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반과 동반
/신영복
피아노의 건반은 우리에게 반음의 의미를 가르칩니다.
반은 절반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동반을 의미합니다.
모든 관계의 비결은 바로 이 반半과 반伴의 여백에 있습니다.
‘절반의 비탄’은 ‘절반의 환희’와 같은 것이며,
‘절반의 패배’는 ‘절반의 승리’와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절반의 경계에서 스스로를 절제할 수만 있다면
설령 그것이 환희와 비탄, 승리와 패배라는
대적對敵의 언어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동반의 자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덧붙임
권순진(시인)
“‘동반’의 의미에 주목하여,
절반이 승리하면 남은 절반은
패배할 수밖에 없는 대립과 갈등의
관계에서 벗어나,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면서 더 나은 미래를 향해
함께 나아갈 수 있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남과 북,
여와 야 등, 모든 갈등과 대립의
상황과 관련이 있다.
희망의 반대편에서 절망에 빠져 있는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할 때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
한쪽이 이기고 다른 한쪽이 지는 관계가 아니라,
협력과 조화의 관계임을 말한다.
밤이 깊을수록 별이 더욱 빛난다는 사실은
힘겹게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위로이다.
몸이 차가울수록 정신은 더욱 맑아지고
길이 험할수록 함께 걸어갈 길벗이
더욱 그리워지는 법이다.
진정한 연대의 의미도 그것에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함께 바라보는 것이다.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칼날 같은
우리의 관계를 되돌아보며
동락(同樂)의 경지로 나아가기를 희망한다.”
네이버사전에 의하면,
한문의 ‘대對’는, ‘짝, 상대’의 의미가 있다.
‘상대’의 의미는,
‘서로 마주 대함. 또는 그런 대상.’
‘서로 겨룸. 또는 그런 대상.’
‘서로 대비함.’이다.
‘짝’의 의미를 보면,
‘둘 또는 그 이상이 서로 어울려
한 벌이나 한 쌍을 이루는 것.
또는 그중의 하나.’
‘둘이 서로 어울려 한 벌이나 한 쌍을
이루는 것의 각각을 세는 단위.’
‘배필을 속되게 이르는 말.’의 의미다.
우리 인간은 각기
‘하나이면서 둘인 것’이다.
‘절반이면서 동반인 것’이다.
『유마경』에
“부단번뇌이입열반不斷煩惱而入涅槃”.
‘번뇌를 끊지 않고 열반에 들어간다’
이 말은, 유마 거사가 사리불에게 말한
매우 유명한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
대승불교와 소승불교의 차이가 있다.
대승은, 번뇌를 소중히 생각하고,
소승은, 번뇌를 안 좋다고 없앤다.
나는 소승출가수행자이면서 대승을 간다.
사리불은 유마거사에게 당한 경험이 있다.
“일전에 제가 좌선을 하고 있었을 때,
유마거사가 찾아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리불 이시여, 좌선이라 하는 것은
단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심신멸각心身滅却의 경지에 들어간 채,
규율에 맞는 행동을 하는 것이 坐禪입니다.
깨달음을 얻은 채, 범부의 행동을
하는 것이 좌선입니다.
마음을 내면에 머물지 않고,
외계의 사항에 의해 휘둘리지 않게
하는 것이 좌선입니다.
번뇌를 끊지 않은 채,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좌선입니다.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시는 좌선입니다.’라고요.
그렇게 듣고, 나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저 사람이 부담스럽습니다.
그래서 병문안 가는 것을 사퇴하겠습니다.”
라고 세존께 보고드린다.
‘A는 A가 아니다. 그런데도 A이다’
라고 하는 논리적으로는 모순된 논리가 있다.
이 논리를 ‘般若卽非반야즉비의 논리’라고 부른다.
『반야심경』 중에,
‘색즉시공色卽是空’의 1구, 이것도
모순된 논리를 보이는 일례이다.
色은 물질이고, 空은 비물질이다.
둘은 완전히 반대개념이다.
空은 色의 부정이기 때문에,
색과 공은 절대부정의 관계에 있다.
그러나, 空의 논리(지혜의 입장)에서 보면,
‘색은 공이고, 공은 색’으로서
나타나고 있다고 하는 의미로,
색과 공은 하나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卽非’의 논리라고 한다.
알기쉽게, 예를 들어 말한다.
얼음은 색, 물은 공이다.
표면적으로 얼음은 물이 아니다.
그런데도 얼음은 물이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온도라고 하는
‘연緣’이 필요하다.
얼음이 물로 되기에는 뜨거운 온도가 필요하고,
물이 얼음이 되기에는 차가운 온도가 필요하다.
곧, 둘은 같은 것이다. 둘 다 근본은,
수소분자 2, 산소분자 1이다.
고 틱낫한 스님의,
“만일 당신이 시인이라면,
이 한 장의 종이 안에
구름이 떠오르고 있는 것을
분명히 볼 것이다.
구름 없이 비는 없다.
비 없이 나무가 자랄 수는 없다.
그리고 나무가 없으면 종이는 만들 수 없다.
종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구름은 없어서는 안 된다.
구름이 여기에 없으면
이 한 장의 종이가 여기에 있을 수는 없다.
그래서 구름과 종이는 상호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이 종이를 한층 깊이 보면
그 속에서 태양의 빛을 볼 수가 있다.
태양 빛이 없으면 나무가 자랄 수 없다.
아무 것도 자랄 수 없다.
태양의 빛이 없이는 우리들은
살아갈 수가 없다.
이렇게 태양의 빛도 또한
이 한 장의 종이 안에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 수 있다.
종이와 태양의 빛은 상호존재하고
있다.”라고.
이 세상은, 상호의존관계로 성립하고 있다.
곧, ‘연기緣起’하고 있는 것이다.
‘절반이면서 동시에 동반’인 것이다.
당신은 상대와 다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곧, 하나인 것이다.
그것을 알면, 곧 깨달음이 열린다.
-상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