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 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후계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세르비아 민족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치프에 의해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했다.
오스트리아는 이 암살 사건을 구실로 세르비아에 대해 전쟁을 선언 했다.
그리고 몇 주 만에 유럽의 모든 강대국들이 참전하게 되었다. 바로 1차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보리요프 제브틱은 프린치프의 공범이었다.
그는 다음 글을 통해서, 전 세계가 전쟁에 휘말린 이유를 공교롭게도
페르디난트 대공이 세르비아 방문 날짜를 잘못 정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신문에서 오려낸 작은 기사 하나가, 아무런 설명도 없이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에 있는
비밀 테러리스트 대원들로부터 베오그라드에 있는 동료 대원들에게 보내졌다.
이 기사가 1914 년 전 세계를 전란의 불길에 휩싸이게 한 도화선이었다.
작은 신문지 조각 하나가 오만한 옛 제국들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자유 국가들을 탄생시킨 것이다.
나는 그 신문기사를 접수한 베오그라드의 테러단 일원이었다.
당시 나와 동료들은 흉악범으로 간주되어 목에 상금까지 걸려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 일행에 대한 시각이 바뀌어 선구적인 애국자들로 생각되고 있다.
구 세르비아 수도의 오래된 카페에서 꾸며진 우리의 비밀 계획으로 인해
유고슬라비아가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벗어나 새로운 독립국가로 태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문제의 신문기사는 제한된 부수만 발행되던 크로아티아의 신문 "스로보브란"지에서
오려낸 것이었으며, 비엔나에서 나온 짤막한 전신이 그 내용이었다.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인근 산악지대의 군사작전을 지휘하기 위하여
6월 28일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한다는 것이었다.
이 기사가 1914 년 4월 말의 어느 날 밤 우리의 아지트였던
제아트나 모루아나라는 카폐로 전달되었다....
초라한 카폐의 조그만 탁자에 앉아 우리는 희미한 가스등불 아래에서 이 기사를 읽었다.
기사 외에는 어떻게 하라는 행동 지침이나 권고 사항 같은 것도 없었다.
단지 28, June이라는 두 개의 숫자와 네 개의 글자만이, 특별한 논의도 필요 없이,
일행 모두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말해 주고 있었다. 운명의 날짜와 시간이었다.
압제자의 표본이자 오만한 폭군인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어찌 감히 그날 사라예보에 올 수 있단 말인가? 틀림없이 계산된 모욕 행위였다.
6월 28일은 모든 사라예보인들의 가슴속에 깊이 박혀 있는 날이다.
그래서 '비도브난'이란 고유의 이름까지 가지고 있는 날이다.
이날은 1389 년 암셀 펠트 전투에 패하여 세르비아 왕국이 터키인들에게 정복당한 치욕의 날이다.
하지만 제2차 발칸 전쟁에서 세르비아 군대가 터키인들에게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두어
과거의 패배와 노예 시절을 앙갚음한 날이기도 하다.
이런 날 세르비아의 새로운 압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같은 사람이,
세르비아인들을 자신의 발 밑에 깔아 뭉갤 군사력을 과시하러
감히 세르비아의 문턱을 넘어온다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우리의 결정은 순식간에 내려졌다. 폭군을 암살하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바로 작전을 짰다. 우선 그를 확실하게 죽일 수 있는 22 명의 조직원이 선발되었다.
처음에는 제비뽑기로 대원들을 뽑으려 했지만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끼어들었다.
프린치프는 세르비아의 역사에 위대한 영웅으로 기록될 운명을 타고 난 사람이었다.
페르디난트를 죽이자는 결정이 내려진 순간부터 그는 거사 계획을 세우는 데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다.
그의 조언에 따라 우리는 사라예보와 주변 지역에서 그의 지휘를 받고 있던 대원들과,
세르비아 신문사의 식자 기술공 가브리노빅의 지휘를 받고 있던 대원들에게 거사를 맡기기로 했다.
두 사람 모두 대의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드디어 운명의 날이 밝았다. 페르디난트가 사라예보에 도착하기 두 시간 전에
이미 22 명의 거사 대원들은 모두 무장을 하고 정해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들은 그가 기차에서 내려 시청까지 가는 길 곳곳에 분산 배치 되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수행원들은 기차에서 내려 차를 탄 후 두 명의 대원들 앞을 지나갔다.
그러나 차의 속도가 너무 빨라 거사를 실행할 수 없었다.
군중들 속엔 세르비아인들이 많이 섞여 있어서 수류탄을 던진다면
많은 무고한 시민들의 목숨이 위험했다.
차가 식자공 가브리노빅의 앞을 지나갈 때 수류탄이 투척되었다.
그러나 수류탄이 차의 측면에서 터지고 말았고
페르디난트는 침착하게 몸을 피해 부상을 입지 않았다.
그와 함께 타고 있던 수행원 몇 명만 부상당했다.
차 행렬은 시청까지 한층 더 속력을 냈으며
이 때문에 나머지 대원들은 공격을 감행할 수 없었다.
시청에서의 영접 행사가 끝난 뒤 오스트리아 사령관 포티오렉 장군은
프란츠 페르디난트에게 신속히 도시를 떠나라고 권고했다.
도시 전체에 반란의 기운이 감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가장 빠른 지름길을 이용하여 최대한 신속하게 도시를 떠나라고 권고했다.
도시를 벗어나 군사작전 지역으로 가는 길은 V자 모양을 하고 있었다.
즉 닐가카 강 다리 위에서 급격히 회전을 해야 했다.
페르디난트를 실은 차는 빠른 속도로 이 다리까지 달려왔지만
회전을 하기 위해서는 부득이하게 이 지점에서 속도를 늦추어야 했다.
프린치프는 바로 이곳에서 대공을 기다리고 있었다.
차가 그의 옆을 서서히 지나는 순간 그는 보도에서 뛰쳐나와 자동권총을 꺼내어 두 발을 발사했다.
첫 발은 대공의 부인 소피아 대공비의 복부에 명중했다. 당시 임신 중이었던 그녀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두번째 총탄은 대공의 심장 근처에 명중했다.
그는 쓰러진 자신의 부인을 향해 "소피아"란 말 한마디를 내뱉은 뒤,
곧 머리를 숙이고 쓰러져 즉사해 버렸다. 수행원들은 프린치프를 사로잡았다.
그들은 칼자루로 그의 머리를 마구 강타했다.
그가 쓰러지자 발길질을 해대고 칼날로 그의 목 가죽을 벗기는 고문을 가해
그를 거의 죽기 직전의 상태로 만들었다.
그런 다음 그들은 그를 사라예보의 감옥으로 데려갔다.
다음날 그는 군영창으로 이송되었으며, 동료 일당들에 대한 일제검거가 실시되었다.
물론 프린치프는 이것이 자신의 단독범행이라고 우겼다.
그와 폭탄을 투척했던 가브리노빅 사이에 대질심문이 행해졌지만
프린치프는 그를 모른다고 잡아뗐다.
다른 사람들도 대면시켰지만 프린치프는 명백한 사실들도 모두 부인했다.
다음날 그들은 프린치프의 발에 쇠사슬을 채웠다. 그는 사형될 때까지 이것을 차고 있었다.
프린치프는 자신이 대공의 부인까지 죽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만은 유일하게 유감을 표명했다.
그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대공이었으며, 나머지 총탄 한 발이
차라리 포티오렉 장군을 맞혔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스트리아인들은 사라예보의 모든 혁명가들을 일제히 검거했으며 당연히 나도 그중 하나였다.
그러나 내게는 범행과 연관돼 있다는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
나는 프린치프의 바로 옆방에 투옥됐으며 프린치프가 감옥 마당으로 끌려나갈 때 옆에서 동행했다.
1914 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으며
바로 다음날부터 베오그라드에 폭격이 시작되었다.
곧이어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돕기 위해 참전하자 이에 맞서 독일이 러시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도 이를 따랐다. 프랑스가 러시아와 동맹관계에 있다는 이유로
독일은 프랑스에 대해서도 선전포고를 했다. 다음날 영국도 이 시끄러운 싸움에 끼어들었다.
다른 나라들도 속속 참전을 선언했으며 1917 년에는 미국까지 개입했다.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 독일, 불가리아, 기타 오토만 제국 국가들이 한편이었고,
세르비아, 러시아,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루마니아, 벨기에, 그리스, 포르투갈,
몬테네그로, 리베리아, 산마리노, 사이암, 중국, 일본, 미국, 쿠바, 파나마, 과테말라,
브라질, 니카라구아, 코스타리카, 온두라스, 하이티 등의 국가들이 한 편이었다.
1차대전은 현대 역사상 두 번째로 값비싼 대가를 치룬 대규모 유혈 참극이었다.
적어도 1,000 만 명 이상이 이 전쟁으로 사망했다.
비록 암살 사건이 없었더라도 전쟁이 발발했을지 모르는 일이지만,
만약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사라예보 방문 일자를 6월 28일이 아닌
다른 날짜로 잡았더라면 오늘날의 역사가 상당히 바뀌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