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꽃 피는 학교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 /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지고 / 뉘 집을 들어서면은 반겨 아니 맞으리 // 바람 없는 밤을 꽃 그늘에 달이 오면 / 술 익은 초당마다 정이 더욱 익으리니 / 나그네 저무는 날에도 마음 아니 바빠라.” 이호우 ‘살구꽃 피는 마을’. 내가 고등학교 다닐 적 국어교과서에 실린 작품이다. 그의 누이는 청마가 보낸 연서 수취인 이영도 시인이다.
삼십여 년 전 80년대 중반 나는 이호우 영도 남매 고향집과 가까운 시골 초등학교에서 근무했다. 밀양 상동면 안인초등학교였다. 지금 경부선은 대구에서 밀양을 거쳐 부산에 이르는 철길도 KTX가 다니면서 일부 곡선 구간을 직선화했다. 그때 밀양역과 청도역 사이에 간이역 수준의 유천역이 있었다. 근래에 역명을 상동역으로 바꾸었고 하루 몇 차례 무궁화가 정차하는 것으로 안다.
나는 유천역에서 2킬로미터 떨어진 그곳 학교에 2년간 근무하다 삼랑진으로 내려갔다. 유천과 삼랑진에서 열차를 타고 대구 근교 경산 소재 야간강좌 대학 국문과를 다녔다. 인인초등학교에선 식사를 해결할 식당이 없어 삼랑진으로 옮겼더랬다. 안인초등학교 근무할 당시 유천역을 지난 경북 청도 유천마을에서 자전거를 타고 통근하던 정년이 가까웠던 평교사 한 분이 기억에 남는다.
내가 젊은 날 안인초등학교에서 같이 근무했던 지역 원로교사는 이호우 시인의 재종이었다. 이호우 시인과는 6촌 동생으로 같은 마을 태생이고 서로는 잘 알았다. 당시 현역으로 활동하던 어느 신문사 논설위원도 항렬이 같은 집안이었다. 둘의 할아버지는 형제로 지역 유지였다. 나는 주말이나 방학이면 하천을 두고 경남과 경북 경계가 나누어진 청도 유천으로 건너가 보기도 했다.
유천은 밀양강의 상류로 운문 계곡과 풍각에서 발원해 흘러온 개울이 합류하는 지점이다. 자갈돌에 맑은 물이 고인 ‘빈지소’라는 유원지가 있었다. 열차 교통이 편리해 봄에는 대구나 부산의 대학생들이 야유회를 왔고 여름엔 피서객들도 넘쳤다. 천변에는 매운탕집이 몇 곳 되고 누구나 천렵을 즐겼고 특히 다슬기가 많이 잡혔다. 지금도 유천 일대 맛집으로 알려진 다슬기탕집이 있다.
유천은 밀양 북쪽과 인접한 청도 최남단이었다. 경남과 경북의 경계였다. 멀지 않은 곳에 새마을운동 발상지가 있다. 마을 앞으로는 개울이 흐르고 뒤로는 산이 에워싸 논밭이 많지 않은 지형이었다. 청도 관내 다른 읍면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나는 젊은 날 밀양에서 열차나 시외버스를 타고 청도를 지나 대구 근교 경산을 4년간 오르내려 차창 밖에 비친 그곳 풍광이 눈에 익었다.
농지가 적은 산간지역은 들판 주민들보다 더 부지런했다. 논밭이 귀하니 산비탈을 일구어 과수원으로 만들었다. 청도 산비탈 과수는 종류가 다양했다. 복숭아나무와 사과나무와 감나무였다. 이들 과수 가운데 봄날 복숭아나무가 꽃을 피우면 무척 아름다웠다. 그 꽃이 복사꽃 아니던가. 밀양에서 청도를 거쳐 경산을 오르내리면서 차창 밖 흐드러지게 피어났던 복사꽃을 잊을 수 없다.
청도를 지나칠 때면 사계절 가운데 봄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이호우 생가가 있는 유천은 물론 청도 일대는 봄이면 울긋불긋 꽃 대궐을 이루었다. 유천엔 실제로 수령이 오래된 살구나무가 더러 있었다. 이른 봄이면 분홍색 꽃을 피우는 살구나무였다. 요즘은 어디나 텃밭에 매실나무가 흔하다만 그 시절엔 그렇지 않았다. 이른 봄 잎보다 먼저 피는 살구꽃이 단연 눈길을 끌게 마련이었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로 들어와 마무리 지으련다. 근래 비가 몇 차례 넉넉히 내려 가뭄이 해갈되었다. 교정 천연잔디는 물기를 머금고 새움이 돋으려 한다. 뒤뜰 수선화와 가는잎할미꽃이 화사하게 피었다. 매화와 산수유꽃은 절정을 지난다. 삼월 셋째 월요일 아침나절이었다.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교정에는 주말을 보낸 사이 연분홍 살구꽃이 화사하게 피어났다. 살구꽃 피는 학교다. 18.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