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632
6월26일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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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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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wC0rxJudjzw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오석봉 바오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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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뜨거운 하느님 사랑의 불꽃에 순식간에 소멸되어 버린 상처!>
젊은 사제 시절, 아이들 생활 시설에서 생활했습니다. 당시 소년원에서, 분류 심사원에서, 법원에서 수시로 저희에게 아이들을 보내주셔서, 기숙사는 아이들로 넘쳐났습니다.
단체생활이다 보니 별의별 전염 질환들이 우리를 괴롭혔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옴이었습니다. 한방에 옴 걸린 아이가 들어오면 순식간에 전염됩니다. 어쩌다 보니 저도 옴에 걸렸는데, 정말이지 죽는 줄 알았습니다.
얼마나 가려운지 밤새 피가 나도록 긁고 또 긁었습니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손가락 하나 하나에 붕대를 감고 잠자기도 했습니다.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기에 나중에는 옴 방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격리 수용을 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그렇게 밤새 안절부절 못 하면서 나병 환자들이 겪었을 고통에 잠시나마 동참했습니다. 예수님 시대 가장 가난했으며 가장 비참한 삶을 살아갔던 사람들이 바로 나병 환자들이었습니다. 번번한 치료제도 없던 당시 매일 썩어 문드러져 가는 자신의 환부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보는 것은 참으로 큰 괴로움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큰 고통이 있었으니 그것은 세상 사람들의 시선이었습니다. 당시 나병을 하느님의 벌로 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나병에 걸리면 더 이상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성 밖으로 나가 동굴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사람들과 세상으로부터 격리가 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병 환자는 보아하니 꽤 중증 환자였습니다. 그는 이미 오랜 세월 나병에 시달려왔습니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갔습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었으면 하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치유자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나병 환자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 인생의 마지막 기회로구나. 목숨을 한번 걸어보자.’ 하면서 율법규정까지 어겨가면서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
치유되고 싶은 심정이 얼마나 간절했으면 얼굴을 땅에 대고 완전 납작하게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정말이지 온몸과 마음을 다 담아서 절박하게 청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참으로 감동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온몸이 종기로 뒤덮인 한 가련한 인간과 측은지심으로 가득 찬 하느님이 만나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 나병 환자가 지니고 있었던 수많은 죄와 상처, 종기, 고름은 뜨거운 하느님 사랑의 불꽃에 모두 소멸되어 버렸습니다. 그 대신 태초의 보송보송한 애기 피부로 아름답게 재생되었습니다.
결국 죄인인 우리, 결핍과 상처투성이뿐인 우리 인간이 살길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의 지속적인 접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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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9REk789CW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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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응답을 받은 이들에겐 비밀이 하나 있다>
찬미 예수님! 오늘도 한 날을 잘 지내셨는지요.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복음 묵상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기도의 가장 완벽한 모범을 만납니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며 간청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태 8,2 참조)
짧은 기도지만, 그 안에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 내는 모든 비밀이 들어 있습니다. 오늘 저는 그 비밀을 한 문장으로 먼저 말씀드리고 시작하겠습니다. 하느님은 기쁘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무언가를 얻고자 한다면, 그분을 기쁘게 해 드려야 합니다.
먼저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들여다봅시다.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주는 사람입니까. 생각해 보면, 우리도 누군가 무섭게 협박한다고 해서, 혹은 하도 졸라 댄다고 해서 무언가를 내어 주지는 않습니다. 도리어 그렇게 강요당하면 주고 싶던 마음마저 싹 달아납니다. 우리가 기꺼이 무언가를 내어 주는 때는, 그렇게 주는 것이 나를 기쁘게 할 때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에게 베풀 때 우리가 행복한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주는 것 자체가 내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기도의 첫 번째 원칙이 나옵니다. 무언가를 청하려거든, 그것을 주려는 사람의 기분부터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누구든 자기 행복을 위해 주는 법이니, 주는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것이 얻어내는 사람의 지혜입니다.
그분의 기분은 헤아리지도 않고 무작정 청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 어리석음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부르는지, 윌리엄 제이콥스의 단편 「원숭이 손」이 섬뜩하게 보여 줍니다. 한 부부가 세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는 원숭이 앞발 부적을 얻습니다. 그들은 그 앞발에게 마음이 있는지, 그 소원을 들어주는 힘이 무엇을 원하는지 따위는 묻지 않습니다. 그저 죽은 물건을 문지르듯, 당장 빚 갚을 이백 파운드를 달라고 빌 뿐입니다. 소원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돈은 하나뿐인 아들이 공장 기계에 끼어 참혹하게 죽은 대가로 나온 사망 보상금이었습니다.
더 무서운 것은 그다음입니다. 비탄에 빠진 어머니가 두 번째 소원으로 "아들을 다시 살려 달라" 빌자, 묻혔던 아들이 짓이겨진 몸 그대로 문을 두드리며 돌아옵니다. 공포에 질린 아버지는 마지막 소원으로 황급히 그를 도로 무덤으로 돌려보내야 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경고가 있습니다. 이 부부의 비극은 소원을 빌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는 쪽의 마음과 기분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살아 있는 힘을 죽은 부적처럼 대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들어주는 분이 누구이신가, 그분은 무엇을 기뻐하시는가"를 묻지 않고, 제 욕망만 기계에 입력하듯 밀어 넣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가 꼭 이렇지 않습니까.
살아 계신 하느님, 마음과 기쁨을 지니신 그 아버지를, 동전을 넣으면 물건이 나오는 자판기처럼, 문지르면 소원이 나오는 원숭이 앞발처럼 대하지는 않습니까. 주는 분의 기분은 헤아리지 않고 내 욕망만 들이미는 청은, 그 자체가 이미 저주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는 분의 기분을 좋게 한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사람이 가장 기분 좋을 때가 언제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바로 영광스러워질 때입니다. 자기가 높여지고, 그 가치가 알아봐질 때 사람은 가장 흐뭇해집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무엇이든 기꺼이 내어 주고 싶어지는 순간도, 자식이 그 부모를 진심으로 알아보고 자랑스러워할 때입니다. 하느님도 그러하십니다. 당신께서 영광스럽게 높여질 때,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참되게 고백받을 때 가장 기뻐하십니다. 그러니 얻어내는 길은 분명합니다. 청하기 전에 먼저 그분을 영광스럽게 해 드려 기분 좋으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의 나병 환자가 바로 그 일을 해냈습니다.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기쁘시게 했는지 보십시오. 그는 "저를 깨끗하게 해 주십시오" 하고 제 욕망부터 들이밀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하고 먼저 고백했습니다. 이 한마디는 단순한 겸손의 표현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사람들 앞에서 드러낸 위대한 신앙고백이며, 그분을 영광스럽게 높여 드린 찬미였습니다. "당신께서 마음만 먹으시면, 당신께서 하고자 하시기만 하면 무엇이든 이루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는 제 병의 절박함보다 그분의 능력과 자유를 앞세웠습니다.
자기가 받을 것에 골몰하기 전에,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먼저 영광스럽게 고백한 것입니다. 어느 분이 이런 고백 앞에서 기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지체없이 손을 내미시며 응답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태 8,3 참조) 환자가 "당신께서 하고자 하시면" 하고 그분의 뜻을 높이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니" 하고 그 뜻을 기꺼이 펼치신 것입니다.
이 비밀을 뼛속까지 깨달은 인물이 에이브러햄 링컨입니다. 남북전쟁 때 북군이 극도로 몰리던 어느 날, 한 참모가 초조하게 말했습니다. "각하, 하느님께서 우리 북군 편에 서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그러자 링컨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습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 되시기를 기도하지 않소. 하느님은 언제나 옳은 편에 계시기 때문이오. 내가 날마다 무릎 꿇고 드리는 기도는 오직 하나, 우리가 하느님의 편에 서게 해 달라는 것이오." 우리는 늘 하느님을 내 편으로 끌어와 내 뜻에 굴복시키려 합니다. 그러나 참된 기도는 내가 하느님 편으로 건너가, 그분을 영광스럽게 높여 드리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비밀을 찾으려 멀리 갈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밀을 통째로 응축하여 손수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주님의 기도」입니다. 그 순서를 가만히 들여다보십시오. 주님의 기도는 결코 내 소원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먼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하고, 처음 세 청원을 온전히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높여 드리는 데 바칩니다. 곧 아버지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먼저 찬미하여 그분을 기분 좋으시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내 양식과 용서와 보호를 청하는 것은 그다음입니다.
곧 주님의 기도는, 나병 환자가 그러했듯 "당신께서 하고자 하시면"을 먼저 길게 바쳐 그분을 영광스럽게 높여 드리고, 그 뒤에 내 청을 살며시 얹는 구조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기도 습관을 따끔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묵주기도를 바치며 입으로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하면서, 머릿속은 온통 "제발 그 시험에 합격하게, 그 병이 낫게 해 주십시오"로 가득 차 있지는 않습니까.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높이는 그 앞부분은 빨리 해치울 인사치레로 흘려보내고, 마음의 무게는 전부 내 소원에 실어 두지는 않습니까. 성체조배를 하러 들어가서도, 그분을 찬미하고 그 마음에 귀 기울이기보다 내 청원 목록만 일방적으로 읽어 내려가다 나오지는 않습니까. 그렇게 바치는 기도는, 형식은 주님의 기도이되 속내는 원숭이 앞발을 문지르는 것과 똑같습니다. 영광 받으셔야 할 살아 계신 아버지를, 기분도 헤아리지 않고 죽은 부적처럼 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그 앞부분을 결코 대충 흘리지 말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한마디 한마디에 온 마음을 실으십시오. 그것이 곧 나병 환자의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이며, 그분을 기분 좋으시게 해 드리는 길입니다. 그렇게 그분을 영광스럽게 높여 기쁘시게 해 드릴 때, 예수님께서는 지체 없이 손을 내미시어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고 응답하시고, 상상하지 못한 하늘의 축복까지 기쁘게 얹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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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살면서 우리는 ‘당황(唐慌)’할 때가 있고, 때로는 ‘황당(荒唐)’할 때가 있습니다. 당황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 갑자기 생겨서 마음이 급해지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입니다. 황당은 그보다 더 깊습니다. 너무 어이가 없고, 현실 같지 않아서 말문이 막히는 상황입니다. 당황은 잠시 정신이 없는 상태라면, 황당은 삶의 기반 자체가 흔들리는 경험일 수 있습니다. 달라스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길이 그랬습니다. 원래는 아침 7시 30분 비행기였습니다. 그런데 비행기가 취소되었습니다. 다시 예약한 비행기도 취소되었습니다. 공항에서 기다리면서 참 당황스러웠습니다. 일정은 꼬이고, 마음은 조급해졌습니다. “오늘 갈 수는 있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다행히 오후 5시 30분 비행기를 탈 수 있었고, 처음에는 경유 편이었는데 오히려 직항편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지나고 보니 감사한 일이었지만, 그 순간에는 참 당황스러웠습니다.
미국 성당은 사제가 부족하고 고령화되면서 몇 개의 본당이 합쳐지는 일이 있습니다. 제가 있던 브루클린 교구에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한국 공동체가 이웃 본당과 합쳐지면서 본당 신부님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북미주한인사제 모임에서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신부님은 한국에서 미국으로 파견되어 온 첫날 교구청에 갔다고 합니다. 주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신부님 본당은 교구 방침에 따라 우선 매각 대상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새로운 사목을 꿈꾸며 왔는데 첫날부터 본당이 없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입니다. 다행히 교구에서 한국 공동체를 위한 새로운 성당을 알아보고 있었고, 더 안전한 지역의 성당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는 좋은 방향이었지만,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우리 삶에도 이런 일이 있습니다. 갑자기 회사가 문을 닫습니다. 건강검진 결과를 들었는데 예상하지 못한 병이 발견됩니다. 믿었던 사람에게 상처를 받습니다. 평생 모은 돈이 경제 위기로 흔들립니다. 자녀의 문제, 부부의 갈등, 인간관계의 아픔도 있습니다. 당황스러운 일도 있고, 황당한 일도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로니아의 침략으로 모든 것을 잃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습니다. 나라가 무너졌습니다. 백성은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단순히 당황한 정도가 아닙니다. 황당함을 넘어서 절망의 상황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버리신 것인가?”라는 생각까지 들었을 것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나병환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나병환자는 병만 앓은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에서 쫓겨났고, 사람들에게 외면당했고, 미래를 잃어버린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는 이미 인생의 하늘이 무너진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의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참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그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문을 닫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의탁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미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 순간 그의 삶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신앙인은 당황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황당한 일을 겪지 않는 사람도 아닙니다. 신앙인은 당황과 황당 속에서도 하느님께 의탁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은 흔들릴 수 있습니다. 계획은 무너질 수 있습니다. 사람은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옛말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라고 했습니다. 신앙인은 그 솟아날 구멍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 구멍은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때로는 비행기가 두 번 취소되어도 결국 직항편이 열리기도 합니다. 때로는 본당이 없어질 위기 속에서도 더 좋은 길이 준비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눈물 속에서 새로운 희망이 시작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절망 속에서도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나병환자처럼 “주님, 당신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삶에는 당황의 순간도 있고 황당의 순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오늘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의탁하여 새 삶을 얻은 것처럼, 우리도 주님께 의탁하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막힌 길에서도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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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은 산상 설교 뒤에 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군중이 따르지만, 예수님의 눈길은 한 나병 환자에게 향합니다. 고대의 ‘나병’은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질병의 수준에서 이해되지 않습니다. 레위기 13―14장이 서술하듯 나병 환자는 격리되고 소외되는 것을 참아야 하였고, 공동체 밖으로 밀려나 존재 전체가 부정당하고 고립되어야 하였습니다.
나병 환자는 예수님께 다가와 절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태 8,2) 이 고백은 그저 치유를 바라는 요청이 아닐 것입니다. 다시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다시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불리고 싶다는 간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십니다. 그 접촉은 예수님을 부정하게 만들 수 있었지요.(레위 5,3 참조) 사회가 부정하다 여긴 그곳에 예수님께서는 과감히 함께하셨고, 부정이 전염되기는커녕 오히려 그분에게서 깨끗함이 흘러나옵니다. 예수님의 손길은 위험이 아니라 회복의 통로가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율법이 정한 절차에 따르도록 보내십니다. 이는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는 산상 설교의 선언을(마태 5,17 참조) 증명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다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8,4)라는 당부는 묘한 긴장을 남깁니다. 많은 군중 사이에서 예수님의 치유는 소문으로만 머물기보다는 서로를 향한 인정과 용서와 화해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저 우리는 서로에게 마음을 열면 됩니다. 마음을 열기보다 말만 앞세운다면 서로가 야속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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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8,1-4: 한센병 환자의 치유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께 찾아와 간청하는 한 한센병 환자가 등장한다.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2절) 이 짧은 기도 속에는 놀라운 믿음과 겸손이 담겨 있다. 그는 자기 뜻을 주장하지 않는다. 오직 예수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며, 치유의 주권이 그분께 있음을 고백한다. 이는 우리가 주님 앞에서 가져야 할 참된 기도의 자세를 보여 준다. 기도는 하느님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뜻에 나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 “하느님은 당신의 선물을 강제로 주시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겸손히 청할 때,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뜻을 드러내신다.”(Sermo 169 요약) 이 한센병 환자의 청원은 바로 이러한 겸손한 믿음의 모범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3절)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당시 사회에서 부정한 자로 낙인찍혀 격리된 한센병 환자에게 예수님이 손을 내미셨다는 것이다. 당시 율법은 그와의 접촉을 금지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두려움 없이 다가가셨다. 이는 하느님께서 죄로 인해 멀어진 인간에게 친히 다가오신 사건, 곧 육화의 신비를 드러낸다. 성 이레네오는 이렇게 말한다. “살아 있는 인간이 하느님의 영광이며,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을 뵙는 것이다.”(Adversus Haereses IV,20,7) 예수님의 치유 행위는 바로 하느님이 인간과의 거리를 허무시고, 우리가 참된 생명에 이르도록 하시는 사랑의 계시이다.
예수님은 치유된 그에게 말씀하신다.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여라.”(4절) 치유는 단순히 개인적 회복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공동체 안으로 다시 받아들여지는 은총의 회복이다. 교회 역시 성사 안에서 죄인을 치유하고 공동체 안으로 다시 받아들인다. 고해성사가 바로 그러한 회복의 자리다. 교리서도 이렇게 가르친다. “예수님은 죄를 용서하시면서 죄인들을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 안에 다시 받아들이셨다. 교회는 고해성사를 통해 이 사명을 계속한다.”(1443-1444항 참조)
오늘 복음의 한센병 환
자는 단순히 육체적 병자의 모습만이 아니다. 그는바로 죄로 인해 하느님과 이웃에게서 멀어진 우리의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처럼 겸손히 고백할 때, 주님은 언제나 손을 내밀어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신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말한다. “죄가 크다고 절망하지 말라. 회개하는 순간, 죄보다 더 큰 하느님의 자비가 네 앞에 있다.”(Hom. in Matth. 25,2 요약)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움 속에 숨어 있는 대신, 오늘 한센병 환자의 기도로 주님께 나아가야 한다. “주님,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2절) 그때 우리도 죄의 상처에서 벗어나고, 하느님의 자녀다운 기쁨을 되찾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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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고자 하는 것>
마태오 8,1-4 (나병 환자를 고치시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그때에 어떤 나병 환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그의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하고자 하는 것>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태 8,2)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태 8,3)
당신
하고자 하시는 것이
믿음이듯이
나
하고자 하는 것이
믿음이게 하소서
당신
하고자 하시는 것이
희망이듯이
나
하고자 하는 것이
희망이게 하소서
당신
하고자 하시는 것이
사랑이듯이
나
하고자 하는 것이
사랑이게 하소서
당신
하고자 하는 것이
기쁨이듯이
나
하고자 하는 것이
기쁨이게 하소서
당신
하고자 하는 것이
착함이듯이
나
하고자 하는 것이
착함이게 하소서
당신
하고자 하는 것이
고움이듯이
나
하고자 하는 것이
고움이게 하소서
당신
하고자 하는 것이
의로움이듯이
나
하고자 하는 것이
의로움이게 하소서
당신
하고자 하는 것이
품음이듯이
나
하고자 하는 것이
품음이게 하소서
당신
하고자 하는 것이
스밈이듯이
나
하고자 하는 것이
스밈이게 하소서
당신
하고자 하는 것이
살림이듯이
나
하고자 하는 것이
살림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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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어떤 나병환자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시어 깨끗이 낫게 해 주셨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든 병의 원인이 무조건 환자 자신의 죄나 부모의 죄로 말미암은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병자나 불구자는 그 자체로 죄인으로 간주 되었습니다.
이들은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괴로움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나병환자는 격리되어 지내야 했습니다. 가족은 물론 사회에서도 소외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불치의 병이고 전염성이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소록도, 안양 나자로 마을, 경북 칠곡 등에 따로 모여 살아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철저히 소외시키고 외면했습니다. 병보다 사회로부터의 고립됨이 더 큰 아픔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의 몸에 대시면서 고쳐주셨습니다. 보통 사람이면 감염의 위험 때문에 결코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결핵이 한참, 창궐할 때 ‘폐병’이라고 해서 그의 곁에서 음식을 먹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넘어서서 환자들에게 치유의 손길을 내밀어 고쳐주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육체적인 고통을 거두어 준 것이 아니라 죄인이라는 종교적 단죄에서 그리고 사회적 소외에서 벗어나게 해 준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덕분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 방법은 고통 중에 있는 그 사람의 한 부분만이 아니라 몸과 마음 모두를 치유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치유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할 일도 생각합니다. 능력의 주님께서 기적을 보여주셨는데 그 바탕에는 나병환자의 믿음이 한몫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말에 예수님께서“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라고 응답하시며 고쳐주셨으니 나병환자는 자신의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도와드린 것입니다. 믿고 구할 때 주님께서는 그 간절한 청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외적인 나병을 치유 받아야 하지만 우리 영혼의 치유가 선행 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꼬이면 그것이 겉으로 드러납니다. 드러난 병보다 마음의 병이 더 무서운 것이고 그래서 그 병을 깨끗이 치유 받아야 합니다. 알게 모르게 쌓여만 가는 교만함과 나태함, 이기적인 습성들을 인정함으로써 새로 태어나야 하겠습니다.
‘하고자 하시면 낫게 해 주실 수 있는 분’을 모시고 산다는 것이 우리의 큰 기쁨이기를 바랍니다. ‘보통 의원은 병의 증세를 보고 그것을 다스리지만, 명의는 병의 뿌리를 다스린다.’고 합니다. 뿌리를 다스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있으니 주님의 자비로 죄의 용서를 받고 마음의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은 용서하시는 데 주저하지 않으십니다. ‘죄의식으로 말미암은 병은 죄의식을 없애서 고쳐야 하고, 잘못된 생활습성 때문에 생긴 병은 그것을 바로잡아서 고칠 일’(이현주)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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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낙관주의자가 잘살까요? 비관주의자가 잘살까요? 아마 낙관주의자가 잘 살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들이 훨씬 더 편안한 삶을 삽니다. 그러나 어떤 낙관주의자냐에 따라 다르다고 합니다.
첫 번째 유형은 전망이 불확실해도 세상이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들은 변화를 시도하기에 희망을 품게 되고 실제로 진보하게 됩니다. 그런데 두 번째 유형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세상의 불행이 있지만 자기에게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닥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확률의 법칙에서 자기들에게는 예외라고 믿는 것입니다. 기후, 환경 문제가 심각하다고 하지만, 자기에게는 그 피해가 도망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변화와 진보는 있을 수 없습니다.
첫 번째 유형인 변화를 지향하는 낙관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세상의 변화와 자기 변화를 위해 힘쓰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무엇이든 다 해 주리리라는 낙관주의자가 아니라, 주님의 일을 함께하려는 그래서 세상에 하느님 나라가 완성하는 데 일조할 수 있는 낙관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은 두 번째 유형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이고, 그래서 무조건 구원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 하느님의 벌을 받는 사람은 예외였습니다. 이들을 무조건 거부하고 멀리해야 부정해지지 않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나병 환자가 나타났습니다.
나병은 하느님의 징벌이자 율법적 부정함으로 여겼기에 마을 밖에서 격리되어 살아야 했고, 사람들이 오면 “부정한 사람”이라고 외쳐서 사람의 접근을 막아야 했습니다. 그런 그가 수많은 군중을 뚫고 예수님께 다가선 것입니다.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고, 예수님께 온 희망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태 8,2)
예수님께 자기의 모든 것을 맡기는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이에 직접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십니다. 깨끗한 사람이 부정한 것에 닿으면 똑같이 부정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대셨을 때, 부정이 예수님을 전염시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거룩함과 생명이 나병 환자의 부정함을 씻어버렸습니다.
굳이 손을 대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랫동안 가족에게도 버림받고 누구의 따뜻한 손길도 느껴보지 못했을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신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주님께 희망을 두고 나아가는 사람을 절대로 주님께서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도 이 나병 환자처럼 변화를 지향하는 낙관주의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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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그때에 어떤 나병 환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그의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마태 8,1-4)
1) 예수님께서 당시 사람들이 불치병으로 생각했던 병들과 사람의 힘으로는 고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장애들을 고쳐 주신 일들, 그리고 마귀를 쫓아내시고, 죽은 이를 살리신 일들은 모두, 당신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라는 것을 드러내신 ‘표징들’입니다. 이 말은 11장에 있는 ‘세례자 요한의 질문’에 연결됩니다.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 11,2-6)
세례자 요한의 질문은, 그 자신이 예수님을 믿지 못해서 한 질문이 아니라,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으로 해석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안 믿었기 때문에, 그들을 예수님께 보내면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직접 보고, 예수님 말씀을 직접 들으라고 시켰다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면, 예수님을 ‘사람들을 심판하려고 오신 메시아’로 믿고 있었는데(마태 3,12), 예수님께서 심판하는 일은 하지 않으시고 구원하는 일만(자비를 베푸는 일만) 하시니까 심판하는 일은 언제 하시느냐고 물은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는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요한 3,17)
그 ‘구원’은 죽은 다음에 얻게 되는 구원만은 아니고, 지상에서 사는 동안 겪는 온갖 고통과 억압에서 해방되는 구원도 포함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 덕분에 치유되고 해방되면서 구원을 받게 되는데, 물론 그것은 영원한 구원의 ‘시작’일 뿐이고, 구원의 ‘완성’은 하느님 나라에서 이루어집니다.
또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신 일은, 그 자체로 복음 선포가 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자비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게 되고, 그 나라를 향해 걸어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게 됩니다.
2) 2절의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말은, 좋은 쪽으로 해석해서, 예수님 뜻에 순종하겠다는, 또는 예수님 뜻에 전적으로 자기를 맡기겠다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예수님의 뜻이(의향이) 어떤지를 모르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고, 예수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이 아직 없거나 부족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 병자는 “예수님은 무슨 병이든 다 고치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병을 고쳐 달라는 간청을 들어 주실지, 어떨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습니다. 3절의 “내가 하고자 하니”를 원문대로 직역하면 “나는 원한다.”입니다. 병자를 고쳐 주는 일은, 병자가 청하기도 전에 먼저 예수님께서 원하신 일입니다.
사실 세상에 오신 것 자체가 예수님께서 원해서 하신 일이고, 예수님의 자비입니다. 복음서에는 사람들이 청하지 않았는데도 예수님께서 먼저 사람들을 가엾게 여기셔서, 기적을 일으키신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나인 고을의 어떤 과부의 외아들’의 경우에, 죽은 그 사람을 살려 달라고 예수님께 청한 사람이 없었는데도, 예수님께서 먼저 그 과부를 가엾게 여기셨고, 그 젊은이를 살리셨습니다.(루카 7,13-15) ‘벳자타 못 가의 병자’의 이야기도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 병자는 예수님을 몰랐고, 몰랐으니까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먼저 그를 가엾게 여기셨고, 고쳐 주셨습니다.(요한 5,6-9)
3)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의 권능과 자비를 모두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능을 믿으니까 무엇이든 청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불가능한 일로 보이는 일이라도 청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의 자비를 믿으니까 다른 것을 걱정하지 않고 예수님께 청할 수 있습니다.
쉽게 표현하면, 거절당할까봐 걱정할 필요도 없고, 치료비를 걱정할 필요도 없이 청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원래 ‘자비’는, 아무런 조건 없이 그냥 베풀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분이고, 당신의 자비를 그렇게 우리에게 그냥 주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고, 모든 것을 청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10,8) 신앙생활은 주님의 자비 안에서 살아가는 생활이고, 동시에 그 자비를 그대로 사람들에게 아무 조건 없이 베풀어주는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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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김대선 안드레아 신부님]
<내가 가진 것>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치유해주십니다. 당시 나병은 매우 무서운 병이었고, 치유되기 어려운 병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큰 죄를 지은 사람들이 걸리는 병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병 환자들은 가족과 마을로부터 쫓겨나 따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예수님의 치유는 병을 고쳐주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즉, 죄의 용서와 공동체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치유의 기적을 만들어낸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나병 환자입니다. 그의 겸손한 태도가 예수님으로 하여금 병을 치유하게끔 만들어준 것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 말씀 안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기적의 주체가 예수님이심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병이 치유되는 것이 자신이 용서 받을 만한 행동을 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이해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이 모두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이해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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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오늘 복음은 나병환자의 치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의 치유를 통해 예언자 ‘엘리사의 활동’을 완성함으로써(2열왕 5,1-27), 당신이 ‘메시아’임을 드러내십니다. 나병환자는 <레위기>(13,45-46)에 따르면,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풀고, 윗수염을 가림으로써 자기가 죽은 사람과 다를 바 없음을 드러내야 했고, 공공장소나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나타날 수도 없었으며,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도 없었습니다.(민수 5,2-4)
그래서 혹시 누군가가 자기에게 접근해 오면,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레위 13,45)라고 외치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고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오늘 복음에서는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피해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가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합니다. 여기에서 ‘구약의 법’과 예수님의 ‘복음의 차이’를 극렬하게 엿볼 수 있습니다. 곧 구약의 율법은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할 뿐 그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지만, 복음에서는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 와서 치유를 받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예수님께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병들었고 죄인이기에 때문에 오히려 감싸주시고 치료해주십니다. 복음은 이처럼 규정을 제시하기보다 사랑과 호의를 제시합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청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태 8,2)
율법에 의하면, 나병환자를 만지거나 접촉하면 부정을 타게 됩니다.(레위 14,46)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만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손은 구원의 힘을 드러내며, 그분의 신체적 접촉은 우정과 사랑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를 접촉하시지만, 부정을 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사랑’은 부정을 피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져 깨끗하게 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율법을 완성하시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규정보다도 율법의 정신인 사랑을 더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그리하여 당신께서는 불결함에 더럽혀지지 않는 '거룩하신 분'임을 드러내십니다. 마치 호렙산의 불꽃 속에서도 타지 않는 떨기나무처럼(탈출 3,2), 아기를 낳으면서도 동정성을 잃지 않은 성모님처럼, 불결한 이를 만지면서도 불결해지지 않으시고 오히려 불결한 이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곧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시고, 당신이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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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태 8,3)
주님!
불순함으로 제 온 몸이 부스럼투성입니다.
죄와 상처로 속이 문드러지고, 마음이 병들었습니다.
불결하기에, 저는 망설이지만 당신은 오히려 불결하기에 다가오라 하십니다.
죄인이기에, 저는 숨지만 당신은 오히려 죄인이기에 용서받을 대상이라 하십니다.
당신께서 원하신 바를 이루소서.
제가 하고자 한 바가 아니라, 당신이 하고자 한 바를 이루소서!
저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을 이루소서.
오, 주님!
당신이 원하신 것을 제가 원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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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태 8,2ㄴ)
<나병 환자의 믿음!>
오늘 복음(마태8,1-4)은 '나병 환자를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어떤 나병 환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태8,2ㄴ)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태8,3) 그러자 곧 그의 나병이 깨끗이 낫습니다.
'믿음'은 '신뢰이자 약속'입니다. 세례 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하느님을 신뢰하면서 하느님과의 약속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면서 나를 지켜주시는 분이라는 굳은 신뢰 아래에서,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뜻을 지금 여기에서 실행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하느님과의 약속'입니다.
오늘 독서(2열왕 25,1-12)는 이스라엘이 완전 멸망해서 치드키야 임금과 백성이 바빌론으로 끌려가는 말씀입니다. 이는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고 하느님과의 약속을 저버린 결과입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너희의 마음이 돌아서서 말을 듣지 않고, 유혹에 끌려 다른 신들에게 경배하고 그들을 섬기면, 내가 오늘 너희에게 분명히 일러 두는데, 너희는 반드시 멸망할 것이다."(신명 30,15.17,18ㄱ)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신명 30,19ㄴ-20ㄱㄴ)
오늘 치유를 받은 나병 환자, 온 몸과 마음이 문드러진 나병 환자는 생명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면서, 예수님께 매달리는 믿음을 드러냈습니다. 그 '신뢰와 믿음'이 그를 구원했습니다.
우리는 같은 신뢰와 믿음을 드러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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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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