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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5일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요한 7,1-2.10.25-30
누구나 자신 안에서 하느님을 키울 수 있다
『하.사.시.』에 나오는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합니다.
예수님께 어떤 이방 여인이 다가와 남편이 싸움하다가 머리에 상처를 입어 의사의 말로는
실명이 될 것이 확실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시메온이라는 남편은 이전에 죄를 지었다가 아내의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치유해 주신 적이 있는 남자였습니다.
그의 삶이 다시 냉혹과 탐욕으로 비뚤어져 버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사정은 알지만, 그가 용서받고 죽어 천국에 갈 것인지, 아니면 치유 받고 지옥에 갈 것인지 선택하라 합니다.
갈등하던 여인은 남편의 영원한 생명을 선택합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도 같은 선택을 하게 하십니다.
남자는 “용서하십시오! 용서하세요!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
지난번처럼 선생님의 용서를 주십시오! 그러나 지난번처럼 병도 고쳐 주십시오.
아리아! 아리아! 나 당신에게 맹세하오. 다시는 폭력도 쓰지 않고 속임수도 쓰지 않겠소.
나는….”라며 죽음의 공포로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약속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청하는 것이 속죄하기보다는 죽음이 두려워 그러는 것을 아십니다.
그리고 그가 뉘우치도록 그의 아내에게처럼 두 가지를 제시하시고 하나를 선택하라 하십니다.
그도 지금 죽음과 심판, 지옥의 공포를 느끼고 있으므로 결국 “제 병을 고치기 위해 손을 들지 마시고, 저를 용서하시고, 저를 붙잡고 있는 마귀에게서 저를 구해내시기 위해 손을 드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손을 내미시어 용서해 주시니
그는 이내 눈물을 흘리며 잠이 듭니다. [출처: 『하.사.시.』 6권 150장]
결국 예수님은 그 사람의 병을 고쳐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공포를 이기는 평화를 주셨습니다. 두려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두려움의 근원은 모두 ‘죽음’입니다.
두려움은 살려는 욕구에서 생깁니다.
더는 잃을 게 없다면 두려움도 사라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죽이려 하는데도 당당하게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십니다.
아직 당신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운명을 아버지께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누구보다 강력한 분이셔서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누구도 당신께 손을 댈 수 없음을 아셨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를 이기기 위해 더 가지려 하고 더 먹으려 하고 더 강해지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죽음의 공포를 이기게 할 수 있을까요? 만리장성을 쌓는 일은 힘이 듭니다.
그래도 진시왕은 일찍 죽었습니다.
모든 에너지를 거기에 쏟아부은 까닭에 더 빨리 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유튜브에 한 강아지가 여러 마리의 호랑이에게 젖을 먹여 키우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개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개가 되었습니다. 호랑이들이 성장해서도 그 강아지를 자기 어미라 여기기 때문에 그를 보호합니다.
그 개에게 해를 끼치기 위해 다가가려면 수많은 그 둘레의 호랑이들과 맞서야만 합니다.
이때 강아지는 다른 개들에게 전혀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 모든 에너지를 정말 강한 대상에게 쏟았기 때문에 얻는 보상입니다.
위 이야기에서 죽어가는 남편과 그의 아내는 생존의 두려움을 병 나음으로 이겨내려 했습니다.
다행히 그들은 올바른 선택을 하였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심판관이 되셨습니다.
그들은 지옥에 가지 않게 될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이 세상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평화를 얻었습니다.
자신 안에 잉태된 호랑이를 키우려면 임신부처럼 세상에서는 가장 약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반대로 세상 것들에 의지하여 자기를 지키려 하다가는 내 안의 호랑이가 죽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몰방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그런 믿음은 생기지 않습니다.
물 위까지 걸었던 베드로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다만 조금씩 젖을 줄 때 성장하는 모습을 볼 수는 있습니다.
그러면 조금씩 더 평화로워짐을 느낍니다.
그러면 더 많이 투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마태 19,29)라고 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은 이 세상에서 작은 투자로 백 배의 보상을 받는 것으로 성장합니다.
한 번에 하느님의 보호를 믿을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은 마치 성모님 태중의 아기처럼 나의 희생을 먹고 자라십니다.
저도 주일 학교 교리 봉사하고 성당에서 활동하면서 거기서 오는 평화 때문에 저의 전 생애를 바쳐도 되겠다는 믿음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나의 이 지상에서 두려움을 이기려고 원하는 것들을 포기하고 조금이라도 주님께 의지해 봅시다.
내가 포기하는 그것들이 내 안에 잉태된 하느님을 성장시키는 영양분이 됩니다.
죽음으로부터 시작되는 모든 불안과 두려움을 완전히 이기는 방법은 이 길밖에 없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15일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요한 7,1-2.10.25-30
세상이 아무리 악해도
누군가가 이유도 없이 노골적인 적개심을 품고 내 목숨을 해치려 할 때 가까스로 피한 경험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작정해서 나를 폄하하고 나를 음해하고 나를 못살게 군 끔찍한 경험이 있는지요?
그럴 경우 통상 즉시 나타나는 우리의 반응은 어떠한 것입니까?
대체로 동태복수법에 따라 처신하든지 아니면 더 센 반응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내가 살기 위해, 내가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겠지요.
공생활 기간 내내 예수님께서는 지속적인 생명의 위협 상태에 놓이셨습니다.
유다 지도층 인사들과 사사건건 대립각을 내세우다 보니, 특히 그들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던 안식일 규정이나 정결예식 등을 예수님께서 보란 듯이 파기하다보니 예수님께서는 자연스럽게 그들과 적대관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노기등등하던지, 얼마나 살기가 번득이든지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명이 위태롭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셨습니다.
이런 연유로 예수님께서는 유다 지방보다는 위험부담이 조금은 덜한 갈릴래아 지방에서
더 많이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살기등등한 유다 지도층 인사들의 지속적인 압박 속에서,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매일 수시로 죽음의 위협을 겪으면서도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시기 위해,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부여하신 인류 구원 사업의 완수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셨습니다.
이윽고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다가왔습니다.
유다 지도층 인사들의 예수님을 향한 살의(殺意)는 더해갔고, 더 이상 드러내놓고 다니기조차 어렵게 되었습니다.
초막절은 당시 유다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가야 하는 세 명절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 명절은 오늘날 추수감사제 비슷했습니다.
그 해 수확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동시에
이집트를 빠져나온 히브리인들이 사막을 횡단하면서 보낸 오랜 체류 기간을 기념하는 축제였습니다
일주일간 지속된 이 명절기간에 유다인들은 초막 안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남자들은 매일 아침 봉헌제사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제물을 바치며 사람들은 하느님께 풍부한 비를 내려주실 것을 청했습니다.
저명한 성경학자 플라비우스 요셉푸스에 따르면 유다 사회 안에서 이 명절은 1년 중 가장 중요하고 거룩한 명절이었습니다.
이런 중요한 명절이었기에 예수님께서도 축제를 지내기 위해 조용히, 그리고 남몰래 예루살렘 입성을 시도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들은 또 난리들입니다.
입을 다물지 못하고 떠벌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향한 유다 지도층 인사들의 끝도 없는 불신,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함, 도를 넘어선 적개심 앞에 예수님께서 느끼셨을 비애와 배신감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집니다.
예수님 당신은 어떻게 해서든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돌려보려고, 어떻게 해서든 그들을 죽음의 길에서 생명의 길로 돌아서게 하려고 외치고 또 외쳐보지만 끝까지 귀를 굳게 막은 그들은 절대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담하지 않고, 단 한걸음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묵묵히 당신의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정말 대단해보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그 숱한 배신과 사악함에도 불구하고 그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최선을 다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눈물겨워 보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해도,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당신을 핍박해도 개의치 않습니다.
더 큰 선, 더 큰 희망, 더 큰 사랑을 위해 꿋꿋이 그리고 당당히 뚜벅뚜벅 당신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순 제4주간 금요일 강론>
(2024. 3. 15. 금)(요한 7,1-2.10.25-30)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 몇 사람이 말하였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최고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7,25-30).”
5장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요한 5,17-18).”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 몇 사람’은 아마도 기득권층에 속한 사람들이었을 것이고, 최고의회 의원들을 비판할 수 있을 정도의 지위나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는, “저 사람을 죽이려고 했다면 빨리 죽일 것이지, 저렇게 공공연하게 활동하는데도 왜 내버려 두는가?”입니다.
“최고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라는 말은, “우리는 저 사람을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는데, 혹시 최고의회 의원들은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의심하고 비판하는 말입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라는 말은, “저 사람에게는 ‘메시아다운 신비감’이 없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메시아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오신다.”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러면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은 하느님이 계시는 하늘을 가리키는 말이 될 수도 있고, 이 말은, “메시아는 하늘에서 직접 오실 것이다.” 라는 생각을 나타내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다.” 라는 말은, “저 사람이 나자렛이라는 보잘것없는 시골의 가난한 목수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저 사람이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지금 이 말은, 나자렛 사람들이 했던 말과 같습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마르 6,3).”
요한복음 7장 24절에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지 말고 올바로 판단하여라.” 라는 예수님 말씀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이나 나자렛 사람들이나 모두 예수님의 ‘겉모습’만 보았던 자들, 눈에 보이는 것만 본 자들입니다.
사실 그것은 그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이고, 인간적인 한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나 어떤 일의 겉모습만 보다가, 또는 눈에 보이는 것만 보다가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나 일의 진짜 모습을 보려면,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을 버려야 하고, 믿음이 있어야 하고, 시간을 두고 신중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당신이 나자렛 출신 목수라는 것은 맞지만, 그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당신이 누구인지 안다고 말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너희는 나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모르고 있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라는 말씀은, “나는 하느님께서 보내셔서 왔다.” 라는 뜻이고, 다시 이 말씀은, “나는 하늘에서 왔다.” 라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앞의 6장에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38).>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는 “나를 보내신 분은
하느님이신데”이고,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모르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고, 또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자기들 마음대로 판단한다는 뜻입니다.
“나는 그분을 안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과 당신이 하나로 일치되어 있음을 뜻하는 말씀인데, 당신의 겉모습은 나자렛의 목수지만, 사실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라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의 고향이나 집안이나 직업 등이 큰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는 신앙인들도 그런 걸림돌들을 만날 때가 많습니다.
교회의 모습에서, 다른 교우들의 모습에서, 또는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에 대해서, 또는 인간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의구심이 생기기도 하고, 믿음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어쩌면 신앙인들이 겪는 어려움 중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정말로 하느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실까?”, 또는 “내 기도를 듣기는 하실까?” 라는 의심과 불안감일 것입니다.
그런 걸림돌들을 극복하는 비결은 따로 없습니다.
더 굳게 믿으려고 노력하고, 더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 외에는.>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