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는 진도인이 먼저 진도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홍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진도를 알아야 합니다. 특히 고향을 떠나 생활하는 출향인들의 역할은 막중합니다. 생활 속에서 늘상 접촉하는 주변의 지인들에게 진도를 알려야 하기 때문이죠.
진도는 전 지역이 역사 유적지이다
진도는 한반도의 서남쪽 맨 아래에 위치한 작은 섬이지만 예전부터 중앙 정부 관료, 학자들의 주요 유배지였고, 군사적 요충지라서 수많은 전란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고려 시대 때는 삼별초 항쟁의 근거지였고, 조선 시대 때는 명량해전의 격전지였다. 이로 인해 진도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특히 명량해전 때는 진도민이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일본군에 의한 무차별 살육을 당했고, 삼별초 항쟁 때도 수많은 진도 남자들이 죽음을 당했다. 그런 만큼 진도 전역에는 당시의 역사 유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진도의 관문인 진도대교에 들어서면 대교 아래는 명량대첩의 격전지인 울돌목 거센 물살이 휘돌고 있고, 대교를 건너면 좌측에 망금산 관방성이, 우측에는 명량해전을 대승으로 이끈 이충무공 동상이 울돌목을 지켜보고 있다.
녹진을 지나 고군면 용장리에 들어서면, 고려 원종 11년(1270) 고려가 몽골과 굴욕적인 강화를 맺자 이에 불복하여 대몽항쟁의 결의를 다짐한 삼별초군이 남하하여 대몽항쟁의 본거지로 삼았던 호국의 성지 용장성(국가 지정 사적)이 자리 잡고 있고, 용장성을 지나 의신면 왕무덤재에 이르면 삼별초 항쟁 때 여몽연합군에 살해당한 왕온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왕온의 묘(전라남도 기념물)가 진도군 의신면 침계리에 있다. 왕온의 묘를 지나 의신면 창포리에 이르면, 삼별초 항쟁 때 피난 중이던 궁녀들이 몽골군에게 붙잡혀 몸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고자 둠벙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는 삼별초 궁녀둠벙(향토 유형 유산)이 있고, 이곳에서 다시 임회면 남동리에 이르면 삼별초가 몽골과 항쟁을 벌였고, 제주도로 옮겨 갈 때도 이곳에서 출발했으며,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수군과 만호(萬戶)를 배치하여 조도 해협과 신안 하의도 해역 등을 관할했다는 남도진성(사적)이 자리 잡고 있다.
남도진성에서 진도 일주 도로를 따라 걷다 보면 남도진성 전투에서 여몽 연합군에게 패한 후 굴포 해안 쪽으로 이동하다 최후를 마친 것으로 전해지는 삼별초 배중손 장군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지은 사당과 동상이 임회면 굴포리에 있고, 굴포리에서 의신면으로 발길을 옮기면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조선 후기까지 수군의 주요 군진이 있었다는 금갑진성이 진도군 의신면 금갑리 일원에 있다. 의신면 금갑리에서 해안 도로를 따라 계속해서 진행하면 고군면 군지기미에 이르는데, 여기서부터 삼별초 호국 역사 탐방길을 따라 가면 고군면 벽파진에 이른다.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은 13척의 함선으로 330여 척의 일본군 함선을 거의 전멸에 가깝게 격퇴하였는데, 이런 역사적인 명량해전 승첩을 기념하면서 진도 출신 참전 순절자들을 기록한 이충무공 벽파진전첩비(진도 향토 문화유산)가 이곳 고군면 벽파리에 있고, 정유재란 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진도군 내 사족인 조응량(曺應亮)을 비롯한 전사자들의 무덤 230여 기가 안장된 정유재란 순절묘역(전라남도 문화재자료)이 고군면 도평리 송우산 기슭에 있다.
벽파진에서 명량대첩로를 따라 걷다가 군내면 둔전방조제를 지나 군내면 녹진리에 이르면, 물목을 지키는 관방성으로 임진·정유란 때 군사의 수를 돋보이기 위해 강강술래를 했던 곳으로 전해지는 망금산 관방성(전라남도의 기념물)이 군내면 녹진리에 있다. 이렇듯이 진도는 조국이 백척간두의 위기에 있을 때마다 그 중심에 있었고, 그때마다 인명과 재산은 물론 모든 것을 다 바쳐 나라를 구하는 데 앞장섰었다. 그 흔적이 지금 이렇게 진도 전역에 역사의 현장으로서 남아 있는 것이다. 진도의 걸음걸음은 역사 탐방이나 다름없다. 그 역사 유적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삼별초가 세운 새 나라, 진도 용장성(국가 지정 사적)
용장성은 고려 시대 삼별초가 진도를 근거지로 관군과 몽골군에 항전했던 호국의 성지이다. 고려 원종 때 몽골군의 침입을 받아 치욕적인 강화조약을 맺고 개경으로 환도하자 이에 반대한 삼별초군은 원종의 육촌인 온(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진도로 내려와 항거하였는데, 이때 고려의 장군 배중손(裵仲孫)이 이끈 삼별초군이 대몽항쟁(1270 ~ 1271)의 근거지로 삼은 성이다. 성의 길이는 군내면의 용장리, 세등리, 고군면의 도평리, 벽파리, 오류리를 잇는 산등성을 따라 총 12.75km이며 높이는 4m 내외이다. 현재 성의 대부분은 원형이 사라진 상태이며, 성지가 부분적으로 남아 있고, 성내의 용장사지 및 행궁지가 보존되고 있다. 용장성 홍보관에 들르면 삼별초와 진도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 위치: 진도군 군내면 용장산성길 92
* 찾아가기: 진도 버스터미널에서 벽파, 연동행 버스(용장리에서 하차)
* 주변 관광지: 진도대교, 진도타워, 이순신 장군 동상
전(傳) 왕온의 묘(전라남도 기념물)
삼별초에 의해 왕으로 추대된 왕온은 1271년 5월 고려의 김방경, 몽골의 홍다구가 지휘하는 여·몽 연합군의 총공격으로 패하면서 용장성에서 쫓겨 진도읍에서 의신면 운림 산방에 이르는 중간 고개(왕무덤재)에 이르러 격전을 벌이다가 아들 왕환과 함께 몽골 장수 홍다구에게 피살되었는데, 이 고개 동쪽 산기슭에 왕온의 묘가 있다. 무덤은 직경이 810㎝, 높이가 200㎝가량이며 장타원형의 토장분 형태로 호석이 둘러져 있다. 1978년과 1983년에 보수하였다.
* 위치: 진도군 의신면 왕온로 20-7
* 찾아가기: 진도 버스터미널에서 금갑, 접도행 버스(왕무덤재에서 하차) 또는 진도 버스터미널에서 택시로 10분
* 주변 관광지: 운림 산방, 쌍계사, 운림 삼별초공원
진도의 낙화암, 삼별초 궁녀둠벙(향토 유형 유산)
삼별초에 의해 왕으로 추대된 왕온이 몽골 장수 홍다구에게 피살되자, 전투 중에 피난 중이던 궁녀들은 의신면 창포리에서 만길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만길재’를 넘다 언덕을 따라 내려가 둠벙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몽골군에게 붙잡혀 몸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한 것이다. 그 뒤 비가 오는 날이면 이곳 둠벙에서 여인네의 울음소리가 슬피 들렸다고 한다. 이후 진도 사람들은 이곳을 ‘여기급창둠벙’이라 불렀다.
* 위치: 진도군 의신면 돈지리 1029-11, 1029-12
* 찾아가기: 진도 버스터미널에서 금갑, 접도행 버스(창포리에서 하차)
* 주변 관광지: 운림 산방, 쌍계사, 운림 삼별초공원
삼별초의 지도자 배종손 장군 사당
삼별초 배중손 장군은 1270년 고려가 몽골에 항복하자 삼별초군을 이끌고 진도에 도착, 용장성을 쌓고 항전 의지를 다지던 중 1271년 5월 18일 여몽 연합군의 기습을 받고 진도 남도석성 전투에서 패한 후 임회면 굴포 해안 쪽으로 이동하다가 최후를 마쳤다. 이런 배중손 장군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건립한 사당과 동상이 임회면 굴포리에 있다.
* 위치: 진도군 임회면 진도대로 4212
* 찾아가기: 진도 버스터미널에서 팽목, 서망행 버스(굴포에서 하차)
* 주변 관광지: 남도진성, 아리랑 마을
정유재란 순절묘역(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진도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고, 정유재란 때는 울돌목(명량)을 중심으로 해상전투가 전개되면서 다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정유재란 순절묘역은 정유재란 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진도군 내 사족인 조응량(曺應亮)을 비롯한 전사자들의 무덤으로 모두 230여 기이다. 일부 무연고자의 묘가 섞여 있기는 하나 대부분 정유재란 때 순절한 사람들의 무덤이다. 진도군 고군면 도평리 송우산 기슭에 있다.
* 위치: 진도군 고군면 도평리 산 117-3 외 26
* 찾아가기: 진도 버스터미널에서 가계, 회동행 버스(오일시에서 하차)
* 주변 관광지: 진도 용장성, 이충무공 벽파진전첩비
진도 남도진성(국가 지정 사적)
남도진성은 진도군 임회면에 있는 삼국시대의 성곽으로 추측되는데 고려 삼별초군이 몽골군과의 항쟁을 위해 이곳에 다시 성을 쌓았고, 그 후 1438년(세종 20년)에 성을 보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높이 4 ~ 6m, 폭은 2.5 ~ 3m가량 되는 성으로 둘레는 610m이다. 둥그런 성벽과 동·서·남문이 거의 그대로 있으며, 서문 양옆에 밖으로 튀어나온 치가 남아 있다. 남도진성이 위치한 남동리 앞바다는 남해안과 서해안이 맞닿는 길목인데, 이런 지리적 특수성으로 인해 13세기부터 왜구가 약탈을 일삼자 이를 막기 위해 이곳에 수군과 종4품 만호(萬戶)를 배치하여 조도 해협과 신안 하의도 해역 등을 관할하였다. 남도진성이 있는 자리는 백제 시대 매구리현(현 진도군 임회면)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 위치: 진도군 임회면 남도길 8-8
* 찾아가기: 진도 버스터미널에서 팽목, 서망행 버스(남동리에서 하차)
* 주변 관광지: 배종손 장군 사당, 아리랑 마을
진도 금갑진성(전라남도 기념물)
금갑진성은 의신면 금갑리에 있는 조선 시대의 성으로, 성종 16년(1485)부터 연산군 5년(1498) 사이에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왜구 방어의 요새로서 기능하고 임진왜란 때는 전라우수영과 밀접히 연결되면서 큰 역할을 하였다. 이 성에는 만호를 비롯한 여러 관원들이 배치되었으며, 왜적을 방어하는데 필요한 각종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진도 성곽조에 성 둘레 1,153자, 높이 8자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는 서측과 북측의 성벽 일부만 남아 있다.
* 위치: 진도군 의신면 금갑리 639 외
* 찾아가기: 진도 버스터미널에서 금갑, 접도행 버스(금갑에서 하차)
* 주변 관광지: 운림 산방, 쌍계사, 운림 삼별초공원
진도 망금산 관방성(전라남도 기념물)
진도 망금산 관방성은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망금산(111.5m) 정상에서 동남쪽 500m 밑의 작은 봉우리(67m)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성으로 둘레는 460m이다. 성안에서 백제 와당이나 신라 토기가 수습되었고, 울돌목을 지키기 위한 관방성으로 고려-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전쟁에 이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관방 유적이며, 특히 물목을 지키는 관방성으로 명량대첩의 역사 현장이었다는 점에서 보존할 가치가 크다.
* 위치: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산12-2
* 찾아가기: 녹진 버스터미널에서 도보로 10분
* 주변 관광지: 울돌목, 진도대교, 진도타워 등 녹진 관광단지
이충무공 벽파진전첩비(향토 문화유산 유형 유산)
1956년 11월 29일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에 건립된 이 전첩비는 정유재란 당시 이충무공에 의해 가장 통쾌한 승리를 거둔 명량해전 승첩을 기념하면서 진도 출신 참전 순절자들을 기록하였다. 이 전첩비는 높이 3.8m, 폭 1.2m, 두께 0.58m의 비신을 자연암을 떨어내어 조형한 높이 1.2m, 폭 4.7m, 길이 5.7m 규모의 거대한 거북좌대 위에 세웠고, 그 위로 높이 1.2m, 폭 1.2m, 길이 2.1m의 머릿돌을 올려놓았으며 동양 최대 높이의 비로 알려지고 있다. 비문은 시인 이은상 선생이 짓고 글씨는 이 고장 출신 소전 손재형 선생이 썼다.
* 위치: 진도군 고군면 벽파길 74
* 찾아가기: 진도읍에서 벽파, 연동행 버스(벽파진에서 하차)
* 주변 관광지: 용장성
* 출처 : 대한민국의 유일한 민속문화예술특구, 《진도에 가·보·느·자》 중에서
첫댓글 이렇게나 연구를 많이하셧군요 놀랍고 존경스럽습니다
선생님의 글 6편을 책으로 군청에서 군비로 만들어 국립중앙도서관,각 유명 대학교,전남대학교도서관,문광부,역사박물관 등에 기증하고, 진도군내 각 학교 도서관에 5권식 보존케하고 학교에선 이 교재로 역사 공무를 하게하는 것이 매우 의미가 있다고 사료됩니다.
군의회에도 보고하고 예산확보 등 준비 작업에 힘써주시길 바라고,진도군내 몇개 언론기관에서도 무료로 이 기사를 시리즈로 연재하여야하며
진도군내 각 리장, 각 경로당에도 책을 비치해줄것을 간구합니다.
군수가 깨어있는 분이라면 이런 역사성을 일깨우는 일에 매진하고, 전남도청에도 도비지원을하고, 국비 지원도 받아서 proposal공모사업으로 예산을 확보해주실것을 간구합니다.
필요하다면 제가 기획을 하고 힘써보겠습니다. 요청만하신다면.
이 글은 제가 2022.12.13일에 출간한 《대한민국의 유일한 민속문화예술특구, 진도에 가·보·느·자》 중에서 옮긴 글입니다. 진도가 고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소소한 인연 때문인지, 아니면 민속문화와 진정한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진도의 가치를 인정해주시고 안타까워해주시는 선생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진도는 언젠가는 그 진가를 인정받고 합당한 대우를 받을 날이 올 것입니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진도인 모두와 선생님과 같은 외지인들의 진도를 사랑하는 손길이 한뼘씩 한뼘씩 이어지고 넓혀진다면 말입니다. 이 글을 게재하는 이유도, 이 글을 읽으신 분들이 그동안 묻혀진 진도의 진가를 이해하시고 주변에 널리 전파해주십사 하는 마음에서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