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정 화신 2
삼월 하순 금요일이다. 엊그제 춘분 새벽엔 남녘에선 드문 봄눈이 제법 내렸다. 그 전날 저녁 세찬 바람이 불면서 구름이 몰려왔다. 한밤에 부슬부슬 내리던 비는 새벽이 되면서 눈으로 바뀌었다. 어둠이 채 가시질 않은 이른 시각 베란다 창밖을 내다보았더니 소리 없이 내리던 하얀 눈은 아파트 뜰에 주차된 차량 지붕에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차도는 눈이 녹아 얼어붙지는 않았다.
그날 평소와 같이 아침 일찍 출근했더니 도심 공원은 물론 학교 근처 산언덕은 보기 드문 은세계였다. 날씨가 영상으로 올라 학교 운동장과 뜰의 눈은 쉽게 녹았다. 그러나 시야에 들어오는 먼 산에는 눈이 그친지 이틀이 지났음에도 아직 허연 잔설이 남았다. 금요일 오전 일과를 끝내고 점심을 들고 오후가 되었다. 마침 수업이 한 시간 비었기에 학교 뒤뜰로 내려가 산책을 했다.
분수대 주변을 느긋하게 거닐면서 주말 이틀 행선지를 어디로 향할까 구상해 보았다. 엊그제 내린 봄눈이 제법 되어 응달 산자락은 녹지 않은 곳이 더러 있지 싶었다. 아무도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을 숫눈을 밟아볼 곳이 더러 떠올랐다. 지난 주말 다녀온 서북산 임도가 생각났다. 천주산 꼭뒤나 작대산 임도도 가 볼만했다. 진례산성 너머 평지에서 신월로 걸어도 숫눈 눈길일 듯했다.
주말 동선을 미리 그려보다가 울산에 사는 친구에게 전화를 넣어 보았다. 초등학교에 근무하는 친구다. 저학년 담임이라 아이들은 오전 일과로 마치고 점심을 먹인 후 하교 시켰단다. 오후 여가시간에 취미로 목판 서각을 새기는 중이라고 했다. 주말 이틀 경주 산내로 농장으로 들어가 당귀와 삼채 모종을 심으려던 계획은 다음 주말로 넘기려 했다. 울산 근교도 눈이 녹지 않아서다.
친구와 안부 전화를 끝내고 분수대 주변 수목들을 살폈다. 지나온 겨울이 유난히 추웠기에 매화와 산수유꽃이 예년보다 늦게 피었다. 매화는 이제 절정을 지나면서 그루터기 아래 떨어진 꽃잎이 몇 장 보였다. 산수유나무는 높이 자란 소나무 그늘에 가려 매화보다 늦은 감이 있었다. 뒤뜰에는 살구나무와 복숭나무도 몇 그루 심겨져 있었다. 그들 나무에서도 꽃봉오리들이 부풀어갔다.
우리 학교 뒤뜰에는 여학교인데도 봄에 피는 꽃이 아름다운 유실수들이 더러 있었다. 매실나무, 산수유나무, 복숭나무, 꽃사과나무 등이다. 매화와 산수유꽃이 절정을 지나면 살구꽃과 복사꽃이 핀다. 이 꽃들이 저물면 자두나무에서 하얀 꽃이 피고 꽃사과나무에서도 분홍색 꽃이 화사하게 핀다. 연이어 사택 아래 별탑원 뜰 고목 벚나무에서 벚꽃이 피면 우리 학교는 꽃 대월을 이룬다.
분수대 주변에서 산언덕 아래로 갔다. 극동방송국 사옥과 붙은 언덕에는 자연석으로 축대를 쌓아 두었다. 축대 틈새는 영산홍들이 심겨져 있는데 아직 꽃이 필 기미는 보이질 않았다. 그 아래 지표면은 엷은 보라색 꽃송이들이 점점이 보였다. 봄까치꽃이었다. 여러해살이로 이른 봄이면 해마다 무더기로 피어나는 가는잎할미꽃도 보였다. 자주색 꽃봉우리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지표면에서 피어난 꽃으로는 수선화도 있었다. 우리 학교 교정에서 봄날이면 가장 화사하게 피는 꽃이다. 축대 언덕 아래도 있지만 노송그루 밑에도 무더기로 피어났다. 소나무가 그늘을 드리워 잎맥이 가늘고 다른 곳보다 조금 늦게 피었다. 3학년 교실인 별관 앞뜰에서도 볼 수 있다, 화석 공룡 알처럼 둥글게 생긴 자연석을 에워싸고 피어난 수선화는 마치 설치미술을 보는 듯했다.
본관 모퉁이를 돌아 앞뜰로 가 보았다. 서편 출입구 현관 곁에는 제법 높이 자란 살구나무에서 연분홍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남향에다가 본관 건물이 북쪽 바람을 막아주어 어디보다도 볕이 바른 자리였다. 교정 여러 군데 심겨진 다른 살구나무보다 먼저 꽃이 피었다. 일주일 전부터 꽃이 피기 시작했다. 향기가 진해서인지 벌들이 날아와 잉잉거리며 부지런히 꿀을 모으고 있었다. 18.0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