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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향해: 미국행 노예 수송선의 노예들
미국 최초의 노예들은 1619 년 네덜란드 전함을 타고 버지니아에 도착한 노예들이다.
원래 노예제도의 희생자들이 아프리카 흑인들에게만 국한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영국 하층민 출신의 남녀들이 미국까지 타고 온 배삯을 지불하거나 빚을 갚기 위해 스스로를 노예로 팔기도 했고,
남들에 의해 팔리기도 했다. 1622 년 미국에 도착한 안소니 존슨이라는 아프리카 흑인은 흑인임에도 불구하고,
1651 년에는 자신이 직접 흑인 노예들과 백인 노예들을 계약직 노예로 수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체로 이 무렵 이미 미국에 온 아프리카 출신 흑인들은 노예로서 지위가 고정되어 버렸다.
1670 년경엔 특별한 증명이 없는 아프리카 흑인은 모두 노예로 간주되었다.
농업 노동자에 대한 수요가 폭증하면서 노예 수입에 대한 수요도 늘어나서
17세기 미국에서는 인디언, 무어인, 터키인, 유태인까지 노예로 매매되었다.
사실 노예제도는 아프리카에도 있었다. 그러나 그곳의 노예제도는 미국의 경우와 매우 달랐다.
아프리카의 노예들은 가족의 일원으로 생각되고 그렇게 대접받았다.
그들의 자녀들은 자유인이며 평등한 사회구성원이었다.
한 목격자의 증언에 의하면 "아프리카의 노예는 결혼을 하거나, 재산을 소유할 수 있으며,
자기 자신 또한 노예를 소유할 수 있었다. 또 맹세나 증언도 할 수 있으며 주인의 재산 상속인도 될 수 있었다....
아샨티족의 노예는 열 명중 아홉 명이 양자로 입적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의 자손들은 주인의 인척들과 섞이는 경우가 많아 나중에는 조상의 근원을 알기 힘들었다.
" 아프리카는 워낙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곳이라 한 부족이 다른 부족을 포로로 삼아서
노예로 삼는 일이 매후 흔했지만, 이들은 사실 노예라기보다는 유럽의 농노에 가까웠다.
유럽인들이 노예를 선적해 가기 시작하면서 아프리카인들도 자신들이 부리는 노예와
백인에게 판매하는 노예들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종종 집안에 데리고 있는 노예들이
수출용 노예들을 포획하러 원정을 나가기도 했다.
구스타부스 바사라는 흑인은 이 두 가지 종류의 노예를 모두 경험해 본 노예였다.
1745 년 베닌이란 곳에서 태어난 그는 원래 다른 부족에게 납치되어 노예가 됐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후 4 년 뒤 노예 무역상에게 팔려 미국으로 건너오게 되었다.
그의 인생 이야기는 그가 쓴 자서전 "아프리카인 구스타부스 바사의 흥미로운 인생 이야기"(1791)에 잘 기록돼 있다.
해안가에 처음 도착했을 때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바다와 짐 선적을 기다리며
정박해 있는 한 척의 노예선이었다. 너무나 두려웠다.
이런 두려움은 배 위에 태워졌을 때 거의 공포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승무원들은 내 건강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몸을 이리저리 건드렸다.
나는 내가 아주 사악한 세계로 들어왔으며, 이들이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와 너무 다르게 생긴 이들의 얼굴 모습, 머리 모양, 처음 들어보는 이상한 말투가 이런 생각을 더 강하게 했다.
당시의 내 공포감은 너무 커서, 만약 내가 이 세상 모두를 갖고 있었다면 차라리 그걸 다 주고서라도
아프리카의 가장 비천한 노예신분과 내 처지를 바꿨을 것이다. 배 안을 둘러보자 커다란 화덕에
구리가 끓고 있는 것이 보였고, 그 주변에는 온갖 부족의 흑인들이 쇠사슬에 한데 묶여 있었다.
모두 풀이 죽고 슬픔에 찬 표정들이었다. 내 운명도 어떻게 될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너무나 무섭고 고통스러워 갑판 위에 꼼짝 않고 쓰러져 있다가 마침내 기절하고 말았다.
의식이 약간 돌아오자 흑인 몇 명이 내 주변에 모여 있는 것을 알았다.
그중 몇 명은 나를 배까지 데려다주고 돈을 받아먹은 녀석들 같았다.
이들이 나에게 말을 시켜 기운을 차리게 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는 이들에게 험상궂은 표정과 붉은 얼굴, 긴머리카락을 지닌 백인들이 나를 잡아먹으려는 게
아닌가 물어보았다. 그들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얼마 후 백인 선원 한 명이 술잔에 독주를 조금 담아 가져왔다. 하지만 나는 그가 너무 무서워 술잔을 받지도 못했다.
흑인들 중 한 명이 내 대신 술잔을 받아 나에게 건네주었다. 술을 조금 마시자 기운이 회복되기는커녕
술맛이 빚어내는 이상한 느낌 때문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았다. 난생 처음 맛보는 이상한 액체였다.
그러나 더 이상 슬픔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었다. 곧 갑판 아래에 있는 선창으로 내려가야 했기 때문이다.
선창 안에 들어서자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역한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악취와 함께 울부짖고 있는
흑인들의 모습도 보였다. 그 모습이 너무 끔찍해서 속이 메스꺼워져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
어떤 음식도 맛볼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나는 마지막 친구처럼 차라리 죽음이라도 찾아와 나를 구원해 주길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두 명의 백인이 나에게 음식물을 갖고 왔다.
먹기를 거부하자 한 명이 내 양손을 기계틀에 묶고 그 위에 나를 눕혔다.
다른 한 명은 내 발을 묶은 뒤 나에게 가혹해게 채찍질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일하던 카톨릭 사제, 샌도별 신부는 아프리카에서 일하던 동료 신부 루이스 브랜돈 신부에게
아프리카 흑인들을 노예로 부리는 일이 과연 기독교 교리에 맞는 일인지 문의한 적이 있다.
1610 년 3월 12일 날짜로 보내온 브랜돈 신부의 답장은 다음과 같았다.
"신부님께서는 그 지역에 보내진 흑인 노예들이 적법하게 포획된 노예들인지 알고 싶다고 편지를 쓰셨습니다.
이에 대한 내 대답은,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이미 리스본의 '양심 위원회'에서 거론됐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위원회 구성원들은 모두 박식하고 의식 있는 분들이셨습니다.
상투메, 케이프 베르데, 그리고 이곳 루안다에서 일하시는 주교님들[물론 모두 박식하고 양심적인 분들이시죠] 중에서
노예문제를 비판하시는 분은 한 분도 안 계십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일한 지 벌써 40 년이 돼 갑니다.
우리들 중에는 매우 박식한 신부님들이 많이 계셨었죠.
그러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노예 무역이 불법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들과 브라질 신부들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노예를 구입해서 부리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처음 당해 보는 일이었다. 나는 물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다를 처음 봤을 때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꼈었다. 그러나 할 수만 있다면 선창 그물망 너머로 몸을 던져 바다에 빠져 죽는 게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직 쇠사슬로 묶여 있지 않았던 우리들을 백인들이 가까이에서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물에 뛰어드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런 일을 하다 발각된 흑인들은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밥을 먹지 않는 흑인들은 한 시간 동안 매질을 당했는데 바로 내 경우가 그랬다.
잠시후 나는 쇠사슬에 묶여 있는 흑인들 중에서 고향 사람 몇 명을 만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어느 정도 마음이 안정되었다. 나는 이들에게 도대체 우리 운명이 어떻게 되는거냐고 물어보았다.
이들을 통해 나는 우리들이 이들 백인들의 나라로 노동하러 붙잡혀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비로소 다소 안심되었다. 만약 단순한 노동 이외에 더 나쁜 상황만 벌어지지 않는다면
내가 처한 상황이 그렇게 자포자기할 만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백인들의 표정과 행동이 너무 잔혹했기 때문이다.
우리 부족 사람들에게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잔인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백인들은 이런 모습을 우리 흑인들뿐만 아니라 몇몇 다른 백인들에게도 보였다.
갑판 위로 다시 올라오도록 허락을 받았을 때 내가 눈여겨보았던 한 백인이
앞 돛대의 큰 밧줄로 무자비하게 매질을 당해 죽고 마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들은 마치 죽은 짐승을 버리듯 죽은 백인의 시체를 바다에 던져 버렸다.
나도 똑같은 취급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소름이 끼쳤다.
고향 사람들에게 내가 느낀 공포감과 불안감을 얘기하며, 이 백인들은 제 나라도 집도 없이
배만 타고 다니면서 사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은, 그렇지 않으며,
이들 백인들은 먼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대답했다.
내가 다시 "고향에 있을 때는 왜 저들에 대해 전혀 듣지 못했을까"하고 궁금해 하자
고향 사람들은 그들이 너무 먼 곳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다시 여자 백인들은 어디에 있는지, 여자들도 남자들과 똑같이 생겼는지 물어 보았다.
고향 사람들은 여자들은 그들의 고국에 두고 왔으며 남자들과 똑같이 생겼다고 대답했다.
이 배는 어떻게 해서 물에 떠가는지도 물어보았다. 이것은 고향 사람들도 확실이 모른다고 했다.
밧줄을 이용해서 돛대 위에 천을 매달면 배가 움직여나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배를 정지시킬 때는 백인들이 물 속에다 어떤 주문이나 마법을 행하는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이 설명을 듣고 너무나 놀랐다. 그리고 이들 백인들은 틀림없이 악마적인 존재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후 될 수 있으면 이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려 했지만 너무 좁은 공간이라 잘 되지 않았다.
배가 해안에 머무르고 있는 돈안 나는 대개 갑판 위에 있었다.
하루는 배 한 척이 돛을 올린 채 우리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백인들은 이 모습을 보자 소리를 질러댔고 우리는 이 때문에 더 놀랐다.
배는 가까이 다가올수록 크게 보였으며 마침내 이 큰 배가 우리 배 곁으로 와서
닻을 내리고 정박하는 모습에 나와 내 고향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매우 놀랐다.
마치 마술이라도 펼쳐지는 것 같았다.
큰 배가 정박하자 작은 보트들이 내려지고 보트들은 우리배 쪽으로 다가왔다.
양쪽 배의 선원들은 서로 만나자마자 무척 기뻐했다. 몇 명은 우리 흑인들과도 악수를 나누었으며
우리들에게 자신들의 나라로 함께 가자는 몸 동작을 해보였다. 그러나 그 의미를 자세히 알 수는 없었다.
마침내 우리가 탄 배에 실어야 할 짐이 다 실리자 배에서 무시무시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모두 갑판 아래 선창으로 내려가 있었기 때문에 백인들이 배를 어떻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배를 다루는 모습을 보지 못한 실망감은 악취 때문에 내가 느낀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선창 안의 악취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해서 가만히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우리들 중 몇 명은 맑은 공기를 마시기 위해 다시 갑판으로 올라가도록 허락받기도 했다.
선창 안으로 짐까지 다 몰아넣은 상태였기 때문에 한층 더 역한 냄새가 났다.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흑인들, 무더운 날씨, 게다가 몸을 돌리기조차 힘들 정도로 비좁은 공간...
우리는 거의 질식할 지경이었다. 땀이 비오듯 쏟아졌고 호흡하기도 힘들었다.
부패한 공기 탓에 많은 흑인들이 병에 걸려 죽기도 했다.
백인 노예 매매업자의 대책 없는 탐욕 때문에 죄없는 흑인들이 희생되고 있었다.
이런 비참한 상황은 쇠사슬로 인한 상처 때문에 더 악화되었다. 상처가 쓰라려 견딜 수 없었다.
게다가 변기통의 오물들까지 한몫을 했다. 아이들 중에는 잘못해서 그곳에 빠져 질식사할 뻔한 경우도 있었다.
여자들의 벼명소리, 죽어가는 병자의 신음 소리가 들려오면 이곳이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무시무시한 생지옥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얼마 안 있어 몸이 매우 쇠약해졌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갑판 위에서 보내야 했다. 그리고 백인들은 내 나이가 아직 어렸기 때문인지 발에는 족쇄도 채우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다른 동료 흑인들의 운명을 공유하고 싶었다. 특히 거의 초죽음 상태가 되어 갑판으로
옯겨지는 흑인들을 보며, 차라리 내가 저런 처지라면 이 비참한 상황을 끝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선창 제일 밑바닥에 있는 흑인 노예들이 나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는 생각이 몇 번이나 들었다.
오히려 그들의 처지와 내 처지를 바꾸고 싶었다.
배 안에서 접하게 되는 상황 하나하나가 내 처지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고, 불안감을 고조시키고,
백인들의 잔인함을 확인시켜 주었다. 하루는 백인들이 많은 생선을 잡은 적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생선을 물리도록 실컷 먹고 난 뒤 남은 생선들을 그대로 바다로 던져버렸다.
갑판 위에 있던 우리 흑인들은 너무 놀랐다. 가능한 한 모든 표현 수단을 동원해서 남은 생선을 좀 달라고
애걸했지만 먹으라고 주기는커녕 잔인하게 모두 그냥 버린 것이다.
우리 고향 사람 몇 명이 너무 배가 고파서 아무도 안 볼 때 몇 마리를 훔쳐 먹으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들통이 나고 말아 아주 가혹하게 채찍질을 당했다.
바람이 잔잔하고 파도도 높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내 바로 옆에서 함께 쇠사슬로 묶여 있던 고향 사람 두 명이 너무 탈진해서,
"이렇게 비참한 삶을 사느니 차라리 죽겠다"며 그물망을 넘어 함께 바다로 뛰어내렸다.
그러자 마침 질병으로 인해 쇠사슬이 풀린 채로 방치되어 있던,
몹시 침울해 보이는 흑인 남자 한 명도 그 뒤를 따라 뛰어내렸다.
아마 백인들이 뛰쳐나와 막지 않았더라면 순식간에 많은 흑인들이 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다.
적극적으로 뛰어내리려고 했던 흑인들은 즉시 갑판 아래 선창으로 보내졌다.
배 안은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소음과 혼란으로 가득찼으며 결국 배는 멈취 서고 말았다.
곧 보트가 내려지고 백인들이 뛰어내린 흑인들을 찾아 나섰다.
처음 두 명은 이미 익사해 버린 뒤였고 나중에 뛰어내린 흑인만 구해 냈는데,
백인들은 노예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려 했던 이 흑인을 무자비하게 매질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말로 다 이야기할 수 없는 고통을 격으며 향해해 나갔다.
이 저주받은 노예 무역이 만들어 낸 고통들이었다. 우리는 신선한 공기의 부족으로 몇 차례나 질식사할 뻔했다.
어떤 경우는 며칠 동안 단 한 번도 신선한 공기를 쏘일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적도 있었다.
선창 자체의 악취와 변기의 악취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항해 도중에 처음으로 날치를 보고 깜짝 놀란적도 있다.
이들은 종종 배를 가로질러 날아다녔으며 그중의 몇 놈은 갑판 위에 떨어지기도 했다.
또한 나는 처음으로 사분의(천체의 고도를 관측하는 부채꼴의 도구: 역주)를 사용하는 모습도 보았다.
선원들이 그걸 가지고 관측하는 모습이 무척 신기했지만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신기해 하자 선원 중 한 명이 내 호기심을 더 자극하려는 듯 하루는 그 안을 들여다보도록 허락했다.
흘러가는 구름이 마치 육지처럼 보였다. 이를 통해 나는 내가 다른 세계에 와 있으며,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마술에 걸려 있다는 확신이 다시 한 번 들었다.
(다음 광고는 인도가 영국의 통치를 받던 시절인 1818 년 캘커타 신문에 실렸던 내용이다:
"여자들을 추첨으로 판매함"
유럽에서 수입해 온 지 얼마 안되는,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들이 딸린 여섯 명의 아리따운 숙녀분들을
브리티쉬 갤러리 바로 옆에서 추첨으로 판매합니다.
모두 건강해서 뺨에 홍조를 띠고 있으며 눈은 반짝거리고 성격은 상냥합니다.
그리고 무척 교양도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 숙녀들을 한 번 보면 반할 것입니다.
판매계획: 한 장당 12루피씩 티켓을 열두 장 발행합니다.
추첨을 세 번 해서 가장 높은 점수가 나온 사람이 물론 가장 멋진 여자를 차지합니다.)
우리는 마침내 바르바도스 군도가 보이는 곳까지 도착했다.
백인들은 기뻐서 소리를 지르고 우리에게도 기쁨의 표시를 해댔다. 우리는 그들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배가 항구에 다가가자 항구의 모습이 똑똑히 보이기 시작했으며
다양한 종류와 크기의 배들이 정박해 있는 모습이 또렷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배는 이 배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정박했다.
저녁 시간인데도 많은 상인들과 농장주들이 배에 올라왔다.
그들은 우리들을 여러 무리로 나누어 주의깊게 검사했다.
제자리에서 뛰어보라고 요구하기도 하고 특정한 지점을 가리키며 뛰어갔다 오라고 시키키도 했다.
우리는 이 흉학한 사람들이 우리를 잡아먹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갑판에서 내려온 후 너무 무섭고 두려워서 계속 몸이 덜덜 떨렸다.
배는 결국 미국 본토에 도착했으며 위 글의 필자인 구스타부스 바사는 버지니아의 한 농장주에게 팔렸다.
그는 나중에 영국의 해군 장교에게 되팔렸으며, 그 다음에는 필라델피아의 한 상인에게 팔렸다.
이 상인이 그에게 자유로운 삶의 기회를 주었다.
이후 구스타부스 바사는 여객선의 승무원이 되어 세상 구경을 많이 했다.
그는 또 노예제도를 폐지하기 위하여 열심히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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