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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9일 [성 요셉 대축일]
마태오 1,16.18-21.24ㄱ
고해성사의 효과는 정확히 이렇게 드러난다
제가 어렸을 때 뒤란에서 야한 여자 사진을 보다가 아는 형이 나타났을 때 그것을 둥그렇게 꾸겨서 담 밖으로 버린 적이 있습니다.
그 형은 그런데 굳이 그것을 찾으려 했습니다.
다행스럽게 논은 그것을 잘 감추어 주어 그것이 드러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형이 찾았는데도 일부러 모른 척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쨌거나 그 일로 저는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일이 있은 후로 나는 타인의 잘못을 덮어주는 논을 본받았을까요,
아니면 그것을 찾아내려던 동네 형을 본받았을까요?
이상하게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본받게 됩니다. 이것이 부모가 자녀의 잘못을 들추어 상처 주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자녀는 그러면 자기 잘못보다는 자기가 잘못했을 때 그것을 덮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 지만을 배우게 됩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을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께서 이미 용서하시기로 작정하셨음에도 그것을 믿지 못하고 상대의 탓을 하였습니다.
타인의 잘못을 들추어내는 것 자체가 용서를 믿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오늘 요셉 성인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는 말은 순결했다는 뜻입니다.
자꾸 타인의 잘못을 드러내려 한다면 자신이 얻는 게 있어서입니다.
반면 드러내고 싶은 게 없다면 이미 의로운 사람으로 심판받았기에 굳이 남을 아프게 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남을 아프게 하면 나도 아픕니다. 요셉 성인이 약혼 중에 임신하고 온 아내를 보면서도 굳이 그 사실을 드러내고 싶지 않으신 그러한 순결한 분이셨습니다.
우리가 닮아야 할 요셉 성인의 의로움이 이것입니다.
타인의 잘못을 들추는 사람은 그것으로 반드시 얻는 이득이 있기에 타인을 아프게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고집 센 사람 한 명과 똑똑한 사람 한 명이 있었습니다.
둘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는데, 다툼의 이유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고집 센 사람은 4×7=27이라 주장했고, 똑똑한 사람은 4×7=28이라 주장했던 것입니다.
답답한 나머지 똑똑한 사람이 재판관에게 가자고 말하였고, 그 둘은 재판관을 찾아가 시비를 가려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재판관은 한심스러운 표정으로 둘을 쳐다본 뒤,
고집 센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4×7=27이라 말하였느냐?”
그러자 고집 센 사람이 말합니다.
“네, 당연한 사실을 당연하게 말했는데, 글쎄 이놈이 28이라고 우기지 뭡니까?”
그러자 재판관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7이라 답한 놈은 풀어주고, 28이라 답한 놈은 매질하여라!”
결국 고집 센 사람은 똑똑한 사람을 놀리며 그 자리를 떠났고, 똑똑한 사람은 억울하게 매질을
당해야 했습니다.
도무지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똑똑한 사람은, 매질을 당하는 내내 재판관에게 억울하다고 하소연했지만, 재판관은 그런 그의 하소연을 한 마디로 잠재웁니다.
“4×7=27이라고 말하는 놈이랑 싸운 네놈이 더 어리석은 놈이다.
내 너를 매우 쳐서 지혜를 깨치게 하려 한다.”
왜 굳이 받아들이지도 않으려는 사람의 잘못을 드러내면서까지 나의 옳음을 증명하려 할까요?
나 스스로 그렇게 해야 하는 틀린 면이 있음을 스스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타인을 굳이 심판하고 잘못을 드러내며 자기를 정당화하지 않아도 되는 때가
있습니다.
바로 ‘고해성사 직후’입니다.
이때는 모든 죄를 용서받았기에 그 사실을 믿는다면 타인의 잘못도 들추고 싶지 않은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내 죄를 용서받았음을 의심하게 된다면 아담과 하와처럼 또 누군가의 잘못을 들추어
자기를 정당화하게 마련입니다.
고해성사를 본 즉시 우리는 요셉 성인처럼 ‘누구의 잘못도 들추고 싶지 않은 사람’이 됩시다.
‘굳이 남의 잘못을 들추어낼 때 내 맘만 괴롭게 되는 성 요셉과 같은 정결하고 의로운 상태’로
살아갑시다.
이것이 심판 앞에서 의로운 상태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19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말없이 행동하고, 말없이 사랑합시다!
사순 특강을 갔다가 정말이지 몇십 년 만에 신학교 동창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특강 시간에는 성당에 안 보이더니, 사제관에서 따로 들었더군요.
저를 보고 하는 말, 어떻게 사람이 변해도 이렇게 변할 수 있냐고.
하루 온 종일 말 한마디 없던 사람이었는데, 아무리 말을 붙여도 뒤로 빼면서 실실 웃기만 하던 사람이었는데,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 어떻게 이렇게 날나리가 되었냐며 놀라워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정말이지 그랬습니다.
제가 봐도 놀랄 정도입니다.
사실 저는 젊은 시절 요셉 성인 못지않게 과묵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저 듣기만 하고, 마음속으로 깊이 생각하고, 해야할 일만 딱 하고...
몇십 년 동안 엄청나게 많은 말을 하며 살았으니, 이제 다시 과묵했던 시절로 돌아가야 할 순간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살다 보면 진국 같은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말없이 사랑하는 사람.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 조용히 도와주는 사람. 힘들 때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는 사람. 침묵 속에 기도하는 사람. 생각만 해도 마음이 든든하고 힘이 나는 그런 사람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요셉 성인이 그런 분이셨습니다.
복음 사가들은 그에 대해 철저하게도 함구하고 있습니다.
사실 구세주의 양부이자, 마리아의 동반자로서, 오랜 세월 구세사의 주역들을 동반하셨던 그의 역할은 참으로 막중한 것이었습니다.
요셉 성인의 특별하고 굴곡진 삶을 글로 쓰자면, 아마도 소설 몇 권으로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그는 과묵하고 진중한 사람, 침묵하고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요셉 성인은 하느님으로부터 아주 특별한 사명을 부여받았으며, 그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일생을 봉헌했습니다.
그 사명은 예수님을 보호하고 양육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마리아의 순결을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비오 11세 교황님께서는 요셉 성인의 사명이 세례자 요한의 사명이나 베드로 사도의 사명에 버금가는 막중한 것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성 요셉의 사명은 조용히 생각하는 사명이요, 침묵하는 사명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구속 사업의 비밀이 세상 사람들에게 미리 노출되지 않도록 끝까지 침묵을 지켰습니다.”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는 성 요셉의 사명은 곧 오늘날 우리 교회의 사명임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성모님과 함께 계실 때의 성 요셉의 사명은 보호와 방위의 사명, 수호와 원조의 사명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도 적으로부터 방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사명은 곧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 역시 이 혼탁한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지키고,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주위에 성장시킬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요셉 성인에 대한 신심이 각별하셨던 요한 23세 교황님께서는 그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성 요셉! 저는 이 성인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저는 가장 먼저 그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제 하루 일과를 시작할 수도,
끝낼 수도 없을 정도로 그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성모님 전문가 쇼사르 박사는 요셉 성인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성 요셉은 우리와 조금도 다름없는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두 발을 땅에 딛고 있었으며, 결코 지상 낙원의 꿈을 쫓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나이를 먹지 않는 영원한 청년입니다.
그는 세상 모든 가장들의 모범입니다.
그는 참으로 여성스런 동정녀 마리아와 떳떳하고 올바르게 교제할 수 있었던, 참으로 이상적이고 멋진 남자였습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이 세상, 성 요셉처럼 침묵의 사명에 충실해야겠습니다.
성 요셉처럼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만사를 바라봐야겠습니다.
성 요셉처럼 말없이 행동하고, 말없이 사랑해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강론>
(2024. 3. 19. 화)(마태 1,16.18-21.24ㄱ)
<요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마태 1,18-21.24).”
이 이야기를 겉으로만 보면, 요셉을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사람으로, 또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라는 말 때문에,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혼자서만 빠져나가려고 했던 사람으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요셉은 적극적으로 마리아와 아기를 보호하려고 했고, 능동적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찾았고, 그러면서도 신중하게 그 일을 진행하려고 애쓴 사람이었습니다.
천사가 마리아를 찾아가서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했을 때의 이야기를 보면(루카 1,26-38), 천사는 마리아의 약혼자 요셉이 할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약혼자 요셉에게 성령 잉태를 알리는 일과
요셉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하는 일은
온전히 마리아가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할 일이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곧바로 요셉에게 가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알렸을 것이고, 아마도 두 사람의 관계는, 즉 약혼 관계는 변함이 없고, 결혼도 예정대로 해야 한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요셉이 마리아를 믿었고,
마리아의 말을 믿었다는 점입니다.
<안 믿었다면 율법대로 처리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라는 말은, 요셉이 마리아를 적극적으로 보호하려고 했음을 나타냅니다.
또 그는, 자신은 마리아의 말을 믿지만, 세상 사람들을 믿게 만드는 것은 어렵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모르게’ 라는 말은, 마리아가 잉태한 아기는 자신의 아기라고 주장하려고 했다는 뜻이 됩니다.
요셉이 그렇게 주장하면 마리아는 안전해집니다.
그러면 파혼은 왜 하려고 했을까?
아기의 진짜 아버지는 하느님이시니까(루카 1,35)
자기는 뒤로 물러나려고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남모르게’ 함으로써 마리아와 아기를 보호하는 일은 하려고 했습니다.
<파혼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요셉과 마리아를 변함없는 부부로 생각할 것이고, 같이 살기 전에 아기를 잉태한 일에 대해서도, 조금 이르게 이루어진 일이긴 하지만 부부 사이의 자연스러운 일로만 생각할 텐데, 그러면 모두가 다 안전하고
평화롭게 됩니다.
그 모든 계획은 철저하게 마리아와 아기를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겠다는 요셉 자신의 각오에서 비롯된 계획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왜 작정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았을까?
약혼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남모르게 파혼하려면,
여러 가지로 고려해야 할 일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천사가 나타난 시점은, 요셉이 어떻게 할까
고민하면서 망설이고 있을 때가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실행하려고 할 때입니다.
<실행하기 직전에 천사가 나타났다고 말하는 것이 맞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요셉이 주님의 천사를 천사로 알아보았고, 천사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는 점입니다.
<이야기 속에서는 당연한 것처럼 표현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보통 사람들이 천사를 천사로 바로 알아보는 것과 천사의 말을 그대로 믿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꿈에’ 천사가 나타났다고 표현되어 있는데, 그 ‘꿈’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꿈’이 아니라, 특별한 환시 체험일 것입니다.
아마도 요셉은 기도 중에 응답을 들었을 것입니다.
천사가 한 말에 ‘두려워하지 말고’ 라는 말이 들어 있어서, 요셉이 두려워하고 있었거나 고민하고 있었거나 무척 힘들어 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하기가 쉬운데, 이 말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전하려고 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탄생 예고를 할 때에도 “두려워하지 마라.” 라는 말부터 했습니다(루카 1,30).
천사가 요셉에게 한 말은, 마리아가 요셉에게 한 말을 다시 확인해 준 것과 같습니다.
요셉은 천사의 말을 통해서 자기가 마리아와 마리아의 말을 믿은 것이 옳은 일이었음을 확신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을 종합해서 생각하면, ‘의로운 사람’이라는 말은, 단순히 착하고 온유하고 자비로운 사람이라는 뜻만은 아니고, 늘 하느님과 함께 살면서 ‘하느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입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한 말을 보면, ‘메시아의 왕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루카 1,32-33), 요셉에게 한 말을 보면, ‘메시아의 구원사업’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뜻으로는 큰 차이가 없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그 두 가지를 합해서, “예수님은 온 세상의 주님이신 분으로서 사람들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는 분”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태어나실 아기가 그런 분이라는 것을 믿었고, 그래서 기꺼이 마리아와 아기의 보호자가 되라는 부르심에 응답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