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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부에 김택수 인터뷰글이 있네요.)
출처 : 후추 명예의 전당
Prologue
후추 명예의 전당 제20호 헌액자 이호 선수를 인터뷰하러 1년 전에 태릉 선수촌에 갔
던 일이 있다. 선수촌 입구에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저녁 식사를 끝낸 각
종목의 대표 선수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저녁 외출을 하고 있었다. 그 중에 참 눈
에 익은 선수 한명이 츄리닝 차림으로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며 필자 쪽을 지나쳤다.
김택수였다. 그때 필자는 이미 마음 속으로 약속을 했다. '머지 않은 시간 내에 저
사람을 인터뷰하러 꼭 다시 올 것이다' 라고 말이다. 후추의 명전이 꽤 많은 비인기
종목 선수들을 조명하고, '국내'에서도, '비 올림픽 해'에도 그들이 살아 있다는 사
실을 각인 시켜가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탁구란 종목이 누락되었었다. 사실 누락될
종목이 아니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또, 탁구란 종목만큼 '비인기'와 '인기'의 중
간에서 번지수를 헤매던 종목도 없었다. 이미 30여년 전인 1973년 '이에리사-정현숙'
'사라예보 쾌거'로 한반도를 들끓게 했었고, 그 후로도 수많은 대한의 '탁구 귀신'들
이 녹색테이블을 수놓았다. 당시 스포츠 언론에서는 탁구에 대한 특집 기사, 기획 기
사, 선수 인터뷰 등, 국제 대회 전후로 최소한 반 페이지 이상의 공간을 할애했었다.
'한국 탁구의 황금기'를 설계하고 건설했던 동아건설의 최모 회장이 서서히 세력을
잃어가던 즈음, 한국 탁구에 대한 국민적 관심, 다시 말해 언론의 초점 역시 '부도
처리'가 되어갔다. 한국 탁구의 설계와 건축까진 좋았는지 몰라도 유지 보수 과정에
서는 실패했다. 100년을 내다보고 짓는다는 건축물은, 아니 '한국 탁구 아파트'는 결
국 부실 공사가 되어 버렸다.
탁구란 종목의 한 인물을 선정해서 후추 명전에 올리는 일이란… 마치 눈 감고 뺑뺑
이 돌려서 아무나 걸리는 한명을 헌액 하더라도 누구도 후추의 선택을 욕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선택의 폭은 넓고 다양했다. 이에리사, 정현숙, 윤길중, 박미희, 이수자,
양영자, 김완, 김기택, 현정화, 안재형-자오즈민, 그리고 유남규… , '소 한 마리 잡
으면 버릴 데가 없다'는 축산업자의 말이 떠오를 정도로 우리 탁구의 중흥기 및 황금
기를 장식한 별들은 누구 한명도 '버릴 데가 없다'. 개개인의 흥미롭고 독특한 스토
리가 담겨져 있고 실력으로 따져도… 아니다, 실력으로 우열을 가리는 발상 자체가
유치하다. 그들 모두 위대한 선수였음을 부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후추는 김택수를
선택했다. 김택수가 한국 탁구 사상 최연소로 국가대표에 선발되었기 때문도 아니고,
그가 16년째 태극 마크를 달고 '고군분투'란 말의 새로운 정의를 내려줬기 때문도 아
니고, 일본의 한 탁구 용품 회사에선 '김택수 라켓'이란 제품을 상품화할 정도로 그
를 인정해 줘서도 아니다. 후추가 수많은 대한민국의 '탁구 신(神)' 중에서도 굳이
김택수를 택한 이유는… 그는 우리 팬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회'란 자다가도 벌떡 깰 만큼 지겹도록 들어온 '중국의 벽'
을 깨뜨릴 수 있는 '기회'도 아니고, 누굴 만나서 악수하기조차 싫어지는 유럽의 '쉐
이크 핸더(Shake Hander)'들을 물리칠 수 있는 '기회'도 아니다. 김택수가 우리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그의 현역 생활을 보다 관심 있게 지켜보
고 박수와 축하로 그를 떠나보낼 수 있는 '기회'를 뜻한다. 평생 한번도 찾아보지 못
한 탁구 경기장을 '김택수 출전'이란 이유 하나만으로도 한번 가 볼 수 있는 그 '기
회'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10년 넘게 세계 탁구계의 열손가락 안에 든 'World
Class Athlete' 김택수의 경기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아직까지는
우리에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버스는 떠나고 신작로에는 먼지만 뽀얗게 일고 있다'는 아쉬움이 이젠 지겨워서 김
택수를 선택한다. 수많은 우리 탁구 영웅 중에 그 누구를 선택해도 무방하다면 (객관
성, 주관성을 다 떠나서 얘기해도 무방한 건 사실이다) 후추는 '아직도 늦지 않은'
김택수를 택한다.
가끔 김택수를 TV에서 볼 때 마다 필자는 눈물이 난다. 빨갛게 달아오른 그의 두 광
대뼈, 땀으로 범벅이 된 그의 유니폼 상의, 속이 허옇게 들여 다 보일 정도로 심해진
부분 탈모 증세, 그리고 두 눈을 찡그리며 하늘을 쳐다보는 그의 길고도 허무한 한
숨… 하늘 같은 선배들 사이에서 약관 17세의 나이로 국가대표에 발탁되어 '김택수
돌풍'을 일으킨 장본인이 어느덧 대표팀의 최고참으로 중국이면 중국, 유럽이면 유럽
의 최강 'Number 1 시드 (Seed)'들과 격돌해서 분전하는 김택수의 모습을 보노라면,
솔직한 심정으로 딱하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김택수의 취재를 결정하고 나서
필자는 '고군분투'란 말을 다시 한번 사전에서 찾아보게 되었다. '수가 적고 후원이
없는 외로운 군대가, 힘에 겨운 적과 용감하게 싸움. 적은 인원의 힘으로 도움도 받
지 않고 힘겨운 일을 그악스럽게 해냄'. 필자가 잘못 알고 있지는 않았다. 김택수와
한 조를 이루고 있는 현역 파트너들을 과소평가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다. 그냥 김
택수를 보면 '혼자 싸운다'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서 그럴 것이다. 스웨덴의 발드
너에서부터 중국의 류궈량까지… 김택수의 16년 국대 시절동안 맞붙어야 했던 '세계
1위'는 왜 그리도 많았는지… 한 명의 '세계 1위'를 겨우 따라 잡을만하면 또 한명의
'세계1위'가 왜 그리도 금세 등장하는지, 김택수가 출전하는 승부는 '2-3' 이란 스코
어가 왜 그리도 많은지… 세계 탁구계의 '톱 클래스'는 세대교체다 뭐다 하면서 하루
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는데 왜 우리는 허구한 날 '김택수'가 결정을 지어줘야 하는지…
'이제 그만 접고 편하게 살아라' 란 말이 입안에서 맴돈다.
누가 붙여줬는지 필자가 보기엔 말도 안 되는 김택수의 '순둥이'란 별명… 그저 착하
기 그지 없고 뽀얗게 생긴 그의 외모만 보고 단정지은 '부당한 별명' 임엔 틀림없다.
깡마른 체구 어디에서 그런 웃기지도 않는 힘이 솟아나오는지, 그 많은 탁구 전형 중
에도 김택수가 '파워 드라이브'를 고집하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그는 '순둥이'와는
거리가 멀다. 서양인들과 체력 싸움에서 안 되는 동양인들이라면 '기교파, 두뇌파'가
훨씬 더 어울릴텐데, 김택수는 그들과 아주 제대로 맞짱을 떠 왔다. '힘 대 힘',
' 테크닉 대 테크닉'으로 말이다. 90년 북경 아시안 게임 결승전에서 그가 보여준 '6
시간 투혼의 남북대결'을 누가 잊으리요, 얼마 전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보여 준 '32
구 환상의 랠리'를 보고도 누가 감히 김택수를 '순둥이'라 하리요… 오히려 김택수의
행동 거지를 살펴보면 '청부 살인자(Hitman)' 쪽에 가깝다. 우리가 보아온 그 어떤
탁구 선수보다도 김택수는 냉철하고 묵묵하고 절제된 행동의 소유자이다. 어지간한
승부처에서도 그는 '쇼맨쉽', '오바'라곤 없다. 현란한 푸트 워크와 어마어마한 궤도
와 스피드의 와인드업, 그리고 통렬한 스매싱… 김택수의 '명중' 뒤엔 짤막한 '주먹
불끈' 밖에 찾아볼 수 없다.
'20세기 최고의 펜홀더', '펜홀더의 교과서' 그리고 '영원한 세계 Top 10' 김택수를 후
추 명예의 전당 27호 헌액자라 부른다. '탁구'였더라면 굳이 김택수가 아니더라도 무
관했겠지만 후추는 꼭 '탁구의 김택수'만을 고집하고 싶다. 김택수는 올림픽 금메달리
스트도 세계선수권 우승자도 아니지만, 한국 탁구의 자존심을 너무나 오랫동안 혼자서
지켜온 외로운 승부사이기 때문에 그를 명전에 초대한다. 김택수마저 은퇴한 다음에
후추가 '뒷북' 쳐야 하는 처지가 된다면 필자는 아마도 밤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김택수의 '고군분투'는 이 글로 영원히 날려 보내고 싶다. 앞으로 경기 전 락커룸에
서 라켓 고무 커버에 풀칠을 하고 있는 김택수의 머리 속에 더 이상은 혼자가 아니란
생각, 그리고 비록 눈에 보이는 '아군'의 숫자는 적을지언정 김택수의 마음 속에 자
리잡고 있는 '열렬 후추인'들의 성원의 함성 소리를 잠시라도 느끼게 할 수 있다면
후추 명예의 전당 안 김택수의 자리는 언제나 빛나게 될 것이다.
'10-10 클럽'
5월14일 발표된 세계 테니스 랭킹을 볼 기회가 있었다. 한국의 이형택 선수가 당당히
67위에 올라 있었다. 작년 여름, 4대 테니스 그랜드 슬램 중 하나인 US Open에서 이
형택이 16강에 진출한 소식은 아직까지도 사실 잘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사
건'이었다. 아니, 어쩌면 있어선 안 될 일이란 생각도 든다. 우리나라 국민들처럼 테
니스란 종목에 대한 전반적인 관심이나 사회적인 저변이 열악한 나라의 특정 선수가
그런 '획기적인 사고'를 자꾸 치다 보면, 혹자는 또 그런 생각을 가지지나 않을까 하
는 우려 때문이다. '이형택이 좀 봐… 인프라가 어떻고 저변이 어떻다 하더라도 열심
히 하니까 되잖아? 투자고 뭐고 다 필요 없어. 하고자 하는 개개인의 마음에 달려 있
다고…' 이형택의 승승장구는 어찌 보면 세계 탑 랭커들을 발굴하고 육성하기 위해서
엄청난 투자를 아끼지 않는 외국 테니스 협회측에 대한 최대의 '부정 행위' 일 것이
다. '67 Lee, Hyung Taik - KOR'이라고 쓰여진 랭킹 페이지에 Top 10 랭커들을 한 번
보았다. 쿠에르텐, 사핀, 애거시, 샘프라스, 카펠니코프, 페레로, 휴잇… 등의 쟁쟁
한 스타들이 Top 10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형택이 세계 67위에만 올라도 이처럼
광분하는 우리들에게 과연 세계 Top 10 랭커들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저 '넘을 수 없
는 산' 정도의 느낌이랄까? 아니면, '인간이 치는 테니스가 아님' 정도?? .
같은 날 필자는 세계탁구연맹의 홈페이지인 ITTF.COM을 찾았다. 그리고 현재 세계 랭
킹을 검색해 보았다. 1위부터 573위까지의 세계 랭킹이 나열되어 있는 것을 보고 놀
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탁구 랭킹도 장난이 아닌데… Top 10만 정하는 게 아니네?'
명예로운(?) 573위의 자리는 몰타 출신의 '부티기에그' 선수가 차지하고 있었다. 테
니스의 경우 (공간이 모자라서 그랬는지 몰라도) 1,319위까지 랭킹이 정해져 있었지
만, 탁구 마저(?) 100등 이하까지의 랭킹을 정한다는 사실에 무엇보다도 세계적인 규
모의 탁구 커뮤니티에 감탄했다. 그리고 김택수의 이름을 보았다. '7 Kim, Taek Soo
- KOR' 우리가 테니스의 세계 탑 랭커들을 바라보며 느끼는 그런 막연한 부러움과 신
기함을 몰타의 '부티기에그' 선수나 그의 팬들도 김택수의 탁구를 바라보며 느끼겠지?
우리 테니스가 세계 랭킹 100위권에 '걸맞은 나라'라면, 탁구 랭킹 100위권에 '걸맞
은 나라' 처럼 보여지는 쿠바, 이집트, 싱가폴… 이런 나라의 탁구 팬들은 김택수의
환상의 랠리를 보면서 과연 무슨 생각이 들까… '코리아의 김택수는 미친 인간이다'
라고들 하겠지. 음하하하…
김택수는 1986년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대회에서 북한을 물리치고 2관왕(단체전, 복식)
을 차지하며 한국 탁구계의 '차세대 주자'로 급부상한다. 일찌감치 '떡잎'을 알아본
대한탁구협회는 당시 전무했던 '유망주 유학 프로그램'을 가동, 김택수를 1986년 9월
부터 87년 1월까지 유럽 탁구의 본고장 스웨덴 스톡홀름의 벨링비 마을로 보낸다. 수
많은 사과나무와 자두나무, 마치 에덴의 동산을 옮겨다 놓은 것처럼 보이던 벨링비
마을, 그리고 빙하의 자취가 남아있던 키루나 마을에서 보낸 사춘기 소년 김택수의
스웨덴 조기 유학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김택수의 탁구 인생에 분수령으로 작용했다.
그곳 '앵비 탁구 클럽'에서 같이 생활하며 훈련하던 선수들이 바로 그 이름도 유명
한, 세계 탁구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불리던 얀 오베 발드너, 페르손, 그리고 에펠
그린 등이었다. 이듬해인 87년, 그러니까 김택수가 18살 되던 해 그는 사상 최연소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자신의 '세계선수권 첫 경험'을 하기 위해 뉴델리로 향한다.
'약관 김택수'는 불과 몇 개월 전까지 같이 연습하던 스웨덴의 발드너 선수와 풀세
트까지 가는 치열한 접전 끝에 2-3으로 분패하지만, 이 대회를 통해 세계 탁구계는
'코리아의 무서운 아이 - 김택수'를 주목하게 된다.
서울에서 열렸던 88 올림픽. 대표팀 막내 김택수는 1년 선배 유남규의 '금메달 돌풍'
에 철저히 밀려난다. 이미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김완, 김기택과 같은 선배들을 실력으
로 물리친 바 있었던 김택수지만, '민족의 향연' 88 올림픽에서 만큼은 실력과는 무
관한 다른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작용할 수 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대표팀 엔트리에
올라 있었지만, 88올림픽은 결코 김택수의 몫이 아니었다. 안방에서 열렸던 올림픽에
서의 '들러리 신세'를 뒤로 하고 89년 태국 방콕에서 열린 유로-아시아 대회에서 김
택수는 사상 첫 세계대회 우승을 경험한다. 대회에 출전했던 각국의 선수 중에 최연
소의 나이로 팀 선배 김기택 선수를 3-1로 물리치고 정상에 오른 것이다. 김택수의
시대는 그렇게 막이 오른다.
89년 도르트문트 세계선수권에서 김택수는 유남규와 한 조를 이루어 동메달을 따냄으
로써 중국을 5-0으로 완파하며 '쉐이크 핸드 전성시대'를 예고했던 스웨덴에게 '펜
홀더의 자존심'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90년 북경아시안 게임 남자 단체전… 국민들의
가슴 속에 김.택.수.란 이름 석자를 영원히 잊지 못하도록 만들어버린 북한과의 피
말리는 일대 전쟁. 이 대회를 통해 김택수는 명실공히 한국 탁구의 대들보로 자리잡
는다. 그리고 그 정상의 자리에서 정확히 10년을 버텨왔다. 87년 처음으로 태극마크
를 가슴에 단 이후, 김택수는 무려 8번의 세계 선수권 대회(격년제)에 출전했고, 4번
의 올림픽과 3번의 아시안 게임에 나가서 김택수 특유의 힘과 투혼을 발휘한다. 비
록 이에리사, 유남규, 현정화처럼 세계 선수권이나 올림픽 금메달 사냥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래서 유독 김택수에겐 '뒷심 부족'이란 말도 심심찮게 따라다니기도 했
지만, 김택수는 그 긴 세월을 한결같이 한국 탁구의 간판으로 군림해 왔다.
김택수는 말한다. 하루이틀 만에 우승여부가 판가름 나는 단기전에선 세계 그 어떤
탑 랭커들과 맞붙어도 이길 자신 있다고… 자신이 추구하는 선이 굵고 체력 소모가
심한 파워 위주의 탁구가 워낙 사람 진을 빼 놓아서 그렇지, 반나절 동안 2-3명 꺾고
우승하는 대회엔 언제 나가도 이길 자신이 있다고 말이다. 그의 말은 '뻥'이 아니었
다. 지난 91년 일본에서 열렸던 IOC 회장컵 ('사마란치 컵') 세계 8강 초청경기에서
김택수는 그야말로 펄펄 난다. 세계 8위 안에 드는 중국, 유럽 권의 최강자들을 상대
로 한명씩 아주 개박살을 내며 결국 결승에서도 발드너를 가볍게 3-1로 따돌린다.
92년부터 출전했던 '월드 올스타 서킷', 이 역시 세계 탑 랭커들을 초청해 세계 전역
을 순회하며 1, 2, 3차 우승자를 가린 후 최종 우승자를 결정하는 단기전 성격의 승
부. 이 대회에서도 역시 김택수는 지난 10여년 동안 통산 9번의 우승을 차지한다. 우
리가 '모르는 세계 대회', 우리가 '안 본 세계 대회'에서 김택수의 진가는 나타난다.
우리보다 외국 탁구팬들이 김택수를 더 인정하고 감사해 하는 이유는 아마도 이런 이
유에서 일 것이다.
'10-10 클럽'… 야구에는 '30-30 클럽', 그리고 축구에도 '50-50 클럽'이 생겨나는
판국에 왜 탁구에는 '10-10 클럽' 이란 말이 생기지 않는 건지 필자는 이해할 수가
없다. '10-10 클럽'이 뭐냐고? '10년 동안 세계 10강'의 자리를 지켜온 실력, 꾸준함,
그리고 체력의 결정체를 뜻한다. 탁구에는 왜 그런 눈에 확 들어오는 용어 하나 만들
면 안되나… 필자의 친한 친구는 한국 탁구를 보면서 종종 그런 말을 했다. '김택수
가 아무리 잘 해도 빅 게임에선 유남규가 나가야 된다'고 말이다. 아시안 게임이다
올림픽이다… 소위 'TV 중계 되는 큰 대회'에선 유남규가 죄다 쓸었으니 전혀 근거
없는 얘기도 아니다. 하지만, 필자는 김택수의 끈질긴 생명력을 간과할 수 없다. 10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소위 '빅게임에 강하다는 그들' 모두가 떠난 이 자리에도
김택수만은 남아있다. 발드너다 왕따오다 유남규다… 그들이 모두 떠난 자리에도 김
택수만은 아직도 라켓을 쥐고 있다. 10년을 세계 탑 클래스에 속해 있다는 사실…
즉, 절정의 실력을 꾸준히 유지하는 선수의 진정한 가치를 필자가 아무리 목 터져라
외쳐 봐도, 칼 립켄 주니어 혹은 최태원의 연속 경기 출장 기록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소귀에 경읽기' 밖에 안 된다. 김택수의 질긴 생명력과 자기 관리… 어
쩌면 그를 칭하는 수많은 수식어 중에 가장 으뜸으로 꼽아야 할 '김택수만의 저력'
일 것이다.
'The Vintage 김택수' ('90 &'98 아시안 게임 Replay)
1990년 북경 아시안 게임은 김택수 본인에게는 물론, 유남규란 '올림픽 스타'에게만
의존하던 당시 한국 남자 탁구계에 새로운 희망을 심어준 계기가 되기도 했었다. 남
자 단체전 결승에서 북한과 맞붙은 한국은 유남규의 뜻하지 않은 부진에도 불구하고
김택수의 3전 전승, 그리고 복병 박지현의 2승에 힘입어 종합 전적 5승4패로 북한을
간신히 따돌리고 대망의 금메달을 목에 걸게 된다. '수비 탁구의 귀재'라고 불리던
북한의 이근상, 유남규를 꺾고 졸도까지 한 김성희, 그리고 약관 18세의 '겁없는 아
이' 최경섭을 차례로 물리치고 금메달 획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김택수의 마지막
경기는 1구 1구에 온 국민의 손에 땀을 쥐게 하고도 남았다. 한국 시간으로 밤 8시,
북경의 노동자 체육관에서 시작된 북한과의 단체전 결승은 새벽 1시가 넘어서 끝이
났고 김택수는 마지막 세트까지 피를 말리는 접전 끝에 최경섭을 2-1로 제치고 영웅
이 되었다. 최경섭과의 마지막 9차전… 후추가 Replay 한다.
90 북경 아시안 게임 남자 탁구 단체전 결승 : 김택수 (한국) vs 최경섭 (북한)
단체전 스코어 3-4로 궁지에 몰렸던 한국 남자팀은 이근상을 2:0으로 이긴 박지현의
수훈에 힘입어 전체 스코어 4:4… 김택수의 '마지막 한판'으로 희비가 엇갈리게 되
어 있었다. 김택수는 이날 이미 2경기에 출전, 이근상과 김성희를 각각 2-0으로 셧아
웃 시킬 정도로 상승세를 타고 있었고, 김택수와 격돌하는 최경섭은 18살의 나이로
'무서울 게 없는' 다혈질 쉐이크 핸더였다. 1세트… 국제 무대 경험이 비교적 부족한
최경섭을 압도하기 위해 김택수는 초반부터 파워 넘치는 드라이브와 속공 스매싱으로
최를 몰아 부치기 시작한다. 17-7까지 앞서 나가는 김택수의 일방적인 리드… 당시까
지만 하더라도 김택수의 '약점'은 초반 상승세에 비해 시간이 갈수록 체력이 저하되
고 '뒷심 부족'을 이유로 역전패를 곧잘 당하곤 했는데, 1세트를 여유롭게 리드해 나
가는 김택수에 대한 유일한 우려는 '막판 뒤집기' 밖에 없을 정도로 초반 분위기를
압도해 나갔다. 김택수의 맹공에 기가 꺾인 최경섭은 연속되는 서브 리시브 실수로
쉬운 점수를 내주며 1세트를 21-13 란 점수로 패한다.
각오를 새롭게 한 최경섭은 2세트 시작과 함께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전법으로
초반부터 엄청난 공격을 시도한다. 기회만 생겼다 하면 무조건 파워 넘치는 드라이브
공격, 김택수는 당황한다. 초반 0-7까지 리드를 당하던 김택수는 기가 오른 최경섭의
멘탈 게임에 교란되어 기회를 살리지 못한다. 1세트를 넘겨준 최경섭의 반격에 체육
관을 찾은 중국 관중들가지 '최경섭'을 외치며 일방적인 응원이 시작된다. 1, 2 포인
트 따라간다 싶으면 최경섭의 과감한 속공에 무릎을 꿇은 김택수는 15-21로 2세트를
내준다. 1세트와는 판이하게 다른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마지막 3세트… '물불을 가리지 않는 최경섭의 총력전'은 3세트 초반에도 주효, 0-5
까지 점수차를 벌인다. 그렇지 않아도 2세트의 '원 사이드'한 승리에 제대로 힘을 받
은 최경섭은 3세트 초반마저 자신의 페이스 대로 경기가 풀리자, 완전히 자신감을 얻
은 모습… 한국 측 벤치는 초조와 긴장 속에 침통한 모습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고,
해설자마저 이미 경기를 포기한 듯, "아쉽다'는 말만 반복한다. 경기의 전반적인 분
위기는 그 정도로 북한의 최경섭 쪽으로 넘어가 있었다. 3세트 스코어 1-8… 패색은
짙었다. 공격이 성공할 때마다 최경섭은 기쁨에 길길이 날뛰었고 앳된 모습의 김택수
는 코 앞에까지 왔다가 멀어져 가는 아시안 게임 금메달이 야속하기만 했다. 이때…
김택수의 일대 반전은 시작된다. 피 말리는 롱 랠리 한방으로 4-9로 점수 차를 좁히
더니 그 후 다섯 점을 연속 득점… 마치, 먹이를 포착한 맹수처럼 김택수는 최경섭
의 헛점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기 시작한다. 김택수의 반격에 당황한 최경섭은 실수
를 연발했고 점수는 어느덧 9-9 동점… 이때부터 김택수와 최경섭의 숨막히는 각축전
은 시작된다. 김택수가 14-10 까지 치고 나가면 곧바로 최경섭은 따라 붙었고, 14-12,
14-13, 14-14, 15-15… 양 선수는 경기 도중 룰에도 없는 타임을 불러 라켓을 놓고
땀을 닦으려 하지만 심판 아저씨가 브레이크… 결국 두 선수는 '갈 데까지' 간다.
19-16 상황에서 김택수와 최경섭은 다시 한번 총력을 다한 랠리를 펼친다. 김택수 승
리… 승부의 쐐기를 박는다. 이 포인트를 진 최경섭은 격분해서 라켓을 집어 던지고
김택수는 특유의 '주먹 불끈'… 승리를 확신하는 모습이다. 탈진 상태까지 간 두 선
수는 20-19까지 승부를 몰고 가지만 김택수는 21-19 란 간발의 차이로 금메달을 한국
팀에 안겨준다. 김택수의 3승 째가 결정되는 순간, 한국 벤치 인사불성 북한 벤치 망
연자실… 마지막 9차전을 앞두고 "만약 한국팀이 진다면 나 때문에 진 것이다" 라고
얘기했던 유남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극적인 역전 드라마를 연출한 김택수와 얼
싸안고 깡충깡충… 김택수의 아시안 게임 신화는 그렇게 시작된다.
98 방콕 아시안 게임 남자 단식결승전: 김택수 (한국) vs 류궈량 (중국)
필자가 기억하는 많지 않은 '탁구 명장면' 중에 하나가 바로 김택수와 중국의 류궈량
이 펼쳤던 98 아시안 게임 남자 단식 결승에서의 '32구 랠리' 일 것이다. 그 장면을
하일라이트로 보면서 넋을 잃었다. '저게 대체 사람인가?' 중국의 세계 1, 2위 공링
후이와 류궈량을 차례로 꺾고 8년 만에 다시 한번 아시안 게임 정상에 오른 김택수의
분전은 긴 설명이 필요 없다. 김택수 탁구의 모든 것이 아마도 이 한 포인트에 축약
되어 있을 것이다.
김택수와 사람들…
지난 15년 동안 김택수를 '거쳐간' 세계 정상의 탁구인들의 명단을 뽑아보면 꽤나 쟁
쟁한 이름들이 속해 있을 것이다. 필자가 굳이 '거쳐간' 이란 표현을 쓰는 이유는 세
월이 흐르고 탁구판이 변해도 'Kim, TaekSoo - KOR' 란 사실만큼은 아직까지도 '불
변'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특별활동 시절에 '친구 따라서' 라켓을 처음
잡은 김택수가 처음으로 맞붙었던 세계 최강 발드너에서부터 왕리친까지… 김택수의
라이벌은 '씨가 마르지 않는 것' 같다. 아직도 중국집에서 짜장면은 먹지 않는다는
김택수의 말 한마디가 중국에 대한 김택수의 모든 걸 대변해 준다. 제 아무리 중국의
'인해전술'이 무시무시하다곤 하지만, 중국의 탁구 문화는 도대체 어느 정도이길래
이렇게까지 재빠른 세대교체를 단행해 나갈 수 있는 것인가? 2년마다 열리는 세계 선
수권 대회에서 같은 이름의 중국 선수가 결승전에 오르는 일이 없으니… 김택수 혼자
서 제 아무리 짱구를 굴려서 묘수를 던져도 '역부족'이란 말이 실감난다. 유럽은 또
어떤가? 경기 후 진심으로 그 친구들하고 악수하고 싶은 생각이 들까 싶다. 이러다가
김택수는 악수 대신 '하이파이브' 던져 대는 결례를 범하는 인간이 되는 건 아닌가…
김택수의 탁구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획을 그었던 3명의 선수를 집중 조명해 본다.
어쩌면 그들의 존재가 없었더라면 오늘의 김택수도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위대
한 라이벌 관계는 서로의 최고를 뽑아낸다'는 말처럼 말이다.
얀 오베 발드너 (Jan Ove Waldner)
스포츠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발드너란 이름 석자는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1965년 10월 3일 스웨덴 스톡홀름 출생의 자타가 인정하는 현재 탁구 사상 최고의
선수 발드너…
지난 20여년 간 중국이 넘쳐 나는 '탁구 인재'들로 세계 탁구계의 한 축을 지켜나가
고 있었다면, 나머지 한 축은 아마도 발드너의 오른손 하나로 지탱해 왔다고 해도 과
언이 아닐 것이다. 신장 179Cm, 체중 76kg의 잘 뻗은 몸매와 수려한 외모로 세계 각
지에 수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는 발드너는 아마도 스웨덴이 배출한 최고의 '수출 상
품'일 것이다. 89년 6월 생애 첫 세계 랭킹 1위 자리에 등극해서 그 후 93년까지 매
년 랭킹 1위의 자리에 올랐던 발드너는 유럽 탁구의 아성이었다. 지난 2000년 시드니
올림픽, 한국 나이 36살의 나이로 '확실한 하향세로 접어들었다'던 발드너가 개인 단
식 은메달을 획득한 사실은 그의 화려한 탁구 인생에 확고부동한 느낌표를 찍은 셈이
되었을 것이다.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단식 금메달, 세계선수권 대회 통산 3관왕,
유럽 선수권 2관왕, ITTF 프로 투어 2관왕 등 중국 선수와 발드너가 맞붙었던 '결승
전'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발드너에 대한 최고의 찬사는 아마도 세계 각
지의 언론에서 예외 없이 대서특필하는 다음과 같은 헤드라인일 것이다. "XXX, 발드
너 격파!' 지난 20여년간 탁구 정상을 꿈꾸던 수많은 탁구 유망주들에게 발드너를 꺾
는 일이란 '파란'이자 '성공 보증수표'처럼 느껴졌다. 김택수도 예외는 아니었다.
발드너와 김택수… 김택수와 발드너의 인연은 그 어떤 국내 탁구 선수들의 그것과도
다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김택수는 국내 선수로는 유일하게 고등학교 시절 발
드너의 '안방'인 스웨덴의 스톡홀름으로 '탁구 연수'를 다녀왔던 선수이다. 5살 연상
의 발드너는 동양에서 온 앳된 모습의 김택수를 친절하고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6개
월간 함께 생활하며 훈련하면서 서로의 장단점을 파악할 수 있었다. 유독 해외에서
강하다는 김택수, 그리고 유난히 유럽선수에 강하다는 김택수에게는 모름지기 고등학
교 시절 경험했던 유럽 탁구가 아직까지도 정신적인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을 것이다.
발드너와의 첫 대결은 김택수의 세계선수권 데뷔 무대였던 87년 뉴델리… 개인단식 2
회전에서 격돌한 김택수는 5세트까지 가는 혈전을 벌이며 결국 무릎을 꿇고 만다. 비
록 진 승부였지만, 이 대회를 계기로 세계 탁구계는 한국의 신예 김택수를 주목하기
시작했고 그 후 4년이란 세월이 지난 91년 사마란치컵 세계 최강전 결승전에서 김택
수 역시 처음으로 '김택수, 발드너 격파'란 꿀맛을 보게 된다. 발드너의 손에 의해
치러진 김택수의 데뷔전 그리고 그후… 김택수와 발드너는 각종 크고 작은 국제 대회
에서 통산 20여 차례 다시 격돌한다. 김택수의 증언(?)에 따르면 발드너 상대로 승률
이 40% 정도 된다고 하니 대충 감이 온다. 발트해의 바이킹 후손답게 시종일관 무표
정하고 프로페셔날한 모습의 소유자인 발드너가 사석에서는 그렇게 장난기가 많고 사
교성 풍부한 선수라고 한다. 어려서부터 '장난꾸러기'란 별명이 늘 따라다녔다고 하
는 발드너는 어린 시절부터 오늘날까지 김택수와 함께 해 온 '바다 건너 유럽'의 진
정한 친구이자 라이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왕따오
필자가 백수십장이 넘는 김택수의 과거 자료를 뒤지면서 혀를 내둘렀던 점은 바로 중
국의 끊임 없는 '스타 탄생'이다. 어쩜 그렇게 줄기차게 세계 탑 랭커들을 배출해 내
는 건지… 96 애틀란타 금메달리스트 류궈량, 2000 시드니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공링
후이, 2001년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리스트 왕리친 그리고 왕따오… 모두 한때는 세
계 1위 랭킹에 올랐던 선수들이고, 현재 무서운 신예로 떠오르는 마린은 이제 겨우
21살이다. 중국 본토에 등록된 탁구 선수가 총 7백만 명이라고 한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김택수 본인의 말대로 최근 몇 년간 세계 1, 2위를 독식하던 공링후
이와 류궈량과의 상대 전적은 각각 2승2패, 3승1패로 대등한 성적을 올렸다. 서서히
그들을 물리칠 해법을 찾아나간다는 얘기다. 몇 차례의 격돌 끝에 세게 최강 격파의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듯 싶으면 그땐 이미 새로운 중국의 강자가 세계 1위의 자리에
올라가 있다는 얘기다. 왕리친과 마린이 그런 경우다. 그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지경
일 것이다. 김택수가 지난 10여년 간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했던 6번의 세계선수권대
회는 중국의 신진 스타의 등용문과도 같았다. 2년마다 새로운 스타가 발굴된다는 얘
기다. 한국? 지난 10여년 동안 꾸준하게 그나마 세계 Top 10 자리에 머무를 수 있었
던 선수는 김택수 뿐이다. 이런 걸 보고 중국의 '인해전술'이라고 해야 하나…
그토톡 몸서리 쳐지는 중국 선수들 중에 유독 김택수의 뇌리에 생생히 새겨져 있는
이름 석자가 있다. 바로 왕따오… 공링후이나 류궈량에 비해 국제적인 업적이나 지속
적인 월드 랭킹에서는 뒤떨어질 지도 모르겠지만 김택수 개인에게 왕따오란 이름은
그 어떤 중국 선수보다도 특별하다. 167cm의 단신에 배까지 나와 운동선수로 보기 어
려운 체격이지만, 쉐이크 핸드 전형을 중국식으로 완성시켜 펜홀더 전형이 주류를 이
루는 한국 선수들을 파죽지세로 몰아붙이던 선수였다. 힘과 스피드, 유연성의 3박자
를 겸비하고, 테이블에 바짝 달라붙어 날리는 타점 높은 드라이브와 까다로운 구질의
이면 돌출 러버 사용에 능해 95-96년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선수였다.
김택수 역시 탁구에 서서히 눈을 뜨려던 시절인 1995년 5월. 중국 텐진에서 개최되었
던 제 43회 세계선수권대회… 김택수는 파죽의 연승 행진을 기록하며 8강에서 격돌한
왕따오를 불과 30분 만에 3-0으로 셧아웃 시켜버렸다. 대회 기간 내내 워낙 컨디션이
좋았던 김택수는 4강전 상대자 류궈량과의 한판 승부를 남겨두고 있었는데 믿기지 않
는 왕따오와의 '악연'은 이제부터 시작된다.
적진의 심장부에서 중국 탁구의 영웅 왕따오를 개박살 낸 그날 밤, 국제탁구연맹
(ITTF)은 긴급 집행위원회와 소청위원회를 열고 '한국의 김택수가 중국의 왕따오와의
8강전에서 사용한 라켓에 ITTF가 허용한 기준치 이상의 유해화학물질이 함유된 고무풀
(본드)을 쓴 것으로 밝혀져 실격처리 한다'고 발표했다. 같은 날 오전 왕용강과의
16강전에서도 같은 라켓을 사용했는데 아무런 문제제기가 되지 않았던 상황에서 유독
왕따오 전 이후에 이런 판명을 내린 점은 의심이 가고도 남았다. 원래 탁구 선수들은
라켓과 러버를 경기에 앞서 매번 다시 붙이게 되는데 이는 접촉 강도가 강해질수록
공의 탄력과 스피드가 크게 향상 되기 때문에, 한번 사용해 약해진 라켓의 접촉강도
를 높이기 위해서 경기 시작 약 1시간 전에 고무풀로 러버를 새로 부착한다. ITTF가
말하는 '유해성 화학물질'이란 얼마 전까지 동네 불량 청소년들이 집단으로 들이 마
시던 그 본드 안에 들어있는 환각성 솔벤트를 말한다. ITTF는 이를 방지하고자 일정
기준치를 정한 본드제품만을 인정하고 있고 전 세계적으로 12개사 제품이 공인되어
있다. 김택수의 당시 라켓은 공인 업체인 일본의 버터플라이사에서 만든 페어젝과 독
일의 실라 미케 제품을 혼합해서 사용해 왔는데, 유독 왕따오와의 경기 후만 그렇게
강한 유해성분이 검출됐다는 사실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중국 탁구계의 비리와 '져 주기' 행위를 고려했을 때
이번 사건은 충분히 중국측의 텃세 내지는 '작업'이 가미된 결과라고 김택수 측은 입
장을 밝혔다. 문제의 핵심이 김택수의 양심이건 제조사의 실수였건 간에 김택수는 탁
구계 사상 처음으로 고무풀 때문에 실격 당하는 불명예를 경험하게 된다. 평소 정직
과 성실하기로 국내외 탁구계에 소문났던 김택수의 탁구 커리어에 치명적인 오점을
남긴 사건이기도 했다. 그런 김택수를 더욱 슬프고 무기력하게 만든 건 대한탁구협회
측의 반응이었다. 제대로 된 규명 파악 또는 항의 한번 못 해 보고 ITTF 측의 판정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며 귀국한 김택수에게 오히려 '엄중 경고'란 '미지근한' 징계를
내렸다. '선수 자격 박탈'이면 박탈이고 '출장 정지'면 정지지, '엄중 경고'는 또 무
슨 대단한 '징계'인지… 협회측도 답이 안 나왔다는 얘기 밖에 안 된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김택수는 꼬박 이틀을 통곡했다. ITTF의 결정이 억울하고 중국 측의 텃세가
분하고 대한탁구협회의 반응이 섭섭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는 탁구 라켓을 놓을 생각
까지 한다. '국제적으로 아무런 힘 없는 한국 탁구 환경에서 더 이상 죽어라고 해봐
야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회의가 들어서 였다. 하지만, 김택수는 '실력 하나로
다시 한번 니 결백을 밝혀라'는 주위 선배들이나 동료들의 위로와 격려를 등에 업고
한 달 뒤 다시 탁구 계에 복귀, 홍콩에서 벌어진 95 탁구월드올스타 서킷에서 왕따오
를 다시 한번 3-0으로 셧아웃 시킨다. 고무풀 논란은 두 번 다시 없었다. 왕따오 그
리고 '고무풀 사건'은 김택수의 탁구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반환점이 되기도 한다.
시련의 나날을 보내며 정신적으로 좀 더 성숙되고 안정된 플레이를 할 수 있게 되었
다. 96년부터 김택수의 탁구는 '완전히 물이 올랐다'는 주위의 평을 듣기 시작하고
앞서 말했던 공링후이, 류궈량과의 역대 전적에서도 앞서 나가기 시작한다.
유남규
김택수의 명전을 쓰는 데에 있어서 '한국 남자 탁구의 간판', '싸움닭', '불사조' 유
남규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서두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유남규가 후추 명전의
앞마당에 올라와 있어도 그 누구 하나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어쩌면 김택수를
선택한 후추의 결정을 반신반의하는 사람은 있어도 유남규를 선택했을 때 그 결정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후추는 김택수를 선정했는지도 모른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말이다. 지난해 1월, 유남규의 태극마크 반납을 두고 기타언론
에서 사용했던 유남규의 프로필이다.
"부산남중 재학 시절이던 지난 85년 청소년대표로 처음 태극마크를 단 유남규는 왼손
펜홀드 드라이브의 정통공격법을 트레이드마크로 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서 단식과 단
체전 우승으로 대회 MVP가 되면서 세계적인 스타로 도약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88년 서울올림픽서는 구기종목 최초의 금메달을 딴데 이어 89년 도르트문트 세계선수
권대회에서는 현정화와 컴비를 이뤄 혼합복식 우승을 일궈냈고 90년 북경아시안게임
서는 한국의 단체전 우승에 주역을 맡았던 한국탁구의 얼굴이기도 하다"
그렇다. 유남규는 말 그대로 한국 남자 탁구의 '얼굴'로 인식되어왔다. 86년 서울 아
시안 게임과 88 올림픽 당시 유남규가 전해줬던 그 환희와 감격의 순간은 아직도 기
억 속에 생생하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예선전에서는 대충대충 어슬렁 거리다가 결
정적인 승부처에서 더 빛을 발했다는 유남규, TV 중계 되는 대회에서는 꼭 실력 이상
의 기량을 발휘해 한국 탁구의 인기몰이에 절실히 필요했던 'TV용 탁구선수' 유남규,
'녹색 테이블의 여우'라고 불릴 정도로 잔꾀가 뛰어나 상대방의 단점을 이용하는 두
뇌플레이에 있어서는 세계 그 어떤 선수도 따라갈 수 없다는 평을 받던 유남규… 유
남규의 쇼맨쉽 그리고 카리스마 때문에 그의 진정한 탁구 실력이 폄하되는 것은 결코
원하지 않는다. 그는 분명 '죽여주는 탁구선수'였다.
김택수는 현역 시절 전반부 7-8여년을 '유남규의 그늘'에 묻혀 살아온 적도 있었다.
다른 것 다 제쳐 놓고라도, 10여년간 두 사람이 복식 파트너로 뛰던 시절 내내 그 '환
상의 복식조'는 항상, 그리고 영원히 '유남규-김택수 조'라고 기억되어왔다. 단 한번
도 '김택수-유남규 조'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만큼 유남규는 한국 탁구를 견인해 왔
던 선수였다. 그들이 지난 89년 3월 제40회 도르트문트 세계선수권을 앞두고 처음으
로 복식 파트너로 기용되던 시점부터 이 두 젊은이들은 평생을 잊지 못 하는 선의의
경쟁자의 길을 걷게 된다. 유남규 같은 파트너와 경쟁자가 있어서 김택수는 날이 갈
수록 일취월장할 수 있었고, 김택수 같은 다크호스가 항상 고삐를 늦추지 않았기 때
문에 유남규 역시 '올림픽 신화'에 안주할 수 없었다. 유남규와 김택수, 김택수와 유
남규… 둘은 마치 '물과 기름'이었다. 하지만 이 두 명의 한국 탁구의 보배가 손을
잡고 녹색테이블을 달굴 때면, 그들을 지켜보던 모두가 '무아지경'으로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아마도 이런 결합을 두고 '조화'란 말을 조심스레 쓰리라 본다. 왼손과 오른
손의 조화, 영호남의 조화, 동아생명과 대우증권의 조화, 기교와 파워의 조화, 그리
고 화려함과 절제의 조화… 두 살 터울의 나이만 빼놓고 보면 절대로 함께 어울릴 수
없는 이 두 사람이 펼쳐내는 환상의 탁구쇼를 보면서… 분명 사람들끼리의 '궁합'은
존재하는 것 같다.
89년 도르트문트 세계선수권 대회에 호흡을 맞추기 시작한 김-유 커플, 유-김 커플은
곧 바로 동메달을 획득하며 그 후 각종 국제대회에서 환상의 콤비를 이룬다. 93년 예
테보리 세계선수권 동메달, 99년 네덜란드 세계선수권 동메달, 90년 북경 아시안 게
임 동메달, 94년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은메달,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동메달 등,
비록 세계 정상에 올라보지는 못했지만, 그나마 유-김 복식조였기 때문에 그 정도의
성적을 올릴 수 있었다는 평도 없지 않았다. 단식 라이벌로선 90년대 중반 이후 유남
규에게 절대적인 우세를 나타낸 김택수는 각종 크고 작은 부상과 체력 저하로 하향곡
선을 긋던 유남규가 지난 98년 방콕 아시안 게임 때 '후보 신세'에 불만을 품고 조기
귀국, 실질적인 은퇴를 선언함으로써 두 거물의 라이벌 구도는 막을 내리게 된다.
세계 속의 김택수
우리나라의 '비인기 종목' 선수들 대부분이 마찬가지겠지만, 그들은 이 땅에서보다
바다 건너 타지에서 훨씬 더 대우를 받고 인정을 받는 느낌이다. 김택수의 경우도 예
외는 아니다. 중국, 일본, 대만 등 동양의 탁구 강국을 순방할 때면 어딜 가든지 김
택수는 팬들의 사인 공세에 시달려야 한다. 탁구 선수가 팬들의 사인 공세에 시달려?
이해가 안 된다. 프로 야구 선수도 아니고 프로 농구 선수도 아닌 탁구 세계 탑 랭커
한테 사인을 받아? 대만의 한 팬은 대만에서 열렸던 한 국제 대회의 현지 중계방송을
시청하는 도중 TV 화면에 나온 김택수의 얼굴을 다시 카메라로 찍어 김택수에게 보내
주기도 했다. 김택수의 집에서 보았던 수백장의 사진 속엔 적지 않은 수의 중국 여성
팬들과 다정하게(?) 찍은 사진들 때문에 부인 김조순의 바가지도 피해갈 수 없었다.
현 여자 탁구 세계 랭킹 1위인 중국의 왕란 선수의 취미 생활에 대한 일화를 들어보
면 더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김택수가 한창 펄펄 날기 시작했던 95년, 그러니까
왕란 선수가 학생시절부터 그녀는 틈만 나면 김택수의 경기 장면 비디오를 시청하면
서 '여가 선용'을 한다. 대부분의 신예 중국 선수들의 '탁구 히어로'는 발드너와 김
택수로 꼽힌다고 하니 기뻐해야 할 일인지 울어야 할 일인지 모르겠다.
김택수에 대한 대외적인 관심은 동양권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유럽 최강의 프로 탁구
리그인 분데스리가의 명문 탁구클럽 '그랜저우' 팀은 지난 97년 5월 영국의 맨체스터
에서 열렸던 세계선수권대회에 어깨부상으로 남자단식 32강전에서 탈락한 김택수를
영입하기 위해 온갖 러브콜을 보내왔다. 10개월 임대 형식으로 연봉 15만 달러라는,
당시 탁구 선수에게는 잊을 수 없는 거래를 제안한 것이었다. '그랜저우' 클럽은 삼
소노프, 공링후이, 류궈량 등, 대부분 당시 세계 랭킹 10위 권에 속해 있던 탑 클래
스 선수들을 보유하고 리그 2위를 달리고 있던 강팀이었고, 김택수까지 영입해서 '펜
홀더 전형'까지 보강하려는 의도였다. 소속팀 대우증권 역시 팀의 기둥이었던 김택수
를 '좀 더 큰 무대에서 세계적인 선수들과 경쟁하며 기량을 향상시킨다'는 취지에는
동감했지만, 여러 가지 민감한 팀 사정 때문에 결렬되고 말았다. 유럽 측의 끈질긴
'김택수 스카우트'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98년 9월에는 프랑스의 1부리그 클럽인
Caen(까엥)에서 10개월 임대 조건으로 1억5천만원을 제시했다. 98년 10월부터 99년
5월까지 까엥 팀 소속으로 탁구를 좀 쳐달라는 얘기였고, 그 기간 동안 국가대표 소
속팀 복귀에 대한 규제는 전혀 없었다. 태극마크는 언제라도 달게 해 줄 테니 '비
는 시간'에 와서 라켓 좀 잡아 달라는 제안이었다. 결국 김택수는 10여년 만에 다
시 한번 유럽으로 복귀한다. 프랑스 북부에 위치한 까엥에 적을 두었던 기간 동안
김택수는 아마도 일생일대 가장 감정적으로 up 되어 있던 시점이었을 것이다. 프랑
스 진출 2개월 뒤인 98년 12월엔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의 기적적인 금메달 잔치가
있었고 그의 천년배필 김조순과의 교제가 한참 무르익었을 때도 역시 그가 프랑스
까엥 소속으로 운동을 했을 때니까 말이다.
김택수의 길지 않은 일대를 조사하고 공부하면서 필자는 한 가지 깜짝 놀랄만한 사실
을 발견했다. 미국의 스포츠 영웅 타이거 우즈, 안드레 아가시, 마이클 조던 등이 세
게 스포츠 마케팅의 시장을 주도하는 대표적인 선수였다면, 김택수 또한 '우리가 모
르는 동안' 세계적인 탁구 용품사의 간판 얼굴로 활동하고 있었다. 일본의 버터플라
이 사는 스웨덴의 '발드너 시리즈', '페르손 시리즈', 그리고 크로아티아의 '프리모
락 시리즈'에 이어 얼마 전 펜홀더 전형 전용 라켓인 '김택수 시리즈'를 출시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아마도 현존하는 세계 시장의 탁구 라켓 중에 가장 비싼 제품 중
에 하나라고 한다. 다시 한번 굳이 탁구를(Table Tennis)를 테니스(Tennis)에 비유한
다면, 김택수의 지속적인 세계 랭킹을 토대로 어쩌면 당연한 결과로 보여질 수도 있
으나, 국내 그 어떤 선수가 자기 이름을 건 라켓이 세계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단 말
인가… 몰타의 탁구 팬들이 들으면 '경기'할 소리가 아니란 말인가…
김택수의 '사는 이야기' &연금 '만땅' 커플
김택수의 명전 취재는 이례적으로 2번의 인터뷰가 필요했다. 철저한 '탁구 이야기'를
듣기 위해 소속팀 담배인삼공사의 훈련장인 상무 체육관으로 한 번 갔었고, 김택수의
'사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그의 송파 보금자리를 찾았다. 원래는 김택수와 소주를
한잔 하려고 했었다. 상무체육관에서 김택수와 얘기를 나누는 도중, 왠지 모르게 '이
사람 술 한잔 들어가면 진짜 재미있는 사림이겠다'는 생각이 들어 저녁 약속을 했지
만, 그가 급하게 지방 대회에 출전하는 바람에 소주 약속은 무산되고 그의 신혼살림
집을 대신 찾았다.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김택수의 반려자는 바로 96년 애틀
란타 올림픽 여자 양궁 단체전 금메달리스트인 김조순이다. 사실, 필자의 성격이 고
약해서인지 '김택수-김조순' 정도의 스타 커플이라면 무엇보다도 '연금'이 궁금했었
다. 둘이 합쳐서 도대체 얼마나 받는지 말이다. ^^ 이미 김택수의 1차 인터뷰를 통해
연금에 대한 이야기를 명확히 들었기 때문에 그의 집을 찾았을 땐 그냥 아주 거침 없
이 '연금 커플'이란 표현을 쓸 수 있었다. 이에 받아 치는 김조순의 멘트가 더 압권
이다. "우리 연금 '만땅' 커플이예요… ^^
김택수와 김조순은 98년 6월, 태릉 선수촌 합숙 때 처음 만나게 되었다. 대표팀 선수
들의 최대 악몽 중에 하나였던 '불암산 합동 등반' 당시 두 사람은 모두 부상 때문
에 '도보조'에 속해 있었고, 하산길에 우연히 동행을 하게 된 김택수와 김조순은 '불
꽃이 찌링찌링' 하는 그런 첫 만남은 아니었지만, 둘의 첫 만남은 하여튼 그렇게 이
루어졌다. 내려오는 길에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둘 다 잘 기억은 못한다. 하지만 (필
자 역시 그를 만나고서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김택수 특유의 '입담'에 김조순은 호
감이 갔던 것 만큼은 사실이다. 처음에는 그저 친한 '운동 선후배' 사이였지만, 같은
해 12월 방콕 아시안 게임에 두 사람 모두 '동반 우승'을 하면서 둘의 사이는 좀 더
끈끈해 진다. 전화, 편지, 삐삐를 통해 서로 격려하며 응원하고 자신이 금메달을 딴
것 보다도 상대방의 금메달 소식에 더 감격한 걸 보면 제 아무리 선후배 사이라고
하더라도… 이미 '사건'은 터졌던 것이다.
이제 막 불꽃을 당기려던 두 사람에게 시련도 없지 않았다. 2000년 봄, 좀 더 홀가분
한 상태에서 운동에 전념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결혼 계획을 발표했던 두 사람에게 집
중되는 언론의 관심 그리고 인터뷰 요청으로 인해 먼저 나가 떨어진 사람은 바로 김
조순이었다. 극도의 집중력과 심적 평정을 요구하는 양궁 선수가 감당하기 쉽지 않은
나날들이었다. 결과는 시드니 올림픽 예선 탈락. 김조순의 올림픽 2관왕 꿈은 그렇
게 무너졌고 김조순의 충격으로 인해 김택수 역시 올림픽 본선 무대에서 흔들렸다.
단식 1회전 탈락, 복식 8강 탈락… 잘 나가던 스타 커플이 꿈꾸던 최대의 결혼 선물,
'올림픽 금메달 그리고 명예로운 은퇴'는 그렇게 고스란히 날아가 버렸다. 이렇게 어
려운 시기를 함께 위로하며 극복했던 것이 오히려 둘의 사이를 더욱 탄탄하게 만들었
는지도 모른다. 2000년 12월23일 올림픽 파크텔 결혼식장에서 둘은 황영조의 사회로,
그리고 김운용 회장의 주례로 화촉을 밝힌다.
김택수와 김조순은 아주 재미있게 살고 있었다. 앞으로 죽을 때까지 매달 꼬박꼬박
200만원씩의 수입이 보장되니 사는 게 재미없을 일도 없겠지만… 송파에 자리한 그들
의 보금자리는 말 그대로 깨소금이 쏟아질 것만 같은 여느 신혼살림과 다를 바 없었
다. 김택수와 5년 차이가 나는 김조순 역시 이제 아줌마 냄새가 폴폴 나서 그런지,
운동 선수 특유의 수줍음과 낯가림 보다는 털털하고 시원시원하게 잘 웃는 그런 시원
스런 성격의, 그리고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였다. 수박을 내 놓으며 1시간 가량 대화
를 나누는 자리에서 김택수는 며칠 전 상무 체육관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필자가
소주 자리에서 찾고자 했던 그런 김택수의 '끼'가 발동 걸리기 시작했다. 와이프가
옆에 있는 자리에서도 은근히 '왕자병' 증세를 보이며 꺼내 놓는 중국의 '극성 (미모
의) 여성팬' 이야기에서부터, 카타르의 교민 아줌마들과 골프 라운딩까지 해야 할 정
도로 어딜 가나 '탁구 계의 얼굴 마담' 노릇을 해야 한다는 넋두리, 그리고 마루에
진열되어 있는 빈 양주병 3병을 하룻밤에 비워버린 이야기까지… 감히 누가 김택수를
이런 사람이었다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탁구대 앞에선 물불 가리지 않는 냉철
한 'Hitman 김택수' 일런지 몰라도, 사석에서의 김택수는 샤프한 이미지만큼 날렵하
고 재치 넘치는 위트를 발휘하는 대단한 재담꾼이었다. 김택수가 이야기 보따리를 푸
는 동안 김조순은 옆에서 웃음을 멈출 줄 모른다. '신참 부부' 김택수와 김조순이 놀
고(?) 있는 모습은 그저 보고만 있어도 즐겁고 좋아보였다.
올 늦가을이면 김택수는 아빠가 된다. 김택수-김조순 커플의 태교 방법은 무엇인지
궁금했다. 꿈 같은 신혼살림집에서 1년에 6개월도 채 못 사는 김택수가 집을 비울 때
면, 김조순은 아무리 심심해도 전자파 우글거린다는 인터넷 접속도 삼가고 있다. 비
록 임신 5개월 째지만 태아의 발차기 실력이 예사롭지 않다고 한다. 김택수의 경기
비디오를 태교 삼아 시청한다고 하는데, 도대체 그 집 아이는 뭐가 될는지 더 궁금
해 진다. 유전자로만 따지자면 잘못 나와도 '칼 루이스는 기본' 같다. 여자 아이가
태어나면 탁구 선수도 괜찮을 것 같다는 김택수의 의견에 김조순은 골프 쪽을 지지
한다. 김택수는 곧 바로 받아 친다. '애 골프 시킬 돈 되겠냐?'고… '연금 만땅 커플
' 맞는지… 아니 그러다가 자식까지 연금 받게 되는 건 아닌지… ^^
' 아무리 좋은 취지로 조직이 되어도 한국 사람들 여럿 모이기만 하면 결국은 파벌 싸
움하고 갈라지는 꼴 보기 싫어서' 일체 스포츠인 모임에 참여하기 싫어하는 김택수-
김조순 커플이 유일하게 활동하는 모임이 하나 있다. 바로 OB 스포츠인들이 모여서
불우한 환경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함께하는 사람들' 이란 봉사 활동이다. 현역 선
수의 빡빡한 스케줄 때문에 다른 사람들만큼 왕성한 활동은 못 하고 있지만, 그 모임
만큼은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남들이 하는 건 다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김택수
의 지론 덕택에 골프면 골프, 바둑이면 바둑, 김택수는 못 하는 게 없다. 골프 실력
도 싱글 수준이라고 하니 프로 선수처럼 화려한 스폿라이트를 받지 못하는 탁구 선수
김택수가 이런 만능 '르네상스 맨(Renaissance Man)' 이었는지 그 누가 알았을까? 김
택수의 인간적인 측면은 분명 일대 '발견'이었다. 어찌 보면 김택수는 실속파 중에
실속파이기도 하다. '빛 좋은 개살구' 같은 여느 프로 선수처럼 빚을 내어 외제차를
끌고 다니지 않아도 김택수는 챙길 것 다 챙겨가며 인생을 enjoy 하고 있다. 남 부럽
지 않은 삶이다. 5살 연하 이쁜이 와이프에게 '2006년 아테네'를 강조하며 '올림픽
금메달 한(限)풀이'를 다짐하는 김택수의 모습을 보며 필자는 미소를 머금는다.
김택수 노컷 인터뷰 l
후추:이런 인터뷰 항상 그렇듯이, 어린 시절이나 그런 얘기부터 시작을 하겠습니다.
^^ 처음에 어떻게 탁구를 시작하게 되셨죠?
김택수:근데 진짜 탁구 시작할려고 한 게 아니구요, 왜 초등학교 때 특별활동 시간
있잖아요. 그때 친구 두 명이 수업 끝나고 그걸, 탁구를 하는 거에요. 그래서 저는
인제 동네 친구들 두 명, 저까지 세 명이 집이 같은 동네여가지구, 혼자 맨날 집에
가는 거 재미없잖아요. 그래서 맨날 걔네들 탁구 치는 걸 구경하고 있다가 끝나고 같
이 오고 같이 오고. 근데 또 저도 심심하잖아요. 그래 가지고 인제 같이 저도 재미
로 하다가…
후추:집에 같이 가실려고 처음에는?
김택수:예, 인제 친구들이니까, 동네도 같고 그래 가지구. 근데, 그 친구들은 다 관
두고 지금은 나만 해요, 어떻게 반대로 돼 가지구 ^^
후:그때가 4학년때죠?
김:예, 4학년때.
후:그때 탁구 시작하신 다음에 중3때 우승 많이 하셨죠?
김:중학교 3학년때, 3학년 초에 올라가서 첫 우승했죠. 초등학교 때는 전국에서 개인
전 3위 입상이 최고였구요.
후:예, 그럼 중3 그 무렵부터 전국적으로 슬슬 유명한 선수가 되신 거네요?
김:예, 그래 가지구 고등학교 1학년 올라가면서, 청소년 대표 시작하면서 대표팀 훈
련 형들하고 같이 하면서 그때부터 쫌 좋아졌던 거 같애요.
후:스웨덴 갔다 오셨잖아요?
김:예, 그때가 고등학교 2학년때… 4개월 갔다 왔어요.
후:9월 달에 가셔서 4개월 계셨었죠.
김:거기 이제 그때 스웨덴 프로리그에요, 제가 뛸 수 있었어요.
후:어떻게 가게 되신 거에요?
김:협회차원에서 보내줬었죠.
후:유망주들?
김;예, 근데 제가 인제 거기 가서 잘 했어요 어떻게 잘 돼 가지고…
후:그때 같이 훈련하셨던 선수들 기억나세요?
김:스웨덴 선수들요? 지금까지도 잘 하고 있는 발드너 선수, 페르손, 에펠그린이라든
지, 다 같이 했죠.
후:그때 스웨덴 대표 거의 다 같이 다 합류했다 그러던데…
김:예, 대표팀 훈련했을 때 들어간 거니까 같이.
후:그때 가셨던 마을이 참 경치가 좋았다고 말씀 많이 하시는 거 봤는데…
김:예, 스웨덴 가 보면요, 시내만 빼 놓고는… 지방 쪽으로 가면 공기도 좋고, 우리
하고는 많이 틀려요. 이렇게 우리는 복잡한데 거기는 여유가 있고 공기도 좋고.
후:언어의 문제는 없으셨어요? 4개월이긴 하지만…
김:그 당시는 이제 어렸을 때니까 공부도 하면서, 쪼끔쪼끔… 그래서 지금은 인제 뭐
다니면서 인터뷰 거의 할 정도…
후:영어로요?
김:예, 그래 봐야 뭐, 다른 건 아니고 탁구적인 인터뷰 하는 거니까…
후:인터뷰를 많이 하세요? 주로 어디랑… 해외 나가시면, 해외에는 탁구 전문 잡지
같은 것도 많이 있나요?
김:그럼요, 다 있죠. 또 항상 거기는 시합 끝나고 나면 팬들이 있고, 또 기자들 이런
게 잘 돼 있으니까 항상 인터뷰 요청을 하고, 기본적으로 시합 끝나면 선수들이 그런
걸 당연히 해야 되고…
후:지금도 혹시 연락 되는 스웨덴 선수 계세요? 그때 당시 만났던… 친구라든지 뭐.
김:아뇨 뭐, 다 탁구 선수들이죠. 지금까지 보고 다니죠, 그때 그 선수들.
후:그니까 대회 나가면 맨날 보고 다니는 거?
김:그렇죠, 장난치고 시합 끝나면 술도 한 잔씩 하구요.
후:술 잘 드신다면서요?
김:아이 그냥 잘 하는 건 아니고 쪼끔 해요, 쪼끔.
후:주량 어느 정도 되세요?
김:그냥 분위기에 따라 틀려지죠 ^^
후:그게 젤 무서운 말인데 ^^
김:소주 한두 병 해요.
후:96년도에도 두 병 하신다고 하셨는데 그 동안 주량이 안 느셨나요? ^^
김:아뇨 ^^
후:국가 대표에 처음 언제 뽑히셨어요?
김:87년도요.
후:고등학교 2학년 때죠?
김:87년이면… 그렇죠, 고등학교 2학년에서 3학년 올라가면서 인제… 2월달이니까…
후:그게 아마 그때 당시에는 최연소 국가대표 기록 아니었나요?
김;모르겠어요 그 당시에 나이는… 최연소인지는 모르겠는데 나이는 어렸었어요.
후:최연소였는데 지금은 깨졌죠. 유승민 선수 때문에.
김:대표 선수 경력은 제가 가장 오랠 거에요.
후:그럼 몇 년 된 거에요?
김:87년부터 지금까지니까…
후:15년째네요?
김:그렇죠, 햇수로 15년째죠.
후:86년에 청소년 대회에서 북한 꺾고 3관왕 하셨던 거 기억 나세요?
김:2관왕이었죠.
후:2관왕이었나요? 어떻게 어떻게 2관왕이었죠?
김;그때 일본 나고야에서 했을 때가… 단체전에서는 북한 이기고 우승을 했고요, 복
식에서 1등 했고, 혼합 복식 2등 하고, 단식에서는 이제 8강에서 지고…
후:근데 그때 청소년 대회 국내 선발전에서 유남규 선수랑 붙으신 거 기억 나세요?
김:글쎄 잘 모르겠어요.
후:그때 유남규 선수한테 지셨어요. 아마 유남규 vs 김택수 첫 대결이 아마 그 대회
로 알고 있어요. 그 대회에서 지셨거든요? 근데 오히려 그 (세계) 대회 나가셔서는
더 잘 하셨잖아요.
김:예
후:청소년 대회에서 우승하신 다음에 달라지신 점이라든지 그런 거 있었나요?
김:저한테는 국제 대회가, 그렇게 큰 대회가 처음이었고요, 굉장했었어요 그때. 북측
하고 결승전을 했는데… 분위기가 그 당시만 해도요, 북한 애들이 이기면 막 인공기
들고 내려 와서 체육관 휘젓고 난리치고 이랬을 때라고요. 그러고 막 이렇게 그 당시
에는 방 문도 꽉 잠그고 자라, 조총련들 혹시 누구 하면 열어주지 마라 이랬을 정도
니까요. 그때 분위기가 살벌했다고요. 시합장 딱 들어가면은 조총련들 쫙 있고요,
또 민단 쫙 있고… 그래서 하나 이기면 서로 난리고 막 이랬을 때니까요. 근데 그때
당시에 큰 게임에서 제가 두 게임을 잘 해 가지고… 그때 첫 경기였는데, 긴장에다
가 부담이 굉장히 뭐 이렇게… 그때는 북한 사람들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이상했을
땐데, 첫 시작이 쫌 좋았던거 같애요.
후:87년도 뉴델리 세계선수권 대회 기억나세요? 이 대회에서 이제 최연소, 대표팀에
서 최연소였잖아요. 이 대회에서 국제적으로 유명해 지셨잖아요.기억나세요 이 대회?
김:예, 이 대회에서는 64강에서 발드너 선수, 그 당시에 개인전에서 결승에 올라갔었
어요 이 선수, 스웨덴 선수가. 근데 그때 시합을 저희가 잘 했어요, 지긴 졌지만.
2-1로 막 이렇게 리드하다가 3-2로 졌거든요? 그것도 뭐 듀스 가서 막 지고 이래
가지고…
후:이 대회 이후에, 드디어 한국에도 새로운 별이 뜬다 그런 기사도 나오고 그랬던
걸로 기억하는데…
김:예, 그때 이후로… 국내에서도 완이형, 기택이형, 재형이형 이런 형들은 제가 고
등학교 때도 이겼었으니까…
후:그래요?
김:예, 저 중학교 때 완이형을 처음 이겼었어요.
후:그 분이 그때 몇 살이었었어요?
김:완이형 같은 경우가…
후:몇 년 선배에요?
김:한 8-9년 선배죠.
후:혹시 그때 발드너 선수가 알아 보지 않던가요? 그때 같이 훈련도 했었는데.
김:알아 보죠, 다 알아 보죠 그때. 같이 인사하고…
후:나이가 어떻게 돼요 발드너 선수.
김:65년생.
후:오래 했네… 그 양반 아직도 하잖아요?
김;예.
후:원래 탁구는 그렇게 (선수) 생명이 긴가요?
김:아뇨 아뇨, 그 유럽 선수들은 좀 많이 길었던 편인데, 저희 한국 같은 경우는 수
명이 많이 짧았죠. 왜 그러냐면, 완이형 기택이형 뭐 안재형 선배 다 20대에 관뒀으
니까요. 20대에 관두고 이래 가지고… 근데 이제 저희… 제가 쫌 오래 하고 있는거죠.
근데 그 생각 자체가, 선수 한 명 이렇게 나오는게 쉽지 않잖아요 재목이. 근데 이제
그 전에는 쫌 일찍일찍 관두고, 그리고 또 20대 후반만 되면 노장이라는 그런 생각이
앞서 있었고. 또 언론에서도 20대 후반 되고 그러면 한 게임, 후배들한테 한 번 지면…
질 수 있잖아요? 근데 뭐 체력이 다 됐다, 힘에 밀렸다, 뭐 이런 얘기 들으니까 자꾸…
안 그래도 후배들하고 하면 굉장히 벅찬데요. 그 부담이 얼마나 많이 되는데요, 후배
들하고… 정신적으로도… 당연히 이겨야 되니까요.
후:잘 해야 본전이니까?
김;예, 그런 부담감이 있는데, 질 수도 있는데 그걸 인제 그런 쪽으로 하니까 더 힘
들어지는 거에요. 그렇다고 해서 뭐 항상 이길 수만은 없는거고… 그럼 부담감 때문
에 인제 선배들이… 또 힘들기도 하고 운동이. 그래서 쫌 빨리 관뒀던 거 같애요.
후:89년도 유로 아시아 토너먼트 대회에서 처음으로 성인 대회 국제 대회 우승하셨어
요. 근데 그때 결승전 상대가 누군지 기억나세요?
김:예, 기택이형이었어요.
후:김기택 선수였는데, 이때 김기택 선수가 당시 세계 1위인 장자량 선수를 꺾고 결
승에 올라가서 전부 다 김기택 선수가 이길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근데 오히려 그때
그루바랑 첸룽찬 이기고 올라가서 이기셨죠? 뒤집고. 이 대회 이후에 완전히 뜨셨죠
속된 말로. ^^ 신문에도 막 대문짝만하게 나고. 이 대회 이후에 가장 개인적으로 바
뀐 게 있다면 뭐가 있을까요?
김:자신감이죠 역시. 운동 선수라는 거는 훈련만 해 가지고 좋아진다는 거는 그거는
쫌 말이 안 맞는 얘기고요. 물론 훈련 해서도 기량 향상이 되는 거지만, 시합을 통해
서 기량 향상이 가장 많이 되거든요. 그런 자신감들이 몸에 이렇게 딱 왔을 때 실력
이 향상이 되고, 또 누구하고 하더라도 두려움이 떨어지고. 그런 자신감들, 중국 선
수들이나-중국 선수들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고, 유럽 선수들한테도 이기고 하니까…
후:김택수 선수 인터뷰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유남규 선수 질문이 많이 나올데요,
그건 어쩔 수 없다는 거 아시죠? ^^
김:예, 아이 근데, 저는 제가 이렇게, 같이 이렇게 지금까지 할 수 있었던 거는 가장
옆에서… 물론 라이벌이다 이런 얘기도 나오고 그런 거는… 지면 다른 사람보다 주위
에서 왜 졌냐고 얘기하고, 실력적으로도 낫고 왜 졌냐… 그 얘기 들으면 제가 가장 열
받죠 솔직히. 근데 또 어떻게 한 편으로 보면은 유남규 같은 선배가 있었기 때문에 제
가 지금까지 계속 이렇게,어떤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잘 오지 않았냐 이렇게 생각해요.
후:나이 차이는 얼마 안 나시죠?
김:1년 선배에요.
후:예, 근데 상당히 선배인걸로 저희들은 알고 있잖아요. 이 유남규 선수랑 89년도
도르트문트 세계선수권대회 앞두고 처음으로 복식조 하셨는데 이 때 왜 갑자기 같이
하시게 된 거에요?
김:글쎄 인제 뭐… 그때는 제가 많이 올라오고 하니까, 또 안재형 선배 그 당시만 해
도 제가 많이 이겼고…
후:예, 그때 유남규-안재형 그렇게가 우리 나라 최고의 복식조였었는데, 이 대회 15
일 앞두고 갑자기 바뀌었어요. 그래 가지고 김택수 선수랑 유남규 선수랑 조를 만들
었는데, 사전에 협회에서 민 건가요, 그거를?
김:글쎄요, 그건 모르겠어요. 근데 저는 많이 부담되죠, 일단 다 선배들인데. 복식
그 당시만 해도. 그래서 쫌 약간 선배들하고 부담이 되더라구요.
후:근데 이 대회가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중요한 대회 아니었나요?
김:예, 중요한 대회였죠.
후:병역 문제 걸려있고…
김:예, 그런 것도 있었고...
후:근데 이 대회에서 성적이…
김:안 좋았죠.
후:안 좋았죠? 그래서 어떻게 되셨어요 그 다음에요?
김:뭐 89년 이제 단체전에서도 소련한테 8강에서 지고, 굉장히… 저희가 전력 상에서
는 우세했는데 제가 3점을 뺏겼어요, 세 번 뛰어서 세 번 다 지는 바람에…한 점만 잡
아도 이길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4강 갔으면 그 당시만 해도 병역 혜택이었었다구요.
후:한 번만 이기면?
김:예, 근데 운동 선수는 병역 혜택이 이런 게, 병역에 대한 게 굉장히 엄청나게 중
요한 거에요. 그래 가지고 그거 지고, 시합 끝나고 쇼크를 좀 많이 먹었죠.
후:(군대) 가는구나? ^^
김:예 ^^
후:근데 김택수 선수는 본인 생각했을 때, 가장 본인이 잘 했던 경기 그러면 무슨 경
기 생각나세요?
김:뭐 시합은 잘했던거 많이 있고… 90년도 아시안 게임 때도 쫌 잘 했던 거 같고.
후:역시… ^^ 90년 아시안 게임 결승전, 북한하고. 그 세 경기 잡으시고.
김:근데 그때 굉장히, 그때도 빅 게임이었어요. 저녁 7시에 시합을 들어갔는데요, 새
벽 1시쯤 끝났어요.
후:6시간…
김:예, 그래서 뭐 김성희 선수 같은 경우는 시합 끝나고 막 쓰러져 가지고 실려나가
고 그랬을 정도로 접전이었으니까요.
후:그때 몸이 상당히 안 좋으셨다고…
김:아 그 시합 전, 훈련 하는 과정에서 인제 무릎도 안 좋고 이래 가지고…
후:예, 무릎 부상 당하셨다고…
김:한 달 전에 수술 하느냐 마느냐, 시합 가느냐 못가냐 그랬는데, 병원에 상의도 많
이 해 보고, 치료 받고 약물 치료 해 가지고 나갔죠.
후:근데 첫 단식에서 이근상 선수를, 진짜 아무도 생각 안 하고 있었는데 이기셨어요.
기억 나세요?
김:예
후:근데 이근상 선수가 그 전에 누구를 이겼었냐면… 중국선수들 이겼죠?
김:예, 중국 선수들도 다 이겼죠. 그 당시에는 세계 랭킹… 1위 실력이 됐었다구요,
이근상 선수가.
후:예, 수비를 워낙 잘 해 가지고 이길 수가 없다고 했는데… 그때 이겼을 때 벤치에
서 뭐라고 하던가요? 기억이 안 나시나?
김:지금은 뭐 기억이 안 나죠 뭐
후:기억 안 나시죠? ^^; 그 마지막에 제일 중요한 그, 최경섭 선수하고 경기할 때,
이거 이기면 저희가 이기는 거고, 지면 지는 거고. 마지막 경기 나가시기 전에 기분
이 어떠셨어요?
김:그때는 이제 훈련장에서 연습을 하는데 인제… 4-3으로 저희가 지고 있었어요.
근데 박지현 선배가 이근상 선수하고 하게 됐는데, 북한 최경섭 선수하고 둘이 연습
장에서… 저도 이근상 선수가 이길 줄, 당연히 실력적으로 누가 봐도 이근상 선수가
앞서니까 우리 끝나는 줄 알았어요 5-3으로.
후:거기서 끝나야 정상인 게임이었죠.
김:예, 근데 이제 1세트를 이겼다고 하더라구요. 그러더니 쫌 있다가 강희찬 선수가
갑자기 뛰어 와서 시합 준비를 하래요. 어우 근데 긴장이 빡~ 되더라구요 막. 야~
그래 가지고…
후:실력적으로는 해 볼 만 하지 않았었나요?
김:최경섭 선수한테요?
후:예.
김;아니 실력적으로는 제가 좀 유리했죠.
후:그러니까요.
김:근데 이제 그 마지막 시합이라고 하는 거는 서로, 긴장되고 하니까요.
후:거기에 또 북한…
김;네, 긴장되고 하는 그런 거기 때문에 몰르죠 뭐.
후:이 경기 보시다가요, 국내에서 돌아가신 분도 계시대요. TV 보다가 심장마비로 돌
아가셨대요.
김;예예…
후;별명이 뭐죠? 그 다들 알고는 있지만… ^^
김:아이 저는 모르겠어요 진짜. ^^
후:순둥이라고… ^^
김:아이, 그건 아닌데… 별명은 없어요.
후:신문이나 그런 데서는 별명이 순둥인데…
김:예, 개인적으로는… 이 별명에 대해서 솔직히 기분이 안 좋아요.
후:예, 나는 독종같애 오히려. 그 실제 경기 하실 때 보면 정말 완전히… 제대로 악
받쳐서 경기하시잖아요. 근데 어쩌다가 이런 별명이 생겼죠?
김:근데 옛날에 뭐… 그런거 같애요, 하도 이렇게 이기고 있다가 지고 이런게 많으니
까. 또 승부 같은 거 인정을 팍팍 해 버리니까. 지는 거에 대해서 많이 그… 핑계를
대거나 그런거 보다 이건 내가 부족했다 하고 인정을 해 버리니까… 그래서 그런 거
같애요.
후;90년에 서울장충체육관에서 열렸던 복식컵 우승하셨죠?
김:예~
후:이게 아마 유남규 선수랑 조 짜서 우승한 몇 개 안 되는 대회 중에 하나였는데.
김:예, 굉장히 큰 대회였어요 그 복식컵 대회는
후:1회 대회였어요.
김:예, 1회 대회였죠
후:굉장히 큰 대횐데 현정화-홍차옥 조 동반 우승하고… 이때 어느 조 이기고 우승하
신지 기억나세요?
김:예, 그 때 당시에 인제 결승에서 독일 선수들요. 페치노-로스코프.
후:예, 로스코프 선수. 이 로스코프 선수 상당히 이제 자주 나오는 이름이죠. 김택수
선수랑 아주… 나중에 이건 물어보고… 이때 우승 상금이 얼마였죠?
김:3만불인걸로 알고 있어요.
후:딱 만 5천불씩 나누셨나요?
김:세금 떼고 해 갖고 뭐 만 5천불은 안 되고… ^^
후:하하하…
김:2회 대회도 라스베가스에서 했는데, 2회 대회도 우승했죠 우리가.
후:해외에서 우승하는거랑, 국내에서 우승하는 거랑 차이가 있나요?
김:글쎄요 뭐… 어떤 쪽으로 차이를 말씀하시는거죠?
후:그니까 뭐 예를 들어서, 해외에서 우승하는 게 더 어떻게 보면 스포트라이트를 받
을 수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상대적으로 가려질 수 있고. 그리고 경기면에서도 해외
에서 뛰는거랑 분명히 다를 거 아녜요.
김:근데 뭐 저 같은 경우는 해외에서 뛰고 해도 굉장히 많은 팬을 갖고 있어요. 오히
려 국내보다 훨~씬 많은 팬을 갖고 있어요. 중국 같은 데 가 봐도 알지만… 혹시 기
회가 되면 가 봐서 나중에 알 수 있으실 지 모르겠지만, 가보면은 정말 제 이름 한문
으로 김택수 딱 써 주면요, 이제 제 이름 김택수 못 알아 들으니까, 중국가면 발음이
틀리니까. 제 이름 써주면 웬만한 사람은 다 압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중국가서 살으
라 그래요. ^^
후:근데 중국 애들은 진짜 탁구 열기가 어때요?
김:어마어마해요. 정말 거… 지금 프로리그도 있구요, 중국에서 공링후이나 류궈량
이런 선수들 일년에 한 20만불씩 벌거에요 아마. 20만불이면, 달라로 20만불이면 중
국에선 엄청 난거죠. 재산이 뭐 제가 볼때는 한 10억, 20억대 되는 걸로 알고 있어요
공링후이는. 그니까 걔네들은 유럽 축구 같은 거 하면은, 뭐 멘체스터나 어디 이렇게
시합 하면은 자기네 친구들끼리 베팅을 뭐 5천불 만불씩 해요, 자기들끼리. 그리고
잃어도 뭐 눈 하나 깜짝 안 해요. ^^
후:대접을 되게 잘 해 주나부다 중국애들은…
김:예, 그렇죠.
후:두 번째 인기 스포츠잖아요, 축구 다음으로.
김:근데… 물론 지금은 축구가 지금 올라 와서 그렇지만, 내면에 깔려 있는 거는 탁
구가 엄~청나죠. 나이든 옛날 사람들 탁구 안 쳐본 사람들이 없고 뭐…
후:대회장, 경기장 같은 데 가도 관중들이 많이 오죠?
김:그럼요. 관중들이 정말 탁구 좋아하는게… 그때는 정문으로 들어가기 힘들어요.
후:제일 그게 심한 나라가, 탁구 열기가 심한 나라가 어디에요?
김:중국이죠 역시. 그리고 일본 같은 경우는 국민 의식이 있으니까 딱~ 점잖게 보고
후:스웨덴은 어때요?
김:스웨덴도 인기 좋고.
후:현정화-홍차옥 조 이때 동반 우승 하셨을 때요, 그때 가십 기사로 뭐가 났었냐면
요. 그 두 조끼리 시합을 하신다면서요?
김;예.
후:근데 6점 주고 하면은 이기고, 7점 주고 하면 진다고 하는데 이거 진짜에요?
김:예. 핸디를 그렇게 주고 해요.
후:오~
김:단식도 마찬가지에요. 여섯 점 일곱 점씩 주고 해요. 지금은 뭐 유지혜 김무교 일
곱 점씩 주고 하기도 하고.
후:그럼 이겨요?
김:그럼 이길 확률이 많죠.
후:아 근데 몰라요 그건 또? 확실친 않아요? 저희가 생각할 때 다른 스포츠 종목들은
남자랑 여자랑 어느 정도 레벨 차이가 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근데 탁구는 그런 게
쫌 적긴 하지만…
김:아니 적은 게 아니죠 핸디 일곱 개면…
후:6점 7점이면 큰 건가요?
김:큰 거죠 7점이면…
후:하긴 21점 중에 3분의 1이니까…
김:큰거죠.
후:저, 91년도에 남북단일팀 하셨는데 맨날 인제 싸우다가 같은 팀 되셨는데, 그때
분위기가 어떻게 하다가 만들어 지게 된거죠?
김:그 당시에는 인제 박철언 장관, 탁구에 관심 있고 이래 가지고…
후:통일 외교 하고 정치적인 면이 많이…
김:예, 정치적인 거였죠.
후:당시 실력으로 보면 어디가 더 나았나요? 우리가 쪼금…
김:비슷했어요. 정말 비슷했어. 남자도 비슷했고 여자도 비슷했고.
후:근데 그때 단식 멤버에, 단식 멤번가? 전부에 못 끼셨어요. 유남규 김성희 선수
가 에이스였고, 이근상 선수가 가끔 나오고…
김:아 전 뛰었죠.
후:중국전인가 뛰셨잖아요. 근데 대회 전 예상에 보면 중국전에는 김택수 선수 투입
하고, 스웨덴 전은 이근상 선수 투입한다 그랬죠?
김:예
후:근데 사실 그런 단일팀 아니었으면, 풀로 뛰셨을 거 아녜요?
김:예, 그렇죠.
후:근데 쫌 밀렸다는 생각은 안 드셨나요?
김:아니 그런 거 아니었어요. 스웨덴하고 저희가 8강할 때요, 단식도 뛰고 복식도 뛰
고 제가 들어가 있었어요. 근데 마지막 게임이어서, 저희가 3-1로 져 가지고 끝난거
죠. 만약 2-2 갔으면 제가 뛰었을 거에요.
후:나중에요?
김:예, 엔트리에 다 들어가 있었죠.
후;그때 북한 선수들하고는 어땠나요? 얘기 좀 해 주세요. 처음 같이 생활하신건데.
김:예 그 전에 뭐 자꾸 보고 이런 거는 있었는데, 그때 이제 우리측에서 요구한 거는
복식도 같이 하고, 혼합 복식도 같이 하고, 방도 같이 쓰자 복식 파트너끼리. 근데
이제 그건 무산됐죠. 그래 가지구 이제 층을 다르게 썼어요. 저희가 한 층 밑에 쓰고,
북한 애들이, 북측 애들이 한 층 위에 썼다고. 그래 가지고 이제… 그 당시에는 뭐
매일 축제 분위기죠. 운동 끝나면 총련에서 파티, 뭐 또 다음날 되면 민단에서 파티.
뭐 식사하러 갈 때 딱 보면은 사인 뭐 백장씩 이상씩 해야 밥 먹으러 가고 이렇게…
굉장했었어요. 그래 가지고 시합, 훈련하면서 왔다 갔다 하면서 보면은 그쪽에서도
못 보던 사람 한 서너 명 있고, 이쪽에도 탁구 관계자 외에 못 보던… 그럼 이제 안
기부에서 파견된 사람, 저쪽에는 또 인민무력부 이제 그런 데서 파견된 사람 그런 거
다 있었고. 근데 뭐 알면서도… 그리고 지내면서 선수들 방 왔다 갔다 하면서 친하
게 지내고…
후:형 아우 이렇게 하고?
김:그럼요, 근데 사상적으로 완전 생각이 틀려요.
후:어 그래요? 그걸 느끼세요?
김:그럼요. 완전히 틀려요.
후:그런 얘기가 나오면 민감해 지나요?
김:서로 안 꺼내고, 막 이렇게 인제 하는거죠.
후:그니까 완전히 다르게 사는,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는게 느껴져요?
김:그럼요, 딱 이렇게 딱… 있어요 그런거.
후:그럼 혹시 뭐 이런 말은 하지 말아라 그런 얘기 들으셨나요 위에서?
김:저희도 그 단일팀 하기 전에 교육을 받았죠. 근데 김성희 그 형 같은 경우도,
'아, 이거 단일팀 하면 피곤해서야…'
후:하하하
김:그 교육 받았던게요, 자기네들도 다 교육을 받죠.
후:받겠지.
김:그 저희도 인제 교육을 받고, 저희도 교육받고 이런건데, 그 당시에는 뭐… 그래
서 인제 그 시합이 끝나고 저 혼합복식 했던 유순복 선수 같은 경우는 얘기하면…
'우리 인제 다시 또 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 빨리 통일이 되고 뭐 이래야 되는데 그
런 얘기 하면. '아~ 거저 미국놈들 빨리 물러가야 되는데…'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는
거죠. 물러가면 다 통일이 되는 건줄 알고… 그래서 인제 나는 그런거 설명을 다 했
죠. '어떻게 그렇게 미국 애들만 물러간다고 바로 통일이 되겠니 응? 독일, 서독하고
동독하고 통일할 때는 왔다갔다 왕래도 굉장히 많았는데도 몇 년이 걸렸고, 바로 통
일하고 나서도 굉장히 문제도 많은데, 지금 우리는 왔다갔다도 하지 못하는 현실 속
에서, 미국 애들만 물러간다고 통일이 되겠니' 라고 하니까 애가 말을 못하는 거에
요. '야~ 택수 오빠 보니께, 답~답합니다. 안타깝습니다' 이러는거야. ^^
김택수 노컷 인터뷰 ll
후:91년도 6월에요, 국내 대회에서 강희찬 선수한테 패한 적 있으세요 남녀 실업 탁
구대회. 기억 나세요?
김:예예예
후:그… 어떻게 하다가 지셨어요? 방심했나요?
김:아니요, 방심한 거는 아니고, 그때 당시에는 솔직히 이기고 싶은 마음이 없었어
요. 그 당시에는 같은 동료로서, 같은 팀이고 복식 파트너고 그래 가지고 이기는 사
람이 3관왕이었어요.
후:아~
김:이기는 사람이 3관왕이었는데, 복식도 1등 했고, 단체 우리 팀이 1등했었고, 단식
하나 남았었어요. 둘이 결승에서 딱 했는데, 그 당시에 저 같은 경우는 쫌… ^^; 1등
도 해 봤고, 국내 대회 몇 번 1등도 해 보고 그래서 이 친구 좀 잘 해 봤으면 좋겠
다 싶어 가지고 쫌 이렇게… ^^;
후:91년도에 일본 마쓰모톤가? 거기서 IOC 회장컵 대회 우승하셨죠? 이 대회 굉장히
큰 대횐데.
김:예, 세계에서 8명만 이렇게, 사마란치컵이라고 해 가지고요 시합을 만들었어요.
후:8명 제일 잘 하는 사람만 불러서 하는건데, 이 대회에서 결국엔 결승에서…
김:발드너한테 이기고 우승했죠.
후:처음 이기신 거에요?
김:91년도면… 그렇죠, 공식 시합에서는 처음 이긴 거라고 볼 수 있죠. 그때 아주 경
기 내용이 좋았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굉장히 많은 일본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후:국제적으로 유명해 지셨죠. 대회 예선에서도 이기신 선수 보면 당시 한참 잘 나가
던 페르손이나 마웽거… 이 대회가 전체적인 김택수 선수 캐리어로 봤을 때도 상당히
중요한 우승 경력에 들어가는 거죠?
김:예, 그렇죠. 그거 이기고 나서 좀 국제적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죠.
후:올스타,월드 올스타 서킷 시리즈,유독 이 대회에서 상당히 강한 모습을 보이셨어요.
김:예, 근데 이제 저같은 경우는 펜홀더 탁구를 하고, 힘있는 파워 탁구를 많이 하다
보니까 체력적인 그런게 굉장히 저한테는 부담이 많이 돼요. 근데 이런 시합 같은 경
우에는 시합이 짧아요. 투어 개념으로 딱 돼 있어서 시합이 짧아요. 기간이 짧다고.
후:몇 일 하고 옮기고 그러죠?
김:예, 하루 이틀 하고 옮기고, 하루 이틀 만에 끝내는 시합이라고요. 그런 시합은
인제…제가 인제 지금도 물론 나이는 있지만, 하루 한 게임 딱 이렇게 긴장하고 하는
빅 게임 이런 거는 자신있어요.
후:96년까지 아홉번이나 우승하셨어요.
김:예, 굉장히 많이 우승했어요. 만약에 골프나 이런 따른 종목이었으면 어마어마했
을 거에요. ^^
후:타이거 우즈죠 그냥. ^^
김:엄청난 거죠 이런거는 ^^
후:외국 선수 중에요, 상대하기 어려운 선수 있으시죠?
김:중국 선수들이요 중국 선수들.
후:예를 들어 누구.
김:뭐, 중국 선수들은 다 힘들죠. 그리고 또, 걔네들 (이기고) 자신감 생길만 하면
밑에 애들이 나와서 괴롭히고…
후:걔네는 세대교체가 워낙 빨리 되나 봐요?
김:그럼요 예.
후:워낙 많으니까… 선수층이 넓으니까 그렇구나.
김:지금 뭐 공링후이 이런 애들 스물 일곱, 여섯 이런 정도 밖에 안 됐는데요 뭐.
후:근데 걔네, 중국 애들하고 유럽 애들하고 뭐가 그렇게 달라요?
김:중국 애들은 아주 탁구 기술이 세밀하고 정확하죠, 변화도 있고. 그니까 잘 하는
애들이 굉장히 많으니까 걔네들 잘 하는 수준에서 계속 연습을 하다 보니까… 한 예
로, 중국 오픈 끝나고 아시안 게임 전에요, 저희가 중국 애들하고 일주일 동안 합동
훈련 했어요. 근데 이제 훈련하면서, 하다가… 거기 이제 탁구대가 22대가 딱 있더라
구요, 훈련하는 데가. 근데 이제 저희는 아침 일찍 하고, 저녁에는 청소년 애들이 훈
련하더라구요, 중국 애들이. 거기서 연습을 하는데, 한 번은 거기서 청소년 애들이
훈련을 한대요. 그래 가지고 어떻게 얘길 해 가지고 한 번 봤는데, 우리 나라는 탁구
신동이라고 해서 유승민 유승민 이러잖아요? 근데 유승민만큼 치는 애들이요, 44명
이서 훈련을 하는 거에요. 그 정도 실력 되는 애들이. 거기는 뭐 탁구 학교도 있고
요, 굉장히… 공식 선수로 등록된 인구가 700만 이상 될 거에요. 우리는 전체 초등
학교부터 전체 대학 뭐 해 가지고 2천명 되나?
후:계란으로 바위치는 격이라고 비교하면 되겠네요.
김:지금도 세계랭킹 10위까지 안에 5명 들어가 있어요.
후:지금 1위가 누구죠?
김:1, 2, 3, 4. 6위가 중국 애들, 아니, 1, 2, 3, 5, 6위가.
후:지금 1등은 누구에요 그럼?
김:왕리친 선수라고. 2위가 공링후이 선수고.
후:그런 랭킹이요, 물론 국가대표급 선수들이야 랭킹 뭐,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든 듣
겠지만, 일반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죽었다 깨나도 그건 모르거든요? 스포츠 신문이
나 이런 데서 탁구 한 번 내 주지 않는 이상? 그건 어디서 알아요?
김:국제연맹이라고 있어요. www.ittf.com 이라고.
후:ittf.com이요? 여기 가면 랭킹 있다?
김:여기 가면 인제 국제탁구연맹 소식도 있고, 랭킹 리스트도 나와 있고.
후:그 투어는 따로 점수 집계 되죠?
김:랭킹 카운트는 매 시합을 카운트해요. 컴퓨터 랭킹이기 때문에 아주 정확해요. 지
금 세계 대회 끝나서 제가 지금 7위로 다시 올라왔는데, 또 다른 시합이 있다 그러면
그 시합 끝나면 카운트를 해 가지고 바로바로 올라가죠.
후:인터넷도 많이 하시나요?
김:예
후:어디서 하세요?
김:저는 광양, 또 집에 컴퓨터가 있으니까.
후;로스코프 선수, 아까 얘기하려다가 뒤로 미뤘는데, 이 선수랑은 상당히 인연 많으
신데… 이거 기억 나세요? 92년도 월드 올스타 서킷 3차 대회에 이 선수 대신 나가셨
어요. 대리 출전하셨다구요. 그랬는데 우승하셨어요.
김:아~ 한 번인가 그랬을 거에요.
후:그때 그러셨고, 98년도 월드컵 탁구 대회에서…
김:제가 한 번 졌죠, 결승에서.
후:예, 결승에서, 굉장히 중요한 대횐데 졌고. 96년도가 제일 아까웠죠?
김:예, 올림픽 때 8강에서.
후:그때 공링후이를 잡으셨어요 16강에서. 그래서 이제 우승이다, 올림픽 금메달이다
그랬는데 오히려 이 선수한테 잡혔어요.
김:굉장히 아깝게 시합을 졌고요, 그 친구가 굉장히 또 상승세를 탔고 그래 가지고…
큰 대회는 운이 많이 따라야 돼요, 운동도 운이 따라야 돼. 물론 이제 실력도 실력이
지만 일방적으로 이기지 않는다면야… 세계 수준 되면은요, 긴장되고 하면은요 거의
나인틴, 듀스 시합이거든요? 거기서 운이 따라줘야 돼요. 안 풀릴 때는 뭐 에지도 나
오고 막 이런 느낌이 안 좋다구요.
후:이 선수랑 뭐 특별히 전형상의 어려움이 있거나 그런 거는 없었나요?
김:예, 꼭 그런 건 아닌데요.
후:실력적으로는 지실 이유가 전혀 없는데…
김:예, 아니 실력적으로는 이겼다 졌다 할 수 있는… 10위권 이내에는 항상 이겼다
졌다 할 수 있거든요.
후:이 로스코프 선수는 원래 복식에서 더 잘하지 않았나요?
김:예, 복식도 잘 하고요, 근데 단식도 잘 했어요.
후:92년 4월에 삭발하신거 기억나세요?
김:예 ^^;
후:왜 하신 거에요? ^^
김:글쎄 뭐 항간에 소문은 많지만 그 당시에는 올림픽 앞두고요,새로운 마음가짐으로
후:인터뷰에는 '나태해진 정신자세를 가다듬기 위해서 삭발은 했다'고 하셨는데…
김:아니 근데 이제… 그때 이제 어떻게 깎게 됐냐면요 솔직히요… ^^ 올림픽을 앞두
고 뭔가 새로운 마음에서 뭔가를 쫌 해보고 싶은데, 그게 어떻게 얘기가 됐냐면요
'머리 한 번 깎아 볼까? 이렇게 삭발 한 번 해 봐? 머릴 팍 한 번 쳐 봐?' 했는데 옆
에서 강희찬 선수가 이렇게 불씨를 지폈죠. '니가 어떻게 깎어 씨~' 이런거죠. ^^ 그
래 가지구 인제 나보고 못 깎는다 그래서 자존심이 팍 상하더라구요. 저 태어나서 삭
발 한 번도 안 해 봤어요. 그래서 이제 자존심을 팍 긁더라구요. '그래?' 그래가지구
뭐 깎으면 자기가 10만원을 내 놓는대. ^^ 그래가지구 인제 마음은 그거였지만, 자존
심도 상하고, 남자가 한다 한 번 말했는데… 그리고 정신적인 그런 것도 쫌 다듬고,
나는 그런 동기였었는데.
후:신문에는 뭐라고 나왔냐면요, 그 전에 유남규 선수한테 두 번 연속 지셨어요. 종
합선수권이랑 국내최강전 두 번 지셔서 김택수가 이를 갈았다, 여기서 인제 쇼크 먹
고 열심히 운동할라고 그러는구나 하고 전부 다 났어요.
김:아니 근데 그건 아니었구요, 저는 그래요, 시합이라는게 질 수도 있고 이길 수도
있고. 뭐 내용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거 같애요.
후:91년도 이후에는 유남규 선수에게 거의 안 지셨어요. 그 전까지 좀 지시구, 그 이
후에는 거의 이기셨거든요.
후:근데 사람들이 옛날에는, 그 당시만 해도 탁구를 많이 봤다구요. 근데 유독 또 어
떻게 TV 중계만 하면 지고 그랬다구요. 이긴거는 인제 TV 중계 안 됐을 때. 그 뒤로
는 탁구가 쪼끔 관심 떨어지면서, 그 뒤로 이긴거는 TV에 안 나오고…
김:예, 저도 그러니까 항상 보면은, 진짜 너무너무 아깝게 지는, 그런 장면을 많이
봤어요. 이겨도 뭐 월드 서킷이나 해외 나가서 이기시니까, 그런거 우리나라 위성중
계 안 해 주잖아요. 그러니까 빅 게임이다 이런거 할 때 항상 기억나는게 김택수는
'2대 3'. 한국 단체전 같은 경우는 김택수가 단식 두 경기 이기구 꼭 복식이나 막판
에 어그러져 가지구 2-3으로 진다, 난 그 기억이 항상 기억에 남아요.
김:뭐 팬들도, 딱 보면은 탁구인들도 국내 시합하는 것만 봤잖아요. 그리고 우리 선
수들하고 시합하는 거니까 질이 높을 수가 없죠. 그러니까 이제 외국 나가서 외국 선
수들하고 하는 거 보면 질이 높아지잖아요. 제 탁구도 질이 높아지고. 그래서 탁구인
들이 나가서 하는 거 보고 많이 놀랐대요. '야, 탁구 잘 친다 잘 친다 말만 들었었지,
정말 탁구 수준이 어느 정돈지는…' 물론 저도 이제 질 수도 있고 하지만…
후:실력적으로도 위셨고, 해외 나가서 유명하시고 그런데두, 90년대 초중반까지두 유
남규 선수가 더 유명했어요 솔직히.
김:아~ 뭐 남규형 같은 경우는 그렇죠. '86, 뭐 '88 올림픽 타이틀 그게 엄청난 그거
죠, 정말 대단한 선수였죠.
후:그런 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아니 저는… 그 당시에 주위에서는 라이벌이다 라이벌이다, 나는 정말 생전… 옆
에서 지켜보면서 어떻게 노력해 가지고 어떻게 해서 금메달 땄다 그런 걸 다 봐 왔고,
난 내가 부족하다고 인정했기 때문에, 배울게 많다… 아 지면 저도 열 받죠. 저도 중
학교 고등학교 이럴 때 선배들한테 지고 그러면 잠 못자고 분석, 스코어 다 적고 뭐
이렇게… 계속 야간 연습하고, 이길 때까지 하고 그랬는데… 그 당시에는 실력적으로
는 뭐 주위에서는 라이벌이다 라이벌이다 하면서 그런 거를 했는데, 저도 (지면) 기
분은 제가 최고 안 좋죠. 근데 그 형에 대해서 딱 인제 다 좋은데, 그 형이 이제 시
합하면서 최고 맘에 안 들었던게 딱 한 가지 있었어요. 실력 외적으로. 시합 안 풀
리면 막 볼 같은 거도 깨고요, 막 이렇게… 막 이렇게 아프다고… 저는 그렇게 이기
고 싶지는 않아요, 정말 이렇게 깨끗하고 정정당당히. 물론 그 형이 시합하는 방식
이겠지만은, 뭐 따른 거는 기술적으로나 그런 거는 다 좋은데, 그 쫌 정당하게, 이렇
게 깨끗하게 싸우고 싶고…
후:일종의 교란술이겠죠, 상대 심리 약간 교란하는.
김;근데 볼 같은거 공식적으로… 게임 안 풀리면 볼 깨버려요. 자기 안 풀리면 볼 깨
고 그건 안 되는 거잖아요. 시합 하다가 깨지고 그런 거는 괜찮은데… 그래서 딴 거
는 다 좋은데 그거 하나는 좀 약간…
후:부상이 좀 많으셨죠?
김:예 부상이 좀 많았죠.
후:92년 5월에 무릎 쪽에 이상이 있어서 검사 받으셨는데 이게 고질적이었나요?
김:어렸을 때부터 이제 쫌 안 좋긴 안 좋았는데,지금 보면 무릎이 좀 안 좋잖아요.
후:어 진짜 왜 이렇게 무릎 뼈가 튀어 나왔어요?
김;지금 이제 완전히 뼈가 이렇게 갈라져 있는 상태에요. 그래서 이제 수술을 할까
많이 고심하다가, 병원에서도 운동하는 사람 아니라면 수술을 해도 상관 없지만은,
운동을 하기 때문에 이거 수술하면 재활에 대해서는 이렇게… 운동 안 하면은 몰르지
만, 운동하기 때문에 지금 만큼의 힘을 줄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보장을 못 하겠다
고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이제 재활을 많이 했죠. 근육 강화 훈련하고. 다 그걸로
버틴거죠.
후:이게 선천적인 거라면서요?
김:아니 그건 모르겠어요, 어렸을 땐 이러지 않았거든요.
후;근데 기사를 보면은 '선천적으로 뼈가 이상하게 자랐다'고 돼 있던데…
김:근데 이제 기자님들 쓰는게… ^^;
후:하하하 ^^ 그 탁구를 하시다 보니까 목이나 허리에는 항상 부상이 있으시죠?
김:예 목 같은 데는 지금 병원을 가 보면 수술을 하라고 해요.
후:목 디스크?
김:예, 허리도 있고.
후:근데 부상 그렇게 잦은 거 술 때문은 아녜요? ^^
김:아이~그런건 아니죠.저는 술 같은 거 가끔 한 번씩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후:아니 물론 스트레스 풀고 이런거는 도움이 되는데, 누구는 그러더라구요. '허구헌
날 부상 당하고, 당하는데 또 당하는 사람들이 보면은 대부분 말술이고, 그게 술 먹
은 다음날 근육이 제대로 회복되기 전에 또 고된 훈련하고 이러다 보면은 그게 부상
으로 이어진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구요.
김:물론 운동을 하는데 도움… 그거는 좋진 않겠죠. 근데 이제 운동할 때는, 다음
날 운동할 거면 술 안 먹어야죠. 시합 끝나고나 그럴 때 마시는거지.
후:그런 경우면은 무관하겠지만…
김:예, 안 그러면은 제가 볼 때는, 계속 술 마시면서 이렇게 자주 마시면서 운동했는
데 이런 거는 절대 운동 선수로 수명 오래 못 가죠. 자기 관리죠 그것도. 평상시에
훈련을 계속 제대로 정상적으로 하면은… 저는 믿음이 있는데요, 잠을 못 자면 운동
을 못 해요. 정상적으로 잠을 제대로 자도, 7시간 8시간 자도 운동 뛸라면 피곤하거
든요. 그럼 뭐 이제 점심 때도 꼭 자야지 운동을 할 수 있고. 근데 뭐 하루 이틀은
개길 수 있겠죠, 근데 그게 얼마나 집중이 되겠어요.
후:맞어요. 엉치 95년에 엉치. 그리구 담석 수술도 하셨죠? 98년에.
김:자꾸 이제 결리고 막 하니까, 이렇게 가슴 쪽으로 결리고…
후:근데 운동을 열심히 하시면 그런 것도 생길 여유도 없을텐데… ^^;
김:아니 이게 결리고 등도 결리고 하도 아프니까 병원에 갔는데 검사하다 보니까 담
석이라고…
후:그 수술은 어떻게 하는 거에요? 째요?
김:레이저로 했죠 레이저로. 아주 간단, 그… 지금 의술이 좋아져 가지고 레이저로
해 가지고 현미경 들어가서… 지금 수술 자국 쪼만하게 네 군데 나 있어요. 옛날 같
으면 이만큼씩 찢었다 그러더라구요. 회복기간도 2주 3주씩 걸리고. 지금은 뭐… 일
주일만에 퇴원했어요 수술하고 나서.
후:95년도 고무풀 사건, 기억나시죠?
김:예
후:이거에 대해 하실 말씀 없으세요? 그게 저거죠, 아까 (훈련 전에) 바르신거.
김:그 당시에는, 지금 유럽 애들도 다 이제 그 알고 있는데, 그때 그 당시에 초창기
바로 시행됐을 땐데, 그때 이제 16강에서 중국 선수를 이겼어요. 똑같은 고무풀에 똑
같은 그걸로, 근데 아무 문제 없었다구요 검사를 했을 때. 근데 8강이 왕타오 선수였
다구요. 그 당시에 중국에서 했었고 또 그때 인제 천안문 사건 때문에 시끄러웠다구
요. 그래 가지구 다 탁구에 집중시킬라고. 그래가지구 인제, 그때 이제 제 라바가
떴었다구요, 라바만 갈았어요 그래서 포장된 걸로. 근데 포장된 거는 지금 해도 새
봉지에서 다 나와요. 그걸 이제 몇일 전에 뜯어 놔야 돼요 다. 그건 인제 그거를 제
조업체에 항의를 해야 된다고 했는데 국제 연맹에 저희가 제소를 했죠. 문제가 있다
고 해 가지고. 그래서 국제 연맹에서 다음 날 10시에 공식적인 미팅, 심판 미팅을
하자, 10시까지 와라. 그래놓고, 다음 날 10시까지 오래 놓고 전날 프레스는 다 터
뜨렸죠 실격이라고.
후:그때 당시에 버터플라이 페어젝이라는 상품이랑 독일의 실라 미케 두 제품을 섞
어 쓰셨죠?
김:예, 그거는 별 문제가 안 돼요.
후:그러니까 그건 완전히…
김:그리고 제가 얘길 했는데, 검사한 사람도요 저보고 분명히 괜찮다고 그랬거든요.
그리고 나서 그 사람을 찾았는데 문제가 되니까 그 사람 없어졌어.
후:쨌구나. 그래 가지구 한국 탁구협회에서도 김택수 선수한테 경고, 엄중경고라고
했는데…
김:저는 굉장히 그때, 우리 협회가 정말 힘이 없다는 걸 처음 느꼈어요. 강하게 이
렇게 해 줬어야 되는데… 와 가지고 저보고 이렇게 징계 검토하고 어쩌고 저쩌고…
그때 너무너무 저는 협회에 대해 불만이 많았어요. 근데 지금도 그래요, 협회가 너
무 큰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일본도 마찬가지고. 협회하고 싸우면, 만약
싸워서 잘못 되면은 시합을 못 나가는데 선수가. 그건 정말 유럽이나 이런데 비해 너
무너무 잘못됐어, 협회 권한이. 그래서 프로가 되면은요, 협회 권한이 그렇게 크지
않고 선수들한테 이렇게 비중이 커지는 거죠, 정말 경기력 향상되고. 그래서 저는 운
동을 하면서 아직도 소신이 뭐냐면은 무조건 프로화가 돼야 된다, 전문화가 돼야 된
다. 선수 관리 해 주는 사람은 관리해 주는 사람, 운동 뛰는 애들은 경기력 향상에만
집중을 해야 되고.
후:그 다음 대회, 바로 다음 대회 올스타 서키트 시리즈에서 또 지셨어요 왕타오 선
수한테 지시고 홍콩 시리즈 가서 이기셨어요. 몇 대 몇으로 이기셨는지 기억나세요?
김:예, 3대 0으로 이겼어요.
후:예, 완전히 뭐 원사이드로 이기셨어요. 그때 기분 어떠셨어요?
김:제가 원래 운동을 관둘라 그랬어요, 안 할라 그랬어요 갔다 와서. 나 이런 데서
운동해 가지고 별… 제가 이틀 동안 울었어요. 그래서 이제 기회가 자주 오는 것도
아니고, 정말 그때 느낌에는 인제, 예선에서 너무너무 힘들게 올라와가지구요. 그 시
합 내용 보시면 알겠지만 고무풀 같은 거는 아무 연관 그런 것도 없어요, 뭐 경기력
향상이니 뭐니. 근데 그 당시에 시합 들어가기 전에 컨디션이 너무 좋아 가지고 딱
들어가기 전에 코치님한테, '오늘은 3대 1로 무조건 이긴다' 많이 가면 3대 1 정도
로 이긴다, 왜 그러냐면 예선서부터 너무너무 힘들게 올라와 가지고요, 계~속 상대
한테 매치포인트까지 막 지는 그런 상황까지 가서 막 이렇게 뒤집고 올라오고 올라오
고 그래가지고, 16강에서 중국 선수한테 3대 2로 이기고 올라오고 그래 가지고 8강
딱 왔는데 컨디션이 좋더라구요. 그래서 무조건 이긴다, 3대 1로 이긴다고. 2대 0에
서 18대 12 지고 있다가 거기서 역전시키고 이겼다구요. 그니까 3대 0으로 이겼죠
3대 1도 아니고. 그래 가지고 느낌에 그 당시만 해도 준결승에 류궈량 선수, 결승에
공링후이 선수, 그 당시만 해도 어렸었죠. 멤버도 못 들어갔죠. 근데 그 선수들이 결
승에 진출했는데, 진짜 막 이렇게 딱 느낌이 진짜 왔었죠. 그래 가지고 인제 탁구를
관둘려고 했었죠. 갔다 와서 인제 충격도 받고. 이런 상황에서 운동해 봐야 뭐 하냐
고, 그리고 또 국내에서도, 협회에서도 뭐 어쩌구… 근데 주위에서 인제 저한테 다르
게 생각하게 얘기해 준 게, '그렇게 해 버리면 니가 인정하는 거 밖에 더 되냐, 한
번 보여줘라. 니가 실력이 있다는 걸 보여줘라' 그래 가지고 다시 한 거죠. 그래서
인제 이기고 왔고. 유럽 선수들도 그거는 중국측에… 지금도 중국 선수들, 중국은 어
땠냐면요,자기 선수들끼리 시합 하고 그러면요,누구 져 줘라 해요 협회에서 공식적으로.
후:선수 키우기에요?
김:아뇨 이제 상대가 딱 누가 올라오느냐에 따라 성적을 내야 하니까 누가 강하냐…
후:아, 전형이 있으니까…
김:그럼요~ 얼마나 그런게 많은데요 무지무지해요 그런거. 그 고야마 지레 같은 선수,
일본에 가 있잖아요. 중국에서 그때 87년 세계 대회때, 그때 누구한테 지라 그랬는데
요, 중국 선수 누구한테 지라고. 근데 자기는 싫다고, 자기가 이겨 갖고 그담부터 대
표선수 못 했잖아요. 원래 올림픽을 나와야죠, 87년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자가요 88때
못 나왔잖아요. 그 자오즈민 형수, 첸징하고 그때 그 서울 올림픽 4강이었잖아요.
4강 했는데, 실력적으로는 그때 형수가 잘 했다고요. 근데 인제 결혼 문제 재형이형
하고, 그러니까 그냥 '져라' 그랬었다고요. 그런게 얼마나 많은데.
후:참, 자오즈민 씨 요즘 잘 계시나요? ^^
김:예.
후:한국말도 잘 하세요 이제?
김:예.
후:97년에 독일 분데스리가 팀에서 스카우트 제의 왔었죠?
김:예, 뭐 여러 군데에서 많이 있었어요.
후:근데 이 팀은 되게 잘 하는 팀이었잖아요, 2위했던 '그랜저우'.
김:예, 그랜저우.
후:연봉을 15만불이나 주신다고… 근데 왜 안 가신거에요?
김:아니 안 간 게 아니고, 못 간 거죠. 회사에서 안 보내줬던 그런 이유도 있고…
후:96년에, 대우증권 코치도 겸임하셨죠? 그니까 그 1년 후니까 애들 좀 봐 주고 가
지 마라 그런 식으로 한 건가요?
김:그런 뭐 정말 일찍 나갔으면 돈도 많이 벌고 개인적으로는 봐서는 좀 많이 그랬어요.
후:98년에 나가셨잖아요.
김:예, 프랑스로 나갔죠. 카엥. 깡이라는, 프랑스 말로 깡이라고 하는데 그게 어느
지점이냐면은, 프랑스에 2차 세계대전때 노르망디. 상률작전 한 데 그 도시에요.
후:돈 많이 받으셨다고…
김:70만 프랑이니까… 그때 환율로 한 1억 7-8천 됐을 거에요.
후:1년 가 계신 거에요?
김:아뇨, 10개월인데 16경기 뛰어 주는 조건으로.
후:말이 10개월이지 그러면 거의 뭐…
김:경기당 천만원 정도 됐죠. 엄청난 거였죠. 근데 1년 계약에 얼마다 딱 그러면 그
런데, 다른 프로의 게임 수에 비하면… 16경기니까.
후:근데 그런 제안들이 가능하네요? 걔네들은 탁구 16게임 할라고 그 많은 돈을 쓰
네? 클럽팀이잖아요.
김;예, 근데 저희가 클럽에서 유럽 챔피언까지 했어요.
후:계속 있으시지 왜 오셨어요?
김:거 뭐 세계대회 있고 아우 힘들더라구요 혼자 있으니까 그리고 또 올림픽도 있고.
후:불어도 좀 하시겠네요?
김:아~ 불어는 못해요. 아우~ 어려워 가지고… ^^
후:인사말도 모르세요?
김:인사말 정도 겨우 하는거지.
후:어떤거요?
김:bonjour? 이런거 ^^
후:여기 프랑스 갔다 오신 다음에, 개인적으로는 실력이 느셔 가지구 방콕 아시안 게
임때 우승하셨잖아요?
김:개인적으로 실력이 늘은거라기 보다두요, 경기 감각이죠. 그니까 저는 우리 젊은
선수들도 후배들이나 이런 선수들도 기회 된다면 해외 나가서 시합 해 봤으면 좋겠어
요. 그게 그렇잖아요, 큰 물을 가 봐야지 그 물이 어떤 물인지 알지, 이 물에만 있으
면 그 물밖에 모른다구요. 우리 나라 선수층으로는, 외국 나가면 세계적인 선수들 모
여 있는데, 세계적으로 잘 하는 선수들 다 모여 있는데 적응을 해 봐야지 게임이 되
죠. 그 볼이나 구질에 적응 못 하면 그건 어렵죠.
후:방콕 아시안 게임에선가 그 "환상의 랠리" 그때죠?그게 몇 분 짜리 였어요 그게?
김:글쎄요 저는 시합 상태라 세어 보지는 못했는데, 끝나고 나서 보니까 32구?
후:제가 그때 홍콩에 살고 있었어요, 당시에.
김;생중계 됐었을 거에요 아마.
후:생중계 됐었고, 그날 저녁 스포츠 뉴스, 테레비라는 테레비마다 전~부 그게 나왔
어요. 진짜 끝내줬어요. ^^ 그때… 공링후이 선수 준결승에서 이기시고, 결승에서 누
구 이기셨죠?
김:류궈량
후:당시 세계 랭킹 1위. 그래 가지구 당시 인터뷰에서 뭐라고 하셨냐면, 공링후이나
중국 선수들 이기는 데, 프랑스 갔다 온 게 굉장히 도움이 됐다고.
김:예, 도움이 많이 됐죠. 근데 그 전에도 이겨봤어요. 이겨봤는데 경기 감각이나 이
런 게 살아있었기 때문에…
후:그 아시안게임 우승한 게 딱 세 번 있었어요. 66년에 (탁구협회) 부회장님이 하셨
고, 86년에 유남규 선수고, 그리고 김택수 선수. 아시안 게임두 어렵죠?
김:뭐 다른 종목들은 아시안 게임 나가면 뭐 거저 1등하고 막 이렇게… ^^ 이건 탁구
는 아시안 게임이나 올림픽이나 별 다른 거 없어요. 더 어려우면 어려울 수도 있어
요, 왜냐하면 중국 애들하고 바로 부딪히니까. 다른 시합 같은 거는 어떻게 보면 운
좋으면 유럽선수들이 한 번 이겨줄 수도 있고 그런데…
후:하하하 ^^ 중국에 대해서는 참… 장난이 아니겠네요.
김:제가 짜장면을 안 먹잖아요. ^^
후:푸하하하하~~ 어느 정돈지 이해가 가요. ^^ 해외에 나가서요, 어떤 점들을 배워
야 될까요? 해외에 저희 젊은 선수들이 나간다, 그럼 그 선수들한테 뭐라고 말씀해
주시겠어요?
김:뭐 물론 기술도 기술이지만, 프로 정신이라 그러나? 자기는 이렇게 전문적으로
이 길이다 그러면 거기에 목숨, 목숨 건다고 하면 좀 그렇지만, 거기에 정말 매달리
고 그렇게 파묻혀 갖고 해야지, 열심히 해야지…
후:선수들은 감독한테 막 따지고 막 신경질 내고 그런다면서요? 그러다가도 연습 딱
시작하면은…
김:그런 것도 많이 있죠, 자기 성질에. 근데 그런 것도 제대로 된 그런 거라면 그렇
게 안 하죠. 제대로 된 사람이면. 근데 인제 저는 선수들하고나 이렇게, 저하고 이렇
게 많이 싸워야 된다고 생각해요. 많이 부딪혀야 된다고 생각해요.
후:아, 코치랑 선수랑?
김:예, 왜 그러냐면 기술적인 내용 갖고는 많이 부딪혀야 된다고 생각해요.
후:그래야 발전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김:예, 자꾸 인제 기술적인 고민 이런 거 갖고 서로 얘길 해 가지고, 최대한 좋은 거
를 찾아 내기 위해서라면은 많이 싸워야 된다고 생각해요. 근데 어떤 소모적인 전쟁,
감정적인 이런 거는 그건 도움이 안 되지만은.
후:저기 질문도… 너무 많이 시간을 뺏은 거 같아서…
김:아 괜찮습니다. 오늘 하기로 했으니까.
후:그럼 짧게짧게 몇 개만 더 여쭤볼게요. 얼마 전에 오사카 가셔가지구, 또 '분패'
하셨잖아요.
김:예 ^^;
후:저 이제 못 보겠어요 그런 중계를… ^^; 진짜, 이거 참 외람된 얘기지만, 보기
딱해서 못 보겠어요. 무슨 말인지 아시죠?
김:예 ^^
후:근데, 매스컴에서는 단일팀 구성하면 된다고 분위기 막 띄우고 그러는데, 그거
진짜 될까요?
김:아니 제가 볼때는요, 단일팀 한다고 해서 꼭 1등 한다고, 그거는 쫌 어려워요.
단일팀 한다고 세계 1등 하면 맨날 하죠. 그거는… 우승할 확률보다는 우승 못 할
확률이 더 높죠. 근데 이제 그 외적인 거 단일팀의. 으쌰으쌰 하고 어떤 그런 힘을
한 번 바라보고 그렇게 하는거고, 또 한 편으로 보면은 남북 합한다, 그 하나 자체만
으로도 의미를 두는 거 같애요.
후:그런 거 또 어떻게 보면은 진짜 일본 애들 같은 경우는 쫄 수도 있을 거 같고, 그
럴 거 같애요. 북한에도 또 잘하는 선수 있고 그러니까, 저 둘이 합치면 얼마나 잘
할까, 그냥 막연한 상상만으로도 막연한 위압감 같은 거 줄 수도 있을 거 같은데.
김:근데 일본 같은 경우도 세계 선수권 대회 남자 같은 경우는 굉장히 선전을 했다구
요. 세계 128개국 나와 가지고 세계 4강 드는 거 이거 쉽지 않아요. 구기 종목에서
요, 세계 4강 들어가는 종목이 몇 개나 있어요 지금 우리 나라에서.
후:맞어요, 정확히 맞어요. 그래서 그래요. 그래서 저희가 사실 이런 인터뷰 자체도,
야구나 농구나 축구나 월드컵 나가서 16강에도 못 들잖아요. 근데 탁구 선수들에 대
한 관심이나 국가대표 축구팀 스트라이커에 대한 관심이 사실 까놓고 말해서 천지차
이잖아요. 몰라요, 탁구장 저도 잘 안 가 봐서 이런 얘기할 자격은 없지만, 이런 오
빠 부대나 이런 것도 농구나 축구에 비하면 전혀 없잖아요.
김:근데 그런, 그 정도의 관심까지는 저희는…
후:바라지도 않더라구요? ^^ 다 그래요, 비인기 종목 선수들은 그렇게까지 바라지도
않는대요. 근데 그냥 인정할 거 정도만 인정해 주면…
김:예, 그렇죠 뭐 나가서 이렇게 잘 했던거 쫌 이렇게 인정해 주고 기사화 시켜주고,
있는 그대로 또 못 하면 못 하는 대로 평가해 주고 그런 면. 태릉 한 번 딱 들어가
보세요, 인기 종목, 비인기 종목 딱 보면은 비인기 종목이 고생이란 고생은 훨씬 많
이 하죠. 물론 뭐 나라 어디 가나 그런 건 있겠지만, 정말 고생은 고생 대로 다 하
고, 대우 받는 거는 열악하게 대우 받고.
후:성적은 또 다르구요? 그죠? ^^
김:예, 그러니까 맨~날 올림픽이나 아시안 게임 있을 때 막~ 하고… 하키 보세요 하
키. 2등 해 갖고 국민들 와~ 국민 스포츠 어쩌고… 지금 뭐 하키 누가 누군지 어떻
게 알아요? 기사 뭐 하키 신문에 나는 거 있어요? 안 내 주잖아요.
후:저기 김택수 라켓 그 얘기 좀 할게요. 그거 어떻게 된 거에요?
김:아 인제 그… 일본 용품회사에서요, 계약이 됐어요. 우리 나라에서는 용품이 안
나오니까요. 라켓 같은 거는 만들지도 못하고 이렇게 하니까.
후:그 일본 회사 이름은 뭐죠?
김:버터 플라이. 세계 시장에서 가장 크죠. 한 55%. 나머지 45%가 이제 다른 데고.
다른 용품 회사들도 많은데 55% 시장 갖고 있는데, 거기서 이제 어렸을 때부터 스폰
서 해 주면서 한 마디로… 저를 상품화 시킨거죠.
후:그럼요~ 근데 김택수 라켓 출시가 돼 가지고 상품성 있고 나가니까 만들었을거
아녜요.
김:그렇죠, 라켓 중에는 아마 가장 비쌀 거에요.
후:아, 그래요? 이게 왜 펜홀더 그런 거 때문에 그런가요, 스타일이?
김:아뇨 아뇨…일반 회사에서 쓰는 펜홀더하고 나무는 똑 같죠. 근데 그 중에서도 좋
은 나무를…
후:김택수 그 라켓이요, 물론 펜홀더로만 나오겠죠? 셰이크 핸드로는 안 나오겠죠?
김:그럼요, 제가 치는 거니까…
후:그러니까, 펜홀더가 더 희소가치가 있는 스타일이잖아요.
김:지금은 인제 어린 선수들, 셰이크 핸드로 많이 가거든요? 왜 그러냐면 셰이크가
편하고 치기 쉬우니까.
후:그렇죠 처음 배울 때는 셰이크 핸드가 훨씬 더 빠르죠.
김:예, 쉬우니까. 그리고 덜 힘들고요. 근데 이제 펜홀더 같은 경우는 체력적인 면
도 있고… 물론 익사이팅 하고 이런 면은 있지만 그래서 많이 가는 거 같애요.
후:어, 이건 좀 과장일지도 모르겠는데요, '세계 탁구 역사상 최강의 펜홀더 선수다'
라는 사람도 있었어요, 김택수가. 이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물론 이제 많은 선수들이 (역사 속을) 지나가니까… 저도 이제 지나가는 중에 그
런 말이 나왔을 수도 있을거 같애요.
후:그럼 현역 선수, 펜홀더 선수 중에서는 가장 자신 있으세요?
김:지금은 인제 그 중국의 마린 선수도 잘 하고 있고요, 대만의 장펭롱 선수도 잘 하
고 있고, 근데 한 5년 전만 해도, 4년 정도 전만 해도… 97년, 98년까지, 마린이라
는 선수가 지금 세계 랭킹 3위고 장펭롱 선수가 세계 랭킹 4위거든요? 그 선수들 저
한테 한 번도 못 이겨 봤어요. ^^ 진짜 저하고 하면 긴장되고 그 전까지요. 근데 진
짜에요. 그 당시엔 이제 펜홀더 선수로는 제가 쫌… 독보적이었고요, 그 뒤로 인제
얘네들도 올라오고 막 이래서 그렇지만은… 공링후이나 류궈량 선수도요, 제가 92년
도에 중국에 시합가고 그러면은요 뭐 청소년 이때니까, 저하고 발드너 팬이어가지고
막 위에서 박수치고 응원하고… 근데 지금 자기네… 가끔 한 번씩 가면 너무 신기하
대요. 자기네가 막 나 시합 할 때 응원하고 박수치고 이랬는데, 자기 시합하면 나 이
기고 그런다 이거에요. 그리고 왕란 같은 경우, 여자에요 중국 세계 랭킹 1위. 자기
취미가 탁구 비디오 보는건데, 제 비디오 보는 거에요 탁구 비디오가. 근데 그때는
막~ 이러더니 지금은 인제 자기 1등이라고 쳐다보지도 안데요. ^^ 그런게 많아요. 중
국은 어릴 때 갑자기 이렇게 막 큰다고.
김택수 노컷 인터뷰 lll
후:한국 남자 탁구가 최근에 많이 부진하죠?
김:아뇨, 지금은 다시 살아나는 추세에요.
후:아, 오상은이나 유승민…
김:예, 좀 이번에 선전하고… 근데 세계 대회 한 번만 갖고 평가하긴 좀 그렇고요…
뭐 전체적인 탁구는 좀 침체기죠. 아주 이번 시합 같은 경우는 무지허니 선전을 한
거구요. 진짜 없는 그거에… 우리 딱 이렇게 실업팀 하면 이십 몇 명 되나? 시합장
가 보면 한 이십 몇 명 돼요. 그 연습 하는 거 딱 보면, '이 선수 가지고 중국하고
시합을 한다는 거는…' 아 이 안에서 대표선수 다 나오니까요.
후:암담한…
김:예.
후:혹시 주목하고 계신, 코치 입장에서 주목하고 계신 학생 선수들, 유승민 같이 유
명한 선수들 말고 그런 선수 없나요?
김:아직은 쪼끔…
후:안 보이나요?
김:예, 집중적으로 청소년 때부터 이렇게 협회에서 투자를 해 주고 뭐 이래야 되는데,
그런 부분이 약간 미약한 거 같애요.
후:얼마 전에 그 탁구협회 쪽하고 한참 막 파문 일었던거, 사실 저는 잘 몰라요 내용
자체를- 그 실체가 정확히 어떻게 되는지 간단하게 요약해 주실 수 있어요? 뭐가
문제였고...
김:저는 이제 비주류 쪽이었는데, 지금 주류 쪽은 협회 쪽이고. 일단 회장 선임 문제
갖고 발단이 됐죠. 근데 인제 그… 회장 선임 문제 갖고 했는데, 스포츠 서울 윤흥렬
사장님이 회장을 하기로 했는데, 기존 협회측에서 다 인제…
후:반대하고?
김:아뇨, 반대를 안 했죠 첨에. 하시라고 인정을 해 줬죠. 그러면서 인제 윤 사장님
이 청와대 그쪽이니까 쫌…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집권해 왔으니까 그걸 놓치기 싫어
가지고, 기득권을 놓치기 싫어 가지고… '안 된다, 이건 힘으로 눌러서 이렇게, 회장
임기 두 달 남았는데 그걸 밀어 내고 회장을 할라고 한다' 그러면서 지금 협회 회장
님을 기득권에서 모시고 왔죠, 숭민 그룹 회장님을. 근데 그 와중에 인제 그거 잘못
됐다, 그리고 회장님에 대해서도 사회적으로 인제 뭐 여러 가지 그런 것도 얘기하면
서 서로 인제 그런 갈등이 시작된거죠. 근데 이제 우리 쪽에서는 협회 전체 분위기
를 잘 갈 수 있게끔 전체적인 분위기를 바꾸자, 지금 기득권이 이러는 거는 협회 침
체기 밖에 안 되고. 회장을 반대한다 이런 거 보다는 그런 게 아니고 그 밑에 집행부
에 대해서 이렇게… 그런 취지였죠. 저는 그래 갖고 그 당시에 정말 별 이상한 소리
도 다 듣고 그랬습니다. 선수가 왜 이렇게 정치에 참여하냐 그런 얘기도 들리고, 안
좋은 뭐, 저에 대해 뭐, 내가 뭐 이 회장님에 대해 뛰어 다니면서 반대하고 이상한
말 하고 다니고 이런다고…
후:미운 털 안 박히셨어요?
김:아니 저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당당하고 싶어요. 왜 그러냐면 누구 앞에서도 얘기
해도 내 생각이나 그런 거는 확고하게 얘기할 수 있고요. 미운 털 박히면 어때요?
자기 소신껏 탁구를 위해서 좋은 말 하는게, 후배들한테 좋은 그런 걸 남겨 주기 위
해서 그렇게 생각한다면은 전 선배들한테 얼마든지 욕 먹을 자신 있어요, 괜찮아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후:지금 그럼 어떻게 다 마무리가 됐나요?
김:아니 지금도 불씨는 살아 있죠 아직.
후:근데 비주류라고 찍히기는 확실히 찍히셨겠네요 이제? ^^
김:저요? 그 전에 찍혔죠. ^^ 근데 이제 그 태릉도 원래 안 들어갔죠. 태릉에서도
뭐 남북 단일팀 하는데 '입촌거부' 뭐 그런 것 때문에 시끄러웠잖아요. 그날 제가 전
화 받은 것만 해도 200통 넘게 왔을 거에요. 그래 가지고 이제 정부에서도 관심 많
이 가지고 있고, 남북 단일이니까. 그래 가지고 인제… 정말 들어가기 어려운 상황이
었어요, 개인적으로. 근데 다 뜻을 접고, 다 나라를 위하는 거고… 그런 거 딱 접고
들어갔죠. 근데 몇일 지나니까 '단일팀 무산' ^^ 진짜 막 허탈하더라구요. 그러니까
제가 뭐 세계대회 안 뛰어 본 그런 것도 아니고, 저한테는 솔직히 세계대회 한 번이
개인적으로 그렇게 큰 의미가 아니라고요. 단일팀이라고 해서 정부차원에서 그렇게
크게 생각해 가지고 들어갔는데 어이가 없더라구요. ^^
후:이제 탁구 얘기 그만 하고 재밌는 얘기 할게요. 결혼하신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얘
길 안 할 수가 없네요. 98년에 만나셨죠? 어떻게 만나셨어요?
김:잘~ 만났습니다. ^^
후:하하하… 처음에 어디서 만나신 거에요?
김:아니, 그 전부터 알고는 있었어요. 96년도… 얼굴은 알고 있었고, 98년도에 태릉
에서 만났죠. 불암산에서 크로스 컨트리 하는데, 그때 저도 발목이 아파서 못 뛰고
걸어서 도보조로 올라 가고 내려 오면서 이런 저런 얘기 하다가… 근데 뭐 항간에 어
떤 신문에서는 내가 뭐 뛰다가 넘어져 가지고 일으켜준 게 계기가 돼 가지고 그랬다고
후:그러면 당연히 트레이닝 복장이셨겠네요 두 분다?
김:그렇죠.
후:화장도 하나도 안 하셨을거고?
김:예.
후:예뻐 보이시던가요?
김:아이~ 그때는 이뻐 보이고 그런게 어딨습니까. ^^
후:처음에는 그냥 순전히 동생처럼?
김:그냥 뭐 운동하는 사람끼리 이런 저런 얘기 하다가…
후:어떤 거에 많이 도움을 받으셨나요?
김:그냥 인제 운동을 하다 보니까 공감을 하는 것도 많고, 이해 하는 부분도 많고…
그런 거 같애요, 자기 정신적으로도 굉장히 양궁 같은 게 멘탈적인 거, 정신적인 거…
그런 거에 있어서 얘기하면서 많은 도움도 많이 받고.
후:지금 호칭은 어떻게…
김:저는 뭐 마누라씨 이렇게도 하고, 뭐 그냥 말을 높일 때도 있고…
후:몇 년 차이 나세요?
김:5년
후:주례를 유명하신 분이 하셨죠?
김:예, 김운용 회장님.
후:사람 많이 왔겠네요?
김:그냥, 뭐… 600명쯤.
후:98년 이후에, 우연인지 모르지만 성적이 좋아지셨어요. 그 전에 약간 침체하셨는
데. 그 결혼의 영향이 있나요?
김:뭐 잘 나왔으니까 얘길 할 수 있는거죠 도움을 받았다고. ^^ 만약에 못 나왔으면
또 사람들이 그거 때매 못 나왔다 뭐 그랬을 거고… 뭐 결과 가지고 얘기하는 거죠.
후:98년 성적 때매 99년 2월에 최우수 선수상 받으셨어요. 그리고 4월에는 과장 승진
하셨구요, 4월달에 프로 투어 랭킹 1위도 하셨어요. 그리고 5월달에 3년 8개월만에 5
위로 다시 올라가셨어요. 그니까 속된 말로 완전히 살아나신거에요. 근데 영향이 없
었다고 말씀하실 수가 있을까요? ^^
김:영향이… 있는거 같애요. ^^;
후:그냥 뭐 심리적으로 안정되고 그런게 있겠죠. 지금 양궁 하시나요?
김:아뇨.
후:안 하시죠? 완전히 놓으셨나요?
김:예
후:다시 하시고 싶으시다면…
김:아니 저는 안 말려요.
후:왜 아줌마들 많이 복귀해서 하잖아요, 다시.
김:아니 저는 결혼하면서도 그랬어요. "야, 운동 좀 해라"
후:하하하
김:아니, 하고 싶으면 하라고. 근데 지금은 좀 쉬고 싶다고. 그래 가지고 그럼 내가
쉬게 해 주께. 그러고 한 1년 쉬게 해 줬어요, 애 가져 가지고. ^^
후:아~ 몇 개월이세요?
김:지금 5개월째 돼 가는데… 쉬고 싶다니까 푹 쉬게 해 줘야죠. 우린 또 말을 잘
들어 가지고
후:그럼 평소에 부인한테 하시고 싶으신 말 있으시면…
김:아니 저는 워낙 평상시에 잘 하기 때문에…
후:잘 하시나요? ^^ 그럼, 지금까지 오늘의 김택수를 만든 건 뭘까요? 물론 여러 가
지 그런게 있겠지만 딱 한 가지, 나의 이런 게 없었다면 오늘 이 자리에 못 섰을 거
다 싶은 거.
김:쫌 오기가 있는 거 같애요 오기, 고집이. 성격은 무지무지 급하거든요. 진짜 급
해요. 그런 것 때문에 첨에는 시합도 그르치고 그런 것도 많이 있었는데, 고집이랄까
요? 맘 먹은 거는 꼭 해야 돼요. 근데 능력으로 안 되는 거는 어쩔 수 없죠. 근데 고
집 딱 그거 하면은, 뭘 내가 해야 되겠다 딱 그러면, 하물며 내가 신문에 집중하면은,
와이프 얘기 하는 것도 못 들어요. 와이프 두세 번씩 얘기해야 그 때 알고. 그것 때
문에 얼마나 많이 부딪혔는데요.
후:대꾸 좀 해라? ^^
김:예, 뭘 하면은 거기에 집중력이… 좀 빠지고…
후:근데 원래 성격이 급한 선수들이 그걸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 있잖아요? 그걸 어떤
식으로 극복하셨어요? 자기 감정 조절을…
김:저는 운동을 통해서 했죠. 실패를 통해서 했죠, 실패.
후:아 실패를 통해서? 하나하나 지면서…
김:아 그럼요, 시합 뭐 큰 대회 그런 거 리드했다가 지면은, 매치 포인트까지 갔다가
한 번씩 지고 그러면은…
후:아, 그때 기분이 어때요 그럴 때는 진짜?
김:끝나고 나면 그게요, 진짜 충격이 오래가요.
후:그러니까요.
김:아니 진짜 오래가요.
후:얼마나 오래 가나요? 한 달쯤 가나요?
김:한 달이 뭐에요?
후:지금도 그럼 충격 상태시겠네요?
김:지금은 이제 그런 것들이 하도 단련이 돼 가지고 쪼끔 인제 덜하죠. ^^ 지금은 또
워낙 시합들도 많이 있고, 그런 충격들이… 지금도 그런걸 만약에 그런걸 크게 느껴
버리면 운동 못 하죠.
후:그럼 에어백 같은게 인제 하나 정도 달렸겠네요?
김:듀얼 (Dual)이 달렸죠.
후:듀얼 에어백? 하하하… 근데 정말 그게 상상이 안 가요. (승리가) 바로 요 코 앞
에까지 왔다가 가잖아요.
김:그 승부가 다 그렇구요, 그걸 또 인정을 해야만 다시 할 수 있고… 만약 계속 그
렇게 그걸 생각하면 운동 못 해요. 쇼크 먹어서…
후:탁구의 매력이 어딨을까요?
김:머리 쓰고 좋잖아요, 완전 머리 싸움하고… 또 깨끗한 운동이잖아요 어떻게 보면.
신사적인 운동이고 샤프하고… 뭐 부딪히고 이런 거는 없으면서도 자기 몸에는 체력
소모나 이런거 많으면서도 굉장히 머리 싸움도 많이 해야 되고.
후:하루 훈련 일정이 어떻게 돼요?
김:뭐 태릉 같은 경우는 6시에 일어나고 에어로빅 하고, 아침 9시에 시작해서 12시
반에 끝나고, 오후 한 3시에 시작해서 6시 반에 끝나고.
후:근데 탁구 선수들만을 위한 특별한 웨이트 트레이닝이나 그런게 있나요?
김:다 있어요, 프로그램 있고요. 원래 태릉에서도 처음에 인제 그 김준성 위원님이라
고 훈련 위원장 있는데, 야, 이거 뭐 쪼만한 공 갖고 노니까 그랬는데 와서 해 보니
까 체력이 장난 아니거든요. 태릉에서도 연습량 가장 많은 팀 중에 하날 거에요. 불
암산 뛰는 것도 항상 상위 종목이고요. 인정을 하잖아요. 농구나 뭐 이런 거는 40분
하고 끝나고 뭐 돌아가면서 뛰고 그럴 수 있지만, 이거는 하루 연습량만 해 가지고
하루 5시간씩 친다는 얘기거든요, 그걸 어떻게 쳐요? 완전 체력전이에요.
후:나중에 탁구팬들이나 스포츠 팬들이 김택수 선수를 어떤 선수로 기억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드세요?
김:저는 뭐 그냥 있는 그대로를 평가 해 줬으면 좋겠어요. 시합을 하면은 저도 시합
을 즐기고 싶고, 보는 사람들도 내가 하는 거에 대해서 같이 즐겨줬으면 좋겠고, 이
자체로. 서로 이렇게 이 자체로, 멋있는거 나오면 박수 쳐 주고 같이 이렇게 즐기는
거, 그렇게 느껴 줬으면 좋겠고. 또 저도 나이 먹어서도 뭐, 물론 이기는 것도 중요
하지만, 후배들한테 대해서 지는 것도 어떻게 지는가 이게 참 중요하다, 그래서 나이
먹어서 지는 게 흉이 아니고 정말 '아 저 선수는 최선을 다 했다' 그런 좋은 모습,
후배들에게 하나의 어떤 귀감이 되고 싶다고 할까요?
후:탁구는 얼마나 더 치실 거에요 현역으로?
김:아 저는 옛날에는 힘들어서 빨리 관두고 싶다 그런 생각 했는데, 지금은 딱 이렇
게 못을 박기는 싫어요.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은 제가 그때 가서 어떤 상황이 돼서
더 할 수도 있고, 그럼 또 약속을 못 지키게 되니까, 체력 닿는데 만큼.
후:근데, 선수들이 서른 넘고 나이 먹기 시작하면 '아 인제 그만 해야 되겠다' 이런
생각이 점점 자주 들수록 결국 은퇴로 가는 거잖아요. 근데 아직은 아직까지 그렇게
절실한 거는 아니시구요?
김:예, 제 생각 자체를 바꾸고 있는거죠. 제가 얼마나 운동을 하기 싫어했었냐면, 학
교때 막 도망다니고 그랬어요 애들 막 집단으로 데리고. 그래 가지고 인제 어떤 이런
저런 이유로 못 관두게 된 상황이 있었는데, 그러면서 '아, 이 길이 내가 가야 하는
길인가 보다' 그때부터 정말 힘들게 운동했어요. 힘들어서 막 눈물 흘리고 쌍코피 터
진 거는 흔하고 그런 것도 있고.
후:앞으로 한 10년이라는 세월동안 중국하고 한국의 수준의 격차가 점점 더 많이 벌
어질까요?
김:지금… 쫍히기는 제 나름대로는 좀 비관적인 생각이지만은… 어떤 획기적인 변화
가 있지 않으면은…
후:근데 그런 거 같애요, 우리나라 스포츠는 인프라가 중국처럼 제대로 깔려 가지고
거기서 양성이 되는 거보다, 한 5년이나 10년에 한 번씩 '미친 선수'가 툭툭 튀어 나
와 가지고 한 10년씩 끌어가 주고, 그렇게 수명을 이어 가는 거 같은데…
김:예, 아주 잘 보셨어요.
후:그죠? 그런 탁구, 농구도 마찬가지고, 중국의 벽이라는 걸 도저히 못 넘는다는 그
종목들은, 대부분이 어떤 스포츠 전반적이 토양이나 그런 거는 따라 잡을 수 없을
거 같구, 그냥 정말 뭐 신의 뜻에 따라 한 놈이 튀어 나오면 또 그냥 먹고 살구…
김:예, 근데 이제 그걸 찾기 위해서 뭐 획기적인 방안이나 그런게 있어야 될 거 같구
요,또 그렇게 해줘야 되는,그게 협회에서 할 일인거 같고 그렇게 해 줬으면 좋겠어요.
후:돈 많이 버셨다면서요?
김:근데 그… 소문난 잔치에 먹을 거 없다고…
후:에이~ 땅부자라고 소문났던데요?
김:그렇지 않아요, 그건 와전된 얘기고요.
후:아,나 진짜 궁금한 거 하나 있다.부인이랑 인제 김택수 선수도 연금 좀 받으시죠?
김:예, 둘이…
후:예, 둘이 합치면 이게 장난이 아니겠더라구요?
김:아니아니, 맥시멈이 백만원씩이에요. 백만원 이상은 못 받아요.
후:아, 그래요? 그럼 초과분은 어떻게 돼요? 일시불로 받나요?
김:예, 일시불로.
후:받으셨겠네요?
김:아뇨, 못 받았죠. 이제 금메달만 받는거죠. 2, 3등은 뭐…
후:아니 근데 부인께서는 금메달 리스트 잖아요?
김:예, 그 친구 백만원 받고, 저도 백만원 받고.
후:그거 평생 받는거죠?
김:예
후:따땃하겠다 그거 진짜, 따땃~하겠다. ^^
김:전에 이제 결혼하기전에 제가 백만원 안됐을 때,연금 갖고 자존심을 좀 긁더라구요.
후:하하하하
김:요새는이제, '까불지마 나도 백만원이야' 이러고… ^^
후:예, 알겠습니다. 오늘 시간 내 주셔서 너무 감사드리구요, 재밌게 인터뷰 응해 주
셔서 감사합니다.
Epilogue
후추 명전을 한번씩 쓰는 동안 필자 역시 '선정 기준'에 대한 판단이 가물가물해 질
때가 있다. '과연 내가 옳은 소리를 하고 있는 걸까?' 하고 말이다. 김택수의 경우
는 달랐다. 열흘 가까이 그를 지켜보고 그에 대한 기사를 찾아보고 그의 경기 장면을
분석하면서 '김택수를 선택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김택수 같은 국
제적인 보배를 아직까지도 마음만 먹으면 직접 가서 응원해 주고 파이팅을 외쳐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고마웠다. 김택수는 오늘도 한국 탁구의 최전
방에서 나라를 지키고 있다. 아마도 내년쯤이면 은퇴를 하지 않을까 싶은 필자의 예
측을 "아테네까지 해야죠." 라는 한마디로 일축하는 그의 대답을 들으면서 다시 한번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내년에 큰 부상을 입어서 본의와는 달리 은퇴를 할지
도 모르지만, '금메달을 못 따더라도'란 무언의 전제가 더더욱 대견(?)하다. 그래 맞
다. 탁구란 종목이 '메달권 효자 종목'이 더 이상 아니더라도, 우리나라에도 나이든
노장 선수가 순수히 그 스포츠를 enjoy 하는 차원에서 라켓을 계속 잡는다는 사실이
든든하다.
몇일 전 어느 골프대회에서도 김택수를 다시 만날 기회가 있었다. Eagle을 칠 정도로
그의 골프 실력은 수준급이었다. 국제 대회에서 비추어지는 김택수의 모습과 유니폼
을 벗은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다르다. 삶을 즐기면서 살 줄 아는 사람이란 인상을
받았다. 여유 있고 정감 있고 사근사근한 김택수를 보면서'과연 어떻게 저런 사람이
그토록 무서운 승부욕을 보일 수 있는 것일까?'하는 의문이 든다.서른 두 살짜리 '노
장 선수' 김택수가 탁구에 있어서 더 이상의 목표는 없다고 얘기할 지 몰라도 필자는
느낄 수 있다. 김택수의 탁구 시나리오 속엔 '마지막 랠리'가 남아 있다는 것을…
'마지막 반격'이 남아 있다는 것을…
현역 초반 유남규의 그늘에 가려 아직까지도 '2인자'의 누명을 쓰고 있는 김택수는
명실공히 대한민국 남자 탁구의 1인자임을 후추가 나서서 공표하려고 한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아닐지언정, 세계선수권 우승자가 아닐지언정, 후추는 김택수의 '꺼
지지 않는 생명력'을 그의 가장 큰 장점이자 매력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오랫동안 우
리 곁에서 라켓을 휘둘러 왔지만 그의 모습을 가까이서 본 사람은 많지 않다. 대한민
국 탁구사를 장식해 온 기라성 같은 선배들을 제쳐두고 후추는 자랑스럽게 '현역 김
택수'를 불러낸다. 그가 은퇴한 후에나 인정하고 박수 쳐 주는 그런 팬들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려주고 싶다. 김택수의마지막 랠리' 지켜보며 그를 향한 '주먹
불끈'을 보내주고 싶다.
첫댓글 이 글로 인해 김택수 감독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네요..감사합니다..
다시 한번 한국탁구의 부흥을 기대하게 되는 어제, 오늘입니다..^^
저도 예전에 탁구경기 보러갔을때.
김택수 선수의 인품과 인기를 직접 확인할수 있었습니다.
유남규 선수도 당시 경기하는 모습을 봤는데..
경기가 잘안풀리니까 네트를 이로 물어뜯는 모습을 보고 정말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나네요. ^^;
김택수 선수 실력으로나 인품으로나 영원히 기억될 훌륭한 분인것 같습니다.
저랑 갑장이라 더 정이 가네요 ^^
예전에 굉장히 재밌게 읽었던 글인데 다시 보니 반갑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