 얻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14일 [사순 제4주간 목요일]
탈출기 32,7-14
요한 5,31-47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요한 5,31-47)
<저리 고운 옥색 하늘이 열리는 날>
가끔씩 바닷가의 날씨는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도 잔잔하던 바다, 그래서 호수 같은 바다였는데, 순식간에 세찬 바람과 함께 높은 파도가 몰려옵니다.
먹구름과 함께 인자한 노인 같던 바다는 한 순간에 화가 잔뜩 난 난폭한 젊은이로 바뀌고 맙니다.
그런 바다, 갯바위 위에 오래도록 서 있었습니다.
뺨에 와 닿은 바람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몸에 느껴지는 바람의 강도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먹장구름을 뚫고 푸른 하늘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신속히 구름이 걷히면서 하늘이 열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평소에 전혀 느껴지지 않던 새로운 감정이 밀물처럼 제게 다가왔습니다.
언젠가 하느님의 도움으로 내 인생도 먹장구름이 활짝 걷히고 저리 고운 옥색하늘이 열릴 날이 반드시 다가 올 거야, 하는 충만한 희망이 다가왔습니다.
잠시지만 너무나 은혜로운 체험이었습니다.
피정의 결실인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비록 이렇게 불투명하고 흐리지만, 언젠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하느님의 말씀이 보다 생생하게 전해져올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성경말씀의 은총이 폭포수처럼 제 영혼에 내려와 하느님 말씀 한자 한자가 감사와 선물로 다가올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날 그분의 말씀은 제게 정녕 피가 되고 살이 되고, 생명의 양식이 될 것입니다.
그때 그분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는 꿀처럼 달 것이고, 생명수처럼 시원할 것입니다.
그 말씀은 제 인생을 환히 밝히는 등불이 되겠지요.
그때 제 삶은 보란 듯이, 그리고 말끔히 정돈되고, 삶은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서 드는 심각한 반성입니다.
그간 너무도 주변에서만 맴돌았구나.
원뿌리를 외면하고 가지만 붙들고 있었구나, 하는 후회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 원전입니다.
성서 본문입니다.
원천에 대한 진지하고 성실한 봉독은 뒷전인 채, 주석서다, 해설서다, 지침서에만 너무 매달렸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성경말씀, 성경 원전이 제 삶의 중심이 되길 바랍니다.
그 말씀은 바로 예수님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왜 이리 삶이 허황된가, 왜 이다지도 인생이 허전한가, 생각해봤더니 말씀의 핵심으로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더군요.
매일의 말씀에 삶의 지침이 있음을, 그러기에 다른 곳이 아닌 바로 말씀에서 하루를 살아갈 에너지를 얻길 바랍니다.
그렇게 될 때, 그 어디에 있든, 그 어떤 곤경 앞에 서 있든, 그 아무리 무거운 십자가가 다가온다 해도, 흔들리지 않고 외로워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순 제4주간 목요일 강론>
(2024. 3. 14. 목)(요한 5,31-47)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요한 5,36).”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어린양(메시아)이신 분이라고 증언했습니다(요한 1,29-34).
안드레아 사도는 그 증언을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갔고, 예수님의 신앙인이 되었고 제자가 되었습니다(요한 1,35-42).
신자들 중에도 안드레아 사도와 같은 경우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도들과 신자들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과 상관없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직접 보고,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직접 들었기 때문에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과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라는 말씀은, “내가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다.” 라는 뜻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라는 말씀도,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직접 보내신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는 일을 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구세주(그리스도)이신 분입니다.
이 말씀과 ‘뜻이 같은 말씀’이 뒤의 10장에도 있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7-38).”
‘아버지의 일들’은 ‘사람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여기서는 “그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뜻으로는 “믿지 마라.”입니다.
<가짜 메시아들은 자기들이 진짜 메시아라고 선전하지만, 사람을 구원하는 일은 하지 않고 탐욕을 채우는 일만 합니다.
그자들은 믿지 않아도 좋은 것이 아니라 믿으면 안 됩니다.>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은, 뜻으로는 “내가 사람을 구원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입니다.
“나를 믿지 않더라도” 라는 말씀은, “지금까지는 나를 믿지 못했더라도” 라는 뜻입니다.
“그 일들은 믿어라.”는 “이제는 그 일들을 통해서
나를 믿게 될 것이다.”, 또는 “나를 믿어야 한다.”입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은 표현으로는 “아버지와 내가 완전한 하나라는 것”이고, 뜻으로는 “내가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생명을 받게 될 것이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깨달아 알다.’는 인생의 완전한 변화를 뜻하는 말이고, 구원과 생명에 온전히 동참하게 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사도들의 신앙고백과 증언으로 바꾸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직접 보았고, 직접 체험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메시아이신 분이라고 증언한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 가운데에서 제일 중요한 일은 ‘죽음, 부활, 승천’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복음으로(기쁜 소식으로)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은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인데(마태 4,17),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에서는 ‘부활’로 무게 중심이 옮겨진 것입니다.
<복음 자체가 바뀐 것이 아니라, 강조점이 바뀌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사도들의 신앙고백과 증언을 믿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있는데, 우리가 사도들의 신앙고백과 증언을 구원의 진리라고 믿는 것은, 그들의 ‘삶과 죽음’ 때문입니다.
사도들과 순교자들의 ‘삶과 죽음’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그러면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는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사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의 신앙인들도 자신의 신앙이 진리라는 것을 ‘온 삶으로’ 증명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사랑 실천이기도 하고, 자기 자신이 구원을 받는 일이기도 합니다.
원래 믿음이란,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대로 사는 것’, ‘온 삶으로 믿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일은 ‘믿는 대로 사는 것’에 포함되는 중요한 일입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요한 5,39).”
이 말씀은 성경을 믿으면 당신을 믿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먼저 당신을 믿으면, 성경이 당신을 증언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믿음이 먼저이고, 성경이 나중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 기록되어 있는 ‘필리포스와 에티오피아 내시’ 이야기가 좋은 예입니다.
“필리포스가 달려가 그 사람이 이사야 예언서를 읽는 것을 듣고서, ‘지금 읽으시는 것을 알아듣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서, 필리포스에게 올라와 자기 곁에 앉으라고 청하였다(사도 8,30-31).”
“필리포스는 입을 열어 이 성경 말씀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그에게 전하였다(사도 8,35).”
믿는 사람들, 또는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성경은 구원으로 인도해 주는 ‘하느님의 말씀’이 되지만, 안 믿으려고 작정한 사람들,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성경은 그저 이상한 옛날이야기 책이 될 뿐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