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바다에서
박재삼
누님의 치맛살 곁에 앉아
누님의 슬픔을 나누지 못하는 심심한 때는
골목을 빠져 나와 바닷가에 서자.
비로소 가슴 울렁이고
눈에 눈물 어리어
차라리 저 달빛 받아
반짝이는 밤바다의 질정(質定)할 수 없는
괴로운 꽃비늘을 닮아야 하리.
천하에 많은 할 말이, 천상의 많은 별들의 반짝임처럼
바다의 밤물결되어 찬란해야 하리.
아니 아파야 아파야 하리.
이윽고 누님은 섬이 떠 있듯이
그렇게 잠들리.
그 때 나는 섬가에 부딪치는 물결처럼 누님의 치맛살에 얼굴을 묻고
가늘고 먼 울음을 울음을,
울음 울리라.
- <춘향이 마음>(1962) -
해 설
[개관정리]
◆ 성격 : 전통적, 회고적, 애상적
◆ 표현
* 슬픔의 정서를 점층적으로 고조시킴.
* 어린 화자의 눈을 통해 누이의 슬픔을 노래함.
* 감각적이고 섬세한 시어 구사
* '섬'과 '물결'의 대립적 시어의 사용
* 산문체이면서도 내재율을 살려 짙은 정감을 풍김.
◆ 시어 및 시구풀이
* 누님 → 한국적 여인을 대표하며, 인고의 역사로 점철된 우리의 역사와도
맞물리는 인물
* 누님의 치맛살 ~ 심심한 때는 → 누님의 슬픔이 너무 크다는 것을 화자가
깨닫는 부분임.
* 밤바다 → 거대한 공포와 비극의 실체. 오누이의 혈연적 슬픔이 동질화(합일)되는 곳.
화자의 슬픔이 투영된 비극적 공간
* 질정(質定) → 갈피를 잡고 헤아려서 작정(결정)함.
* 꽃비늘 → 파도치는 바다에 달빛이 비치는 모습
밤바다의 아름다운 모습과 누이의 슬픔이 주는 아픔이 결합됨.
* 천하에 많은 할 말 = 천상의 많은 별들 → 누님의 슬픔과 한의 정서
* 밤물결 → 누이의 슬픈 모습이면서도 아름다움을 지닌 이중적인 모습
* 바다의 밤물결 ~ 아파야 하리 → 누이의 아픔을 화자가 대신할 수 없음을
슬퍼하는 구절, 한의 정조와 비애미가 잘 드러난 구절
* 그때 나는 ~ 얼굴을 묻고 → 누이가 섬이 되어 잠잘 때, 화자는 섬에 와 부딪치며
우는 물결이 되는, 아름다운 인간적 합일을 이루며 시적 안정과 표현의 완성을
이루게 된다.
* 가늘고 먼 울음 → 누이의 슬픔과 화자의 울음(두 누이의 혈연적 아픔으로 동질화됨.)
◆ 주제 ⇒ 누님의 슬픔과 정한의 정서, 누님의 정한과 누님에 대한 사랑
[시상의 흐름]
◆ 1연 : 누이의 슬픔을 함께 할 수 없는 자아가 바다로 나감.
◆ 2연 : 바닷가에서 누이의 슬픔을 함께 함.
◆ 3연 : 오누이의 인간적 합일(누이와 화자의 동질화)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양승국의 <한국 현대시 400선>에서 이 시는 정한(情恨)의 정서를 애잔한 가락과 섬세한 언어로 노래함으로써 우리 시의 전통적 서정을 가장 가까이 계승한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는 박재삼의 대표작이다.
그의 시에는 남해안 삼천포에서 성장한 소년 시절을 소재로 한 회상조의 작품이 많은데, 이 시 역시 '소년 시절로의 회귀'를 보여 주고 있다. 이 시에서 '누님'은 한국 여인을 표상하고 있으며, 그 누이의 말 못하는 슬픈 사연이 화자의 여린 가슴에 여인의 한(恨)을 깨닫게 해 준다. 그러나 나이 어린 화자는 슬픔을 대신할 수 없음을 알고, 밤바다로 뛰어나가며 소리 죽여 흐느낀다. 그러므로 누이의 슬픔과 화자의 울음은 두 남매의 혈연적 아픔으로 동질화(同質化)되어 나타난다.
누이의 슬픔을 함께 할 수 없는 어린 화자는 고샅길을 지나 밤바다에 나가 서서 눈물 흘리며, 달빛에 반짝이는 파도를 바라보고는 누이의 아픔이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빛이나 밤새도록 소리내 우는 파도처럼 찬란해지고 더욱 아파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누이의 아픔이 소진하여 그 아픔이 아픔으로 극복될 때라야 비로소 편안히 잠들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결국 두 사람은 결구에서 각각 '섬'과 '물결'로 비유됨으로써 누이가 섬이 되어 잠들 때, 화자는 섬에 와 부딪치며 우는 물결이 되는, 아름다운 인간적 합일을 이루며 시적 안정과 표현의 완성을 이루게 된다.
감각적이면서 섬세한 시어로 명징(明澄)한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는 이 시는 산문체 형식이면서도 박재삼만의 독특한 가락과 효과적인 점층법을 바탕으로 하여 한국적 정한(情恨)을 짙게 나타내고 있다.
[작가소개]
박재삼[ 朴在森 ]
<요약>
박재삼은 한국 서정시의 전통적 음색을 재현하면서 소박한 일상 생활과 자연에서 소재를 찾아 애련하고 섬세한 가락을 노래했다.
출생 – 사망 : 1933. 4. 10. ~ 1997. 6. 8.
출생지 : 해외 일본 도쿄
데뷔 : 1953. 시 「강물에서」가 모윤숙에 의해 문예에서 추천
1933년 4월 10일 도쿄 출생. 경남 삼천포에서 성장했으며, 고려대 국문과를 중퇴했다. 현대문학사, 대한일보사, 삼성출판사 등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제2회 현대문학신인상, 한국시인협회상, 노산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인촌상 등을 수상했다. 1953년 시 「강물에서」가 모윤숙에 의해 『문예』에서 추천되고, 1955년 시 「정적」이 서정주에 의해 『현대문학』에 추천되었으며, 같은 해 시조 「섭리」가 유치환에 의해 『현대문학』에 추천됨으로써 추천을 완료하였다.
1962년 첫 시집 『춘향이 마음』을 간행한 이래 시집 『햇빛 속에서』(1970), 『천년의 바람』(1975), 『어린 것들 옆에서』(1976), 『추억에서』(1983), 『아득하면 되리라』(1984), 『내 사랑은』(1985), 『대관령 근처』(1985), 『찬란한 미지수』(1986), 『바다 위 별들이 하는 짓』(1987), 『박재삼 시집』(1987), 『사랑이여』(1987), 『울음이 타는 가을 강』(1987), 『다시 그리움으로』(1996), 『사랑하는 사람을 남기고』(1997) 등 다수의 시집과 시 선집을 간행하였다. 수필집으로는 『울밑에 선 봉선화』(1986), 『아름다운 삶의 무늬』(1987), 『슬픔과 허무의 그 바다』(1989) 등이 있다.
1997년 6월 8일 타계했다. 그의 시 세계는 시 「춘향이 마음」(1956)과 「울음이 타는 가을 강」(1959) 등으로 대표되는데, 그는 이런 시들을 통해 한국 서정시의 전통적 음색을 재현하면서 소박한 일상 생활과 자연에서 소재를 찾아 애련하고 섬세한 가락을 노래했다.
그는 “누님의 치맛살 곁에 앉아/ 누님의 슬픔을 나누지 못하는 심심한 때는/ 골목을 빠져 나와 바닷가에 서자”(「밤바다에서」 1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슬픔이라는 삶의 근원적인 정서에 한국적 정한의 세계를 절제된 가락으로 실어, 그 속에서 삶의 예지와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그의 시에 있어서 자연이란, 삶의 이치를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음으로써 영원하고 지순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세계이다.
그는 그 자연에 의지하여 위로와 지혜를 얻지만, 때로는 자연의 완벽한 아름다움과 인간과의 거리 때문에 절망하기도 한다. 박재삼의 시는 1950년대의 주류이던 모더니즘 시의 관념적이고 이국적인 정취와는 달리 한국어에 대한 친화력과 재래적인 정서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여 주어, 전후 전통적인 서정시의 한 절정을 이룬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그의 시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구어체의 어조와 잘 조율된 율격은, 그의 시의 아름다움과 자연스러움을 보장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학력사항> 고려대학교 - 국어국문학(중퇴)
<경력사항> 현대문학사, 대한일보사, 삼성출판사 등에서 근무
<수상내역> 제2회 현대문학신인상, 한국시인협회상, 노산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인촌상
<작품목록> 울음이 타는 가을 강, 춘향이 마음, 수정가, 한, 햇빛 속에서, 소곡
정릉 살면서, 천년의 바람, 어린 것들 옆에서, 뜨거운 달, 비 듣는 가을나무,
추억에서, 거기 누가 부르는가, 아득하면 되리라, 간절한 소망, 내 사랑은[시조집]
대관령 근처, 찬란한 미지수, 가을 바다, 바다 위 별들이 하는 짓, 박재삼 시집,
사랑, 그리움 그리고 블루편, 사랑이여, 가을바다, 기러기 마음을 나는 안다[편],
햇볕에 실린 곡조, 해와 달의 궤적, 꽃은 푸른빛을 피하고, 허무에 갇혀,
나는 아직도, 다시 그리움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남기고, 박재삼 시선집
[네이버 지식백과] 박재삼 [朴在森]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권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