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략 2주 정도 전쯤 영화 <앤트맨>을 보았다.
배트맨이니, 트랜스포머니, 아이언맨 같은 영화는 좀 많이 비현실적이고
영웅주의적인 작위성이 지나치게 많다 싶어 그다지 좋다하는 타입은 아니다.
좋아하지도 않는 것을 왜 보느냐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또한 호기심에는 약한 사람인 것이다.
앤트맨 예약하고서도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그 영화를 보고 나니 왠지 뭔가가 마음 속에 남아서 계속 돌아 다니고 있는 것 같았다.
오늘, 어처구니 없게도, 앤트맨이 '무아無我'를 설명하기 위해 만든 영화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퍼뜻 들었다.
앤트맨은 특수 제작된 옷을 입으면 개미 크기로 자기의 몸을 축소할 수 있다는 것이고, 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그보다 더 작게도 될 수가 있다. 그러나 원자 이하의 단위로 자기의 크기를 줄이면, 그 원자의 궤도에 갇히게 되어
영원히 현실 세계로 나올 수가 없게 된다는 전제가 있다.
그런데, 실험실에서 그런 특수 의복을 공동 개발한 박사의 아내는 무슨 사건에서 다른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스스로 그 원자 이하의 크기로 축소되었고, 그 결과 박사는 다시는 자기의 아내를 볼 수 없게 된다.
통한에 잠긴 박사는, 그 특수 옷을 입고 훈련 할 다른 사람을 뽑는다. 그런데 그렇게 훈련 받은 그도 다른 사람을
위해 스스로 원자 이하의 크기로 축소되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현실계에 소생하여 반전된다.
무아는 나를 기준으로 보면, '자기 자신이 없어지는 것'이다. 나가 없어 지는 것이 무아인 것이다.
말하자면 내가 그런 특수 의복을 입어 보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없어질 정도로 작아져야만 남을 도우거나 살릴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보시로 보면 흔히 말하는 무주상보시가 될 것이다.
무주상보시의 공덕은 무량하다고 하므로, 보시의 '공덕'을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보시'를 '나'로 나눈 것이다.
분모인 '나'가 zero에 가까워 지면 가까워 질수록, 분자인 '보시'의 크기에는 상관없이 '공덕'은 무한대에 수렴
하는 것이다.
나는 왠지 이 영화를 보면서 그런 의미를 맘 속에 그려 본 것이 아닐까 한다.
이런 생각은, 누가 들어봐도, 정말 말도 안되는 이야기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