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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02.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묵상글 (9/1. 22:10, 04:55, 07:05.)
1) 저는 아래 몇 분의 글만 공유합니다.
1차 공유하는 묵상글: 고인현 신부님. 호명환 신부님.
2차 공유할 묵상글: 05-06시이후
< 김찬선 신부님: 04:55 추가. 호명환 신부님: 07:05 추가.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07:05 추가. >
2) 정회원님 중 다른 묵상글을 공유하실 분은 오늘 묵상글을 이 뜨락에 게재하여 주시고
지난 묵상글은 “5-1. 소금(나눔) 뜨락 1”에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3) 이 묵상글 뜨락은 8월 15일 이후에도 당분간 현재와 같이 운영하며
전체 공지 "H. 260707" 2-1의 가-1), 나)를 실행할 계획입니다.
가-1) 프란치스칸 공동체나 개인 또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존중하는 분으로서 이 카페를 인계받아 운영할 의사가 있으신 분과 협의를 시작하고, 이 공간의 인계, 인수는 합의가 되는 대로 즉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 위 사항이 이루어지지 아니할 때는 11월 대림시기부터는 실질적으로 운영을 중단하고, 카페의 여러 자료를 활용하실 분을 감안 당분간 존속시키고, 적당한 때(2027년 상반기 또는 그 이후) 폐쇄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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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1코린2,10ㄴ-16)
10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십니다.
11 그 사람 속에 있는 영이 아니고서야,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영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하느님의 생각을 깨닫지 못합니다.
12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13 우리는 이 선물에 관하여, 인간의 지혜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말로 이야기합니다. 영적인 것을 영적인 표현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14 그러나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영적으로만 판단할 수 있기에 그러한 사람은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15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지만,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받지 않습니다.
16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아 그분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복음<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루카4,31-37)
31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 고을로 내려가시어,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32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3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34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3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치기는 하였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다.
36 그러자 모든 사람이 몹시 놀라,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하며 서로 말하였다.
37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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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02.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루카 4,38-44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하루를 짧게 보여 줍니다.
그 하루에 세 가지 결이 담겨 있습니다.
‘치유’와 ‘기도’와 ‘파견’입니다.
먼저 ‘치유’입니다.
시몬의 장모는 열에서 나은 뒤
‘즉시 일어나 시중을 들었습니다.’
주목할 점은 그 순서입니다.
나음이 곧바로 ‘섬김’으로 이어졌습니다.
성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가 일깨우듯,
은총으로 낫는다는 것은
‘나만 편해지는 것’이 아니라
‘섬길 힘을 되찾는 것’입니다.
받은 은혜는 움켜쥐면 병들고,
흘려보내면(섬기면) 살아납니다.
다음은 ‘기도’입니다.
그 바쁜 치유의 하루를 보내신 뒤,
예수님께서는 ‘날이 밝자 외딴곳으로’ 나가셨습니다.
가장 분주한 사명의 한복판에서도,
그분은 홀로 아버지께 나아가 머무셨습니다.
이 ‘물러남의 기도’가 모든 활동의 샘이었습니다.
영적 성찰의 자리도 바로 이 ‘외딴곳’입니다.
거기서 그분은 ‘내가 무엇을 위해 파견되었는지’를
또렷이 아셨습니다.
마지막은 ‘파견’입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붙들어’ 곁에 두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답하십니다.
“나는 ‘다른 고을들에도’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그 일을 하도록 내가 파견되었다.”
여기에 일치의 깊은 진실이 있습니다.
복음은 ‘한 고을’이 독점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우리 곁에만’ 붙들려는 마음이야말로
도리어 일치를 가로막습니다.
그분은 ‘모든 고을, 모든 민족’을 위한 분이시기에,
우리는 그분을 ‘함께 나눌 때’ 하나가 됩니다.
영적 성찰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두 가지를 묻습니다.
‘나는 받은 은혜를 섬김으로 흘려보내는가?’
‘나는 그리스도와 은혜를 나만의 것으로 붙들려 하지 않는가?’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은혜를 받은 뒤 ‘섬김’으로 일어서는가?
나는 분주함 속에서도 ‘외딴곳의 기도’를 두는가?
나는 ‘내가 무엇을 위해 파견되었는지’ 아는가?
나는 그리스도를 ‘함께 나누는가’, ‘붙들려 하는가’?
주님,
낫게 하신 은혜를 섬김으로 흘려보내게 하소서.
분주함 속에서도 외딴곳의 기도를 잃지 않게 하시고,
당신을 ‘우리 것’으로 붙들지 않고 함께 나누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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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02.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2026.09.01. 21:15
자기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마음의 십자가!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이 어떻게 복음의 기쁜 소식이 될 수 있을까요?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
자기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마음의 십자가!
2026년 9월 1일 화요일
마태오 복음 16장에 대한 강론에서 공공 신학자(public theologian)인 나디아 볼츠-베버(Nadia Bolz-Weber)는, 예수님의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가르침이 주변부에 있는 이들의 고통을 더 크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음을 강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며 따르라고 하십니다. 또한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이는 잃게 되고,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잃는 이는 오히려 참된 생명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말씀은 오늘날 세상에서 인플루언서가 되기에는 전혀 맞지 않는 메시지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브랜딩'으로는 아마 열두 제자 이상을 얻지 못하셨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저도 여러분처럼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이 어떻게 복음의 기쁜 소식이 될 수 있는지 고민합니다. 특히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이 왜곡되어, '당신의 성적 경향을 부인하고, 이성애라는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거나, '당신의 존엄을 부인하고, 가정 폭력 속에서 계속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식으로 잘못된 메시지로 사용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볼츠-베버는 십자가를 이렇게 이해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하느님과 서로에게 의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을 드러내는 표징이라는 것입니다:
최근에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고 하실 때, 그것은 제자들을 마치 '밟히는 존재'로 만들려는 뜻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과 다른 이들과 분리되어 살아가려는 마음을 부인하라는 초대일 수 있다."고요.…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영성을 단순히 고통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여기는 자아를 내려놓으십시오.
항상 끝없는 요구를 만들어내는 자아를 부인하십시오.
자기 안에만 갇혀 하느님과 이웃을 바라보지 못하는 자아를 부인하십시오.
너의 존엄을 훼손하며 스스로를 향해 모진 말을 내뱉는 자아를 부인하십시오.
결코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고 가장하며 은총과 공동체의 손길을 거부하는 자아를 부인하십시오.
결국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죽음과 부활의 신비 가운데 하나는, 거짓된 자아의 죽음입니다.
그러나 거짓된 자아의 죽음은 결코 기분 선한 일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사실 리처드 로어는 "거룩함은 결코 거룩함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저 죽어가는 것처럼 느껴질 뿐입니다."라고 쓴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우리가 의지하던 불건전한 생각과 습관, 그리고 잘못된 정체성이 우리에게서 제거될 때, 그 자리에 참으로 실재하는 것, 참으로 거룩한 것이 자리하게 됩니다….
여기에 '나 중심의 해결책'은 없습니다. 대신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어리석음입니다. 곧,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이는 잃을 것이고, 자기 목숨을 잃는 이는 오히려 얻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살아내는 어리석음입니다….
십자가는 여전히 자기 힘으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이들에게는 어리석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약한 이들, 냉소적인 이들, 사회적으로 어색한 이들, 지쳐 있는 이들… 이혼한 이들, 실직한 이들, 술에 의지하는 이들… 다시 말해 도움과 안식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이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곧 하느님의 어리석음)는 우리의 해결책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생명입니다. 그것은 더 높은 지위나 더 많은 학위, 더 큰 재정적 안정으로는 결코 줄 수 없는 생명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최근 리처드 로어 신부님의 매일 묵상(Daily Meditations)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성스러운 땅에 발걸음을 옮기지는 않았지만, 저는 영과 실천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의 제자로 살아왔습니다. 날이 갈수록 저는 더 큰 평화를 느끼며, 옛 자아에서 벗어나 새로운 영적 세계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Andrew M.
References
Nadia Bolz-Weber, “Notes from a Late Bloomer,” The Corners, Substack, February 25, 2024. Used with permission.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Jenna Keiper, CAC Environment, 2019-10-09, Photograph, CAC campus, Albuquerque NM. "되어 가는 여정" 위에서 짐을 내려놓고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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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02.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9.02 04:52
- 아직도 육적인?!
“여러분은 아직도 육적인 사람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시기와 싸움이 일고 있는데, 여러분을 육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인간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어제 독서의 마지막 구절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입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는 코린토 신자들이 아직 육적인 사람이라고 꾸짖는 내용입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반대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어쩌면 ‘아직도’이고,
우리도 코린토 신자들처럼 세례 성사로 성령을 받고 그리스도교에 입문했지만
아직도 성령의 사람이 되지 못하고 육적인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육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을 가르는 기준이 여럿 있지만
제 생각에 그 가운데 하나가 분열과 일치입니다.
아주 분명합니다.
성령은 일치하게 하고 육의 영은 분열하게 합니다.
성령이 일치하게 한다는 것은 너무 자명하고
이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수없이 얘기합니다.
그리고 특히 코린토 1서 전체가 이 성령의 일치를 얘기하기 위해 쓰인
편지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특히 12장 13절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세례받고 한때 성령을 받았다고 해도
코린토인들처럼 지금 분열과 파당과 대결을 살고 있다면
우리는 아직도 또는 다시 육의 영을 지니고 사는 겁니다.
그러므로 육의 영은 분열의 영이라고 단언할지라도
잘못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는 오늘
육의 영이 무엇이길래 분열케 하는지 그걸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육의 영은 천상을 향하게 하기보다는 지상을 향하게 하고,
내세를 향하게 하기 보다는 현세를 지향하게 합니다.
그래서 어제 바오로 사도는 이런 사람을 현세적 인간이라고 칭하였지요.
그러나 육의 영은 무엇보다도 자기를 지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은 본래 자기중심적이고 이것을 저는 원죄적인 경향성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세례와 함께 성령을 받지 않으면 자기중심적이기 마련이라는 말입니다.
육의 영은
나만 알고,
나만 옳다고 생각하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 좋아하며 친교를 맺게 합니다.
그러니 반대로
다른 사람의 고통은 모르고
다른 사람은 그르다고 하고,
나를 싫어하고 반대하는 사람은 미워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과는 상종하지 않지요.
이렇게 해서 내 편과 네 편이 생기고
사랑을 하더라도 내 편만 사랑하여
파당과 분열이 필연적으로 생기게 됩니다.
그러니 성찰과 반성은 내 안으로
관심과 사랑은 나 밖으로 향하는,
그런 성령의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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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02.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2026.09.02. 05:33
우리의 말과 감정은 치유를 위한 기도가 될 수도 있고, 그 반대의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치유하시는 힘이 나자렛에서는 억눌려 있다가, 카파르나움에서는 성령의 힘으로 한꺼번에 봇물 터지듯이 넘쳐흐르는 듯합니다. 나자렛에서는 사람들의 익숙함이 그분의 능력을 가로막았지만, 카파르나움에서는 아무런 장벽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이곳 회당에서 안식일에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을 치유해 주시고, 바로 그 다음에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하시고 서 수많은 병자와 악령에 시달리는 이들을 고쳐 주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도 나자렛 사람들처럼 주님에게서 나오는 기적과 치유의 힘을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까지 삶을 살아오면서 이미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고자 하셨던 수많은 기적을 막아 왔는지도 모릅니다.
비판이나 냉소, 절망감 등으로 '내' 주변의 분위기를 주도하거나, 심지어는 경멸의 눈길 하나로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곧 모든 것을 깎아내리는 습관적이고 냉소적인 마음가짐으로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부정적인 존재감을 풍깁니다. 그들의 분위기 안에서는 공동체가 조금씩 죽어갑니다. 이런 분위기 안에서 우리는 자기 이야기를 숨기고, 안전한 말만 하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 공동체는 부식되고, 우리의 믿음도 부식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신앙을 부인한다"는 말을 하지만, 말보다 더 심각한 방식으로 신앙을 해칠 수 있습니다. 말은 적어도 드러나지만, 우리의 눈빛이나 존재 자체, 우리가 풍기는 분위기로도 누군가의 신앙을 은밀히 갉아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 비참한 것은 우리가 그런 암적인 병을 옮기며 주변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쏟아부어 주시며 복음, 즉 기쁜 소식을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살펴보면 거의 항상 복음 선포와 치유나 용서, 위로가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할 때 거기에는 언제나 치유와 용서, 그리고 위로가 늘 동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시사한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어떤 젊은 간호사의 경험을 나누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힘겨운 야간 근무를 마친 뒤 이렇게 말했습니다:
"병원에 들어설 때는 지치고, 피곤하고, 거의 무너진 듯했어요…
그런데 나올 때는 오히려 더 강해지고, 새로워지고, 이상하게도 잔잔한 평화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놀라며 물었습니다:
"밤새 환자들을 돌보며 에너지를 쏟아내었는데 어떻게 더 힘을 얻을 수 있는 거죠?..."
그러자 그 간호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환자의 눈물을 닦아줄 때마다…
물 한 잔을 건넬 때마다…
떨리는 손을 잡아줄 때마다…
제 마음이 치유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제 피곤함은 녹아내리고, 제 약함은 힘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역설 아닐까요?
우리가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를 형제자매들에게 쏟아낼 때…
하느님께서 우리를 다시 채워주십니다.
우리가 기꺼운 마음으로 봉사할 때…
오히려 우리가 새로워집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내어줄 때…
상상할 수 없이 더 큰 것을 받습니다.
이타심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한 영혼 안에서 울려 퍼지는 메아리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며 많은 이를 치유해 주시고 위로해 주시며 당신의 에너지를 쏟아내시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우리에게 이 이타적 사랑의 힘을 내라는 도전을 던져 줍니다.
루카 복음 4장 18절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사명을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의 사명은 곧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일상 안에서 우리는 위로와 희망과 해방을 풍겨주는 삶을 살기 위해 정신을 차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우리의 말과 우리의 감정은 치유를 위한 기도가 될 수도 있고, 그 반대의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일상 안에서 자주 생명을 갉아먹는 무의식적인 감정 상태에서 벗어나 주변에 활력을 주고 치유와 위로를 전하는 영으로 변하게 해 달라고 주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쓰러져 가는 그리스도의 몸을 다시 세울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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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02.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http://www.ofmkorea.org/ofmkfb/584513
2026.09.02 06:35
가난과 기도 6 보게 되는 사람에서 기도가 된 사람으로
가난은 결국 보게 하는 힘입니다. 내 욕망의 안개가 걷히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내 곁에서 말없이 지쳐 가는 형제의 얼굴이 보이고, 인정받지 못한 채 공동체를 지탱해 온 이의 수고가 보이며, 내 판단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의 침묵이 보입니다.
길가의 작은 꽃과 한 방울의 물과 늙은 나무와 창가에 내려앉은 새에게도 하느님의 선성이 스며 있음을 보게 됩니다. 가난은 보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분의 상처 안에서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보고, 실패한 나 자신 안에서 여전히 포기하지 않으시는 자비를 보며, 나와 다른 사람 안에서 내가 갖지 못한 하느님의 선물을 봅니다. 약한 이에게서 하느님의 힘을 보고, 가난한 이에게서 복음의 진실을 배우며, 도움을 청하는 사람에게서 나를 사랑으로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봅니다.
마침내 가난은 내가 보이는 존재가 되는 데서 다른 이를 바라보는 존재가 되는 길입니다. 나를 알아 달라는 갈망에서 벗어나 다른 이의 존재를 알아보는 사람이 되고, 나의 선함을 증명하려는 데서 벗어나 다른 이 안에 이미 주어진 선함을 기뻐하는 사람이 됩니다. 기도는 나를 하느님께 보이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 내 눈을 씻는 은총이 됩니다. 가난과 기도는 서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가난하지 않은 기도는 자기 욕망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꾸미는 일이 되기 쉽고, 기도하지 않는 가난은 분노와 자기 의로움 속에 메마를 수 있습니다.
기도는 가난을 사랑으로 변화시키고, 가난은 기도가 환상에 머물지 않고 구체적인 삶으로 내려오게 합니다. 하느님과 일치한 사람은 세상에서 멀어지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더 깊이 끌어안는 사람입니다.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만난 사람은 상처받은 이들의 울음을 외면할 수 없고, 가난한 이들의 삶을 개인의 불운으로만 바라볼 수 없으며, 고통받는 피조물의 신음을 듣지 못한 척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떼어 놓지 않고 세상의 가장 아픈 자리로 데려갑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오래 바라본 사람은 길가에 쓰러진 사람을 지나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상처에서 그리스도의 상처를 보고, 버려진 이의 눈빛에서 자신을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눈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바라봄의 기도는 마침내 행동이 됩니다. 침묵 속에서 바라본 사랑이 손과 발을 움직여 굶주린 이에게 밥을 건네고, 외로운 이를 찾아가며, 용서받지 못한 사람의 곁에 머물게 합니다.
하느님 사랑은 우리를 비우지만 공허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워진 자리에 더 큰 생명을 채웁니다. 내가 나의 왕국을 내려놓을 때 하느님의 나라가 들어오고, 내가 내 뜻만을 주장하지 않을 때 하느님의 뜻이 관계 안에서 흐르며, 내가 사람을 소유하려 하지 않을 때 비로소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가장 큰 보물은 자신이 가진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을 보물로 여기는 사람은 사람들의 인정에 덜 매이게 됩니다. 자신을 포장하고 증명하고 자랑하고 비교하고 경쟁하던 일이 조금씩 사라집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있는 그대로 알고 사랑하신다는 믿음이 깊어질수록, 나는 다른 사람보다 나아 보이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다른 이가 빛날 때 함께 기뻐할 수 있고, 내가 말째의 자리에 놓여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밀려나지 않았음을 압니다. 가난은 하느님께서 다시 태어나실 공간을 내 안에 만드는 일입니다. 내가 움켜쥔 것을 놓고, 나를 가득 채운 생각과 욕망과 두려움을 비우며,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고백할 때 하느님의 말씀이 내 삶 안에서 다시 육화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내 기도 속에서만 태어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형제를 받아들이는 포옹 안에서, 상처 입은 이를 돌보는 손길 안에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위해 흘리는 눈물 안에서 태어나십니다. 가난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분이 자기 안에서 살아가시도록 자리를 내어 드리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삶을 하느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위한 도구로 내어놓고, 자신을 통하여 사랑이 흘러가도록 허락하는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어느 날 기도는 더 이상 내가 드리는 말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됩니다. 내 침묵이 기도가 되고, 기다림이 기도가 되며, 형제의 말을 끝까지 듣는 일이 기도가 됩니다.
내 것을 내어주는 일이 기도가 되고, 약한 이를 위해 자리를 비우는 일이 기도가 되며, 피조물을 함부로 다루지 않는 일이 기도가 됩니다. 기도하던 사람이 마침내 기도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때 가난은 상실이 아니라 탄생이 됩니다. 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참된 내가 태어나고, 내가 아무것도 갖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형제자매로 돌려받으며, 내 삶이 텅 비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생명으로 충만해집니다. 내가 내 힘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힘으로 살아가며, 나의 영광을 찾지 않고 하느님의 영광이 관계 안에서 드러나도록 허락합니다.
가난은 하느님 사랑을 얻기 위해 치르는 값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사랑을 받아들이는 빈손이며, 가난은 하느님께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아니라 우리에게 내려오시는 하느님을 맞이하는 열린 문이고, 가난은 삶의 아름다움을 빼앗는 어둠이 아니라 사물과 사람 안에 숨어 있는 하느님의 빛을 보게 하는 맑은 눈입니다.
나는 빈손으로 십자가 앞에 섭니다. 설명할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으며, 당신께 보여 드릴 공로도 없이 다만 나의 상처와 실패와 작은 갈망만을 들고 섭니다. 그러나 당신께서는 나의 빈손을 꾸짖지 않으시고, 그 손 안에 당신의 못 박힌 손을 포개십니다. 내가 아무것도 내어놓지 못한다고 말할 때 당신께서는 이미 나 자신을 내어놓았다고 말씀하시고, 내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고백할 때 당신께서는 당신 자신을 나의 몫으로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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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기도 2 팔을 벌리시는 하느님과 포옹의 사랑 ( 2026.08.27. 0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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