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둘째 주 그룹큐티나눔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 나라
누가복음 9:1-17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주의 발자취를 따름이(찬송 560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제국에서 소외된 가난하고 굶주린 이들을 돌봤습니다. 한국 선교 초기에도 선교사들은 빈자와 병자, 고아들을 돌봤고, 여성의 교육과 권리 증진을 위해 실제적인 사역을 펼쳤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과 관념에만 머무르지 않고 이 땅에서 구현되고 실현되어 왔습니다. 이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사역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예수님과 제자들에 관한 소식을 듣고 헤롯이 당황합니다(1-9절).
1) 제자들은 찾아간 마을마다 어떤 일을 했습니까(6절)?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의 병을 고쳤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신 이유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기 위해서, 병든 사람을 고치기 위해서다. 제자들은 이에 걸맞게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했고, 사람들의 질병을 고쳤다.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것과 질병을 고치는 것에는 특별한 관련이 있다. 복음서는 병 고침(축귀)이라는 하나의 이미지를 통해 어둠에 사로잡힌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하나님의 사건을 중요하게 다룬다. 누가복음은 예수님께서 오신 사건을 이사야서의 성취라는 측면에서 다뤘다(눅 4:16-21). 예수님이 오신 것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하기 위해서,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시대를 전파하기 위해서 오셨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셨던 이유와 같이, 오늘날 우리는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를 보여줘야 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치유 사역을 하자는 말로 오해하진 말자.
2) 세례(침례) 요한이 살아났다는 소문에 헤롯이 두려워한 이유는 무엇입니까(7, 9절)?
자신이 세례 요한을 죽였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은 헤롯이 세례 요한을 죽였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면서도, 다른 복음서들과는 달리 세례 요한을 죽였던 사건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다. 누가복음은 헤롯이 자신이 죽였던 세례 요한이 마치 살아난 듯한 착각에 빠져 두려워했다는 점을 담백하게 보여줄 뿐이다. 헤롯이 어쩔 수 없이 세례 요한을 죽였다는 변명은 누가복음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헤롯은 백성의 목숨을 아무렇지도 않게 빼앗을 수 있는 폭군에 불과하다. 헤롯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왕권을 사용한다(눅 3:19-20). 결코 백성을 위한 힘이 아니다. 그런 통치자가 다스리는 나라의 백성은 다른 의미에서 가난한 사람이고, 포로 된 사람이고, 눈먼 사람이고, 눌린 사람이 된다.
나눔 1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내어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의 삶을 회복시키라고 하신 데 반해, 헤롯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선지자를 죽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살아나지만, 헤롯의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향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참된 면모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2. 예수님이 빈 들에서 무리를 먹이십니다(10-17절).
1) 예수님은 해가 저물 때까지 무엇을 하셨습니까(11절)?
무리를 영접하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고, 병자들을 고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만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병든 자들을 고치라고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언제나 손수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병든 자들을 고치셨다. 본문은 이 점을 계속 반복해서 강조한다. 사람들을 먹이신 사건도 같은 맥락으로 봐야 한다. 단지 병든 사람이 주린 사람으로 바뀔 뿐이다.
2) 날이 저물자, 제자들이 무리를 돌려보내려 한 까닭은 무엇입니까(12절)?
그들이 있는 곳은 빈 들이고, 큰 무리를 먹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날이 저물어가는 것을 보며, 예수님께 사람들을 사람이 거주하는 곳으로 보내자고 말했다. 이유는 매우 단순하고 분명하다. 그들이 있던 장소가 빈 들, 즉 사람이 사는 마을이 아니기에 음식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0절에 따르면 예수님과 일행은 벳새다라는 도시 인근의 들판에 있었던 것 같다. 사람들은 멀지 않은 벳새다에 가면 충분히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심지어 벳새다는 ‘사냥꾼의 집’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볼 때, 먹을 것을 구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곳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제자들의 의견은 매우 합리적이고 타당하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기를 원하셨을 뿐이다.
3) 무리를 돌려보내려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13절)?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예수님의 말씀은 여러모로 합리적이지 않고 타당하지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가난하고 그들을 찾아온 사람들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가진 것이라고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다. 고작 몇 명이 나눠 먹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신다. 자세히 따져본다면 이후에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통해 오천 명에게 먹을 것을 준 분은 예수님이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병든 자들을 고치는 일을 예수께서 손수 하셨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예수님의 전유물은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제자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이처럼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줘야 하는 사람도 제자여야 한다. 복음서는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제자의 자세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물질이 많아야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합리적이고 타당한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예수님은 물질이 적은 가운데서도 누군가를 돕는 것이 제자의 자세임을 가르치신다. 적은 물질을 드리는 이는 제자겠지만, 그 물질을 풍성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이 작은 일이라도 세상 사람들을 살리는 데 동참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이뤄진다.
나눔 2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말로만 전파하지 않으시고 연약한 자를 고치고 빈 들에서 무리를 먹임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씀에서 시작되지만, 말씀에만 머물지 않고 역동적으로 드러납니다. 실현되길 기다리고 있는 말씀이 있습니까?
나눔 3 예수님은 빈 들에서 제자들이 별 기대 없이 꺼낸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 나라는 이렇듯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나와 우리에게 있는, 사람을 살리는 ‘떡과 물고기’는 무엇입니까?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작고 미약한 일이라도 말씀대로 실천하면서 사람을 살리는 데 동참하게 하소서.
공동체 _ 지체들의 섬김과 헌신을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이어주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