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창조론과 진화론
무(無)로부터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현상은 그것의 창조주가 세우신 법칙들을 정확히 잘 따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 과학을 ‘기독교의 유산’ 이라고 불렀고 ‘기독교의 후손’ 이라고 까지 말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습으로나, 인격적으로 모든 성품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다. 우리는 과학으로 물질 문명을 완성시킨 기계및 산업의 창조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적인 정신을 닮았기에 오늘날 고도의 발전된 과학 문명의 시대에 접하게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연약한 인간들이 만들어낸 창조의 산물들을 바라 볼때면 어떻게 이런 것들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라는 의아함에 빠진다.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낸 창조의 소산물들은 믿으면서도 전지전능의 하나님께서 만들어내신 천지및 그안에 있는 모든 만물들의 소산물들은 믿으려 하지 않는다.
창세기 1장의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에 나타내고자 했던 의도는 그것들을 만들어 내는 과정의 중요성 보다 만들어 놓은 것들을 바라보는 눈으로서의 증거를 의미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늘을 바라보라. 빛과 어두움의 명암이 있지 않은가.
하늘을 바라보라 구름이 있지 않은가. 땅을 바라보라. 바다와 육지와 그안의 높은산, 이에대한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가. 땅의 채소와 열매 맺는 과일을 바라보라. 하늘의 저 빛나는 태양과, 달과, 별들을 바라보라. 저 하늘의 날아 다니는 새들과, 물에서 번성하는 큰 물고기들과, 육지에서 자라나는 각각의 육축과, 각각의 짐승들이 충만히 자라나는 그것들의 생태계를 지켜 보아라.
보라 사람아 나는 너를 사랑하기에 내 모습 그대로 그리고 내손으로 직접 흙을 빛어서, 네 코에 생기를 집어넣어 너를 만들어 냈단다. 자 너에게 만물을 다스리고, 소유 할 수 있는 권세를 주노라. 이 아름다운 세상을 다 네게 주노니 전부 네것 이니라. 이렇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태양이 없거나, 태양과 지구 사이의 거리가 지금보다 가까와졌다면 지구는 어떻게 되었을까? 지구에 중력이 없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질서와 조화속에서 이루어 지는 수 많은 자연의 법칙들이정말 우연히 이루어 졌단 말인가.
그렇다면 화석에서 발견되는 공룡이나 여러가지 생물체에 발견되는 역사적 실체는 무엇일까 ? 이런것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중 노아의 홍수 이전에는 지구상에 현존해 있었으나 노아의 홍수때 방주에 들어가지 못해서 멸졸하지 않았나 하고 추측해 본다.
분명 노아의 홍수 사건은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어 증명 되었으며, 노아의 방주 또한 발견 되었다고 한다. 지구의 역사가 50억년 이라고 진화론자들은 말하는데 과연 지구의 역사는 얼마나 되었을까?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무엇으로 입증한단 말인가?
이것을 증명할 문헌등 근거가 될만한 자료도 없는 가운데서 단순히 지질 연대 측정법(방사성 탄소의 방출량에 의해 결정하는 방법) 에서 나온 연대치를 가지고 이것을 사실로 인정하고 있으니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닐수 없다.
사실 지질연대 측정법은 상황에 따라 연대의 오차가 상당히 크다는 것이 실험을 통해 입증되었다. 다윈의 진화론에 의거한 아베바에서 인간으로 까지의 진화를 설명하는 생물학적 이론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 것일까?
진화론에 따른다면 지금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체들이 먼 미래후면 지금과 다른 모습으로 변화된다는 뜻인데 그럼 지금의 지렁이가 몇십억년 후에는 사람의 모습과 닮은 모양이 될 수 있을까?
쥐의 앞발이 진화하여 박쥐가 되었다고 진화론자들은 주장하는데 인간 또한 한가지 모습으로만 진화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모습으로 진화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날개달린 다람지 날개 달린 원숭이 날개 달린 수많은 포유류 동물들이 있는데, 그럼 왜 날개달린 인간은 없는 것일까? 왜 타조 처럼 빨리 달릴 수 있는 인간은 없는가? 유인원과 인간의 중간형의 모습을 가진 인간은 없는가?
언어,지혜(지성),인격(양심),문화,예술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권이다. 왜 인간만이 이러한 특권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언어,지헤,인격,문화,예술적 측면으로 인간보다 못하거나, 같거나, 뛰어나게 진화된 동물들은 없는 것인가? 이 다섯가지중 하나 만이라도 가지고 있는 동물이 존재 한다면, 진화의 원리에 합당한 이론이 되었으리만은, 그러나 하나님 께서는 우리 인간만을 선택하셨고 위의 다섯가지 선물을 우리 인간 에게만 주신 것이다.
성경의 역사는 보통 6,000년 으로 본다. 아담 부터 노아의 홍수 때까지의 연대를 계산해 보면(창세기 5장, 7장6절) 아담이 130세에 셋을 낳고, 셋은 105세에 에노스를 낳고, 에노스는 90세에 게난을 낳고, 게난은 70세에 마할랄렐을 낳고, 마할랄렐은 65세에 야렛을 낳고, 야렛은 162세에 에녹을 낳고,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고, 므두셀라는 187세에 라멕을 낳고, 라멕은 182세에 노아를 낳고 노아가 600세 되던 해에 대홍수가 일어나 방주에 함께한 노아의 세 아들 함, 셈, 야벳 으로 부터 인류의 역사는 다시 시작 된다.
이때까지의 연대를 합해 보면 1656(BC2344)년 이란 연대치가 나온다. 이때 노아의 세 아들 로부터 시작된 자손들은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으로 각각 흩어진다.
즉 노아의 세아들 함, 셈, 야벳은 황.백.흑인종의 기원이 되는 것이다.(창세기 10장) 세계전도(세계지도)를 펼처보면(성경 구약시대 지도 참조) 인류의 기원이 다시 시작된 그 곳( 세계전도상 으로보면 중동의 사우디 아라비아 지역 부근) 밑에는 아프리카가 위치하고 있으며 위에는 구라파(유럽)이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각 대륙이 연결되는 교량적 위치가 되는 지역이다. 인류의 조류를 시작한 그들은 더욱더 좋은 옥토를 향하여 세계 열방으로 흩어진다.(창세기 11장10절)
노아의 홍수 이후 2344년간 주님이 오시기 전 까지의 인구가 1억 2천만명 이었는데 가정적인 측면으로 계산하여 이것을 증명 해보자. 단 인구 증가율은 1 세기당 2배로 가정한다.( 물론 노아의 홍수 이후 셈 부터 아브라함 까지는 오백세에서 일백칠십오세 까지 향수 했지만 이런 것은 무시하고 가정 한다)
함.셈.야벳의 아들들은 모두 16명이었다.(창세기 10장2절,6절,22절)이에 여자 까지 합하여 모두 30명으로 가정한다. 2344년을 100년(1세기)으로 나누면 23.44 가나오는데 이것을 22로 가정한다. 30(함,셈,야벳의 자녀수)곱하기 2(인구 증가율)를 기하 급수적인 방법으로 22번(세기)곱하면 125,829,120 이란 수치가 나온다.
주님 오시기 전 인구 120,000,000명과 비교하여 근사치 라는 결론이 나옴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물론 사실이 아닌 가정적인 방법으로 접근한 방식 이었지만 논리적으로 합당 하다는것을 증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진화론에 따른 인류의 생성 연대수를(현대 고고학 연구에 의하여 발견된 인류의 가장 오래된 화석은 300만년전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라고한다.) 100만년 전으로 보는데 진화론에 의한다면 현대의 인구수는 10에 2100승을 계산한 인구수가 나와야 한다. 그러나 현제 54억 밖에 되지 않고 있으니 진화론이 허구임을 알수 있다.
욥기 26장 7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그는 북편 하늘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공간에 다시며 물을 빽빽한 구름에 싸시나 그 밑의 구름이 찢어지지 아니 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살아서 역사 하시며 천지를 창조한 전지전능한 분이신 것을 확실히 믿기를 바란다.
2.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이유는 무엇 인가.
예수님이 이땅에 오심을 구약 선지자의 수없이 많은 예언을 통해 알 수 있다.
‘우리의 전한것을 누가 믿었느뇨···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 ···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 하셨느니라.(이사야 53장)’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는 아버지라. 평가의 왕이라 할것 임이라.(이사야 9장 6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야 7장 14절)’
하나님 께서 뱀(마귀)에게 말씀 하시기를 ‘여자의 자손<처녀의 몸에서 하나님이 육으로 태어나시는 예수님. 남자의 후손이라고 칭하지 않음>은 네 머리<세상의 죄,사단>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세기 3장 15절)구약 성경에서 이것 외에도 특별 교시로 300번이상 하나님의 예수님이 이땅에 오심을 예언 하고 있다.
항쟁 투사의 지도자. 유대 민족들은 그가 정치적.경제적 빈곤에서 그들을 구원할 유대의 왕이라고 믿었다.)밑에 있다가 예수님이 참 그리스도 메시아임을 깨닫고 예수님의 12제자가 뜻을 따르게 된다.
당시 이스라엘의 민족 배경은 로마의 정치적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유대 민족은 그들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킬 메시아, 즉 정치적으로 통치할 유대의 왕이 필요 했던 것이고 장차 올 메시아도 이런 왕이 올 것이라고 믿어왔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인간의 육체가 되어 오신 예수님은 유대 민족만이 아닌 전 세계의 모든 인류를 죄에서 해방시킬(영혼의 구원) 모든 생명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만왕의 왕으로 오신것이다.
‘아브라함과 다윗의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 맛단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마태복음 1장)’
위 말씀은 무엇을 의미 하는 것인가? 구약을 보면은 하나님께서 선택한 계보가 한 혈통에만 이어 지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하나님 께서는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라고 명칭을 구약에 많이 사용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두 아들중 둘째인 이삭을 선택하셨고, 이삭의 두 아들중 둘째인 야곱을 선택하셨다. 야곱의 열두 아들중(이들로 부터 이스라엘의 12 지파로 발전됨) 메시아(그리스도)의 승계를 위하여 유대 지파를 선택하였고 나머지 11 지파는 제외하셨다. 그리고 선택된 유대 지파중 이새의 혈통이 신성한 선택을 받았다.
이새는 8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세의 가계중 7명을 제외 시키셨다. 하나님 께서 다윗에게 말하기를 ‘네 수한이 차 네 조상들과 함게 잘때에(다윗이 죽은후에) 내가 네 몸에서 난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사무엘하 7장 13절)’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예레미야 23장 5절)’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이사야 40장 3절)’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다. ···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유대 민족의 신발로서 종 중에서 주인의 신들메를 묶어주고 풀어주는 것을 담당한 종이 가장 미천한 위치였음)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요한복음 1장 23절-28절, 누가복음3:4-7, 마가복음1:2-3 ,마태복음3:3)’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 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말라기 3장 1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중에 작을 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 이니라.(미가 5장 2절)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선택한 가계중 하나의 혈통으로만 계보가 이루어 지는것을 볼 수가 있는데 이 선택된 계보를 통해 하나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기 위한 예비의 길이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만을 사랑하셔서 유대 민족을 선택하신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기 위한 경로로 선택하셨다는 의미 이다.
즉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이며 신약은 하나님이 육으로 태어나서 십자가 보혈의 피로 죄의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좋은 뜻과 의로운 복음의 언약이 이루어진 전파되어 모든 민족과 나라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였다고 생각한다.
주님 오기전 1억 2천의 인류가 지금은 54억이 되었다. 그리고 주님 오신후 유대 민족이 아닌 전 세계로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 현제 많은 민족과 나라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죄로 인해 하나님과 막혀있던 장막이 무너져 우리몸이 거룩한 성전이 되는 영예를 주셨고,
옛 사도들의 복음 전파 사역이 지금까지도 이어져 세계 각지에서 복음이 끓임없이 전파 되고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장 19절-20절)’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마가 복음 16장 15절-16절)’
‘또한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계가 예루살렘으로 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으로 전파될 것이 기록 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일에 증인이라.(누가복음 24장 47절-48절)’
‘오직 성령이 네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사도행전 1장 8절)’
12제자들 중 사단이 가롯 유다의 마음에 들어가 예수님을 은 삼십냥에 팔고 만다. 그리고 예수님의 예언대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유대 군중들 앞에서 세번이나 부인한다.
총독 빌라는 앞에 결박된 예수님을 앞에두고 모인 유대 군중들을 향하여 말한다. ‘너희는 내가 누구를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마태복음 27장 17절)’
이때 군중들은 정치적 항쟁의 지도자 바라바를 선택하며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친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한 실망과 좌절로 그들은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 본래 생업에 종사 한다.
유다는 곧 자신의 잘못을 뉘우쳐 은 삼십을 대제사장과 장로에게 도로 전해주나 이들은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며, 네가 모든 죄를 당하라고 말하여 이를 회피한다. 이에 유다는 은을 성소에 던지고 목메어 자살한다. 이때 이들은 은을 거두어 그 은을 거룩한 성전에 둘 수 없다며 토기장이의 밭을사서 그곳을 나그네의 묘지로 삼는다. (자살을 하게된다) (마태복음 27장 3절-10절)
이미 이 사실을 구약에서 예언한바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 ···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 에게 던지고.(스가냐 11장 11절-13절)’ 예수님 께서는 예언대로 삼일만에 다시 살아 나셨고, 제자들은 실망에서 희망의 기쁨을 맛보며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예수님의 명을 받아 여러 이방 민족및 국가에 복음을 증거, 전파 한다.
왜! 유대 민족들은 하나님되신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믿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을까? 앞에서 언급한 것 같이 그들이 믿었던 이땅에 오실 메시아는 자신들의 민족을 로마로 부터 해방 시켜줄, 그 능력으로 로마군사들을 단숨에 멸하여 이 땅의 가장 위대한 민족과 국가로서 그들을 존립 시켜줄 강력한 정치적 통치자 라고 믿어왔다.
거친 바닷물을 잔잔하게 하시고,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명을 베불리 먹게 하시며, 무덤에 죽은자들을 살려 내셨으며, 소경이 눈을뜨고, 듣지 못하는 자들의 귀를 열어주고, 수많은 병자를 고쳤으며 귀신을 쫒아내었던 수 많은 기사와 이적을 보면서도 잘못된 그들의 사고와 의식으로 믿지 못하는 그들의 실상은 이러했던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 사도들의 복음 활동사및 그들의 순교에서 사실을 입증 할 수 있다. 베드로,안드레, 야고보(알페오의 아들), 빌립, 시몬, 바돌로매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으며 마태, 도마, 야고보 (세배대의 아들)은 칼및 창에 찔러 죽었다.
야고보(예수의 형제)는 돌에 맞아 죽었으며 다대오는 화살에 의해 죽었고 요한은 자연사 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울(후에 바울로 개명)의 변화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사울(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할수 있는 영장과 책무를 맡은 신분을 가지고 당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사도)들과 그리스도인들을 증오하고 박해하던 인물이었습니다.(사도행전 8장 1절-3절)
이 때 예수 그리스도 께서 사울(바울)에게 나타나셔서 사울아 사울아 너는 왜 나를 괴롭히느냐 라고 꾸짖으 셨고 이에 사울은 하나님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기독교의 복음과 기독교를 변호하는 선교자로서 사역을 하다가이후 로마군에 붙잡혀서 십자가에 못박혀서 순교하시게 됩니다.(사도행전 9장)
그후 복음은 수없이 많은 순교의 가치로 인해서 땅끝까지 전해졌고, 초기 기독교의 박해와 탄압 속에서도 복음은 전파되어 왔다.(그들이 은둔하여 신앙을 지켜왔던 거대한 지하 동굴이 성지로서의 증거가 되고 있다.)
기독교를 순교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무엇이 어려움과 죽음이라는 한계 상황속에서 끈질기게 신앙을 지켜 오게 했는가?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가지고 온 몸이다.
우리는 그 사명을 이행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고 ,그 사명을 다 했을경우 우리는 기쁨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모든 순교자들이 사명을 감당하기에 순교를 당했고 사명을 완성하는 순교자들에게는 믿음의 확신이 있었기에 죽음이 두렵지 않았고 그 순교를 기쁘게 맞이하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사명에 임하셨다.
오늘날 그 많은 순교의 피값으로 인류가 복음을 접하게 되었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룰수 있는 영광을 연결해 준 것이다. 우리 민족의 복음의 시작도 순교의 피값으로 말미암았고 선교와 순교로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전해준 수 많은 선교자들과 순교자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 없이는 이러한 순교가 있을 수 없는 것이며, 특히 다른 종교 보다도 기독교가 유난히 핍박과 박해가 심했으나 모든 신앙인들이 끝까지 버티어 왔던 이유 또한 그들에게 부활의 확신이 확고 했기 때문이다.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를 연단을 낳고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
한가지 예로 바람이 우리에게 강하게 불어오면 우리는 바람에 밀리지 않으려고 몸을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숙이며 두 다리로 더욱더 강하게 지지하고, 바람이 더욱더 거세져서 불가항력(사람의 힘으로 지지하기 어려움)적인 한계 상황에 접하게 되면 나무등,고정된 물체를 잡음으로서 자신을 지지한다. 즉 환란과 고난은 우리에게 더욱더 뜨거운 신앙을 주며 더욱더 간절히 하나님을 찾게하는 것이다.하나님께서 악한 세력을 멸졸하지 않는 까닭도 이러한 이유에 있는것 같다.
주 하나님 독생자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이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모든 사람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서 중재하심으로 하나님과 인관의 관계를 획복하시고 막힌 담을 허셔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하나되게 이루셨으며
의인의 길을 얻게되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다시 성립되었다. 전에는 인간들의 죄를 눈감아주는 것으로 참으셨지만(양을 번제로 드렸지만 그것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
예수님을 이 땅에 대속물로 오셔서 뜻을 이루시고 하나님의 정의를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의 의로움을 나타내고자 우리에게 의로움을 나타내셨고 예수님을 믿는 자도 의로움을 얻음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 할 수 있게된 것이다.(로마서 3장 23절-26절)
나의 마음은 하나님을 갈망하는데 나의 육체는 죄의 법을 즐거워 하고 있으니 오호라 나는 괴로움에 떨고 있는 비극의 실체이다. 이 죄라는 한계에서 누가 나를 구원 할 것인가?(로마서 7장 23절-24절)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할때 이미 나는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구원) 된것이다.(로마서 8장 2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것은 지나같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린도 후서 5장 17절)’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선한 마음으로 창조 되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계율을 어기고 선악과(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먹음으로 하나님이주신 본래의 마음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로부터 인류의 죄와 사망에 이르게 됨. (창세기 3장)
영국의 철학자 콜린 윌슨의 ‘주변인’ 이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주변인들의 문제는 자기의 삶에 대한 현실적이지 못하다. 그들은 이 비현실성으로 고통을 받고 통절한 아픔을 느끼지만, 그 고통의 근원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오래되면 익숙해 지듯히 이때의 세상도 세상으로서의 존재 가치를 잃어 버린다.
인생은 악몽과 같기도 하고 화면이 공백으로 지나갈 때의 공허한 스크린 같기도 하다.
”영국의 소설가 서머셑 모옴은 이렇게 말했다. “만일 죽음으로 모든것이 끝난다면, 앞으로 선한일이 올 것인가 악한 일이 올 것인가에 대한 희망도 두려움도 없다면, 나는 반드시 자문 해야 한다.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지금 이 환경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아더 쾨슬러는 정치 저술가로서 이렇게 말했다. “이 딜레마(dilemma)는 ··· 인간의 영원한 곤경,본성에 내재된 비극적 갈등을 상징한다. 그것은 편의주의와 도덕성 간의 갈등이다. ··· 이 갈등은 우리의 정치 사회적 위기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 그것은 한마디로 우리 시대의 도전이다. ··· 이 두 길 사이의 갈등은 인간이면 누구나 처하게 되는 것으로 인간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간세음보살~~~
ㅅㅂ 개독교 여기서도 설치네 카페 질 떨어진닷!!개독교는 안끼는데가 없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