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마차(Stagecoach)
최용현(수필가)
“우리는 더 이상 웨스턴을 만들지 않습니다.”
존 포드 감독이 ‘세 악인들’(1926) 이후 13년 만에 ‘역마차’를 만든다고 했을 때 폭스 사는 난색을 표하며 이렇게 말했다. 서부극은 이미 시들해져 메이저 영화사들은 모두 손을 뗐고, 마이너 영화사들만 간간이 만들고 있어서 B급영화 취급을 받고 있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때, 존 포드 감독에게 남녀주인공을 존 웨인과 클레어 트레버가 아닌 게리 쿠퍼와 마를렌느 디트리히로 바꾸면 제작비를 투자하겠다고 제의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당시 존 웨인은 B급 서부극에나 나오는 별 볼일 없는 배우였던 것이다. 그러나 존 포드 감독은 흔들리지 않았고, 그의 판단이 옳았음을 후일 흥행 돌풍이라는 결과로 증명해 보였다.
흔히 서부극의 3대 걸작으로 흑백영화 ‘역마차’(1939)와 ‘하이 눈’(1952), 그리고 컬러영화 ‘셰인’(1953년)을 꼽는다. 그 중 ‘역마차(Stagecoach)’는 유행이 지난 서부극을 엄청난 매력을 지닌 메이저 장르로 부활시키며, 처음 서부극의 주인공을 맡은 존 웨인을 하루아침에 스타덤에 올려놓은 영화이다.
7명의 승객을 태운 역마차가 애리조나 톤토를 출발한다. 가는 도중에 탈옥수 링고(존 웨인 扮)가 아버지와 동생을 죽인 플러머 형제들에게 복수하러 가려고 마차를 세우자, 보안관은 링고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탑승시킨다. 이제 역마차는 위험한 아파치 지역을 통과하여 뉴멕시코 로즈버그까지 달려가야 한다.
약간 수다스런 마부 외에 승객은 톤토 마을에서 쫓겨난 매춘부 달라스(클레어 트레버 扮)와 알코올중독자인 의사 분(토마스 미첼 扮), 기병대 장교인 남편을 찾아가는 만삭의 임산부 맬러리(루이스 플랫 扮)와 그녀를 따라온 점잖 빼는 도박꾼, 그리고 공금을 횡령한 은행가, 위스키 판매상, 의협심이 강한 보안관, 탈옥한 링고 등 모두 8명이다.
이들은 마차에서 잠시 하차하는 식당과 숙박을 위한 중간 기착지에서 사회적 지위나 신분 차이 등으로 신경전을 벌이며 갈등을 겪는다. 그러다가 맬러리가 갑자기 산통을 느끼고 쓰러지자, 의사 분은 산파가 되어 출산을 도와주고 달라스는 밤새 옆에 앉아서 쪽잠을 자며 산모와 아기를 극진히 보살펴준다. 그러자 이들 사이의 분위기가 우호적으로 변한다.
달라스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링고는 달라스에게 청혼을 한다. 달라스는 기꺼워하면서도 가족의 복수를 벼르고 있는 링고의 안전을 걱정하며 선뜻 답을 하지 못한다. 나중에 링고는 ‘국경 너머에 저의 목장이 있어요. 거기에 나무와 잔디, 물, 반쯤 지은 오두막도 있고, 그리고 한 여자.’ 하면서 그녀를 쳐다본다. 달라스에겐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유혹 아닌가.
역마차가 강을 건너가자, 저 멀리 산에서 아파치들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한다. 갑자기 날아온 화살이 술 판매상의 어깨에 꽂힌다. 아파치의 습격이 시작된 것이다. 역마차는 필사적으로 마른 호수 쪽으로 달리기 시작하고, 말을 타고 따라오는 아파치들과 거센 추격전을 벌이며 스릴 넘치는 전투가 펼쳐진다.
보안관과 링고를 필두로 남자들이 총을 쏘며 용감하게 싸우지만, 아파치들은 계속 활을 쏘며 뒤따라온다. 급기야 역마차에 있는 총알이 다 소진되고, 역마차에 아파치의 화살이 픽픽 꽂히는 절체절명의 순간, 멀리서 나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기병대가 달려와 역마차를 호위하면서 위기상황은 극적으로 해소된다.
드디어 역마차는 종착지인 로즈버그에 도착한다. 도박꾼은 총에 맞아 죽었고, 공금을 횡령한 은행가는 체포된다. 부상당한 마부와 위스키 판매상은 병원으로 이송되고, 링고는 결투를 통해 플러머 3형제를 처치한다. 보안관은 링고를 압송하지 않고 풀어준다. 링고가 달라스와 함께 마차를 타고 국경 너머 약속의 땅을 향해 떠나면서 영화는 해피엔드로 끝난다.
‘역마차’는 오픈 크레딧에서 서부극 사상 처음으로 인디언의 성지로 불리는 유타 주의 광활한 사막과 모뉴먼트 벨리의 전경을 보여준다. 또 주제곡은 따가닥따가닥 하는 말발굽소리가 나고 이어서 경쾌한 휘파람소리가 들리면서 정감어린 멜로디가 울려 퍼진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토마스 미첼)과 함께 음악상을 수상하였다.
E. 헤이콕스의 단편소설 ‘로즈버그로 가는 역마차’를 각색하여 만든 이 영화는 기존 서부극에서 흔하게 보이는 주인공과 악당 사이의 권선징악적 대결이라는 도식을 과감히 버린다. 그 대신 등장인물들의 개성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서로 갈등을 표출하면서 그 갈등을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는 사회에서 멸시를 받는 매춘부, 알코올중독자, 탈옥수 등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 소위 잘난 사람들보다 인간적으로 더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매춘부 달라스가 맬러리보다 더 헌신적이며, 알코올중독자인 의사 분이 고상한 척하는 사람들보다 더 의롭다. 그리고 아파치의 습격에 맞서 가장 용감하게 싸운 사람이 탈옥수 링고가 아니던가.
아파치와의 전투장면에서는 땅을 파서 카메라를 설치해놓고, 그 위로 역마차와 아파치의 말들을 지나가게 함으로써 박진감 넘치는 시각적 스펙터클을 구현했다. 또, 한 아파치가 역마차를 이끄는 말 위로 뛰어올랐다가 링고의 총에 맞아 말의 다리 사이로 떨어지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위험한 연기는 아파치로 분장한 스턴트맨이 했다고 한다.
‘역마차’는 존 웨인이란 배우를 발굴하여 서부극의 영웅이 되게 하는 발판을 만들어준 영화이다. 이때부터 존 웨인은 존 포드 감독의 페르소나가 되었고, 이후 이들 콤비는 ‘아파치 요새’(1948) ‘리오그란데’(1950) ‘수색자’(1956) 등 20여 편의 서부극을 함께 하면서 한 시대를 풍미한다.
세계영화 역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시민 케인’(1941)의 각본을 쓰고 주연과 감독까지 겸한 26세의 오손 웰스는 ‘역마차’를 45번이나 보면서 연구했다며, ‘역마차’는 고전주의적 형식미를 완벽하게 구현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또 존 포드가 자신의 영화 스승이었고 ‘역마차’가 자신의 영화 교과서였다고 밝히기도 했다.
첫댓글 존웨인의 걸작중의 하나지요. 추억이 새록새록합니다. ㅎㅎ
네, 죤 웨인의 극중 이름이 '링고 키드', 키드가 붙었으니 아주 젊을 때 찍은 거네요.ㅎㅎ
@월산거사 존웨인은 젊었을 때보다 나이들었을 때 연기가 더 멋있어요
@여정 존 웨인, 미국을 대표하는 배우가 되었죠.
최근들어 영화채널에서 가끔씩 볼수 있다는게,
얼마나 다행 스러운지, 감사히 생각 합니다.ㅎㅎㅎ
동감입니다. 옛날 흑백영화 중에 걸작이 아주 많더군요.
겨울 동안에 좋은 영화도 많이 보고 글도 많이 쓸 생각입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