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楚汉志) 1-038
태자단우(太子丹又)는 머리를 가로저으며 대답한다.
"다른 조건이라면 뭐든지 들어드릴 수 있어도 樊於期 장군의 머리를 베어 달라고 하는 것만은
못하겠소이다.우리를 믿고 망명해 와 있는 사람을 어떻게 내 손으로 머리를 베어 드릴 수 있으오리까?"
형가는 태자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되든 안되든 간에
제가 번어기 장군을 직접 만나 보기로 하겠습니다. 모든 것을 저에게 맡겨 주시옵소서."
다음날 형가는 번어기를 직접 찾아가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하고 나서, "진왕을 살해하려면
그를 직접 만나야 하겠는데 진왕을 직접 만날수 있는 방도는 번장군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가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오직 그 방법만이 우리의 나라도 구하고 장군의 원한도 풀어 드릴 수 있는 길이라고
여겨지는데, 장군은 그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번어기는 팔짱을 끼고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결연히 들며 말한다."义를 위하는 일에 어찌 목숨을 아끼겠소.
내가 오늘 밤 스스로 목숨을 끊을 테니, 나의 머리를 가지고 가서 폭군 秦王을 기어이 죽여 주시오."
번어기는 그날 밤 약속대로 자결을 하였다. 태자 단우는 그 소식을 듣고, 울면서 번어기의 시체를
정중하게 장사지내 주었다. 그리고 나서, 번어기의 머리와 비수 한자루를 형가에게 내주며 말한다.
"모든 준비가 다 되었으니, 이제는 길을 떠나 주십시오. 내 수하에 秦舞阳이라고, 칼을 잘 쓰는 소년이
하나 있으니 그 아이를 데리고 떠나소서 그 애더러 진왕을 죽이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진무양이라는 소년은 도대체 무엇을 하는 소년입니까?"
"이를테면 깡패의 두목이라고 볼 수 있는 아인데, 싸움도 잘하거니와 사람 죽이기를
파리 새끼 죽이듯 하는 소년입니다.""이런 일에는 지혜와 담력이 필요하므로 사람을 잘 죽이는
제주만 가지고서는 안 되옵니다. 제가 혼자 갈 테니, 진무양은 따라오지 말게 해주시옵소서."
"선생은 선물만 바치고 진왕을 죽이는 일은 그 아이한테 맡겨야 제 마음이 놓이겠습니다.
그러니까 꼭 데리고 떠나 주시옵소서."
형가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태자의 권고가 하도 간곡하므로 진무양을 데리고 떠나기로 하였다.
한번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마지막 길이었다.그러기에 친구들은 형가를 배웅하는데
모두들 상복을 입고 나왔다. 형가의 막연한 친구 중 高渐离라는 유명한 음악가가 있었다.
그 역시 상복차림으로 筑(거문고 일종)을 들고 나와서 형가 자네가 마지막 길을 떠나는 판이니,
내가 易水까지 배웅을 나가 거기서 이별곡을 연주해 주겠네. 형가와 고점리는 따뜻한 우정을 나누며,
역수강 언덕에 도달하였다. 역수의 푸른 강물은 이날도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언덕 위 풀밭에 나란히 주저앉아 눈 아래 흘러가는 강물을 굽어보며,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고 침묵을 깨고 고점리가 말한다. "이제는 여기서 작별 하기로 하세. 자네의 마지막 길을 위해
내가 거문고를 타서 들려주겠네."
고점리가 거문고를 타는데, 흐느끼는 듯한 그 가락은 가슴을 에어내는 듯 슬프기 그지없었다.
형가는 슬픔을 억제할 길이 없어, 가락에 맞추어 구슬픈 목소리로 즉흥적인 시를 읆는데, 그 시는 이러하다.
<风箫箫兮易水寒。壮士一去兮不復还。/ 바람이 소슬하게 불어옴이여, 강물은 한없이 차도다.
장사가 한번 떠나감이여,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구나.>
형가는 시 한 수를 읊어 보이고 말없이 일어나 배를 타고 강을 건너 가는데, 배에 오르자
그는 두번다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며칠 후 형가는 함양에 도착하자, 진왕의 宠臣인中庶子蒙嘉를 만나
진왕에게 드릴 幣帛(樊於期의首级과 독항 지방의 地图)을 보여주며,
진왕을 직접 만나 뵐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몽가는 번어기의 수급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묻는다.
"당신은 어떤 연유로 번어기의 수급을 가지고 오게 되었소?" 형가가 대답한다. "燕王은 평소부터
秦王殿下를 진심으로 숭배하고 계시옵니다. 그러므로 진왕께서 저희 나라를 형식적인 독립 국가로만
인정해 주신다면 연왕은 기꺼운 마음으로 진왕의 藩臣이 될 생각이옵니다. 그런데 때마침 번어기가
진왕 전하를 배반하고 우리나라로 도망을 왔으므로, 연왕은 그의 배반 행위를 매우 괘씸하게 여기셔서,
그의 머리를 베어 주시며 저더러 진왕전에 갖다 바치라고 하셔서, 제가 가지고 왔사옵니다."
"당신이 이런 귀중한 선물을 가지고 왔으므로, 대왕 전하께서는 연왕의 충성을 매우 어여쁘게 여기실거요,
그러면 내가 이 선물을 대왕전에 곧 갖다 바치기로 하겠소." "그것은 아니 되시옵니다."
"뭐가 안 되겠다는 말이오?" "연왕이 분부하시기를, 이 선물을 제가 진왕전에 직접 바치도록 하라고
신신 당부하셨습니다.""그 이유는?" "이런 귀중한 선물을 중간에 사람을 놓아서 바쳤다가는
혹시라도 잘못되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염려스럽기 때문인 것이옵니다."
몽가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알아 듣겠소. 워낙 귀중한 선물이기 때문에 직접 바치고 싶어하는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겠소이다. 그러면 대왕전에 여쭈어서 내일 아침에 당신이 이 선물을 대왕전에
직접 바치도록 주선해 드리도록 하리다."
다음 날 아침, 형가는 몽가의 인도를 받으며 진무양과 함께 함양궁으로 입궐하였다.
진나라의 대궐에 들어가려면 경계병들이 삼엄하게 늘어서 있는 宫门을 다섯개나 통과해야 한다.
소년 진무양은 궁문을 통과할 때마다 겁에 질려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이 녀석아! 떨지 마라. 이상한 눈치를 보이면 큰일나는 판이다."
형가는 진무양에게 귓속말로 훈계하였다. 이윽고 마지막 중문을 들어서니, 진왕은 저멀리 正殿龙床 위에
덩그러니 홀로 앉아 있었고, 돌층계 아래 좌우에는 중신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형가와 진무양은,
돌층계 아래에 미리 깔아 놓은 돗자리까지 나아가, 진왕 앞에 叩头肃拜하니, 진왕은 두 사람을 굽어보며
우렁찬 음성으로 말한다." 燕王喜가 나에게 좋은 선물을 보내 왔다고 하는데, 이리 내놓아 보시오."
형가는 번어기의 머리가 들어 있는 나무상자를 두손으로 받들고 층계를 올라가 진왕에게 바쳤다.
진왕은 상자 뚜껑을 손수 열어 번어기의 수급을 친히 검사해 보더니, 흔쾌하게 웃으며, "음... 번어기의
수급이 틀림이 없구먼!" 그리고 이번에는 좌우의 중신들을 굽어보며, "배신자의 말로는 이처럼
비참해진다는 사실을 경들도 깊이 인식해 주기 바라오."
그리고 형가를 다시 보면서, "선물이 또 하나 있다고 들었는데, 그것은 어찌되었소?"
또 하나의 선물이란, 독항 지방의 지도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저 소년이 올려 드릴 것이옵니다.
.....진무양아! 그 선물을 네가 대왕전에 직접 올려다 바쳐라."
진무양이 들고 올라가는 상자 속에는 비수가 들어 있었다. 진무양은 그 상자를 들고 올라가면서
전신을 후들후들 떨고 있는 것이 아닌가.그 광경을 보고 중신들이 모두 수상하게 여겼다.
그러자 형가가 소리내어 웃으면서, "이 애야! 시골뜨기 아이가 으리으리한 대궐에 들어오니까
겁에 질려서 몸이 떨리는 모양이로구나, 너 대신에 내가 바칠 테니 그 상자를 이리 내놓아라."
형가는 비수 상자를 진왕은 앞에 들고 올라와, "독항 지방의 지도는 이 상자 속에 들어 있사옵니다.
지도가 보자기로 여러 겹 싸 있사오니, 대왕께서 친히 풀어 주시옵소서." 진왕은 겹겹이 싸여있는 보자기를
하나씩 끌려 보니, 마침내 서슬이 푸른 비수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형가는 비수를 움켜잡고
전광석화 같이 진왕의 옷소매를 왼손으로 다그쳐 잡으며, 그의 가슴에 비수를 내리 찔렀다.
그러나 진왕은 본시 무술이 능한 인물인지라, 기겁을 하게 놀라며 몸을 피하는 바람에 옷소매만 잘리고,
몸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형가는 비수를 움켜쥐고 도망가는 진왕을 재빠르게 좇아갔다. 진왕은 기둥을
둘러싸고 몸을 피하면서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뽑아 내려 하였다. 그러나 검이 워낙 길어서
빠져 나오지를 않았다.형가는 진왕을 쫓고, 진왕은 기둥을 둘러싸고 쫓고 쫓긴다.
군신들은 너무나 뜻밖에 일에 모두들 어쩔줄을 모른다. 진나라의 법률에는 누구를 막론하고
궁중에 들어올 때에는 몸에 무기를 지니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호위 무사들 만은 무기를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궁문 밖에만 있었다.
너무나 벼락 같은 사단이라, 밖에 있는 호위병들을 불러들일 여유도 없었다. 쫓고 쫓기는 숨가쁜 사태가
계속되는 동안에, 侍医夏无且가 허리에 차고 있던 약주머니로 형가의 얼굴을 내리 갈겼다.
그리하여 형가가 잠시 머뭇거리는 순간, 누군가가, "대왕이시여! 검집을 등에 둘러메고 칼을 뽑으시옵소서."
하고 외친다.진왕은 쫓겨 가면서또 검집을 등에 둘러메고 칼을 뽑으니, 그제서야 剑身이 쭉 뽑혔다.
진왕은 검을 뽑기가 무섭게, 형가를 내리 갈겼다.형가는 왼쪽 다리가 끊어지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는 땅에 쓰러졌어도 진왕의 얼굴을 향하여 비수를 힘차게 날려 보냈다. 그러나 그 비수는 명중되지 아니하고,
헛되이 기둥 속에 깊숙이 박혀 버렸다. 진왕은 형가를 향해 닥치는대로 찔러대었다. 형
가는 피투성이가 된 채 외친다. "아 아,내가 실패한 것은 너를 살려 둔 채 항복을 받으려고 했던 것이
잘못이었구나. 이것도 천운인 모양이니, 나를 맘대로 죽여라."
"이놈이! 아직도 아가리를 놀리느냐!" 진왕은 벼락같은 소리를 지르며, 형가의 몸에 연신 장검을 내리쳤다.
그러나 형가는 최후의 순간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큰 소리로 외친다." "네가 나의 몸은 죽여도,
나의 정신만은 굽히지 못하리라.天意를 유린하는 침략자의 말로가 어떻게 된다는 것을
너도 언젠가는 반드시 알게 될 날이 있으리라."
진왕은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서 마침내 형가의 몸뚱이를 산산 조각 내어 버렸다. 그리고 나서도
분노가 가라앉지 않아서, "이 고깃덩이를 주워 내어 기름불에 태워 버려라." 잔혹하기 그지없는 분부였다.
그리고 나서 다시 분부한다. "오늘의 사태를 수습하는 데는 시의 하무차의 공로가 컸으니, 그에게 황금
이백 일(一镒은 24냥쭝)을 내려 줘라."이리하여 乾坤一擲을 노리던 형가의 암살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형가 자신의 말대로, 그것은 어쩌면 <천운>이었는지 모른다.
1-039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