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18. 큐티
마태복음 22:34 ~ 46
신학논쟁 3 – 큰 계명, 다윗의 주 그리스도
관찰 :
1) 다시 모인 바리새인들
- 34절.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정치적인 신학논쟁이 깨지고, 사두개인들의 묵은 부활에 대한 신학논쟁을 깨버리신 주님께 다시금 바리새인들의 일단의 무리들이 찾아왔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두개인들을 깨어버리신 예수님을 다시금 곤란하게 함으로 자신들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고, 사두개인들 앞에서의 우월성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바래새인들은 사두개인들의 신학적 입장, 즉 부활이 없다하는 그들의 주장을 물리치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작업을 이루심에 대해서 놀랐고, 그러나 그들의 대적이 되는 예수를 다시금 깨고자 모인 것입니다.
2) 예수를 시험하여 묻는 율법사
- 35절.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 이것은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이들이 진정 예수님께 와서 물어보는 자세는 배우고자 하는 것이어야 했고, 사두개인들의 신학논쟁도 깨버리신 예수님을 최소한 인정이라도 하는 것이 예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악하게도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질문을 다시금 하고 있습니다. 완악한 모습입니다. 이 율법사의 입장은 혼자만의 입장이 아니라 다른 바리새인들을 대표하는 시험의 성격이었습니다. 여전히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 36절.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라는 질문은 예수님을 올무에 얽어매고자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어떤 계명을 말씀하시던지 간에 그것을 가지고 주님을 공격하고 곤란하게 하고자 하는데 쓰겠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자세는 정말 너무합니다.
3) 율법의 핵심 가치를 말씀하시는 예수님
- 3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 38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 39절.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 40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 하나님 사랑 =>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 자신을 사랑하는 자가 참되게 이웃을 사랑하는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바른 가르침이라는 것을 확증해 주시고 있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이런 가르침을 베풀었습니다. 과거에 수많은 율법학자들이 있었지만, 그들 중에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의 이 핵심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모세가 그렇게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을, 엘리야가 그렇게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바를 예수님이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 어쩌면 예수님은 변화산에서 바로 이 부분에 대해 말씀을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나누셨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율법의 완성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랑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4) 주님이 바리새인들에게 하시는 질문
- 41절.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 42절.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 예수님의 질문은 바리새인들의 모든 신학적인 논쟁을 패퇴시키신 주님의 질문이기에 무서운 질문이고, 이들이 피해갈 수 없는 질문이라는 것을 충분히 예견하게 됩니다.
- 주님의 질문은 그러면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를 물으십니다. 이 부분은 바리새인들이 전공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부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그렇게 말씀하셨어도 이들은 일관되게 부인했는데,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는 도대체 무엇이냐라고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 주님의 질문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대답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또한 그렇기 때문에 너는 아니다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의 말, 즉 예수님이 인자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늘에서 왔다고 하고, 성전이 되시는 분이시고, 율법의 완성자라고 하는 모든 것들이 이들이 생각하는 다윗의 자손으로서의 모습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생각하는 다윗의 자손은 다윗의 왕권을 회복하는 정치적인 회복, 로마로부터의 정치적 회복을 이루는 존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게 되는 말씀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너무 이스라엘의 왕으로 국한하여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5) 예수님의 촌철살인
- 43절.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 44절.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 45절.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 46절.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 다윗은 성령에 감동되어서 하늘 보좌의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거기에서 다윗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그리스도를 보았고,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심판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는 말씀을 들은 것을 기록한 것은 바리새인들이 매우 잘 아는 말씀이었습니다. 심지어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를 증명하기 위해 인용을 가장 빈번히 했던 구절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로 이 시편 110:1의 말씀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이율배반적 해석을 지적하십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는데, 어떻게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있겠느냐 하시는 것입니다.
-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셨다면 그리스도는 다윗을 넘어서는 존재이고, 다윗이 하는 일보다 비교가 되지 않는 큰일을 이루시는 분이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하여 그리스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으로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여 로마로부터의 정치적인 독립 정도로 그리스도의 사역을 국한시킬 수 없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방인들을 위해 사역을 하고, 이스라엘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 복음을 증거하는 것에 대한 이유들을 또한 설명을 하시는 것입니다.
- 짧은 주님의 말씀이시지만 이 말씀에 대해 바리새인들 중에는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얼어붙어버린 것입니다. 자신들의 잘못된 그리스도에 대한 해석과 기대가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는지가 여실히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게 되었습니다.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끝까지 억지를 부리며 예수를 죽음으로 내몰게 됩니다.
가르침 :
1) 예수님의 지적은 율법의 크고 작음을 나누는 자들의 행위 자체에 모순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은 그 자체로 모두 지켜야 하는 것이지 큰 율법을 지킴으로 지켜지지 못하는 작은 율법이 가려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율법마저도 자신들의 의를 위한 수단으로 판단하고 재단하고자 하는 율법학자들의 그러한 판단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무너졌습니다. 계명의 핵심은 사랑이고, 이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입니다. 그것을 모두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동성연애를 비롯한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 변형시켜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것은 지키고 그렇지 않은 것은 마음대로 바꾸고자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이 악한 행위를 자행하는 현대인의 완악함을 또한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주님은 끝까지 일관되게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하게 드러내시고 있습니다. 바래새인, 사두개인들과 3번에 걸친 신학논쟁을 통하여 그들을 패퇴시키시는 주님은 그러한 신학논쟁의 종지부를 시편 110:1을 통하여 찍어버리셨습니다. 자신들이 가장 잘 인용하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자신들이 가장 곡해하던 말씀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으로 단순히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사역을 하시는 존재가 아니라 다윗이 주라 하였기에 이스라엘을 넘어서는 더 크신 사역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이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유구무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악하고 악하고 악하고 악합니다.
3) 예수 그리스도는 당대의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한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 자신이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이스라엘의 스승들이 모두 모르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증거하셨던 것이고. 이제 곧 이들에게 체포되어 십자가에 달리실 주님은 그것을 분명하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너무나 의연하시고, 범접할 수 없는 권위를 보게 됩니다.
적용 :
1) 율법의 크고 작음을 나누는 것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렇고, 주님의 작은 명령도 우리는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적으로 지키고 지키지 않거나, 순위를 매겨서 지킬 수 있다는 말입니까?
2)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분이시지 다윗의 자손 자체가 아닙니다. 즉,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의미하는 것이지 예수님의 사역의 형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의 왕으로 국한시키는 것은 큰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렇기에 하나님이십니다. 이 분명한 믿음이 이 세대 가운데에서도 동일하게 강조되어야 합니다.
3) 하트스트림에서의 디브리핑 과정을 통해서 나 자신을 다시금 살필 수 있었습니다. 내가 보지 못하는 객관적 관점으로 나에게 돌아오는 질문들을 답변할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나의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주님을 찬양합니다. 오늘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