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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04.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묵상글 (9/3. 21:15, 05:25, 07:05. )
1) 저는 아래 몇 분의 글만 공유합니다.
1차 공유하는 묵상글< 전일 22시 이전> : 고인현 신부님. 호명환 신부님.
2차 공유할 묵상글< 04 ~ 05시, 07시 이후 > : 05-06시이후.
< 김찬선 신부님: 05:25. 추가. 호명환 신부님: 07:05 추가.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아직. >
2) 정회원님 중 다른 묵상글을 공유하실 분은 오늘 묵상글을 이 뜨락에 게재하여 주시고
지난 묵상글은 “5-1. 소금(나눔) 뜨락 1”에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3) 이 묵상글 뜨락은 8월 15일 이후에도 당분간 현재와 같이 운영*하며
전체 공지 "H. 260707" 2-1의 가-1), 나)를 실행할 계획입니다.
가-1) 프란치스칸 공동체나 개인 또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존중하는 분으로서 이 카페를 인계받아 운영할 의사가 있으신 분과 협의를 시작하고, 이 공간의 인계, 인수는 합의가 되는 대로 즉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 위 사항이 이루어지지 아니할 때는 11월 대림시기부터는 실질적으로 운영을 중단*하고, 카페의 여러 자료를 활용하실 분을 감안 당분간 존속시키고, 적당한 때(2027년 상반기 또는 그 이후) 폐쇄하도록 하겠습니다.
* * 위에 따르며 가능하면 1차 공유는 전일 22시전까지 2차 공유는 04시- 05시까지, 안되면 07시쯤 할 계획입니다.
이 시간대 이외 여러 묵상글을 보시려면 전체공지란 " H. 260707. 카페 운영에 대한 고견을 주세요." 의
2번에 들어 가셔서 안내를 받으세요 < 2026. 09.04. 07:25 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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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주님께서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1코린4,1-5)
형제 여러분, 1 누구든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시종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2 무릇 관리인에게 요구되는 바는 그가 성실한 사람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3 그러나 내가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든지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든지, 나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나도 나 자신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4 나는 잘못한 것이 없음을 압니다. 그렇다고 내가 무죄 선고를 받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나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5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복음<그들도 신랑을 빼앗기면 단식할 것이다.>(루카5,33-39)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33 예수님께 말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35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36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또 비유를 말씀하셨다.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만 아니라, 새 옷에서 찢어 낸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37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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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04.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2026.09.03 20:31
2026년 9월 4일 금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학교 말씀 기도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루카 5,33-39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따집니다.
“당신의 제자들은 왜 단식하지 않느냐?”
예수님의 대답은 뜻밖입니다.
“지금은 신랑이 함께 있는 ‘혼인 잔치’의 때다.”
곧 하느님 나라라는 ‘기쁨의 새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새로움’을 담을 그릇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드십니다.
새 천으로 헌 옷을 깁지 않고,
새 포도주를 헌 부대에 담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갓 담근 새 포도주는 아직 ‘살아’ 부글부글 발효합니다.
그 힘을 굳고 뻣뻣한 헌 부대는 견디지 못해 터져 버립니다.
그러니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여기서 ‘새 포도주’는 새로 부어지는 은총이고,
‘부대’는 그 은총을 담는 우리 ‘마음’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가 자기 삶으로 증언했듯,
은총은 옛 삶에 ‘덧대는 헝겊’이 아닙니다.
그의 방탕하던 옛 삶은 은총이라는 새 포도주 앞에서
‘터지고’ 새로워져야 했습니다.
“낡은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에페 4장 참조).
은총은 우리를 ‘조금 손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 빚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마지막에 서늘한 한마디를 더하십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것을 원하지 않는다.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여기에 영적 성찰의 거울이 있습니다.
우리는 익숙한 것에 길들면,
그것이 나를 옭아매도 ‘이게 편하다’며 붙듭니다.
새로 다가오시는 은총이 도리어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바로 그 ‘굳어 버린 익숙함’이 새 부대가 되기를 막습니다.
다만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옛것을 무조건 버리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은총을 담을 만큼
마음이 유연하고 부드러워지라’는 말씀입니다.
굳은 부대는 새 포도주를 잃고,
부드러운 부대는 새 포도주를 살립니다.
영적 성찰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이렇게 묻습니다.
‘나는 지금 굳은 헌 부대인가, 부드러운 새 부대인가?’
‘나는 은총의 새로움을 반기는가, ‘묵은 것이 좋다’며 밀어내는가?’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묵은 것이 좋다’며 익숙함에 안주하지 않는가?
나에게 은총은 ‘덧대는 헝겊’인가, ‘새로 빚음’인가?
내 마음은 새 포도주를 담을 만큼 ‘부드러운가’?
나는 날마다 ‘새 부대’로 새로워지려 하는가?
주님,
‘묵은 것이 좋다’며 굳어 버리지 않게 하소서.
제 마음을 부드러운 ‘새 부대’로 새롭게 하시어,
당신의 새 포도주를 넘치도록 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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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04.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2026.09.03. 15:38
고통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사랑으로 충만한 십자가의 길!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현실은 십자가의 형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언제나 서로 충돌하는 반대의 것들이 만나는 자리입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
고통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사랑으로 충만한 십자가의 길!
2026년 9월 3일 목요일
리처드 신부는 십자가를 예수님의 삶의 중심으로 바라봅니다. 예수님은 참 사람이시며 동시에 참 하느님이시며, 세상의 모든 고통과 완전한 연대를 이루시는 분으로 십자가를 통해 드러내십니다:
하느님의 지혜는 인간의 모든 고통을 변모시키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처지를 당신의 처지와 완전히 동일시하시며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연대하심으로써 이 변모를 이루십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참된 의미입니다. 십자가는 단순한 한 사건이 아니라, 현실이 십자가의 형태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시는 하느님의 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국의 요구와 당시 종교 권위 사이에서, 서로 충돌하는 이해관계와 반쪽짜리 진실들 속에 붙잡히시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인간적이면서도 동시에 신적인, 깨어져 있으면서도 완전히 온전한' 이 세상, 즉 인성과 신성이 "혼합된" 세상 속에서 사신 삶의 대가였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현실이 무의미하거나 부조리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셨습니다. 비록 언제나 완벽하게 논리적이거나 일관된 것은 아니더라도, 현실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성 보나벤투라와 알랑 드 릴(Alan of Lille)과 니콜라스 쿠사(Nicholas of Cusa) 같은 신학자들이 이를 "반대들의 일치(coincidence of opposites)"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수난과 부활 안에서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셨습니다."(에페소서 1,10). 이 한 구절은 프란치스칸 그리스도론의 요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보편적 고통의 신비를 짊어지시는 데 동의하셨습니다. 그분은 그 고통이 당신을 변화시키도록 허락하셨고(부활), 또한 우리도 변화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고통을 다른 이에게 투사하거나 그 안에 갇혀 끝없이 반복되는 악순환에서 벗어나도록 자유롭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완전한 부활의 삶입니다. 참된 행복과 자유, 사랑으로 충만한 삶, 곧 "구원받은" 삶의 길입니다. 사실상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신뢰할 수 있다면, 너희도 신뢰할 수 있다."라고요. 우리는 과연 십자가로 구원받았습니다. — 그것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이 말입니다. 모순을 품고 그것을 자기 안에서 화해시키는 사람들이야말로 세상의 구원자들입니다. 그들이야말로 참된 변화와 화해, 새로움의 도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하느님의 동정심을 눈에 보이게 하라는 소명을 받은 이들입니다.
필연적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이기도 한 이 "구원자들"은 모든 시대와 모든 신앙 전통 속에 존재합니다. 때로는 의식적으로 신앙을 고백하지 않더라도, 모든 생명과의 연대가 곧 삶의 의미임을 깨닫고 살아가는 이들 안에도 존재합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이들은 지금 이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운명을 함께 나누기로 동의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세상의 그늘진 면과 배척당한 이들을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가까이 다가가, 세상의 고통이 자신들의 관점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도록 허락합니다. 또한 이들은 세상의 불완전함과 불의마저도 받아들이며, 그것이 자신들의 내면으로부터 깊숙이 변화를 일으키도록 동의한 이들니다. 사실상 세상이 변화되는 유일한 길은 바로 이러한 내적 변화입니다.
복음은 단순히, 하느님의 무한한 고통을 함께 짊어지기로 동의한 이들의 지혜입니다. 많은 비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큰 자유로 이 소명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소명을 늘 기억하게 해 줄 '기준점'이 될 단어를 찾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름대로 2026년의 단어로 "belight"라는 단어를 만들어 택했습니다. 이 단어는 "delight"처럼 발음되는데, 상처 입고 갈자진 세상 안에서 복음을 살아낸다는 것이 곧 '빛이 되는 것'임을 드러내는 단어로 만든 것입니다.
—Jason O.
References
Excerpted from Joan Chittister, “Discipleship for a Priestly People in a Priestless Period,” June 30, 2001. Women’s Ordination Worldwide. Used with permission.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Jenna Keiper, CAC Environment, 2019-10-09, Photograph, CAC campus, Albuquerque NM. "되어 가는 여정" 위에서 짐을 내려놓고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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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04.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9.04 05:17
- 바꾸고 싶고 바뀌고 싶은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오늘 주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새 포도주는 무엇이고 새 부대는 무엇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여기서 새 포도주란 바리사이의 단식 실천은 말할 것도 없고,
세례자 요한의 단식 실천과도 다른 주님의 새로운 가르침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데 새 부대란 정확히 어떤 것인지 생각하게 합니다.
이것은 마치 신상품이 나오면 그것을 새로운 용기에 담고
새롭게 디자인한 포장지로 싸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신상품이 나왔는데도 그걸 전에 쓰던 용기에 그대로 담고
포장지도 전에 썼던 것을 다시 그대로 쓴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것이 우리에게 많이 있습니다.
게으름 때문에 그럴 수 있고,
쓰던 것이 편하기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젊었을 때는 새 옷이 나오면 그것을 사 입지만 나이 먹으면 그럴 마음이 없고,
옷들이 많아도 이것저것 고르는 것이 귀찮아서 입던 옷을 입거나
입던 옷이 편해서 그것을 계속 입습니다.
그리고 나이를 먹으면 앉는 자리에 계속 앉습니다.
나이 든 사람끼리 성당 자리나 식탁 자리를 놓고 싸우기도 하고,
싸우지는 않아도 자기가 앉던 자리에 누가 앉으면 마음 편치 않고 불만입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은 젊었을 때는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도 있고,
소유욕도 있어서 새로운 것을 잘 받아들이는 데 비해
나이 먹으면 관심도 호기심도 현저히 떨어지고 관성대로 길들어진 대로 삽니다.
그래서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하고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바꾸는 것이 싫고 바뀌는 것은 더 싫어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이래도 큰 문제가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편한 대로 살고 길들어진 대로 살아도 되는데
영적인 면에서도 바꾸는 것이 싫고 바뀌는 것이 싫으면 되겠습니까?
내가 점점 세속적으로 편한 것만 찾고 편한 것에 길들어져 있는데
이런 삶과 습관을 바꾸려고 하지 않고 내가 바뀌려고 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인간적으로 기분을 바꾸기 위해 머리도 한번 잘라 보고 새 옷도 사 입곤 하는데
영적으로는 어떻습니까? 바꾸고 싶고 바뀔 원의가 지금 나에게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오늘 듣게 되거든 므리바에서처럼 마싸의 그날의 광야에서처럼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고 초대송 시편은 오늘도 우리에게 좨치는데
오늘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새롭게 듣고, 그 말씀대로 바뀔 의지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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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04.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2026.09.04. 05:39
'나'는 지금 '생명'을 선택하고 있는가? 아니면 '죽음'을 선택하고 있는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예수님 시대에는 포도주를 병이 아니라 가죽 부대에 보관했습니다. 새 포도주는 여전히 발효가 왕성하게 되기에 이산화탄소를 많이 발생시킵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는 탄력이 여전히 있는 가죽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래된 부대는 이미 포도주를 담아 보관해 왔었기에 처음에 가지고 있었던 탄력만큼 이미 부풀어 올라 그대로 굳어 버린 상태이기에 새 포도주를 오래된 부대에 넣게 되면 쉽게 터져 버리고, 그 안의 포도주도 잃게 됩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이해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낡은 부대처럼 굳어버리지 않도록, 늘 부드럽고 유연하게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평생 동안 우리에게 무조건적인 요구를 합니다. 그것은 깊은 공감과 용서의 도약을 요구하고, 세속적 권력이나 이익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 사는 삶을 요구합니다. 또한 자기 뜻을 내려놓고 타인을 위한 삶을 살도록, 세속적 교만과 허영을 죽이고, 그리스도의 자기비움(케노시스)과 가난을 본받도록 요청합니다. 나아가 형제자매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놓을 것을 요구하며, 가장 도전적인 요구는 바로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요구나 도전을 언뜻 생각해 보면 우리를 희생시키고 손해를 보라는 요구나 도전처럼 여겨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더 커다란 그림 안에서 우리 삶 전체를 곰곰이 바라다본다면, 이런 삶이 결코 희생이나 손해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생명 전체를 위한 참된 유익을 가져다주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삶"인 것이고, "목숨을 얻으려고 하면 잃을 것이고, 하느님의 생명, 즉 우주적 생명 전체를 위해 목숨을 잃는 사람을 목숨을 얻을 것"이라는 삶의 진정한 순리인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에고를 키워가고자 하면 당장은 '나'에게 어떤 유익이 되는 것 같이 느껴질지 몰라도 삶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본다면, 즉 존재 전체를 "존재의 위대한 사슬(그물 망)"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결국 '나'를 외톨이로 고립시켜 궁극에 가서는 '나'를 죽여 버리는 어리석음이 될 것이고, 결국은 생명 전체를 단절시키고 숨을 조이며 죽음으로 몰아가는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번에 일어난 네팔의 대홍수와 같은 비극은 우리 인간이 이 '에고'에 중심을 둔 삶을 살아가면서 현금의 현실을 만들어 놓은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사람이 긍정적인 감정 안에 있을 때가 부정적인 감정 안에 있을 때보다 우리의 몸 안에서 훨씬 더 강력한 생명의 에너지를 만들어낸답니다. 아니 어쩌면 부정적인 감정, 즉 미움과 복수의 감정 안에 머물 때는 생명의 에너지는 커녕 그 정반대인 죽음의 에너지를 만들어내겠지요?!
그러니 사랑과 용서, 관대함, 좋게 바라봄 등의 좋은 감정은 생명 전체를 살리는 행위일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나'를 살리는 행위가 되는 것이고, 그 반대의 부정적 감정은 생명 전체를 죽일 뿐 아니라 '나'마저 죽이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다만 이 과정이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고 서서히 이루어지기에 우리가 이 결과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는 너희 안에(가운데) 있다."라고 말씀하실 때 의도하신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미 우리 안에는, 우리 가운데에는 하느님 나라의 씨앗이, 비록 너무 작아 잘 알아채지는 못할지라도, 이미 심겨 있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당장 어떤 효과를 내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을 바라보려 하지 않거나 무시한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하느님 나라의 현실에서 계속 멀어지게 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고, 만일 우리가 매 순간 그 씨앗을 잘 지켜보고 물을 주고 잘 돌보아 주고자 한다면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현실에 가까워지는 삶을 살아가는 것일 겁니다!
하느님 나라의 씨앗을 잘 돌보는 일이란 달리 말해 이 긍정적인 우주의 기운, 즉 하느님 사랑과 선의 영을 마음에 품고자 노력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세상적인 논리, 즉 '에고'를 중심으로 하는 논리를 내려놓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이 하느님 사랑과 선의 기운(영)만이 우리를 살리는 유일한 기운이라는 확신을 매 순간 새기고 또 새기는 수양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실제로 이 우주 안에는 긍정적인 기운이 부정적인 기운보다 훨씬 더 강하게 자리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기운은 단순히 물리적인 기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기운까지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에게서 창조되었기에 물리적인 기운이라는 것도 결국은 영의 기운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물리적인 세상은 이미 영의 기운, 즉 하느님의 기운을 온전히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긍정적인 기운을 받아들이기 위해 마음을 모으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 영성 전통에서 말하는 [수양]이요 [수행]이라고 저는 봅니다.
우리가 좋은 것, 선한 것, 긍정적인 것을 마음에 품고자 한다면 그것이 현실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나쁜 것, 암울한 것, 실망적인 것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게 한다면 그것 또한 현실이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신명기를 보면 모세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선언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계명은 너희에게 힘든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사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 입과 너희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신명 30,11;14).
그러고 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 가지 선택을 하라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 놓는다. … 너희와 너희 후손히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하느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신명 30,15;19;20).
생명을 선택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말씀 아닙니까?!
그리고 당연히 생명을 선택해야 사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살고자 하면서 죽음을 택하며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움과 용서하지 못함, 이기적인 선택 등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이런 정신적 경향에 익숙해져 가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 곧 새 포도주를 선사해 주시면 이를 선택하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런데 이 수양을 위해서는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정신구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 당시 세상은 이미 오래된 폭정의 방식에 지쳐 있었고, 오늘날은 더욱 그러합니다. 복음이 여전히 새롭고 혁명적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은 우리가 아직 멀리 나아가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우리가 이 새로운 포도주, 새로운 삶의 방식의 참된 의미를 깨달아가고자 적어도 자그만 노력이라도 지속적으로 한다면 이 복음이 언제나 우리에게 새로운 기쁜 소식으로 다가올 수 있도록 사랑의 하느님께서 함께해 주실 것이고 이 새로운 기쁜 소식이 우리 안에서 참으로 실현되게 해 주실 것입니다.
믿음의 여정을 하고 있는 우리가 반드시 상기하고 확신해야 할 것은 우리가 이 긍정의 힘, 하느님 사랑과 선의 궁극적인 힘을 깨어 의식하는 만큼 우리가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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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04.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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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기도 1 하느님께서 들어오시는 거룩한 여백 ( 2026.08.26. 10:41 )
http://www.ofmkorea.org/ofmkfb/584127
가난과 기도 2 팔을 벌리시는 하느님과 포옹의 사랑 ( 2026.08.27. 01:21 )
http://www.ofmkorea.org/ofmkfb/584146
가난과 기도 3 십자가를 바라보는 눈과 존재의 가난 ( 2026.08.28. 03:06 )
http://www.ofmkorea.org/ofmkfb/584207
가난과 기도 4 형제 안에서 배우는 가난과 무소유 ( 2026.08.29. 03:36 )
http://www.ofmkorea.org/ofmkfb/584312
가난과 기도 5 사랑의 아름다움과 위대한 교환 ( 2026.08.30. 05:42 )
http://www.ofmkorea.org/ofmkfb/584342
가난과 기도 6 보게 되는 사람에서 기도가 된 사람으로( 2026.09.02. 06:35 )
http://www.ofmkorea.org/ofmkfb/584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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