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마구 불어제낀다.
온 산에 꽃비가 내리고 있다...바라만 보기에는 너무도 아쉬워 산책길을 나섰다.
산으로 걸어가는 내내 "봄날" 선율이 귀를 뒤 흔들고 있다.
BTS의 봄날을 듣고 홀릭 상태에 있다가 BTS의 모든 것을 좋아하게 되었지만
요즘은 싱어게인 17호 출신 한승윤이 불러주는 "봄날"에 빠져들었다.
너무나 담담하게 불러주는 멜로디와 음색장인의 보컬이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려서도 이긴하다.
그리하여 이 봄날, 꽃비 내리던 산책길에서 마주대하게 된 추억여행은 연분홍으로 다가오면서
그 봄날을 마구잡이로 휘젓고 다니던 대학로 동숭동 마로니에 길로 찾아든다.
가장무도회, 학림다방, 동숭교회, 샘터, 멕시코 음식점, 이화동 성곽길 오르는 계단,
연극, 김ㄷ수 모노드라마 연극쟁이......너무 많은 기억들이 봄날을 떠올리면서 찾아들었다.
그중에서도 "가장무도회"는 연극인 성우인 아내와 영화감독인 남편이
그들만의 색깔로 치장을 하고 그 시절에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외, 내부 장식을 하였던 터라
들어서는 입구부터가 색다른 레스토랑으로서 매력을 발산하였던 까닭에
그곳엘 가면 일명 충무로 군단과 이름만 대면 알만한 연예인들의 발길이 무성하던 곳이기도 했다.
그들을 바라보는 재미도 쏠쏠하고 어쩐지 그들과 나란히 가장무도회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흥분이 될만한.
게다가 드물게 독특한 취향으로 장식되어진 그 공간의 유혹적이고 퇴폐적인 듯하면서도
개성만점인 실내공간에서의 문화적 충격만큼은 여전히 선연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어스름 저녁 기운이 거리를 강타하기 시작하면 레스토랑 "가장무도회"는
이름답게 삶의 변신을 꿈꾸는 사람들의 발길로 번잡해지고
그쯤이 되면 어린 우리들은 슬그머니 그곳을 빠져나와
청춘의 열기가 가득한 우리들만의 또다른 아지트를 향해 걸어가곤 하였다.
그렇게 마냥 거리귀신이 되어 혜화동 언저리를 놀이터 삼아 걷던 그때 그 시절,
혜화동, 명륜동, 동숭동, 이화동은 = 동의어 라는 등식과 표식으로 자리매김을 한다.
당연히 그 공간을 점유하던 우리의 청준들이 뿜어내는 에너지와 열정만으로 충분히 젊음의 거리라 지칭할 수 있었던.
그곳에서 우리의 젊음은 끓어오르다가 휘리릭 산화되기도 했고
털어도, 열어도 끝없이 새어나오는 수다발에 힘입은 떠들석함과
한때는 허황으로 무장되어 거쳐가는 영혼의 안식을 위한 놀이,
연극에 매료된 채 매몰되는 순간들도 꽤 많았다.
물론 그 시절을 온전하게 누릴 수 없는 우리의 가난함은 우리들에겐 별 것도 아닌 척 하는
그런 헛헛한 허세이고는 했지만 그래도 그렇게나마 자신들에게 다양한 옷을 입힌 까닭에
우린 또 다른 성장을 할 수 있었고 그런 문화적 욕구라도 가졌던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던가를
지금 깨닫기도 한다.
어쨋거나 철학을 입에 담지도 못할 만큼의 소소한 그릇이었으면서도
어찌나 그리 자주 학림다방의 문턱을 닳게 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턴테이블과 LP판의 매력치를 느끼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기도 했지만
좁디좁은 계단을 오르는 순간 훅 하고 들어오는 텁텁한 공기 속의 매캐함도 나쁘진 않았다.
그렇게 쏘다니던 기억 속에 인물들은 참으로 다양하지만 이름을 죄다 기억하기도 어렵고
생각은 자꾸 되새김질을 하며 누군가를 떠올리지만 그 훈남-동숭교회에서 연극도 함께 했던,
절절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던 남자, 그러나 더러 의혹의 순간을 공유하기도 했던 그 남자-의
이름은 기억에도 없으니 에효...
그가 쥔장에게 해준 것을 생각하면 어쩐지 그에게 마음을 훅 하고 주었어도 되었을까나? 고 생각해보아도
공과 사를 분명히 구분하는 성격 탓에 그건 아니올시다 였지만 그래도 마음 자락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끝까지 애써주고 인내심을 발휘하던 그가 불현듯 떠올랐어도 여전히 이름이 기억나질 않아 안타깝기도 하다.
그리하여 이화동 성곽에서 바라보는 노을을 선물처럼 투척하며 오르락내리락 했던 시절을 상기하면서
괜히 함께 다녔다고 후회하거나 아쉬워 하거나 안타까워 할 일이겠다.
지금은 너무나 멋지게 변해버린 이화동 성곽둘레길이긴 해도 보잘 것 없었던 그 시절이 더욱 아름답기만 하다.
와중에서도 여전히 잊혀지지 않는 이름은 연극하는 1인 모노드라마 주인공이자 마임이스트 김ㄷ수님.
작은 거인이라 불리울 만큼 연극에 대한 애정도는 말 할 것도 없고 마임이스트로서 누구보다도 자존감이 강한.
모노드라마는 기본이었으며 여전히 연극에 대한 애정의 끈을 놓지 않은 그 이름 석자 김ㄷ수.
지금이야 원로 라는 타이틀이 붙었을 테지만 말이다.
겨우 몇 살 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엄청 어른스럽기까지 하였음은 말할 것도 없고
이미 일찌감치 사회인이 되어버린 그에게서 우리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어른이라는 틀이 주어져 있긴 했다.
그런 까닭에 유난히 우리를 챙겨주기도 하였지만 그런 모든 연유같은 것을 물리치고도
개인적으로 더욱더 그와 친해질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사실 따로 있었다.
여고 옆에 남고 출신이라는 사실과 그 두 학교는 보편적으로는 강 건너 불을 보듯하는 관계이기도 하지만
그 둘의 애증은 아주 끈끈함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어느 곳, 어느 장소에서 만나지더라도
우선 순위로 선점되는 특이한 경우도 허다했음은 물론 무엇을 하든지 간에 애정각 1순위이기도 했을
곁 울타리 여고 출신을 먼저 선호하는 묘한 전통같은 것이 있었다는 낭설......증명 할 수는 없다.
어쨋든 무조건 예쁨을 주고받는 것은 당연지사요 우연히 마주친 공간에서도
애정전선 난무할 만큼의 사랑도를 나눠주거나 애착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서 더욱 오빠처럼 챙겨주었을지도 모를 일이겠지만 그 역시 가난하기는 매한가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뱅이라고 불리울 시절에도 대단히 소중하게 챙김을 받았음은 물론
언제 어느 때 그의 연극공간으로 찾아들어도 배고픈 청춘에게 짜장면 한그릇 쯤은 가뿐하게 해결해주곤 하였다.
그리고 그외에 경험해보지 않아도 될 많은 것들을 스스로 터득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특히 무경험은 어리석은 일이요 경험치를 가중 시키는 일은 살아가는 필요불충분의 요건이기도 하고
그조차를 모른다는 사실은 어리석은 것이라며 자발적 원초적 나락의 길도 안내해 주었던 그런 그 남자 김ㄷ수.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쯤은 근사하게 나이든 모습을 간직하면서 여전히 제 갈길을 가고 있는 것 같긴 하다.
"옆집에 배우가 산다" 라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는 참으로 쓰디쓴, 어렵고 험난한 질곡의 세월을 무던하게 애쓰며 넘지 못할 것 같았던 장벽의 강을 건너고서야
더 멋진 남자로 자리매김 했을 것 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고된 세월을 살아냈다.
작은 거인이라는 타이틀이 괜히 훈장처럼 있는 것이 아니었음이니 지나온 흔적으로 보아서는 엄지척을 하고 싶을 만큼
세월값을 하는 매력남으로 전환된 듯하여 안심이 되기도 한다...오랜 세월이 그의 등뒤로 흘러갔던 것.
참으로 기분 좋은 인연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기도 하고 그를 다시 만난다면 무슨 말이 오갈까 싶기도 하다.
암튼 그렇게 그는 내 인생에 들어와 오래도록 머물고 가곤 했지만 굳이 찾고 싶지는 않은
그러나 마음만 먹으며 찾아지는 연극인으로 잘 살고 있는 것 같아 안도하는 중이긴 하다.
그는 아마도 삶을 버리는 순간까지 연극쟁이라는 타이틀을 버리지 않을 것 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 세월이 정말 너무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지라 그가 버텨내고 인내할 수밖에 없었던 세월에는 박수를 보낸다..
어쨋거나 도시에서 이곳으로 거처지를 옮긴 후에도 간간이 계속 소식을 주고받았으며
한때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고 싶다 하여 아니되옵니다 로 말렸던 기억으로 보자면
연극은 변두리에서 해서는 절대 아니 될 뿐만 아니라 그나마 인지도도 사라진다는 기우 때문이기도 했다.
더불어 용설저수지 근처에 탐냈던 그 장소는 이곳 연극인들의 자리이기도 하고
또 옮겨와 둥지로 자리매김하고자 하였던 장소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그 홍ㅅ자 명상센터였으나
절대 둥지를 옮겨오면 아니되옵니다로 만류하였던 까닭에
그는 지금 자신이 걸어온 길의 마무리를 서울이라는 도시, 종로하고도 연지동에서 이루는 중이라는
바람결 소식도 접수완료 되었다.........글을 쓰면서 지면을 통해 찾아본바로는
어쨋거나 한승윤의 "봄날"을 들으며 연두빛으로 물둘었던 청춘시절이 생각났다.
그 시절, 천방지축의 젊음들이 쏘다니던 대학로...그리고 샘터, 파랑새 극장.
허기를 달래주던 분식집과 엄청나게 좋아했던 멕시코 음식점. 가로수 마로니에가 줄줄이 늘어선 그길.
그리고 절대 잊을 수 없는 동숭교회.
그렇게 내 청춘은 흘. 러. 갔. 다
언제 어디서나 동토의 계절일 수박에 없었던 그런 시절.
그러나 찬란한 봄날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설레던.
첫댓글 봄날과 젊은날은 어찌 그리도 잘 어울리는지~! 극심하면 사람이 망가지기까지 한다는 지경까지 가게 안하시고 그만한 인연과 상황으로 인도하심에 감사하네요.
ㅎㅎ 그러게요.
오래도록 잊고 살았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그런 시절이 있었지를 생각하는 요즘이 나름 행복하다는 생각도.
살면더 다양한 경험치를 갖고 색다른 즐거움을 누렸다는 사실에 고마울 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