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17. 큐티
마태복음 22:23 ~ 33
신학논쟁 2 –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에 공격에 대하여
관찰 :
1) 다시 이어지는 신학 논쟁
- 23절.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 바래새인들과 헤롯당 연합군의 정치적인 문제를 가지고 걸고 넘어지려는 논쟁을 패퇴시키신 예수님의 소식을 들은 사두개인들은 옳거니 하면서 예수님을 넘어뜨리고자 접근을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제기를 통해 예수님을 쓰러뜨리면 자신들이 바리새인들보다 헤롯당보다 신학적 우위에 서게 된다고 생각한 듯합니다.
2) 악한 사두개인들의 질문
- 24절.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 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 “선생님이여” =>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이 그렇게 자신을 설명해주어도 선지자도 아닌 단순한 선생으로 치부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간교한 입술을 가졌지만 이들은 처음부터 악합니다.
- “모세가 일렀으되” => 이들이 가지는 권위는 모세였습니다. 율법이 자신들의 권세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율법이 가지는 본래의 의도, 모세를 통하여 성령께서 하시고자 하셨던 뜻에 대해서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이들의 비인격적인 태도를 보게 됩니다.
- 계대 결혼의 좋은 것을 가지고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을 위해 왜곡하는 이들입니다. 형에게 돌아가야 할 분깃을 그가 후사가 없이 죽으므로 없어지고, 그 아내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을 방지하고자 하는 좋은 율례를 이들은 엉뚱한 것으로 바꾸어 버리고 있습니다.
- 25절.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 들었다가 죽어 상속자가 없으므로 그 아내를 그 동생에게 물려 주고”
- 26절.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 27절.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 28절. “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 일곱 형제의 한 아내의 문제를 가지고 이 땅에서의 상황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까지 연관해서 해석하고, 그것 때문에 심지어는 하나님 나라도 부활도 없다고까지 곡해해서 해석하는 것이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 부활 후에 그 여인이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 그러니까 부활은 없다! 이들의 입장에서는 명쾌한 결론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해서 바른 대답을 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이 있었던 영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이라고 해서 이 문제제기에 답을 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의 이 불의의 한 방으로 예수님을 거꾸러뜨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3) 예수님의 반응과 가르침
- 29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 30절.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 31절.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 32절.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 29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 30절.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 31절.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 32절.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해 오해하고 있다” => 주님은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구약의 말씀에 대해 이리도 무지하고 오해를 하고 있는 자들에 대해서 한심스러우실 정도였을 것입니다.
- 부활 때에는 육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부활체의 모습이 될 것이기에 결혼이 없다. 하늘에 있는 천사와 같게 될 것이다. => 천국에서는 한 남자가 한 여자와 더불어 갖는 연합을 천국의 모든 성도들이 그 이상의 연합으로 누리게 될 것이기에 육신의 연합으로 인한 하나 됨의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시고 있습니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아담의 외침이 갖는 의미, 곧 “너는 곧 나다”라는 사랑의 본질이 부활 이후 하나님 나라에서는 모든 성도들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과 방불하는 사랑의 존재가 되어 사랑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육신의 결혼으로 말미암은 친밀함과 연합을 뛰어넘는 친밀함과 연합을 천국에서는 모두가 함께 누리게 될 것임을 알려주시고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이런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 때는 하나님의 존재성, 즉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서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으로 하나님이 죽은 자도 살리심으로 산자의 하나님이 되심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 주님은 사두개인들에게는 대단히 직접적으로 부활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두루뭉술하게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가르침은 부활을 진짜로 아시기에 가르칠 수 있는 것이고, 누구도 대답하지 못하던 사두개인들의 견고한 신학을 깨부수는 주님의 권능이셨습니다.
4)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놀란 무리들
- 33절.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 이 무리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의 오래 묶은 이러한 질문을 이렇듯 간단히 깨버리는 것은 본적도 없고, 놀랄만하기 때문이었습니다.
- 그러나 이 무리들이 며칠 뒤에 바라바를 내주고, 예수를 십자가 못 박으라고 외치는 폭도가 됩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르침 :
1) 반대를 위한 반대는 오류를 낳고 억지를 만들게 됩니다. 그리고 비진리로 들어가는 지름길입니다. 사두개인들이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기 위한 비유는 있지도 않은 어거지의 상황을 가지고 추정하여 만드는 패러독스였습니다. 과거 ‘바늘 끝에 천사가 몇 명 서있을 수 있는가?’, ‘당나귀의 이빨 개수가 몇 개인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도 드실 수 없는 무거운 것을 만드셔야 한다. 그런데 그 무거운 것을 들지 못하면 전능한 하나님이 될 수 없다’는 등의 패러독스들이 기독교 안에서도 존재했습니다. 이 모두가 주님이 지적하시듯이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에 오해하고 곡해하는 영역이었습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는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통해서 알게 되는 영역입니다.
2) 부활은 실재입니다. reality! 부활이 실재라면 그것을 전제로 하는 삶을 지금 이곳 이 땅에서 살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두고두고 숙제가 되는 영역입니다. 오늘을 살며 부활을 염두에 두자고 한다면 죽어야만 부활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죽어짐으로 누리는 부활을 경험하는 것은 갈 길이 멀고 험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누려야만 하는 것이고, 또한 그것이 실재, reality입니다.
3) 주님의 말씀에 놀라기만 하는 무리가 아니라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순종하는 존재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복받는 존재가 될 수 있기를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적용 :
1) 반대를 위한 반대의 미련함을 사두개인들을 통해서 봅니다. 하나님을 반대하는 것의 미련함, 성경 말씀을 자신들의 생각 속에 집어넣으려는 자들의 무지와 한계를 엿보게 되는 영역입니다. 하나님은 찬성과 반대할 대상이 아닙니다. 순종의 대상입니다. 내가 모르고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말씀 속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나를 넘어서는, 나보다 더 큰 하나님의 말씀의 스케일을 증명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말씀이 나보다 못한 것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전제가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르게 대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진실로 오류가 없는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 부활을 실재로 인정하며 누리는 삶을 살고자 다시금 마음과 생각을 다잡겠습니다. 내가 죽어야만 부활은 실재가 됩니다.
3) 하트스트림에서의 디브리핑을 마치는 날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귀한 시간을 경험했습니다. 중요한 몇 가지 일들이 정리가 되었습니다. 주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