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동네는?
잠깐 이를 말하기 전에 내가 살았던 곳부터 먼저 쓰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48년에 태어난 곳이 서울 동대문구 보문동이었고, 아직 나의 생가가 그곳에 있는 걸 몇 년 전에도 확인하였더니 솟을대문 양쪽의 문간방 담벼락의 타일 외에는 바깥 모습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6․25전쟁 후 51년 1․4후퇴 때 본가가 있는 대구로 피난을 가 한동안은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정착을 한 곳이 당시는 대구의 교외에 해당하는 침산(砧山), 산 모양이 마치 다듬잇돌처럼 생겼다 하여 부친 이름이었고, 여기에서 초등과 중고등학교를 나왔으니 사실상 여기가 나의 첫 번 고향인 셈. 지금도 생각나는 단어는 초등학교 때 시내에 나가는 걸 성내(城內)로 나간다 하였고 새로 생긴 길이라 신작로(新作路)라 부르기도 하였다. 어린 시절을 넓고 마당 넓은 집에서 꽃과 개, 닭, 거위, 토끼, 새 등의 동물들과 즐거운 시절을 보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부모님과 친구들이 있지 않는 고향은 더 이상 나의 고향이 아니다.
66년 대학생활부터 서울에서 살고 있으며 의대 다닐 때 하숙 6년, 대학병원 인턴 숙소에서 1년, 전공의 1년차에 다시 하숙 1년 만에 결혼, 신혼에 전공의 무의촌 파견으로 전라도 근무 6개월을 마쳤다. 돌아와서 동소문동의 선친이 사주신 한옥에서 5년간 살았었고, 78년 현 서초동의 새로 지은 아파트에 이사 온 이래 한 집에서 39년째 살고 있으니 여기가 바로 나의 두 번째 고향인 셈이다.
그러면 내가 사는 동네는?
행정구역상으로는 서초동이다. 허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걸어 다닐 수 있고 마을버스 몇 정거장 안에 타고 내리면 다 포함시켜야 한다. 일단 서초동의 역사를 알아보면 옛날 이곳에 서리풀이 무성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지금도 ‘서리풀공원’이 우리 동네에 있고 성대한 서리풀 축제가 열린다. 이 동네는 조선시대 말까지 경기도 과천군 동면 서초리로, 일제강점기에는 시흥군 신동면 서초리로, 1963년 서울특별시 구역 확장에 따라 서울로 편입되면서 서초동이 되었다.
동네의 몇몇 역사적인 마을 중 하나는 당산마을로 현재 남부터미널의 남쪽 남부순환도로변에 십여 호의 작은 마을과 산제를 지냈던 당집이 있었다. 옛날 사또가 머물렀기 때문에 불린 사도감 마을은 현 영동중학교 일대이며 이와 연관되어 사도감 고개, 개울, 들, 다리 등의 이름도 있었다. 한편 반포대로와 남부순환도로가 만나는 지점 부근 고려 왕손이 살았던 왕촌 마을에는 세종의 4남인 임영대군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왔다. 서초동 법원 단지와 그 남쪽 일대 조선 태종 때 대제학을 지낸 정역이 처음 자리 잡고, 이후 해주 정씨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 되어 정곡마을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서울에서 충청도나 경상도를 가려면 남대문을 나와 동작나루나 한강나루를 건너 남도 길에 올랐다. 아니면 서초경찰서 옆에 작은 고개를 넘어 말죽거리로 갈 때 산적이 출몰하여 같이 모여서 넘었다는 마뉘고개 안내문이 지금 서초경찰서 못 미처 누에다리 아래에 서있다.
내가 살고 있는 신동아아파트 자리에 홍문 앞자리 들이고, 여기 조선중기의 명신 충숙공 유관의 4정문이 있었으나 73년 경기도 안산으로 옮겼다 한다. 이 들 모두가 신시가지 개발로 지명과 표석만 남고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아직 남아 있는 유적은 효녕대군의 묘소인 청권사와 예술의 전당 뒤 우면산 중턱에 자리 잡은 백제 고찰 대성사의 서울시 유형문화재인 목불좌상이 유일하며 절 자체도 6․25 때 소실된 것을 50년대에 복원하였다. 또 서초구청 앞의 양재동 로터리에는 1592년 임진왜란이 끝나고 이어 정유재란, 그 후 일본의 요청에 의하여 일본에 파견된 조선통신사가 지나간 길이라고 표석이 있다. 대신 새로 생긴 이 동네는 도로와 건물들이 모두 깨끗한 것이 특징이고 골목은 아예 없다.
그럼 우리 동네의 자랑은 무엇인가?
첫째는 도로가 사통팔달로 뚫려 교통이 아주 편하다. 내가 처음 이사 온 70년대 후반에는 사실 교통 불편이 커다란 흠이었다. 그러나 지하철 2호선 개통이 80년대에 이루어졌고 뒤이어 3호선과 5호선, 그리고 최근 7호선까지 개통이 되었다가 이제는 신분당선으로 분당까지 이웃으로 되었고, 9호선도 나중에 개통되어 서울 교통의 한 축이 되었다. 또 강, 남북을 연결하는 여러 일반 버스와 가까운 지하철역과 심지어 젊은이들이 많이 노는 가로수 길까지 갈 수 있는 마을버스가 있어 대중교통이 여러모로 편리하다. 더구나 나의 직장이 있었던 흑석동 중앙대병원까지는 차로 아침 일찍 출근하면 불과 30여 분밖에 걸리질 않았고, 대중교통으로도 50분 정도이니 출퇴근이 얼마나 편한가. 정년퇴직 후 마련한 내 개인 연구실이 있는 흑석동이나 일주일에 3일간 나가 의료 자문을 하는 명동 대연각 빌딩 사무실도 마을버스 지하철 연계하면 불과 40여 분 만에 도착을 한다.
둘째는 문화 예술 활동을 향유할 수 있는 동네이다. ‘예술의 전당’에는 각종 음악회를 수용하는 콘서트홀과 리사이틀홀, 오페라 공연과 뮤지컬 공연을 하는 오페라하우스, 여러 전시를 볼 수 있다. 또 공연장과 전기박물관이 있는 한국전력문화센터를 걸어서 갈 수가 있고, 서울교육문화센터, LG아트홀, 동영문화센터와 소규모 음악홀인 마리아 칼라스홀도 버스 한 번 타고 다니는 구간이다. 월드컵 옥외 응원으로 유명하였던 강남역 4거리에는 영화관들도 여러 곳이 있어 휴일 날이면 산책삼아 걸어서 영화표를 예매하고 시간에 맞추어 관람하기도 한다. 더구나 현장에서는 경로 할인이 되어 반값으로도 구경을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시설 좋은 주민센터(옛 이름으로는 동사무소), 서초구민 체육센터, 나도 이용할 수 있는 서초구 종합노인복지관까지 있으니 더 말하여 무엇 하랴!
셋째는 공원과 산이 가까워 산책과 등산할 곳이 많다. 80년대 중반에 완공된 ‘양재시민의 숲’과 건너편 ‘문화 예술의 공원’의 식재된 나무들도 세월의 이끼가 끼어 있고, 그 옆으로 흐르는 양재천은 산책로와 자전거 길이 따로따로, ‘몽마르뜨공원’과 육교로 이어진 ‘서리풀공원’ 등의 산책코스가 있어 걷기 좋은 동네이다. ‘한강부터 청계산까지 걸어서’란 구호 아래 내가 사는 신동아아파트 옆 산책로와 만나는 곳에 큰 도로를 가로질러 만든 길마중 다리 1, 2, 3교. 길끼리 만난다고 길마중이라니 이름이 얼마나 예쁜가? 그리고 아파트 뒷길에 심은 벚나무들이 이제는 성큼 자라서 구태여 4월에 벚꽃 구경을 따로 나갈 필요가 없고, 고속도로 진출입구 주변의 철쭉은 차를 타고 멀리 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5월의 철쭉꽃 구경을 즐길 수도 있다.
아 파트 내 정원의 철따라 바뀌는 꽃피는 풍경도 볼 만하다. 봄이 왔어도 아직 움도 틔우지 않은 게으른 오동나무, 잎들이 울창한 여름이 지나면 하늘 모르고 자란 메타세쿼이아의 은은한 단풍과 울긋불긋한 벚나무 단풍, 그리고 주렁주렁 매달린 모과들, 겨울이면 붉은 열매로 멋을 내는 마가목. 이 위에 내린 눈은 잠시나마 눈꽃을 연출한다. 밤의 산책도 좋다. 가로등이 산책로에 곳곳이 설치되어 있어 봄밤에는 꽃향기를 맡으며, 햇살 따가운 여름에는 늦밤 매미소릴 들으며, 가을철에는 풀벌레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 있다.
사철 등산객들이 즐겨 찾는 우면산은 초입에 약수터가 있어 목을 축일 수 있고, 흘러내리는 물로 이루어진 작은 습지에는 부들이 자라고, 대모산과 연결되는 완만한 능선의 구룡산, 다양한 등산 코스와 항상 맑은 물이 흐르고 있는 청계산도 지척 지간이다. 쓰다 보니 우리 동네 식구인 새들과 짐승들을 빠뜨렸구나. 아무리 사진 찍으려 해도 하도 움직임이 빨라 찍을 수 없는 박새, 아침 산책을 반기는 까치, 봄이면 짝짓기 철이면 청아한 목소리의 직박구리, 우면산에는 숨어 있는 꿩, 대모산에서 ‘구구구’ 하고 우는 산비둘기, 작년 청계산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깃털의 오색딱따구리, 물론 내가 이름도 모르는 새들도 적지 않다. 또 청설모, 오소리나 들고양이 등 산짐승들과 양재천 숲에는 너구리까지도.
마지막으로 승용차를 가지고 가야 하나 농협의 ‘하나로마트’와 ‘코스트코’ 등의 양판점과 불과 몇 걸음만 가면 만나는 슈퍼마켓이 여럿 있어 식자재와 생필품을 사기도 편한 곳이다. 우리 집이야 아이들이 다 커서 상관없으나 자녀 교육상 ‘제7학군’의 이점도 젊은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아파트 내에 있어 길도 건너지 않는 서이초등은 우리 애들 둘이 졸업을 하였고, 길 하나 건너에는 역시 애들이 다닌 서운중학교, 멀지 않는 곳에는 서초, 상문, 서울고등과 은광, 세화여고 등이 있다.
오늘 출근할 때 교대역 4거리에 서초구가 ‘살기 좋은 곳 1위’로 뽑혔다는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지은 지 30년이 넘는 아파트이나 동간의 거리가 넉넉하여 10층에 정남향인 내 집은 한겨울에도 햇빛이 넉넉하게 들어와 따뜻하고, 여름철 앞뒤 창문을 열면 바람 시원히 불어 에어컨도 필요 없다.
나는 나의 두 번째 고향인, 역사와 문화가 오롯이 남아 있는 서리풀 들판의 정말 살기 좋은 우리 동네에서 건강한 문화생활을 즐기며 앞으로도 계속 살아갈 작정이다. 나는 귀향이나 귀농은 꿈도 꾸지 않고 내가 살아가야 할 날들이 살아온 날보다 적으니 이제 나에게 세 번째 고향이 필요 있을까?
첫댓글 탁월한 수필가로서 문장이 아주 유려하여 군더더기가 없고 읽는이로 하여금 잔잔한 감동을 느끼게 한다. 역사감각도 투철하여 계속 쓸 것을 권한다.
무슨 과찬의 말씀을.
그 아파트 꽤나 오래 되었네요....위치가 좋아서 아파트값이 꽤나 비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래되었으니 재 건축 한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즈음 아파트들은 시골의 아파트들도, 옛날 것들 보다, 여러 모로 편하게 짓습디다.
재건축 조합이 결성되었어요. 어차피 한번은 이사를 갔다가 다시 들어와야 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