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로부인 헌화공원
소재지 :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원덕읍 임원리 산 323-1
임원항 뒤편 남화산 정상에 위치한 수로부인 헌화공원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헌화가'와 '해가' 속 수로부인 이야기를 토대로 만들어진 공원이다. 절세미인으로 알려진 수로부인은 신라 성덕왕 때 순정공의 부인이다. 남편이 강릉 태수로 부임해 가던 중 수로부인이 사람이 닿을 수 없는 돌산 위에 핀 철쭉꽃을 갖고 싶어하자 마침 소를 몰고 가던 노인이 꺾어다가 바치고, 가사를 지어 바친 것이 4구체 향가인 '헌화가'다. 임해정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용이 나타나 수로부인을 바다 속으로 끌고 갔는데, 백성들이 노래를 부르자 다시 수로부인이 나타났다고 한다. 이 노래가 신라가요인 '해가'다. 공원에는 이 수로부인 전설을 토대로 한 다양한 조각과 그림 등이 조성돼 있다. 이와 함께 산책로, 데크로드, 전망대, 쉼터 등이 갖춰져 있어 탁 트인 동해 바다의 비경을 감상하면서 걷기 좋다. 공원의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는 초대형 수로부인 상은 높이 10.6m, 가로 15m, 세로 13m, 중량 500t에 달하며, 천연 돌로 조성돼 관광객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천연오색 대리석 조각상들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바다 풍경이 장관이다.
수로부인헌화공원 입장요금은 성인 기준 3천원이다.
용이 탐낸 아름다운 무녀
수로부인
목차
경덕왕의 장모, 수로부인
바다로 끌려간 아리따운 부인
수로부인 설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
무속신앙으로 바라본 두 가지 사건의 세 가지 공통점
가뭄과 굶주림이 낳은 무녀 설화
현재까지 전하는 신라 향가 중에서 우리에게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것으로 「서동요」와 「헌화가」, 「처용가」를 들 수 있다. 이들 향가는 선화공주와 수로부인, 그리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처용의 부인 등 모두 아름다운 여인들과 관련된 노래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 가운데 특히 「헌화가」는 단순히 수로부인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당시 신라의 정치적·사상적인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경덕왕의 장모, 수로부인
수로부인이 누구인지 밝혀주는 구체적인 자료는 없다. 다만 수로부인의 남편이 순정공(純貞公)이라는 기록이 있으므로 이를 통해 그녀에 대한 실마리를 풀어야 한다. '순정'은 이름이고, '공'은 존칭이다. 공으로 일컬어진 것이나 하서주(河西州)의 장관이었다는 사실에서 그가 신라 진골 귀족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당시 '공'이라는 존칭은 신라 최고위급의 인물들에게만 사용되었고, 주의 장관은 진골귀족에게만 해당되는 관직이었다.
문제는 '순정'이라는 이름이 수로부인 설화 이외의 다른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다만 『삼국사기』와 『속일본기』에는 성덕왕대 활동한 인물로 김순정(金順貞)이라는 인물에 대한 기록이 있다. 수로부인의 남편인 순정공과 김순정은 각각 다른 한자를 사용하고 있지만, 발음이 같다. 신라의 인명에서는 발음이 같은 한자를 구별 없이 쓰는 경우가 많았고, 또한 김씨의 경우에는 성이 생략되기도 하였다. 가령, 경덕왕의 두 번째 장인인 김의충(金義忠)의 경우 『삼국유사』에는 의충(依忠)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의'자를 발음이 같은 다른 한자로 쓰고 성을 생략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순정공과 김순정은 모두 신라의 진골귀족이니 순정공과 김순정은 동일 인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기록에 따르면 김순정은 이찬(伊湌)을 거쳐 상재(上宰)까지 진출하였으니, 이를 통해 그가 신라 최고위급 인물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삼국사기』에는 신라 경덕왕(742~765) 왕비의 아버지가 이찬 순정(順貞)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경덕왕에게는 두 명의 왕비가 있었다. 첫 번째 왕비는 자식이 없어서 폐위된 삼모부인(三毛夫人)이고, 두 번째 왕비는 만월부인(滿月夫人)이다. 이들 중 만월부인은 743년(경덕왕 2)에 경덕왕과 혼인하였고, 아버지는 서불한(舒弗翰) 김의충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김순정은 경덕왕의 첫 번째 왕비 삼모부인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수로부인은 삼모부인의 어머니이며, 경덕왕의 장모가 된다.
바다로 끌려간 아리따운 부인
『삼국유사』에는 수로부인과 관련된 두 가지 설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 두 설화는 각각 「헌화가」와 「해가사」를 품고 있다.
성덕왕 때 순정공이 강릉(지금의 명주) 태수로 부임하는 길에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 곁에는 높이가 천 길이나 되는 바위 봉우리가 병풍처럼 바다를 둘러싸고 있고, 그 위에는 철쭉이 활짝 피어 있었다. 공의 부인 수로가 그것을 보고 주위 사람들에게 "저 꽃을 꺾어다 줄 사람이 없는가?"라 하고 물었다. 그러나 종자들은 "사람의 발길이 닿기 어려운 곳입니다."라며 모두 사양하였다.
마침 암소를 끌고 그 곁을 지나던 한 늙은이가 부인의 말을 듣고 그 꽃을 꺾어왔다. 그리고 가사를 지어 읊으며 부인에게 꽃을 바쳤다.
붉은 바위 가에
잡은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다시 이틀 길을 더 가다가 임해정(臨海亭)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홀연히 한 마리 용이 튀어나와 부인을 끌고 물속으로 들어가버렸다. 순정공은 허둥지둥 발을 구르며 야단을 쳤으나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또 한 노인이 말하기를 "옛사람의 말에 여러 사람의 말은 쇠도 녹인다고 했으니, 바닷속의 미물인들 어찌 여러 사람의 입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이 지역의 백성들을 모아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막대기로 언덕을 두드리면 부인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그 말을 따르니, 용이 부인을 받들고 바다에서 나와 바쳤다. 공이 부인에게 바닷속의 일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칠보 궁전에 음식은 달고 부드러우며 향기롭고 깨끗하여 인간의 음식이 아니었습니다."라 하였다. 부인의 옷에서는 이상한 향기가 풍겼는데, 이 세상에서는 맡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수로는 용모와 자색이 매우 뛰어나 깊은 산이나 큰 못을 지날 때마다 여러 번 신물(神物)에게 붙들려 갔다. 이에 여러 사람이 해가(海歌)를 부르며 수로부인을 찾았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를 내놓아라
남의 부녀를 빼앗아 간 죄가 얼마나 큰가
네가 만약 거역하고 내놓지 않으면
그물로 잡아 구워 먹으리라!
『삼국유사』 권2, 기이2, 수로부인
수로부인 설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
지금까지는 주로 수로부인의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최근 역사학계에서는 다양한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그 중 가장 큰 호응을 얻고 있는 것은 수로부인의 무녀적 성격에 대한 해석이다. 이를 바탕으로 수로부인 설화를 새롭게 이해한다면 「헌화가」와 「해가사」는 모두 제의(祭儀)와 관련되어 만들어진 것이 된다.
먼저 「헌화가」가 만들어진 첫 번째 설화에서 높이가 천 길이나 되는 바위 봉우리가 병풍과 같이 바다를 둘러싸고 있는 장소는 인간으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곳, 다시 말해 신들의 신성한 영역이니 곧 제의를 지내는 장소라고 말할 수 있다. 자연히 노인이 끌고 온 암소는 제의와 관련된 제물로 이해될 수 있다.
한국 고대에서 용은 물을 주관하는 용왕으로 인식했다.
다음은 두 번째 사건과 관련된 설화이다. 예부터 우리나라를 포함한 농경사회에서 수로부인을 납치한 용은 수신, 즉 물의 신으로 인식되어 왔다. 특히 신라에서는 진평왕 50년(628) 여름에 가뭄이 크게 들자 시장을 옮기고 용의 형상을 그려서 기우제를 지냈다는 내용이 최초로 기록되어 있다. 농경사회에서는 시장이 번성하면 농사에 불길한 재앙이 생긴다고 믿었기 때문에 시장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또한 서해용왕이나 서해용녀에게 부탁하여 비를 내리게 하였다는 기록도 있는데, 용왕과 용녀는 모두 용의 다른 이름이었다.
수로부인 설화에 등장하는 용은 다분히 부정적인 성격을 띠는 악신(惡神)으로 분류되는데, 악신의 화를 달래기 위해서는 종종 위협이나 주술이 사용되었다. 수로부인 설화에서 보이는 막대기로 언덕을 치는 방법도 그러한 주술의 하나였다. 설화 속의 막대기는 영험을 지닌 주술적 도구인 타구(打具)로 사용되었으며, 순정공을 비롯한 경내의 백성들은 막대기로 언덕을 두드려 후드둑후드둑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흉내냄으로써 비를 기원하였다. 이러한 행위는 막대기가 주술적인 효력을 발휘해 용의 활동을 부르면 틀림없이 비가 내려 가뭄이 해소될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일반집에서 굿을 하고 있는 풍경이다. 전통시대에 무녀는 육체적·정신적 치료의 역할을 했다. 제의과정에서 무녀는 신에게 협박과 회유를 반복한다.
반면 「해가사」에서는 "그물로 잡아 구워 먹으리라."와 같은 방법으로 용을 위협하고 있다. 물의 신인 용을 위협하기 위해서는 물과 상극인 불로 구워 먹겠다는 위협이 적중했을 것이다. 또한 여기서 거북은 육지와 바다 모두를 오갈 수 있는 동물로, 육지에 있는 사람들의 소원을 수신(水神)에게 전달하고 수신의 의사를 인간에게 전해줄 매개자의 구실을 한다. 『별주부전』에서 토끼의 간을 구하기 위해 거북이 육지에 나온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수로부인이 바다의 용에게 납치되는 것은 일종의 신명(Ecstasy)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제의가 점차 열기를 더함에 따라 수로부인은 바다의 용에게 납치를 당하는 환상에 젖어들게 되었으며, 수로부인의 환상을 부추긴 것은 경내의 백성들이 쉬지 않고 규칙적으로 두들겨대는 막대 소리였다.
무속신앙으로 바라본 두 가지 사건의 세 가지 공통점
수로부인 설화에 등장하는 두 가지 사건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첫째 모두 바닷가에서 발생하였다는 것, 둘째 점심을 먹을 때였다는 것, 셋째 노옹이 등장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우선, 두 가지 사건 모두 바다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사건 당시 신라의 수도 경주에 살던 순정공이 강릉으로 부임하는 길이었고, 경주에서 강릉으로 가기 위해서는 동해안을 따라가는 여정이 가장 보편적이었다는 당시의 기록을 고려하면 쉽게 납득이 간다.
둘째, 각각 바닷가와 임해정에서 점심을 먹었다는 대목은 이 설화의 시간적 배경을 유추하게 한다. 이때의 점심(晝饍)은 일반인의 음식이 아니라 왕이나 천자와 동격인 신에게 제의를 행할 때 바치는 음식이다. 수로부인이 바닷속 칠보 궁전에서 먹었던 음식(饍)도 '달고 부드러우며 향기롭고 깨끗하여 인간의 음식이 아닌' 신에게 바치는 음식이었다.
셋째, 높이가 천 길이나 되는 바위 봉우리에 핀 철쭉을 꺾어다 바치는가 하면 바닷속으로 납치된 수로부인을 구출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등 어려운 상황에 번쩍하고 나타나 문제를 해결해주는 노옹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가질 수 없는 신비한 능력을 갖추고 있으니, 가히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왕래하면서 양측의 의사를 전달하는 무격(巫覡)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밖에 무녀인 수로부인의 '용모와 자색이 매우 뛰어났다'는 기록은 무녀로서 그녀의 능력이 매우 뛰어났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무녀로서 그녀가 가진 능력은 수로라는 이름에서도 증명된다. 물길이라는 뜻의 '수로(水路)'는 물의 신과 관련된 「헌화가」의 제의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또한 '깊은 산이나 큰 못을 지날 때마다 여러 번 신물에게 붙들려 갔다'는 대목은 다시 말해 깊은 산이나 큰 못을 지날 때마다 그곳에서 제의를 지냈던 것을 의미한다.
가뭄과 굶주림이 낳은 무녀 설화
수로부인 설화가 기록된 성덕왕(702~737)대는 삼국통일 이후 정치적으로는 안정되어 있었으나 성덕왕이 재위하던 36년 동안 크고 작은 천재지변이 모두 43회나 발생하였다. 그 중 아홉 번은 가뭄과 그로 인한 기아였다. 성덕왕 4년(705)에 가뭄이 들어 나라 동쪽의 주군에 흉년이 들자 굶주림에 지쳐 먹을 것을 찾아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속출했고, 성덕왕은 사신을 파견하여 이들을 도우려 하였다. 그러나 2년 연속 흉년이 계속되어 기근은 더욱 심해졌고, 국가에서는 굶주린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주고 죄수를 사면하였다. 계속되는 흉년과 기근은 정치적·사회적 불만으로 이어졌고, 이에 성덕왕은 백성들의 불만을 가라앉히면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순정공을 하서주 도독으로 파견하였다.
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 용당리 가야진사에 모신 용신을 받드는 제의로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왔다(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19호).
한편 중앙에서 파견된 순정공과 그의 부인인 무녀 수로부인은 하서주 지역에서 제의를 주도했다. 제의는 그 지역 주민들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당시 아무리 사소한 제의라 해도 이를 주도한 것은 관, 곧 나라였다. 이는 정신적·사상적으로 지방민을 지배하여, 나라의 지배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지역 주민들과 함께한 제의에서 수로부인은 무녀로서의 빼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흉년과 기근에 시달리던 주민들을 구제할 수 있었으니, 지역 주민들이 수로부인에 대한 고마움을 칭송하는 과정에서 그녀가 가진 주술적 능력을 외적인 아름다움으로 바꾸어 표현한 것이 아니었을까.
| 김덕원 |
수로부인 헌화공원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