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제출자 : 정교화 (19254502)
세계관의 정의
1) 전광식 교수(“학문의 숲길을 걷는 기쁨”, 서울: CUP, 1998)
‘세계관(世界觀)’은 ‘인생관(人生觀)’, ‘신관(神觀)’과 같은 개념 형태로 쓰였는데, 그 용어의 문자적 의미는 ‘세계를 보는 시각’, ‘세계를 보는 관점’이란 뜻이다. 영어에서는 ‘view of world’라고 쓰기도 하고, 독일어식으로 쓴다고 ‘worldview’라고 붙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세계관이란 용어는 사실 근원적으로 독일어의 ‘Weltanschauung(세계관)’이란 개념에서 온 것이다. 이 ‘Weltanschauung’은 독일어에서 나와서 오늘날 덴마크어, 스웨덴어, 네델란드어에서도 그래도 쓰이고 있다.
세계관은 인간이 개별적 내지 공동적으로 세계와 삶을 직관하는, 말하자면 그것을 이해하고 해석하며, 또 그것에 따라 세상에서의 삶을 영위해 가려는 기본적인 의식의 방식이며 근본적 입장이다.
2) 양승훈 교수(“기독교적 세계관”, 서울: CUP, 2003)
우리는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많은 전제들을 가지고 살아간다. 전제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대부분 사람이 의식하지 못하는 역설적 성향이 있다. 그러나 모든 사고 활동도 전제 없이는 출발조차 할 수 없다.
이처럼 사건이나 상황, 자신을 포함한 주변 세계에 대한 인식 또는 판단의 기본이 되는 전제의 틀을 흔히 세계관(世界觀, worldview)이라 한다.
세계관을 의미하는 독일어 ‘Weltanschauung’은 ‘세계’를 뜻하는 ‘Welt’라는 말과 마음이나 정신적인 직관을 의미하는 ‘Anschauung’이라는 말이 합쳐진 것이다. 세계관이란 실험적 탐구나 이론적 구성이라기보다는 직관적, 관조적 의미를 갖는다. 즉 세계관은 개별 사물의 연구로부터 귀납적 결론을 얻으려는 태도나 합리적 고찰과 입증을 중요시하는 연역적 방법이 아니라 인식의 기본 틀자체이기 때문에 합리나 논리보다 체험 또는 직관과 관조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흔히 사상, 가치관, 인생관, 우주관, 철학, 신념이나 신앙 등이 다르다고 하는 것도 자세히 살펴보면 결국 세계관의 차이를 의미함을 종종 발견한다.
세계관이란 “사건이나 상황, 자신을 포함한 주변 세계에 대한 인식 또는 판단의 기본이 되는 전제의 틀”이라고 정의했으나 이를 더 간단하게 말한다면 “세계를 보는 관점”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세계’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물질세계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논리적․심미적인 세계, 정신적․영적 세계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그리고 ‘본다’는 것은 단지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오감, 때로는 육감까지 포함하여 자신과 주변 세계를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를 보는 관점”이란 세계관의 정의가 간단하기는 하지만 매우 포괄적인 정의임을 알 수 있다.
3) 전성민(“세계관적 성경읽기”, 서울: 한국유니온선교회, 2021)
세계관(世界觀)에서 “세계”는 그야말로 보이든 보이지 않든 인간이 인식할 수 있고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하고, “관(觀)”은 세계를 바라보는 어떤 관점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그것은 통합성 또는 전체성이다. “관(觀)”이라는 말 외에 보는 것을 표현하는 개념들로 “견(見)”과 “시(視)”가 있다. 눈앞에 있는 것을 보는 게 “견(見)”이라면 좀 더 꼼꼼히 들여다보는 것은 “시(視)”이다. 이런 “견”과 “시”에서 더 나아가 ‘일정한 관점과 입장을 가지고’ 보는 것이 “관(觀)”이다. 이것은 “전체를 통합할 수 있는 관점”을 가지고 보는 것이다.
4) Albert M. Wolters(양성만 역, “창조 타락 구속”, 서울: IVP, 1992)
세계관을 ‘한 사람이 사물들에 대해 갖고 있는 기본적 신념들의 포괄적인 틀’이라고 정의한다.
첫째, ‘사물들’이란 말은 의도적으로 선택한 애매한 단어로서 우리의 신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지칭할 수 있는 말이다. 이 말은 세계, 인간의 삶 일반, 고통의 의미, 교육의 가치, 사회도덕성, 가정의 중요성 등 모두를 포함한다.
둘째, 세계관은 개인의 신념의 문제이다. 신념들을 ‘인식적 주장’, 즉 일종의 지식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감정이나 의견과는 구별된다.
셋째, 세계관이 사물들에 관한 기본적 신념들과 관계가 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한 사람이 사물들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기본적 신념들은 하나의 틀(framework)이나 유형(pattern)을 이루는 성향이 있다. 이 점 때문에 인본주의자들은 종종 ‘가치체계’라는 말을 사용한다.
※ 세계관에 대한 예(例)
a. 많은 학자들이 세계관을 안경에 비유한다.
b. 민 13~14장 : 10명의 정탐꾼과 여호수아․갈렙 사이에 가나안 땅 정탐보고
차이가 나타난 원인
c. 마 5:3과 눅 6:20 “가난한 자”의 차이가 나타난 원인
① 의미상의 견해
② 해석학적 견해
③ 세계관적 견해
2. 세계관, 철학, 신학(Albert M. Wolters)
일반적으로 세계관, 철학, 신학은 범위가 포괄적이라는 점에서는 서로 비슷하지만, 세계관이 전(前) 과학적인 데 비해 철학과 신학은 과학적이라는 점에서 서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철학과 신학의 차이는 구조와 방향이라는 중요한 두 가지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더욱더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다. 철학은 사물의 구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전체를 다룬다는 의미에서) 포괄적이고 과학적인 학문, 즉 피조물들의 통일성과 다양성에 관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신학은 사물들의 방향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전체를 다룬다는 의미에서) 포괄적이고 과학적인 학문, 즉 세상을 감염시키는 악과 그 치료책에 관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철학은 성경의 기본적인 범주에 비추어서 성경을 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세계관은 구조의 문제와 방향의 문제에 똑같이 관심을 갖는다. 세계관에는 포괄적이고 과학적인 학문의 특징인 초점의 분화가 아직 없다.
3.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1) 기독교 세계관 정의
영어의 크리스천(Christian)이라는 단어는 ‘기독교인’이라는 명사적 의미와 ‘기독교적’이라는 형용사적 의미를 지닌다. 이 말은 곧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기독교적이 된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과 ‘기독교적’이라는 것은 개인이나 기독 공동체의 성장 과정에서 분리할 수 없는 또 분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렇듯 ‘크리스천(Christian)’이라는 단어의 의미에 유념하여 교회를 바라볼 때, 교회 내에서 ‘기독교인’이면서 삶의 모든 영역에서 ‘기독교적’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는 교회에 다니는 ‘기독교인’이 적은 것이 아니라 성숙한 신자, 즉 ‘기독교적인’ 사람이 적은 것이다. 교인 중에 재벌 회장도, 박사도, 정치가도, 문학가도, 예술가도 많은데 예수 그리스도처럼 사고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기독교적인’ 사람들이 적은 것이 문제이다.
넛슨(Robert D. Knudsen: 웨스터민스터 변증학 교수)은 “기독교적 세계관이란, 하나님의 계시에 중심으로 한 진리에 대한 반성으로 심오해진 ‘체계화된 지혜’이다”라고 정의하였다. 기독교 세계관은 단순히 성경 내용을 체계화한 것이 아니라 체계화된 진리를 조망하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정의는 세계관의 체계가 어떤 신학적 입장과 큰 차이가 없다는 비판을 받을 소지가 있지만, 기독교적 세계관은 이미 ‘기독교적’이란 형용사가 붙은 만큼 어느 정도 의식적일 수밖에 없으며 신학적 지식보다는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적인 삶에 더 영향을 미치게 된다.
성경(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과 행동의 기준이요 지침일 뿐 아니라 우리의 사고와 인식의 토대를 제공한다. 우리는 성경에서 세계관의 원리와 내용을 끄집어낼 뿐 아니라, 세계관을 보고 식별하는 원리도 이끌어 낸다.
기독교 세계관은 성경적 세계관이다. 성경은 세계의 기원과 의미, 그리고 그 본질과 목적을 명확히 제시한다.
* 세계에 대한 성경적 견해
① 세계는 하나님의 의해 창조되었고, 죄로 인해 타락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에 의해 회복되었다.
② 세계는 시공적으로 유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 존재하고 의미를 부여 받는다.
③ 세계는 영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세계는 단순히 물리적 현상만 일어나는 자연 세계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 섭리하시고 역사하시며 의미를 부여하시는 영역이고, 또 여기에서 인간은 단순히 지상적․육체적 존재로서 머물 다 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 삶을 영위하고 살며, 또 그 삶의 의미도 내세까지 연장되는 것이다.
카이퍼(A. Kuyper)와 도예베르트(H. Dooyeweerd) 등이 체계화한 기독교 세계관의 기본 틀은 ‘창조 – 타락 – 구속’이다. 이것은 기독교 철학의 종교적 동인이기도 하고 모든 기독교적 학문의 패러다임이기도 하다.
‘창조’에는 세계의 기원과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존재와 세계의 모습이 잘 설명된다. ‘타락’에서는 이 세계의 변모된 성격을 말해주며 왜 이 세상이 이렇게 죄가 많고 고통과 전쟁이 있고 문제투성이인지를 말한다. ‘구속’에서는 이 세계가 과연 새로워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해준다.
2) 기독교 세계관의 기본 틀(Framework)
기독교적 세계관은 성경에 근거하고 있으며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세계관은 대체로 창조(Creation), 타락(Fall), 구속((Redemption)이라는 뼈대 위에서 발전되어 왔다.
(1) 창조
창조는 모든 존재와 인식의 기원에 관한 지식을 제공하기 때문에 기독교적 세계관의 기초가 된다. 창조에 대한 지식과 믿음은 단지 만물의 기원에 대한 개인적 호기심을 만족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만물이 어디서, 어떻게 기원했는지를 알 때 비로소 만물의 존재 이유와 목적도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과 그 가운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성경의 기록은(골 1:16) 만물의 존재와 인간의 인식 체계에 관한 원초적 근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기독교의 가장 근본이 되는 교리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태초의 에덴동산에는 아무런 어두움의 그림자가 없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가리는 것이 없었고, 인간과 인간, 인간과 다른 피조물 간에도 그러했다. 아담은 하와를 보고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창 2:23)고 고백하면서 아름다운 부부의 관계를 시작하였다. 에덴동산에서 이루어진 아담과 하와의 결혼은 가장 완벽한 결합이었을 것이다. 인간과 그 외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도 완전하였으며 아담은 모든 짐승의 이름을 지어 주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창 2:19). 아담이 모든 짐승의 이름을 지어 주었다는 것은 그들에 대한 완전한 지배권을 가졌음을 보여 준다. 또한 에덴동산에는 시기와 질투도, 질병과 굶주림도 없었다. 모든 것은 완전했다.
(2) 타락
타락은 보시기에 좋도록“ 창조된 피조 세계가 오늘날 왜 이렇게 피폐한 상태가 되었는지를 말해준다.
인간의 타락은 창세기 3장에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서는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동산 가운데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셔서 에덴동산에 두고 명하시기를 각종 나무의 실과를 마음대로 먹어도 되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하셨다. 만일 그 실과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다.
성경에 의하면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섬기도록 지음받았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들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도, 불순종할 수도 있는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되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것은 불순종을, 생명나무는 하나님과의 영원한 생명의 교제를 상징하였다. 불행하게도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완전하고 무흠(無欠)한 상태로 창조되었으나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범죄함으로써 타락했다.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경고의 무시였으며, 하나님과 의존적인 관계를 거절하고 인간 자신이 자기의 주인임을 선언한 행위였다.
타락의 결과
아담은 인류의 조상으로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대표자이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한 것은 온 인류의 불순종으로 연결된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으며 아담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된 것이다(롬 5:12). 마치 사과가 열리기 때문에 사과나무라기보다 사과나무이기 때문에 사과가 열리는 것처럼 이제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짓는 ‘태생적 죄인’, 혹은 소위 ‘존재적인 죄인(Ontological sinner)’이 된 것이다.
* 하나님과의 인간의 관계 훼손
* 인간과 인간의 관계 훼손
* 인간과 피조 세계의 관계 훼손
(3) 구속
인간의 타락으로 모든 생명 세계에는 죽음이 왔다.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달려가도록 운명 지워졌으며 이것은 영원한 죽음의 그림자였다.
그러면 이것으로 모든 이야기는 끝인가? 만일 그렇다면 성경은 창세기 3장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공의로운 하나님은 또한 사랑의 하나님이셨다. 그래서 타락으로 죽음에 이르게 된 인간과 온 천지만물을 향한 구원의 길을 예비하셨다. 창세기 3장에서 시작된 이 구속의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절정에 이르렀으며 요한계시록 22장에서 완성된다.
구속은 피조 세계가 사탄이 왕 노릇을 하는 타락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가 왕 노릇을 하는 상태로 회복됨을 의미하기 때문에 기독교적 세계관의 궁극적 지향점을 제시해 준다.
* 해방과 죄사함으로서의 구속
* 화해와 회복으로서의 구속
* 피조 세계의 구속
※ 완성 : 하나님 나라의 도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피조 세계가 구속되는 것을 더 넓은 의미로 보면 하나님 나라의 도래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왕국, 천국, 하늘나라 등과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주기도문에서 “나라가 임하시오며”(마 6:10)란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kingship) 영역이 확장(현재적 의미)되고 예수님께서 재림하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것(미래적 의미)을 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