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예종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최규진
전천후 신앙인이 되라 (빌1:20-30절)
전천후라는 말의 뜻은 어떠한 기상 조건에도 제 기능을 다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전천후 농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전천후 농업은 가뭄이나 홍수 등의 나쁜 기상조건 아래서도 별 지장없이 경영할 수 있는 농업을 말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천수답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논에 물이 없어 오직 하늘만 쳐다보다가 비가 오면 빗물을 저장하여 농사를 짓는 방식입니다. 다행히 비가 오면 농사를 지을 수 있지만 만일에 비가 오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외부적 환경에 따라 눈치를 봐야 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천수답이라는 단어를 경제인들과 주식시장에서 자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주식시장에서는 미국이라는 증시의 결과에 따라 울고 웃는 이른바 천수답 장세라는 말을 합니다. 자기 스스로의 자생능력이 전혀 없고 오직 주변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말을 두고 사용하는 말입니다. LG그룹 구본무 회장은 계열사 경영진들에게 환율 등 외부적인 변수에 의존하는 천수답 이익의 환상에서 깨어나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삼성전자 사장도 천수답 경영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체소화비중을 늘리는 생산적인 집중을 강조합니다. 이른바 어떤 외부적인 환경에 따라 춤을 추어야 하는 경영전략이나 브랜드를 가지고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믿음생활에도 천수답 같은 신앙인이 있는 반면에 전천후 신앙인도 있다고 봅니다. 오직 주님안에서 자기 혼자 설수 있는 믿음은 전천후 신앙이지만 외부적인 요인에 따라 울고 웃고 춤을 추는 신앙은 천수답 같은 믿음인 것이지요. 그런데 천수답 같은 믿음은 정말 불행합니다. 그저 어떤 상황이나 환경적인 요인에 따라 울고 웃는 신앙은 정말 피곤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행복한 신앙은 다른 환경이나 주변 여건 때문에 울고 웃는 신앙이 아니라 자기안에 있는 충분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기 영혼을 지켜 나가는 믿음입니다. 그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오직 한결같은 믿음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성도는 반드시 전천후 신앙을 가져야 행복합니다.
전천후 신앙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오직 주님을 위한 믿음에 흔들림이 없습니다. 사나 죽으나 오직 주님께만 붙어 있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전천후 신앙은 세상의 어떤 바람도 타지 않습니다. 세상의 어떤 분위기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어떤 유혹에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전천후 신앙은 항상 제자리를 지키는 신앙입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침이 없는 신앙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변덕부리지 않습니다. 세상의 어떤 상황이라도 불리함이나 유리함을 따지지 않습니다. 전천후 신앙은 믿음에 견고함이 있는 신앙입니다.
가슴 아프게도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이 자기중심적인 믿음을 가지고 삽니다. 그래서 자기 감정에 따라 신앙이 출렁거립니다. 어떤이는 자기 기분에 따라 믿음의 색깔이 변합니다. 도대체 그 신앙의 중심을 알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불안한지 모릅니다. 아침에는 기도로 시작하였으나 저녁에는 기분으로 막을 내립니다. 아침에는 감사로 시작했으나 저녁에는 불평과 불만으로 하루를 마무리 하고 맙니다. 하루도 그러하지만 한주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날은 은혜스럽게 예배드리던 성도가 주중에는 완전히 이방인처럼 살아갑니다.
주일날 주님 앞에 나와 금쪽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마저 자기 영혼 속에 간직하지 못하고 금방 세상 사람들과 같이 되어버리는 우리들의 실상은 아닌지요?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감사와 기쁨으로 누리지 못하고 간신히 산소 호흡기를 꽂고 버티는 시한부 환자처럼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요? 도대체 믿음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떤 때는 믿음이 있는 것 같으나 어떤 때는 불신자보다 더 악하고 추합니다.
사랑하는 예종교회 성도여러분?
우리 모두 천수답 같은 믿음으로 여러 사람들 피곤하게 하지 마시고 전천후 믿음을 소유하사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시고 너와나 우리 모두에게 항상 기쁨과 즐거움을 선사하시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믿음이 전천후 믿음일까요?
(1) 생사를 초월한 신앙입니다(20-21)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철권을 휘두르는 권세가도 아닙니다. 배경 좋고 문벌 좋은 자도 아닙니다. 가장 무서운 사람은 죽음을 겁내지 않는 사람입니다. 죽음을 겁내지 않는 사람은 무서울 게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죽을 각오를 하고 덤벼드는 사람은 이길 수가 없습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공부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반드시 일어납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사업을 하면 반드시 성공합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전도하면 열매가 맺힙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예수를 믿으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집착하면 목숨이라도 겁니다. 좋은 것도 마찬가지고 좋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일에 목숨을 걸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오락과 도박과 마약 등 좋지 않는 일에도 목숨을 겁니다. 목숨을 건다는 것은 죽을 각오를 한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그 일에 미쳤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면 세상은 물론이거니와 사단도 우리에게 겁을 냅니다. 우리가 어설프니까 세상이 건들고 사단이 찝쩍거립니다. 우리가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을 소유한다면 세상은 우리를 더 이상 건들지 못합니다.
오늘날 왜 세상이 교회를 공격하고 성도를 비난할까요? 우리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진리를 파수하기 위한 생명을 건 모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공격하고 유혹하면 교회가 쉽게 협상의 테이블에 앉아 버리고 성도도 쉽게 타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은 신이 나서 건드는 것입니다. 사단도 교회를 얕잡아 보고 성도를 가볍게 건드는 것입니다. 이제 교회도 마찬가지고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른바 전천후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제발 세상 소리에 민감하지 말고 하나님의 소리에 민감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대부분 전천후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불의한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죄와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분명한 자기 신앙을 가졌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죽음을 초월한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믿다가 순교당하는 것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사자굴에서 사자의 밥이 되기도 했고, 돌에 맞아 죽기도 했으며, 서슬 퍼런 단두대에서 싸늘한 시체가 되기도 했습니다. 모진 고난과 형극을 받으면서도 결코 삶을 슬퍼하지 아니하며 기꺼이 순교의 제물 되는 것을 겁내지 아니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저는 한 사람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초대 교부 시대에 모든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영향력을 끼치던 인물중에 황금의 입을 가진 크리소스톰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로마황제는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포기하라고 수차례 협박을 합니다. 만일 믿음을 포기하지 아니하면 그를 추방하겠다고 엄포를 놓습니다. 그러자 크리소스톰은 당당하게 대답을 합니다. “당신은 나를 추방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이 모든 세상이 바로 나의 아버지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너를 당장에 죽이겠다”고 협박을 합니다. 그래도 그는 굴하지 않고 대답하기를,“당신은 결코 나를 죽일 수 없습니다. 왜냐면 나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보자기 안에 싸여져 있기 때문입니다”고 말합니다.
다시 황제가 공갈 협박을 합니다. “그러면 너의 재산을 모두 몰수해 버리겠다”고. 그는 다시 말하기를, “당신은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내 보물은 하늘나라에 있고 내 마음도 이미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해도 크리소스톰은 황제앞에서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황제는 다시 그에게 그러면 “내가 너를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격리시켜 친구가 하나도 없게 만들어 버리겠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나에게는 당신이 나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는 친구들이 하늘나라에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나는 절대 당신의 어떤 말도 들을 수가 없습니다. 당신에게는 나를 헤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바로 생사를 초월한 믿음입니다.
결국 그는 황제앞에 끝까지 맞서다가 체포를 당합니다. 황제는 신하에게 명령합니다. “당장에 그를 고독한 개인감방에 집어 넣어라”고. 이번에는 황제의 신하가 크리소스톰의 죽음을 초월한 믿음을 전달합니다. 신하가 대답하기를, “황제폐하, 절대 그것은 안됩니다. 예수믿는 사람들은 혼자 있는 것을 정말 좋아합니다. 그러면 그는 하루 종일 싱글벙글 좋아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대화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면 그를 극악무도한 죄수들이 있는 감방으로 쳐넣으라”. 이번에도 신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합니다. “황제폐하, 그것은 더구나 안 될 말씀입니다. 그러면 그는 전도할 기회를 얻었다고 좋아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안에 있는 모든 자들을 모두 다 크리스천으로 만들어 버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를 어떻게 할까라고 고민하던 중에 그를 당장에 목을 쳐서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그때 신하가 사색이 되어 황제에게 다시 간언을 합니다. “아이고 황제폐하, 그것은 절대로 안 됩니다. 그를 목을 쳐서 죽이면 그는 주님께서 순교하는 영광을 주셨다고 날로 뛰며 좋아할 것입니다. 그 사람들의 제일 큰 상급은 순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 처형당하면서 두려워하거나 우는 사람들을 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광채가 나고 기뻐 한답니다”. 그러자 황제가 고함을 지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놈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이냐?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순교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할수 없는 사람들이라고(히11:38).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생사를 초월한 신앙입니다.
전천후 신앙인들에게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들은 삶에 대해 구차한 애착도 부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기쁨으로 순교자적인 삶을 삽니다. 그들이 생명에 대한 애착이 없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 안에서 사는 것이나 죽는 것의 간극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드나든 신앙인들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죽음 그 이후의 세계를 바라보는 자들입니다. 죽음을 초월한 신앙은 부활신앙입니다. 부활의 신앙은 부활하신 주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죽어도 살고 살아서 주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분명한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전천후 신앙인들은 부활신앙을 가진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단지 삶의 연장선상에 있는 한 경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삶에 대한 비굴한 애착을 갖는 자는 전천후 신앙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전천후 신앙은 생사를 초월한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믿음이 없으면 세상의 물결 따라 변덕이 심합니다. 언제 그 심령이 변덕을 부릴지 모릅니다. 언제 그 심령이 뒤집어 질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관심은 영원한 저 세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지금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더 소중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20절을 보면 바울은 전천후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23절). 죽기를 원했다는 말입니다. 다만 빌립보 성도들을 위해 육신에 거하는 것이 더 유익했다고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전천후 신앙입니다.
(2) 삶이 깨끗한 신앙입니다(20절)
전천후 신앙은 삶이 깨끗한 신앙입니다. 그 신앙은 무엇보다도 삶이 청결하고 투명합니다. 그래서 삶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누구 앞에서도 당당합니다. 결코 비굴하거나 비겁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본문 20절에서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모두가 같은 내용들입니다. 자기 삶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은 모든 일에나 사람 앞에서 온전하고 담대합니다. 한마디로 구린 것이 없으니 냄새 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매사에 자신감이 넘칩니다. 누구를 만나도 당당합니다. 거칠 것이 없습니다. 숨길 것이 없으니 숨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거짓말을 하고 하나님과 사람을 속이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움추러 들고 매사에 자신감이 없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에게서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삶이 깨끗한 성도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샤론의 꽃과 같이 사방으로 진동을 합니다. 그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존귀케 됩니다. 그러나 삶이 깨끗하지 못한 성도에게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아니라 악취가 납니다. 그런 자들을 통해서는 절대 그리스도의 존귀함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바울에게 자기 삶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두말할 것 없이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는 일입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20절에서 자기 자신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깨끗한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려는 것이라고 직접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고상한 소망입니까?
우리에게도 그런 소망이 있을까요? 당시 바울의 상황은 지금 우리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그는 빌립보 옥중에 갇혀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 같으면 무엇을 기대하고 소망했을까요? 아마도 지금 당장 지긋지긋한 감옥으로부터 자유케 해 달라는 소원이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바울은 그런 유치한 소망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분명히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기대와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가 나를 통하여 존귀케 되실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자기 삶이 투명하면 됩니다. 즉, 자기 삶을 깨끗케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삶이 떳떳하지 못하면 그리스도는 절대 나를 통해서 존귀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삶이 떳떳하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누구를 겁낼 수 있겠습니까?
전천후 신앙인들의 특징은 세상 앞에서 당당하다는 것입니다. 자기 삶이 추호도 부끄럽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믿음 좋은 사람들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을 시기하던 사람들은 그를 고소하기 위해 여러 가지 흠과 허물을 발견하려고 간사한 짓을 다했지만 결국은 아무 흠과 허물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다니엘의 삶이 깨끗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다니엘은 그들 앞에서 당당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주변을 보십시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삶의 영역에서 각종 부정과 부패의 스캔들에 어떤 식으로든지 연루되어 있습니다. 그 정도로 성도들의 삶이 부패했다는 증거입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들은 세상이나 사람들 앞에서 자기 삶이 매우 투명합니다. 그들은 억지로 감추지 않습니다. 파헤쳐도 겁나지 아니하며 드러나도 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세상 앞에 당당합니다. 자신이 당당하면 뭐가 부끄럽겠습니까? 자신이 정직한데 어떤 부정직인들 겁나는 게 있겠습니까? 자신이 진실한데 어떤 거짓이나 모함이 무서운 게 있겠습니까? 거짓은 하면 할수록 천양의 입술로 나타나지만 진실은 하면 할수록 한 입술이 되어 집니다. 내 삶이 투명하면 무엇이 두려우며 무엇이 겁나겠습니까? 깨끗한 삶을 사십시다. 이것이 바로 전천후 신앙입니다. 전천후 신앙은 삶이 깨끗한 신앙입니다.
(3) 복음에 합당한 신앙입니다(27절)
전천후 신앙은 복음에 합당한 신앙입니다. 전천후 신앙인은 복음적인 신앙을 소유한 자입니다. 신앙의 기본은 복음입니다. 성도들이 상당히 많이 오해하고 있는 일들 중에 하나가 바로 신앙의 기본에 관한 정리입니다. 신앙의 기본은 두말할 것 없이 복음입니다. 신앙의 기본은 결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이 아닙니다. 신앙의 기본이 복음이라는 말입니다. 복음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 없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보다 더 귀한 복음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의 시작이요, 복음의 마침입니다. 아니 복음의 전부입니다. 그런데 상당수의 성도들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단순하게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수준으로 살아가는 것을 신앙의 기본으로 여기고 살아갑니다. 단순하게 착하게 사는 것만으로 종교적인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이 전혀 틀린 이야기는 아닙니다. 복음은 그런 모든 것을 다 수용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본질은 아닙니다.
복음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복음의 알파요 오메가 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자는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그 말씀은 복음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삶이 복음에 합당한 삶입니다. 그러므로 전천후 신앙은 예수 중심의 삶을 의미합니다. 전천후 신앙인은 예수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복음에 합당한 생활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란 복음을 위하여 협력하는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협력하는 신앙이 바로 복음에 합당한 신앙입니다.
아무리 열심을 다해 신앙생활을 한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면 전천후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신앙은 아무리 정직해도 정직이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신앙은 아무리 선을 행해도 선이 아닙니다. 모든 신앙의 중심에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가 계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신앙은 절대 전천후 신앙이 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가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없는 도덕적 선을 추구하며 의를 이루기 위해 열심을 내고 수고하고 노력하는 것을 성도로서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속지 마십시오. 그것은 자기 열심이지 절대 전천후 신앙은 아닙니다. 전천후 신앙은 예수 중심의 신앙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위하여 협력하는 일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주님의 영광스런 복음을 위해 헌신하고 수고하는 모든 일들을 포함합니다. 그것은 가장 먼저 그리스도의 고난을 위하여 교회에 남겨주신 고난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또한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믿음의 지체들을 서로 사랑하며 섬기고 위로하며 격려하는 일들과 성도들과의 거룩한 교제가 포함되기도 합니다. 아무튼 주님의 영광을 위해 투자하는 영적인 모든 사역들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자, 이른바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모든 일들을 위해 수고하는 자들은 전천후 신앙인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모두 전천후 신앙을 가집시다. 그래야 세상을 이깁니다. 적당한 신앙인이 되면 세상과 믿음 사이에서 줄타기 하듯 적당히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삶이 너무나 피곤해 집니다. 그러나 전천후 신앙인이 되면 막상 힘들 것 같지만 훨씬 더 쉽고 가벼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중심으로 전천후 신앙의 특징들을 세 가지로 살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가 각각 독립적이지 않고 모두가 하나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전천후 신앙은 생사를 초월한 신앙입니다. 그런데 생사를 초월한 신앙은 삶이 깨끗한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삶이 깨끗한 신앙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여 복음에 합당한 삶은 삶이 깨끗한 삶이요, 삶이 깨끗한 삶은 생사를 초월하는 삶이라는 말씀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전천후 신앙을 소유하시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201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