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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01.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묵상글 (8/31. 21:10, 05:15, 05:20. )
1) 저는 아래 몇 분의 글만 공유합니다.
1차 공유하는 묵상글: 고인현 신부님. 호명환 신부님.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2차 공유할 묵상글: 05-06시이후
< 김찬선 신부님: 05:15 추가. 호명환 신부님: 05:20 추가.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05:15 1편 더 추가>
2) 정회원님 중 다른 묵상글을 공유하실 분은 오늘 묵상글을 이 뜨락에 게재하여 주시고
지난 묵상글은 “5-1. 소금(나눔) 뜨락 1”에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3) 이 묵상글 뜨락은 8월 15일 이후에도 당분간 현재와 같이 운영하며
전체 공지 "H. 260707" 2-1의 가-1), 나)를 실행할 계획입니다.
가-1) 프란치스칸 공동체나 개인 또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존중하는 분으로서 이 카페를 인계받아 운영할 의사가 있으신 분과 협의를 시작하고, 이 공간의 인계, 인수는 합의가 되는 대로 즉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 위 사항이 이루어지지 아니할 때는 11월 대림시기부터는 실질적으로 운영을 중단하고, 카페의 여러 자료를 활용하실 분을 감안 당분간 존속시키고, 적당한 때(2027년 상반기 또는 그 이후) 폐쇄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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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1코린2,10ㄴ-16)
10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십니다.
11 그 사람 속에 있는 영이 아니고서야,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영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하느님의 생각을 깨닫지 못합니다.
12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13 우리는 이 선물에 관하여, 인간의 지혜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말로 이야기합니다. 영적인 것을 영적인 표현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14 그러나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영적으로만 판단할 수 있기에 그러한 사람은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15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지만,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받지 않습니다.
16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아 그분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복음<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루카4,31-37)
31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 고을로 내려가시어,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32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3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34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3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치기는 하였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다.
36 그러자 모든 사람이 몹시 놀라,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하며 서로 말하였다.
37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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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01.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2026.08.31 20:21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루카 4,31-37
오늘 복음에는 놀라운 역설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가장 ‘정확히’ 말한 이가
다름 아닌 ‘마귀의 영’이라는 점입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군중보다도 더 정확한 고백입니다.
그런데도 그 ‘앎’은 그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성 대 바실리오가 일깨우듯,
여기에 깊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아는 것’과 ‘사랑하며 내어 맡기는 것’은 다릅니다.
사도 야고보도 말합니다.
“마귀들도 믿고 벌벌 떱니다”(야고 2,19).
마귀의 앎은 두려움에 찬 ‘메마른 앎’일 뿐,
사랑도 항복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에게 오는 첫 성찰의 물음은 이것입니다.
‘나의 믿음은 그저 그분에 ‘대하여’ 아는 것인가,
아니면 그분께 나를 ‘내어 맡기는’ 것인가?’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 하나로 명령하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그러자 사람을 옭아매던 영이 물러가고,
그 사람은 ‘아무런 해도 입지 않고’ 자유로워집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어,
우리를 옭아매는 것을 풀어내는 힘이 있습니다.
여기서 두 번째 성찰의 물음이 옵니다.
‘나를 조용히 옭아매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이는 습관에, 어떤 이는 두려움에,
어떤 이는 미움이나 욕심, 중독에 매여 삽니다.
오늘날의 ‘더러운 영’은 이름만 바뀌었을 뿐,
우리를 소리 없이 붙들고 자유를 앗아 갑니다.
성시간이란 바로 그 ‘매인 것’을
그분의 자유롭게 하는 말씀 앞에 데려가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십니다.
“나를 사랑하면… 내가 위로자를 보내리라”(요한 14,15-17).
옭아맴에서 풀려난 자리에,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오셔서 머무십니다.
영적 성찰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의 믿음은 ‘아는 것’인가, ‘내어 맡기는 것’인가?
나를 소리 없이 옭아매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그분의 ‘자유롭게 하는 말씀’ 앞에 데려가는가?
나는 풀려난 그 자리에 ‘성령’을 모셔 들이는가?
주님,
‘아는 것’에 머물지 않고 사랑으로 내어 맡기게 하소서.
저를 옭아매는 것을 당신 말씀 앞에 내려놓게 하시고,
풀려난 그 자리에 위로자 성령을 모시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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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01.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2026.08.31. 15:57
세상의 고통과 연대 안에 서 있습시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세상의 고통과 함께하는 연대가 곧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입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
세상의 고통과 연대 안에 서 있습시다!
2026년 8월 31일 월요일
리처드 신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선택하신 사건이, 하느님께서 고통받는 인류와 함께하시는 연대를 드러낸 것임을 성찰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고통과 함께하려는 연대 속에 살아가고, 피할 수 없는 고난을 외면하지 않을 때, 우리는 다양한 "십자가"를 만나게 됩니다.
많은 이들이 아픔(pain)을 단순히 육체적 불편함으로 이해하지만, 사실 '고통'(suffering)은 그 아픔을 거부하거나 부정할 때, 혹은 그것이 부당하다고 느낄 때 생겨납니다. 제 삶 안에서도 그것이 참으로 진실하게 드러납니다. 이것이 바로 고통의 핵심 의미이며,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가 어렵게 배워가는 진리입니다. 아픔(pain)은 인간으로 살아가는 데 치러야 할 대가처럼 보이지만, 고통(suffering)은 대체로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발적으로 받아들이신 부당한 고이었으며, 이는 세상의 모든 고통과 하나 되신 완전한 연대의 행위였습니다. 이 사랑의 신비를 묵상할 때 우리의 삶은 변화될 수 있습니다.
저는 세상의 더 큰 고통과 함께하려는 그 초대에 응답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는 깊은 내적 자유가 필요합니다. 그분의 삶은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이며, 부르심이고, 성소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 자유롭게 '예'라고 응답할 수도 있고, '아니오'라고 거절할 수도 있으며, 혹은 '글쎄요'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야만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랑은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하느님께 그분으로 받은 사랑을 사랑으로 되돌려 드리고,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며,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방식으로 사랑하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합니다(로마 6:3; 필립 3:10–12).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교는 단순히 소속 체계에 머물 뿐, 세상을 변화시키는 구원의 체계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하시는 것은, 하느님께서 언제나 고통받는 이들의 편에 서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전쟁터에서 상처 입고 죽어가는 양쪽의 병사들, 세상의 피해자들과 억압자들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솔직히 말해, 이러한 진리는 많은 이들에게 불편하게 다가옵니다.
오늘날 우리는 고통을 피하려는 거대한 산업 속에 살고 있습니다. 미국 사회에서 총기 로비의 막강한 영향력, 영구적인 전쟁 경제, 가난한 이들과 이익을 나누는 것에 대한 두려움, 끊임없는 오락에 대한 집착 등이 이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모든 덕목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용기"(courage)라고 말합니다. 라틴어 어원 cor-agere는 "마음의 행동"을 뜻합니다. 그러니 타인의 고통과, 나 자신의 고통 속에 연대하며 걸어가는 데에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합니다. [1]
만일 하느님께서 인간의 고통 속에 단순히 방관하거나 묵인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에 실제로 참여하신다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적어도 관상적 시선으로 "응시"하려는 이들에게는 그렇습니다. 겸손하고 고통받는 영혼들은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이 진리를 배우지만, 그리스도교 성경은 이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공적이고 극적으로 드러내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결코 홀로 이 길을 걸을 수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힌 인류와 깊이 하나 됨으로써만 가능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우리와 함께,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일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갈라디아서 6:15)이 되고, 참된 제자가 되며, 전혀 다른 존재로 변화됩니다. [2]
우리 공동체 이야기
오늘 아침 향기도(Centering Prayer) 중에 뜻밖의 한 이미지가 떠올랐습니다. 저는 스스로가 자캐오가 올라갔던 그 나무에 앉아 있는 듯한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그 순간은 제가 이전에는 결코 생각해 보지 못했던 성찰로 이끌었습니다. 오랜 세월 성경과 함께 기도하다 보면, 그 이야기들이 단순히 읽는 텍스트가 아니라 실제로 살아 있는 체험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 느낀 것은 마치 복음 자체가 저를 찾아온 듯한 체험이었습니다. 말씀은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성령 안에 살아 움직이며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Ilka F.
References
[1] Adapted from Richard Rohr, Eager to Love: The Alternative Way of Francis of Assisi (Franciscan Media, 2024), 21, 22–23, 24.
[2] Adapted from Richard Rohr, Things Hidden: Scripture as Spirituality (Franciscan Media, 2022), 202, 203, 223.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Jenna Keiper, CAC Environment, 2019-10-09, Photograph, CAC campus, Albuquerque NM. "되어 가는 여정" 위에서 짐을 내려놓고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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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01.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http://www.ofmkorea.org/ofmkfb/584423
2026.08.31 15:41
안개 속의 아다지오
젖은 어둠이 숨죽여 내려앉는 밤
세상은 부드러운 안개 너울을 쓰고
천천히 가장 낮은 음역으로 가라앉는다
희미한 등불 아래 서성이던 시간
말하지 않아도 가 닿는 마주친 눈빛
오랜 침묵 끝에 그리움이 맞잡은 두 손은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따스한 온기로 번져가고
흔들리는 가녀린 어깨 위로
보이지 않는 영의 바람결이 스쳐 지나갈 때
가슴 깊은 곳, 오래 묵은 슬픔은
차마 소리 내지 못하는 쉼표가 된다
홀로 견뎌온 고단한 길 위에서
잡은 손을 타고 흐르는 연민과 위로
모든 경계가 흐려진 이 밤
아무것도 움켜쥐지 않아도 좋은
고독은 비로소 깊은 기도가 된다
자욱한 안개는
세상의 소음을 지우며 찾아와
우리 영혼의 빈자리를 가만히 채워주는
지극히 고요하고 다정한 은총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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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01.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9.01 05:10
- 관계 거부자
아시다시피 주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두 가지 중요한 일을 치르십니다.
먼저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는데
그때 성령께서 내려오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이 선포됩니다.
다른 하나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가시어 악마와 마주하시고
악마로부터 혹독한 유혹을 세 가지 받지만 다 이겨내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신화 같은 것에나 나오는 얘기가 아닐까요?
과학자들은 이런 존재와 이런 세계를 인정이나 할까요?
사실 과학자들 가운데 무신론적 과학자들은 결코 인정치 않거나 무관심할 것이고,
심리학자들 가운데서도 대다수는 마귀 들린 것을 정신병 취급할 것입니다.
이에 비해 우리 신앙인들은 이런 영적 존재가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고,
이에 관해 올바로 아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건강한 신앙생활은 시작됩니다.
일부 신앙인들은 영적인 존재와 세계를 인정하지만
잘못 믿기에 잘못된 신앙으로 빠져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바오로 사도가 영에 관한 올바른 가르침을 줍니다.
그는 영 가운데 세상의 영과 하느님의 영이 있음을 얘기합니다.
제가 감히 풀이한다면 세상의 영은 세상을 향한 영이기에 당연히
세상사에 온갖 관심이 있고 하느님과 천국에 관한 관심은 없으며,
그래서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을 바오로 사도는 현세적 인간이라고 하며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런 현세적 인간과 달리 올바른 신앙인은 하느님을 알 뿐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알아본다고 얘기합니다.
“하느님의 영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하느님의 생각을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올바른 신앙인이라면 하느님에게서 오시는 영을 받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알아보고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올바른 신앙인이 아니라면 현세적 인간이 아닐 뿐 아니라
오늘 복음에 나오는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도 아닐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은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하고 소리치지만
하느님을 잘못 알고 그래서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하느님에게서 오신 거룩한 분으로 주님을 알지만
자기들을 멸망시키러 오신 분으로 잘못 알기에
자기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그들은 관계를 거부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주님이 아니라
멸망시키기 위해 오셨다니 이 얼마나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그렇게 알기에 관계를 거부하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어쨌거나 우리는 오늘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나는 하느님과 영적 세계에 관해서는 무관심한 현세적 인간이 아닌지,
주님을 멸망시키러 오신 분으로 알고 관계를 거부하는 관계 거부자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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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01.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2026.09.01. 05:15
우리 안에 동정심과 연민을 키워 나가기 위해...
오늘 복음에 앞선 복음 내용은 우리가 어제 목격했던 루카 복음 4장 1-30절의 장면입니다. 이 부분에서 루카 복음 저자는 예수님의 공생활이 나자렛에서 시작되는 극적인 모습을 전합니다. 처음에는 많은 이들이 놀라움과 경탄으로 반응했지만, 주님께서 당신의 사명이 유다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을 위한 구원을 이루는 일임을 밝히시자 사람들의 태도는 바뀌었습니다. 그들은 "좋은 말씀만 해주는 메시아"에 대한 기대에서 "도전적인 메시아"의 현존 앞에 불편함을 느끼며, 결국 분노와 적개심으로 주님을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적개심과 반항적인 도전 앞에서도 결연히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시기 위해 당신의 고향 나자렛을 떠나 그곳에서 약 80km 떨어진 카파르나움으로 발걸음을 옮기십니다.
이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당신의 가르침을 시작하시는데, 그 가르침이 다른 랍비들이나 율법 교사들의 가르침과는 완연하게 달랐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루카 복음 저자는 "그분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합니다.
'권위'는 단순히 어떤 문서나 다른 이의 허락을 받아 '공식적으로' 말하는 것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 랍비들은 늘 다른 랍비들의 말을 인용하거나 성경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그러나 권위라는 말의 본 뜻은 이와는 정반대의 의미를 지닙니다. '권위'라는 말, 즉 'authority'의 라틴어는 auctoritas(아욱또리따스)인데, 이는 auctor(아욱또르: 근원)에서 왔으며, 여기서 'author'(저자)라는 영어 단어도 파생되었습니다.
그러니 참된 권위로 말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 안에 그 근원이 있는 것이고, 그러므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말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권위 있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곧 그분의 말씀은 인용이 아니라 그분 자신에게서 흘러나온 것이며, 바로 그 때문에 그 말씀은 악령을 쫓아내고 사람들을 속박에서 해방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 자신에게서 나오는 권위로 악한 영을 쫓아내셨다는 것은 그 권위가 당신 아버지의 사랑에서 기인하는 것임을 증명해 줍니다. 악은 선으로만 몰아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루카 복음 1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을 때 군중 가운데 몇이 "저자는 마귀의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루카 11,15)고 비난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 11,20)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시는 하느님의 손가락은 하느님의 치유하고 구원하는 선한 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하느님의 선한 힘이 작용하는 곳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와 있는 곳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율법 위에 계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지하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제정하신 하느님의 뜻과 하나 되신 것입니다.
율법은 수많은 세부 규정으로 해석되고 그것이 글자 그대로 준수될 때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참된 목적이 실현될 때 완성됩니다. 그리고 율법의 참된 목적이란 사람을 살리고 치유하며 용서하는 하느님의 선이 실현되는 것이겠지요?!!
여기서 예수님과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고통받는 이들을 연민과 동정심을 가지고 바라보시며 그들을 치유해 주셨다면,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연민이나 동정심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자기들의 의로움, 즉 철저한 법 규정의 준수에만 오직 관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우리는 점점 더 '자기 성취'가 더 중요해지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좋은 말로 하자면 '자기 성취'이지만 이는 '우리'보다 '나'가 훨씬 더 중요하게 인식되는 세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와중에 우리는 참된 인간성(人間性), 즉 서로가 서로를 위하며 배려하며 같은 마음을 품어 주는 정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요한바오로 2세 교황이 말한 대로, 하느님 나라가 물리적인 장소가 아니라 "관계성"이라면 우리가 하늘 나라의 현실을 살기 위해서는 이러한 정을 우리는 회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권위를 가지고 치유하시고 가르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서로에게 그 권위를 가지고, 즉 서로에 대한 동정심과 사랑을 가지고 서로를 치유하고 용서하며 살아가도록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초대해 주시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로부터 안식일을 어겼다는 비난을 자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심지어 돌아가신 후에도 예수님께서는 토요일(안식일)에 저승으로 내려가 아담 이래로 그곳에 머물던 이들을 해방시키셨습니다.
성 암브로시오(333–397)는 이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루카는 안식일에 시작된 치유의 업적을 묘사하면서, 옛 창조가 멈춘 자리에서 새 창조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라고요...
하느님께서는 엿새간의 창조를 마치신 후 일곱째 날인 안식일(토요일)에 쉬셨는데, 바로 이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치유해 주시면서 새 창조를 시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일이 우리 세상에서 펼쳐지기 위해서는 우리 내면의 동정심을 키워 나가는 수양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매일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하고 청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이 '아버지의 나라'가 실현되게 하기 위해 우리도 아버지께 협력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서로의 고통에 대해, 세상의 고통에 같은 마음, 즉 동정심을 키워 나가는 일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 묵상을 하면서 요즘 제 마음 안에 뭔가 모를 불안함과 공허함이 존재하는 이유를 어슴프레 찾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필시 제 안에 '우리'보다 '나'가 더 강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라는 성찰을 하게 되는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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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01.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http://www.ofmkorea.org/ofmkfb/584434
2026.08.31 22:03
가을이 걸어오면
가을이 걸어오면
하늘은 가장 맑은 빛을 풀어
산과 들의 이마를 짚습니다.
빛이 머문 자리마다
나무는 제 안의 빛깔로 깊어지고
들녘은 익어가는 침묵으로
하늘을 받아냅니다.
그 빛은 어느새
내 마음에도 내려와
오래 감추어 둔 그늘까지
조용히 비춥니다.
아름다운 것은
왜 이토록 슬픈지,
가득 물든 세상 앞에서
나는 오히려
내 안의 가난을 봅니다.
붙잡은 것 많았으나
정작 내 것이라 부를 것은 없고,
채우며 살아왔으나
마지막 남은 것은
빈 가슴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제야 알겠습니다.
비어 있음은
당신이 오실 자리였고,
가난은
은총이 머무는
가장 깊은 그릇이었음을.
나무는 잎을 놓으며
하늘에 가까워지고,
들풀은 자신을 낮추어
빛을 온몸으로 통과시킵니다.
나도 그렇게
당신의 빛을 가리지 않는
가난한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받은 사랑을 붙잡지 않고
흘려보내며,
내려놓을수록 맑아지고
낮아질수록 깊어져,
마침내
내 삶 하나가
당신을 비추는
작은 찬미가 되기를.
가을이 깊어갑니다.
나무는 비워지고
하늘은 더 넓어집니다.
그리고 나도
조용히 두 손을 폅니다.
가진 것 없어
비로소 모든 것을 받는,
그 가난한 자리에서
눈물처럼 맑은 한마디가
가슴 깊이 물듭니다.
찬미받으소서, 나의 주님.
당신으로 가득하기 위해
나는 오늘도
한 잎씩
나를 내려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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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기도 1 하느님께서 들어오시는 거룩한 여백 ( 2026.08.26. 10: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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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기도 2 팔을 벌리시는 하느님과 포옹의 사랑 ( 2026.08.27. 0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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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기도 3 십자가를 바라보는 눈과 존재의 가난 ( 2026.08.28. 03: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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