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6일 [사순 제4주간 토요일]
복음: 요한 7,40-53
성경 해석: 빛으로 빛을 보는 일
오늘 복음은 성경 해석에 관한 요한복음의 이해를 보여줍니다. 복음사가들은 생각했습니다.
‘왜, 어떤 이들은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어떤 이들은 그 반대로 나아갈까?’
루카 복음은 그 사람 안에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특별히 ‘부자와 거지 라자로’ 비유에서 이것이 잘 드러납니다.
부자는 라자로를 부활시켜 자기 형제들에게 보내 달라고 부탁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 할아버지는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 즉 성경을 믿지 않으면 죽은 사람이 부활해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너희들에게 표징이 없어서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돈에 대한 욕심이 너희 눈을 가려서
믿지 못하는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고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 예언자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다고 예수님을 부정합니다.
성경은 모두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같은 성경을 읽어도 그 해석이 다른 것입니다.
요한은 루카 복음에서 더 전진하여 결국 그들 안에 ‘사랑’이 없어서 성경을 읽어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뒤에 나오는 것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유다 지도자들은 율법대로 그녀에게 돌을 던져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율법을 존중해 주면서도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십니다.
율법 위에 자비와 사랑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그들 안에 사랑이 없으니 사랑 자체이신 분이 인간이 되셔서 하는 행동들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려는 것입니다.
빛으로 빛을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꽃이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안에 이미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없는 것은 인식할 수 없습니다.
개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꽃이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우리가 우주가 끝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인식할 수 없는 이유는 우주 밖으로 나가 우주를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한계 내에서 보이는 것만 인식할 뿐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이 없다면 성경을 읽어도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아들도 알아보지 못하는 중증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아들이 있습니다.
아들은 아파트 경비원입니다.
어머니를 어쩔 수 없이 병원에 입원시켜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남편 없이 아들을 키워야만 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 하나를 잃게 됩니다.
의족으로 걸어야 하는 아들을 엄마는 일으켜 주지도 않습니다.
넘어졌을 때 스스로 일어나라며 모질게 떠납니다.
아버지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자란 아들은 그런 어머니가 미웠습니다.
운동회 날 아들은 학교 가기를 꺼립니다. 그러나 엄마는 빨리 일어나 운동회에 가라고 합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데 운동회에 가라는 엄마가 밉습니다.
그에게 걸림돌은 비탈진 골목길 계단이었습니다.
일반인도 오르내리기 어려운 경사의 길을 매일 지나다녀야 했습니다.
특히 눈이 오는 날은 더 그랬습니다.
그런데 항상 눈이 쓸려 있었고 그것을 어머니가 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모진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눈이 오는 어느 날, 병원에서 어머니가 사라졌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급히 달려간 아들은 어머니를 찾습니다. 그런데 병원 앞에서 눈을 쓸고 있는 것입니다.
짜증 난 목소리로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라고 아들이 말합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못 알아보고 말합니다.
“눈 쓸어요. 눈이 오잖아요.
우리 아들이 학교 가야 하는데, 다리가 불편해서.”
그제야 아들은 깨닫습니다.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할 때, “혼자 일어나지 못하면 앞으로 어떻게 살래?”라고 했던 말과
“운동회라 창피해서 학교에 못 간다고? 그럼 평생 숨어 살아!”라고 했던 말이 이해됩니다.
어머니가 사랑이셨다는 것을 다시 믿게 된 것입니다.
“아들은 몰라요, 그거.”
“몰라도 돼요. 우리 아들만 안 미끄러지면 돼요.”
아들은 눈물을 흘리며 겉옷을 벗어서 열심히 눈을 쓰는 어머니를 덮어드리고 안아드립니다.
[출처: ‘치매 걸린 어머니가 한겨울에 눈을 쓸고 있었던 이유’, 유튜브 채널, ‘JTBC Voyage’]
먼저 사랑을 믿어야 사랑의 행위가 보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믿지 못한 상태에서는 어머니의 모든 행위가 미움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사랑을 믿으니 모든 것이 사랑으로 보입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안에 사랑이 없는 사람은 성경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랑이심을 발견하고 하느님의 아드님임을 믿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같은 성경을 보고도, 같은 십자가를 보고도 누구는 믿고 누구는 믿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오늘 복음 바로 직전에는 당신께서 주시는 생명의 물인 성령을 받으라는 ‘성령’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도에 의해 쓰였습니다.
사랑으로 쓰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의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성경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아무리 연구해도 하느님 사랑의 계시인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예 수님은 당신은 빛이시고 어둠 속에 머물지 말라고 하십니다.
진리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인데, 진리는 성령의 빛으로만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은 죄를 지은 사람 안에는 머무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요한 8,34)라고 하시고, 그들이 성령을 지니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 스스로 “거짓의 아비”를 따라서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요한 5,44) “아비의 욕망대로”(요한 8,44) 살기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자기의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신의 죄를 감추려고 거짓말을 합니다.
이것이 빛이 아닌 어둠을 섬기는 방식입니다.
그 어둠 속에 빠져있기 때문에 빛을 알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믿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성경공부가 아닙니다.
죄에서 벗어나 성령을 충만히 받으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빛으로만 빛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시편 36,10 참조).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16일 [사순 제 4주간 토요일]
요한 7장 40-53절
진리는 바로 내 발밑에
예수님의 등장으로 인해 이제 이 세상은 크게 두 부류의 사람으로 양분되었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부류의 사람들과 끝까지 거부하는 부류의 사람들로 나눠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세상 도래를 기점으로 인해 예수님은 인간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그래서 그분의 탄생을 기점으로부터 서양 역사의 기원인 서기(西紀, Anno Domini-A.D)를 세기 시작합니다.
역사 시간에 기원전 이란 말로 통용되는 "B.C" 역시 Before Christ, 예수님의 탄생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이처럼 인류 역사 안에 한 획을 긋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진정한 행복을 찾은 사람, 삶의 의미를 찾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분으로 인해 인생 쫄딱 망한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닙니다.
그분으로 인해 인생 종치고 죽음의 길로 접어든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의 자유 의지를 무척이나 존중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거부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에 맡기십니다.
인간 측의 자유의지에 일임하십니다.
예나 지금이나 죽어도 예수님 받아들이지 못하고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의 존재를 도저히 용납하지 못하고 끝까지 수용하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쓸데없이 자존심만 강한 사람,
괜한 똥고집을 잘 부리는 사람,
뭔가 특별한 것만 찾는 사람,
대단한 것들에만 혈안이 된 사람들입니다.
사실 메시아는 바로 우리 가까이에 계시는데,
천국 문이 바로 우리 일상 안에 자리 잡고 있는데,
진리는 바로 내 발밑에 있는데,
눈이 너무 높기에, 기대치가 너무 높기에,
너무나 물질 만능주의, 세속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기에 이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쉽게 쉽게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기꺼이 그분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단순한 사람, 소박한 사람, 가난한 사람,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언제나 마음이 열려있는 사람,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고 매사에 감사하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너무도 자연스럽게, 거부감 없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다시 한번 예수님을 주님으로 기꺼이 고백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입술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구체적인 삶으로 응답하겠다는 다짐입니다.
그분의 일생을 내 삶 안에 깊이 각인시키겠다는 맹서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3월16일 [사순 제4주간 토요일]
복음: 요한 7,40-53: 그리스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리가 있겠는가?
초막절을 지내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에게 많은 것을 말씀하셨다. 이러한 말씀과 행적을 본 군중들은 예수님이 바로 자기들이 기다리던, 모세가 약속한 예언자(참조 신명 18,15)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그분이 그리스도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라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지 않겠느냐며 논쟁을 한다. 그분이 자라나신 나자렛에 가려 그분이 베들레헴에서 다윗의 후손으로 동정녀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대부분 사람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점으로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다. 성전 경비병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깜짝 놀랐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와 위엄에 압도되어 감히 예수님을 잡아서 끌어올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46절) 하였을 때,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49절)이라고 욕한다. 우리는 여기서 율법을 모르던 사람들이 율법을 내리신 분을 믿었고, 율법을 가르치던 사람들은 그분을 업신여겼다. 결과적으로 율법학자인 바리사이들은 눈먼 자들이 되었고, 율법을 모르면서도 율법을 만드신 분을 믿은 이들은 보게 되었다.
예수님을 만났던 니고데모가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51절) 하였을 때,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52절)하고 니고데모에게 핀잔을 주고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52-53절 참조). 이것이 비극이다. 믿음의 체험이 하나의 무미건조한 논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논쟁의 대상이 아니며 그분은 우리가 올바로 알고 누려야 하는 분이시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어려서부터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고 있다. 우리는 또한 많은 경우에 나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있는 삶을 살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도 그렇게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잘 되는 것을 시기하고 질투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된다. 권력이나 지식이나 교만으로 쌓은 벽을 허물어야 한다. 이것을 다 헐어버릴 때, 우리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이 사순절의 기간이 진정 우리에게 은총의 때가 되도록 열심히 노력하여야 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