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설악 세암자길(백담사, 영시암, 오세암) 산행 #3
10:30 만해 한용운이 깨달은 곳
조선의 국운이 기울어가던 187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선생은 17세에 설악산에 들어가 오세암에서 머슴으로 일했다.
1905년 백담사에서 출가한 뒤 1917년 깊은 겨울밤 오세암에서 참선하던 중
바람에 물건이 큰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한순간에 득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해의 대표작 '님의 침묵'을 탈고한 곳도 오세암이었다.
만해와의 그런 인연으로 암자 가는 길 곳곳에 그의 선시와 작품들이 세워져 있다.
10:39 오세암 0.6km, 영시암 1.9km 지점 이정표에서 만경대 갈림길까지 급한 오르막길 경사길이 이어진다.
11:44 오세암 가는길 안내판
만경대로 올라 가는 길은 출입금지이다.
오늘의 산행목표는 만경대이지만 출입금지이고 짙은 안개로 만경대의 조망을 기대할 수 없어 만경대 코스는 포기한다.
11:05~11:24 오세암(해발 800m)
643년(선덕여왕12년) 자장율사 창건하였으며 당시에는 관음암(觀音庵)이라 불렀다.
다섯살 아이가 폭설에 부처의 도움으로 살아 남은 전설이 있다.
범종루
오세암과 보우선사
오세암 천진관음보전
생육신 김시습과 오세암
오세암 종무소와 팔만대장경 홍보관
오세암 감로수
오세암 동자전
대웅전인 관음전보다 높은 곳에 동자전은 오세암으로 개칭된 연유의 오세 동자가 모셔진 곳이다.
5살이 된 어린 조카와 암자에서 함께 지내던 스님은 암자를 둘러보니
양식이 다 떨어져 어쩔 수 없이 산 아랫마을로 양식을 구하러 가게 되었다.
이에 혼자 남겨질 조카에게 "혼자 있는 것이 무섭거든 관세음보살님의 이름을 외우며 지내거라." 하고 일러주고는 길을 떠났다.
그런데 스님이 산을 내려가서 양식을 구할 무렵 설악산에 엄청난 폭설이 내려서 도저히 암자로 돌아갈 수 없었다.
결국 봄이 되어서 눈이 다 녹은 뒤에야 서둘러 암자로 올라갔는데, 죽었겠거니 했는데 놀랍게도 조카는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어찌된 연유인지 까닭을 물으니 조카가 말하길 '관세음보살이 때마다 찾아와 보살펴 주었다는 것이다.
스님은 관세음보살의 신력(神力)에 감동해 암자의 이름을 오세암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관세음보살의 신력(神力)이 5세 동자를 돌보았다는, 적당히 감동적이고 또 그만큼의 신비스로운 지극히 종교적인 설화다.
오세암이 된 또 다른 설도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의 작가이자, 생육신의 한 사람인 조선 전기 학자 매월당(梅月堂) 김시습과의 관련이다.
김시습은 ‘오세(五歲) 신동’으로 불렸다. 세종의 손자 단종(端宗)이 숙부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사건이 일어나자,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세상과 등졌다. 오세암은 김시습이 승려가 된 뒤 머물렀던 곳이다.
‘오세 신동’이라는 그의 별칭 때문에 ‘오세암’이라는 설이다.
사과를 들고 있는 동자승
오세동자 이야기
오세선원
관음보살입상
오세암 삼성각
시무외전
화장실 옆으로 봉정암과 마등령 가는 길
오세암 출발전 만경대를 배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