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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는 불기둥 낮에는 구름 기둥 (출애굽기 13장 17-2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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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노예제도를 둔 나라들은 세계일류 초강대국들이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이집트는 노예들과 평민들을 강제 동원해서 피라미드와 아부심벨 신전 같은 인류 역사에 남을 위대한 문화유산을 건설했습니다. 로마제국은 그야말로 노예제도로 번성한 나라였습니다. 광산, 농장, 시장, 가정 등지에서 엄청난 숫자의 노예가 있었는데, 로마제국 최대 번성기에는 제국 내 전체 인구의 1/5이 노예였습니다.
사람들을 매매의 수단으로 취급했던 당시에 자칭 문명 선진국이라는 사람들은 남미로, 아프리카로 다니면서 노예를 확보하기 위해 인간사냥을 다녔습니다. 원주민들을 개나 소와 같이 쇠사슬로 묶어서 빛도 들어오지 않는 배 밑바닥에 가두고는, 죽으면 바다에 버리고 살아남으면 노예시장에서 매매했습니다. 이들에게 죄의식은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누가 더 많이 노예를 데려오는가 하고 경쟁을 했습니다. ‘흑인노예’들의 흑 역사도 있습니다. ‘쿤타킨테’라는 이름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80년대 중반에, 퓰리처상을 받은 미국 흑인 작가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라는 소설이 영화화 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뿌리』의 주인공 이름이 ‘쿤타킨테’입니다. 이 영화 이후 ‘쿤타킨테’는 흑인 노예의 대명사처럼 불렸습니다.
노예제도와 인종차별은 서양뿐만 아니라 동양도 마찬 가지였습니다. 중화사상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화인, 곧 중국인만이 우월하다는 의식을 일컫는 말인데, 중화사상에 의하면 중국인을 제외한 모든 주변 국가들은 다 오랑캐라고 불렀습니다. 동쪽에 있는 오랑캐를 동이(우리나라), 서쪽에 있는 이민족을 서융, 남쪽에 있는 야만족을 남만, 북쪽에 있는 도적떼들을 북적이라고 불렀습니다. 자신들만이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오만한 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도에서는 지금도 카스트 제도가 남아있어서, 사람이 계급으로 나뉘어서 차별대우를 받습니다. 최하의 신분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아예 접촉하지 말아야 될 사람들이라고 해서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 untouchable)이라고 불립니다. 이들은 인도 전체 인구의 15%나 되지만, 수천 년 동안이나 직업이나, 거주지역, 그리고 결혼 등에서 인간이하의 모욕과 차별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노예제도의 역사를 보면, “사람이 가장 무서운 동물이다”라는 말이 실감이 납니다.
성경에서도 인종차별은 매우 심했습니다. 강자의 논리로, 약자는 냄새나는 쓰레기 집단으로 취급을 당했습니다. 이스라엘을 ‘히브리 민족’이라고 부르는데, 사실 ‘히브리’라는 말은 무시하고 경멸하는 말로, 오랑캐라는 말과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당시 문명국가인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국가들이 잡족이나 떠돌이 민족들을 멸시해서 부르는 말이 ‘히브리’라고 불렀습니다. ‘히브리’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안정된 사회를 이루지 못하는 평화 교란자들, 무법자, 범법자, 용병, 노예, 반란자 들을 통칭해서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모세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이러한 천대를 받는 집단으로, 이른바 축에도 끼지 못하는 신세였습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은 하나님이 가라고 명령하신 가나안 땅에서 지내기는 하였지만, 안정된 정착생활을 누리지 못하고 이리 저리로 이동하며 지냈습니다. 떠돌이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민족은 야곱과 그의 자녀들, 70명이 애굽으로 이주하여 430년을 살았습니다. 애굽에서 처음 잠간은 요셉 총리 덕분에 기름진 땅에서 거주하며 지낼 수 이었습니다. 좋은 시절도 잠깐, 애굽의 바로 왕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인구가 늘어나자 이를 두려워 한 나머지 통제를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반 평민에서 노예로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벽돌 굽기와 밭일 등을 매우 엄하게 시켰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매우 힘겹고 고달 펐습니다. 국가에서 관리하는 성을 건축하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강제 노동에 동원하자 그들의 삶은 더욱 더 피폐해져만 갔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크나큰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이 그들 민족을 이끌어 가신다는 약속 하나만을 믿고, 하나님께 탄식하며 부르짖으며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은 예전에 아브라함에게 약속 하시기를,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한 이 약속을 잊지 않으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피를 토하는 기도를 들어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장 24-25절에,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처음으로 명령하시면서 인도하는 장면입니다. 당시의 세 가지 명령과 상황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들려주시는 선포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직진하라면 직진하고, 유턴 하라면 뒤 돌아서 가라!”고 말씀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식량도, 물도, 다 부족하고, 잠자리까지도 심하게 불편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빨리 해결하는 길은 하나님께서 약속한 가나안 땅에 최단 거리로 도착할 길을 찾아서 그 길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가는 것이 정석입니다. 가나안 땅은 해안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아주 빨리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신명기에서는 “호렙산(시내산)에서 세일산을 거쳐 가나안 땅의 국경인 가데스 바네아 까지 열 하룻길”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하룻길은 8km이므로 열 하룻길은 352km입니다. 이 거리가 가장 단거리 코스였고, 만약 이 길로 갔다면 노인과 아이들, 그리고 가축들이 이동하는 것을 감안한다고 하여도 넉넉잡고 이스라엘 전체 백성들이 한 달쯤 걸려서 가나안 땅에 도착 했을 것입니다. 해안도로는 광야의 길 보다는 비교적 사람이 이동하기 쉽고 단거리 코스였기 때문에, 만약에 하나님이 어떻게 하라고 지시하지 않으셨으면, 모세도 아마 이 길로 갔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직선코스로 가지 말고 돌아서 가라고 하십니다. 그것도 육지가 아닌 바다 쪽으로 방향을 잡으라고 합니다. 왜 그렇게 하셨는지 17절에서 이유를 설명하시면서,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고 합니다. 오합지졸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턱대고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가 정예 군대인 가나안 족속들과 전쟁을 하면 백전백패, 전멸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대로 다시 노예로 사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어설프게 행동해서 가나안 땅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몰살당하게 내버려 두지도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섣불리 서둘러서 일을 그르치지 않고,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가나안 땅에 정착하도록 끝까지 약속을 지켜 주시려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혀 준비 되지 않은 노예근성에 사로 잡힌 사람들입니다. 독립심도 없고, 공동체 의식도 없고, 지도자의 말에 재빨리 반응 하여 눈치껏 행동할 줄도 모릅니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정복하고 다스릴 여력이 없습니다. 어설픈 사람은 현실이 어려우면 자꾸 과거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득을 포기하는 것을 바보 같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사람은 황당하게 들리는 명령은 우습게 생각하고 순종하지 않으려 합니다. 앞 뒤 안 가리고 직진만 하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턴하여 돌아가라고 인도하여 주십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기는 싸움을 하려고 장기전을 준비하게 합니다.
얼마 전에 세기의 대결이라는 복싱 시합이 있었습니다. 플로이드 메이웨더 라는 미국선수와 매니 파퀴아오 라는 필리핀 선수의 시합이었습니다. 두 선수의 대전료가 수 천 억 원이나 되었다고 해서 화제였습니다. 메이웨더는 전형적인 아웃복서로 무패 가도를 달리고 있었고, 파퀴아오는 동양인으로는 특이하게 전형적인 인파이터 선수로 무려 8체급을 석권한 대단한 선수였습니다. 결과는 메이웨더의 판정승으로 끝났습니다. 사람들은 메이웨더가 피하기만 하다가 돈만 가져갔다고 비난했습니다. 메이웨더는 재미없는 시합을 했을지언정, 지는 경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평가가 어찌되었든 그는 이겼고, 무패 선수, 무패 챔피언으로 은퇴를 하였습니다.
사실 저는 메이웨더 같은 스타일의 선수는 좋아 하지 않습니다. 화끈하게 경기하는 선수들이 좋습니다. 한국 복싱도 절정의 인기가 있던 시절이 있었는데, 저의 기억으로는 아마 장정구 선수나, 유명우 선수 시절이 그 때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갑자기 권투 이야기를 한 것은, 아웃복싱을 하는 사람은 카운터펀치를 날리려고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12회, 아니면 15회가 진행 될 동안 점수로 이겨도 좋고, ko로 이겨도 좋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인파이터 들은 한 방 만을 노리고 저돌적으로 직진만 합니다. 대개 보면 아웃복서들이 ko나 판정으로나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돌아서고, 돌아 서기를 반복하기 때문에 승률도 높습니다. 결론은 이기는 것이 강한자라는 상식적인 논리를 말씀 드리려 합니다. 성경도 끝까지 견디고 이겨내서 하나님 나라에 입성하는 사람이 강한자요 이긴자요 승리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어설픈데 이기지도 못하는 유혹의 자리에 덜커덕 나아가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100%를 주시기 원하는데 10%만 얻고도 좋아라 하고 나머지 90%는 없는 것처럼 포기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 막 권투 도장을 찾은 신인 권투선수가 챔피언과 시합을 붙여달라고 떼를 쓴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시키는 일도 제대로 잘 해내지 못하는 신입 사원이 중요한 회사의 경리업무를 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장사 경험이 아무 것도 없으면서 비싸고 화려하고 돈이 많이 들어가는 큰 사업에 투자하려고 준비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경우들이라면 결과는 뻔합니다. 망신당하고 창피당하고, 크게 손해를 봅니다. 자신만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가정과 공동체에게 크나큰 상처를 입힐 것입니다.
하나님의 걱정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이든지 다 취하고, 다 누리고, 완벽한 승리의 자리에 올라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려면 준비될 때 까지는 돌아가야 합니다. 준비하여야 합니다. 순종해야 합니다. 당장 결과를 취하여 판을 깨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고, 하나님이 인도하는 길로만 간다면,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국 하나님이 주시고자 약속하신 모든 풍요와 모든 평안과 모든 기쁨을 다 누릴 것입니다.
여러분 앞에 고백합니다. 제가 고집이 쎄 보입니까? 저 고집 셉니다. 한 고집합니다. 고집 부리다가 하나님 한 테 크게 혼나 보니, 이제는 빨리 고집 꺾는 것이 덜 맞는 길임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주님 앞에 항복하십시오. 주님 앞에 우리가 꺾여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직진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직진해서 사고 나지 말고, 돌아가서 목적지에 도착하는 길을 알려 주시십니다. “턴 하라, 돌아가라”고 말씀 하실 때, 얼른 듣고 그대로 따르십시오. 우리 모두가, 내 인생 전적으로 책임져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정으로, 땅이 아닌 바다로 향하여 나아가는 순종의 은혜가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명예보다는 약속을 지켜라!”말씀 하십니다.
19절에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지고 나왔다고 합니다. 요셉은 생존 당시 최 강대국의 총리로서 부와 명예를 다 얻었습니다. 죽은 후에 그의 시신은 크고 화려한 무덤에 있었습니다. 애굽의 풍습대로 했다면, 요셉의 시체는 미이라로 만들어져서 영원히 보존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애굽 역사에 흉년으로 인한 기근을 대처하고 나라를 구한 위대한 총리로 기록되었고, 오래도록 기억될 것입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사람이 누릴 수 있는 명예를 다 가졌습니다. 그럼에도 요셉은 자신의 형들이 자신을 애굽의 노예로 팔아버렸던, 기억하기조차 싫어할 것 같은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기를 원했습니다. 요셉은 120세로 생을 마감하기 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맹세시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분명히 여러분을 돌아보실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제 뼈를 이곳에서 갖고 나가 주십시오.”(우리말성경)라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살아서가 아니면, 죽은 후에 유골이라도 가기를 강력하게 바라면서, 유언을 남긴 것입니다.
왜 그렇게 요셉은 가나안 땅으로 가는 가기를 갈망했을까요? 창세기 2장 23절에서 아담은 하나님이 여자(하와)를 만드시고 자기에게로 이끌어 오자,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 중이 살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뼈’ 라는 말은 자기 자체이며 바탕이 되는 ‘본질(Essence)’을 의미합니다. 요셉의 유언 중에 ‘뼈’라는 말이 창세기에서 아담이 말한 ‘뼈’와 동일한 말로 ‘본질(Essence)’을 말합니다. 요셉은 비록 애굽에서 신하로 생을 마감 하지만 자신의 몸과 영혼, 즉 자신의 본질, 본체는 영원히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있으며,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 되는 것을 죽어서라도 목격하고 싶어 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명예보다도 하나님의 약속을 더 신뢰했습니다. 자신의 실리와 부요함과 권세보다도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의 성취를 고대하고 또 기다렸습니다. 요셉은 살아있을 때 비록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의 성취는 목격하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이루어질 그 약속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요셉의 굳건한 믿음은, 결국에는 그가 죽어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취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지조 있고, 아름다운 품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학생들 끼리 다니다가 화려한 불빛이나 조명이 있는 동네를 지나면, “와! 애굽이다!, 애굽!” 이렇게 말합니다. 그만큼 화려하고 유혹적인 도시라는 말입니다. 요셉 당시 애굽의 도시들도 정말 화려하고 풍요로웠을 것입니다. 그런 초강대국의 총리로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잊지 아니하고 믿음을 잃지 않으면서 죽어서도 그 약속을 지켜 냈다는 것은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셉이 노예로 잡혀 왔을 때도 낙심 하지 않았습니다. 모함에 빠져 감옥에 있을 때도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팔았던 형들과 상봉 했을 때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죽었어도 자신을 노예로 팔았던 형들에게 보복을 하지 않고 용서를 해 주었습니다.
요셉의 이러한 사랑과 용서의 마음은 어디에서부터 온 것이겠습니까? 창세기 39장에는 노예로 팔려간 요셉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범사에 그를 형통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지켜주셨고, 요셉은 하나님을 놓치지 않으려고 꼭 붙들고 있음으로 인해서, 그가 살아서는 범사에 형통함으로 큰 복을 받았고, 죽어서는 모든 명예를 다 버리고 하나님의 약속만을 지키고 따르는 강건한 믿음의 사람으로 기억이 되었습니다. 요셉의 해골을 메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요셉이 그토록 지키려고 했던 하나님의 약속을 결코 잊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도 요셉의 그 충성심과 믿음을 잘 본받아서 주어진 사명들을 잘 감당했습니다.
요셉의 삶과 우리의 현실을 비교해 봅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나를 배신하거나 모함하면 그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화를 주체하지 못해 화병이 나고 앓아 눕습니다. 내가 부요해지고, 하는 일 들이 술술 잘 풀리고, 건강하게 지내게 되면, 하나님께 감사해 하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감사함은 고사하고 예배 생활조차 제대로 해 나가지 못합니다. 나에게 불편함과 실망을 안겨다준 사람에게 기회를 주고 대화를 시도하지 않고, 무시하고 상대하기 귀찮아합니다. 나에게 금전적인 손해나, 정신적인 손해를 준 사람에게는 어떻게 하든 두 배 세 배 보복하여 고통을 주려고 작정합니다.
용서하라는 말은 주님이나 하는 것이지, 나는 예수님이 아니야 하면서 화해를 거부합니다. 오히려 저주를 퍼붓습니다. 성경이 주는 풍성한 약속의 말씀들은 나와 상관이 없는 것 같이 지냅니다. 인생의 종착역이 점점 다가오는 데도 나는 더 이상 미련도 없고 큰 낙도 바라지 않고 이대로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도 눈앞의 당장의 이익이 눈에 보이면, 더 챙기려고, 더 얻으려고 추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만약에 요셉이 이 땅의 것을 추구 했다면, 아마도 가나안 땅을 돈으로 다 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군대를 동원해서 힘으로라도 빼앗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이 땅의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약속만을 생각했기 때문에 살아서도 형통하고, 죽어서도 주님이 주시는 큰 명예를 얻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은 우리의 본질, 본체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게 해 주신 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을 다 얻고 제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면 다 헛것이 됩니다.명예는 일순간이요 사라지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은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과 죽은 후에도 부활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영원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원 받았다는 것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이 죽은 후에야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그 약속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주신다는 확신 속에 살아 갑니다. 그 확신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이 주는 시련과 아픔은 잠시 뿐이라고 생각하며, 이겨내고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앞으로의 미래가 불투명 하더라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내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실리를 다 빼앗아 간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면류관의 명예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들은 죽음조차도 두렵지 않습니다.
요셉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고, 우리의 마음이 곧 요셉의 마음입니다. 요셉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남겨준 유언,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신앙고백이 되고, 앞으로 살아갈 소망과 성취의 말씀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백성들을 떠나지 않겠다.”고 말씀 하십니다.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보다 가장 어려웠던 현실적인 문제가 목적지도 없고, 지리도 모르기 때문에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을 종잡을 수 없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상상하지 못하는 하나님만의 방법으로 그들을 인도했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이 떠올라 방향을 인도했고, 밤에는 불기둥이 솟구쳐 올라 방향을 잡아 주었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구약판 네비게이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름기둥, 불기둥이 인도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정말 웅장한 장면일 것 같고, 실제로 그 광경을 본다면 압도당하는 기분을 느낄 것 같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떨기나무에 붙은 불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 소명을 받았고, 빽빽한 구름 가운데로 나아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불기둥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이려고 쫓아오는 애굽 군대를 막아섰고, 구름기둥이 회막(성막)에 내려오면 모세는 사람이 자기 친구와 이야기 하듯이 하나님과 대면하여 대화를 하였습니다. 이렇듯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임하셨음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데 정말 우리와 계속 함께 하실까? 이런 의문을 가지고 불안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보고서야 비로서 안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현현하셔서 동행하고 계심을 두 눈으로 목도함으로 불안에서 벗어났습니다. 시각적으로 보이는 상징물이 눈앞에 있으니, 하나님이 분명하게 살아계시고, 백성들을 인도해 나가시는데 직접 앞장서고 계시다는 확신을 품게 되었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믿음이 약한 자에게는 확신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에게는 평안을, 패배주의와 종속주의에 물들어 있는 자에게는 승리의 기쁨을 맛보게 해줍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보여 지고, 믿어지고, 승리의 결과로 나타나는 신앙 체험을 학습시키는 하나님만의 인도하심의 방법이었습니다. “주위를 둘러 면 아무도 없는 듯 믿음의 눈을 들면 보이는 분 계시네”라는 찬양 가사처럼,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는 않으시지만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고, 모든 어둠의 권세를 물리치는 전쟁을 직접 선두에서 지휘하시며 나아가십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승리하게 하십니다. 단지 믿음이 약하고 영의 눈이 열리지 않은 엘리사의 종 게하시와 같은 상태라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하나님의 군대를 볼 수 가 없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우리의 영안을 열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시고, 그로 인해 믿음이 날마다 자라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믿음과 승리의 확신을 주기도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에게는 큰 부담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떠오르는 것처럼 24시간 하나님이 백성들과 함께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 우리의 사생활이 완벽하게 노출 되는 것입니다. 옆에 분을 한 번 바라보세요. 한 3초 이상만 눈을 마주보고 있어도 서로에게 부담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24시간, 밤낮으로 다 보고 계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부담 백배 일 겁니다. 부담 가야 합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하나님의 시선 범위 안에서,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가는 예행연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의 체질이 되도록, 하나님의 시선에 노출되어 있다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훈련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마치 cctv 있는 곳에서는 주정차 하지 않고, 속도신호위반 카메라가 있는 교차로에서는 조심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 조심하는 것이 습관이 됩니다. 죄를 지을 순간에 멈추게 됩니다. 하나님을 속이려는 행동을 자제하게 됩니다. 남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험한 말을 삼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잘 지키려고 애쓰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정직하고 겸손하게 살아가려는 흔적들을 남기고, 성령의 열매들을 맺기 위해 힘씁니다. 이러한 삶의 지표들은 하나님의 시선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밤낮으로 나를 보고 있다는 부담감, 바로 거룩한 부담감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행동들입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떠오르는 장소는 거룩한 영역입니다. 보호 받는 공간입니다. 그 안에 있으면 만사형통,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 그리고 신령으로 예배하는 사람에게 구름기둥과 불기둥과 같이 영광으로 임하십니다. 오늘 여기 00교회 예배당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여러분의 심령에도 거룩한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셨음을 믿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 앞에 나를 완전하게 노출 시키십시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가지시되, 나를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시선 앞에 거룩한 부담감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처럼,
①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노릇 했던 것과 같이, 사탄에게 종노릇 하며 지냈던 노예의 모습에서 우리를 탈출시키고 해방 시켜 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매일 매일, 평생토록 감사함으로 돌려야 합니다. ②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 하실 때, 직진하라면 직진하고, 돌아가라고 하면 불평하지 말고 즉시로 순종해야 합니다. ③ 그리고 우리의 소망은 이 땅의 실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 부활에 성취할 하나님 나라에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명예를 얻는 것에 잊음을 잊지 말고 세상 소망 다 사라져 가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 하나로 이기고 승리해야 합니다. ④ 그리고 구름기둥과 불기둥과 같이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두려움에서 벗어나 평안가운데 거하시고, 거룩한 두려움으로 하나님의 시선 안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00교회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시고, 인정해 주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하고 권세 있는 승리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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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늘 하나님께 감사로 돌리게 하시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밤낮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로서의 명예를 누리는 거룩한 그리스도인으로 승리의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복사 허용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목사님의 말씀에 은혜 받습니다.^^복된 주일 되십시요^^
감사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의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잠언 30장 4절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