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눈의 선승, 현각 스님 독일 현지 인터뷰
200주년 기념 세계 최대의 맥주축제 옥토버페스트가 끝나고 다시 뮌헨은 그 특유의 우아한 고전적인 자태로 평정을 되찾았다. 맥주축제장인 테레지엔 광장에서 도보 5분 거리에 “불이선원(不二禪院)” 이라는 조그만 선방이 있다.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의 저자이자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파란 눈의 수행자, 현각 스님의 현 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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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축제 기간 중에는 하루 최고 100만여 명이 마실 거리, 먹을거리, 볼거리, 탈 거리 그리고 웃을 거리를 즐기고자 몰려드는 맥주축제장이 뮌헨의 테레지엔 광장이다. 테레지엔 광장의 모퉁이에 있는 불이선원에서는 맥주축제장으로부터 메아리치는 소음과 지나가는 옥토버페스트 마니아들의 술주정에도 아랑곳없이 수행자들이 모여 염불을 하고 참선에 전념했다.
현각 스님의 본명은 폴 뮌젠(Paul Muenzen)으로 조부모는 독일 마인츠 출신이다. 그가 제3의 고향으로 독일을 택한 인연이 여기에서 보이기도 한다. 1964년생인 현각 스님은 미국 뉴저지 출신으로 독실한 천주교 집안 6남 3녀의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컴퓨터회사의 사장이었고 어머니는 생물화학박사로서 자녀들의 성장과 교육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천주교 신부서품을 받기 위한 준비를 하다가 예일 대학에서 철학과를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원 신학대학에서 비교종교학을 전공한 그는 불교에 대한 연구도 시작했다. 한국 불교에 입문하게 된 것은 불교 연구를 시작한 지 2년이 지난 1990년에 하버드 대학에서 열렸던 숭산 스님의 설법에 감명을 받고부터였다. 남다른 불교입문 배경은 한국 불교인은 물론 미국인과 많은 한국인의 관심과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그의 부모는 처음에는 아들이 불교로 개종하는 것을 심하게 반대했지만 지금은 아들의 뜻을 이해하고 있으며 전보다 오히려 관계가 좋아졌다고 한다. 그는 해마다 한두 번씩 일주일에서 2주일간 미국의 부모를 방문하고 있다. 그의 종교관은 확실하다. '종교'는 단지 인간이 만들어낸 ‘형태’일 뿐이라는 것이다. 종교 자체의 형태가 잘못되어 있다고 말했다. 석가모니는 불자가 아니었고 예수도 기독교인이 아니었음을 그리고 그들이 종교를 만들라고 말하지 않았음을 우리들은 재인식해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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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봉암사에서 2008년 3개월간의 하안거(여름 참선수행)를 마친 현각 스님은 일반인들과 접촉하는 과정과 경험을 통한 수행과 포교를 하기 위해 2008년 8월 21일부터 9월 24일까지 노르웨이, 독일, 체코, 헝가리, 폴란드 등지를 돌아보며 유럽에서 ‘만행’의 길을 걷기도 했다. 달라이 라마의 추종자인 할리우드의 중견배우 리처드 기어와의 대담을 통해 불교의 세계를 일반인에게 좀 더 가깝게 소개했다.
한국에서 그의 저서가 베스트셀러가 되고, 하버드 출신, 미국인, 호감 가는 파란 눈의 얼굴, 숭산 스님의 제자라는 배경은 그를 일약 불교계의 스타로 만들었다. 수행자로서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수행에 방해가 될 정도로 그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유명인사가 되어버린 그는 수행자로서 불심의 초심읽기로 돌아가기 위한 길을 떠났다. 그가 운수납자(雲水衲子)로서 구름처럼 물처럼 흘러가다 지금 머물고 있는 뮌헨의 선방 '불이선원(不二禪院)'에서 그를 만나보았다.
스님의 행선지가 미국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 독일 뮌헨으로 바뀌고 있는데, 스님의 삶의 세계는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요?
“미국에서는 나를 위해서만 살았어요. 나의 학벌, 경력, 나의 명예, 나의 가족을 위해서, 나의 경제력을 위해서 나, 나, 나, 나를 위한 삶이었지요. 한국에서 수행생활을 하면서 교육과 정진을 통해 나 자신을 떠나 타인에게 베푸는 삶을 배웠다고 할 수 있어요. 나 개인과 가족의 테두리를 떠나서, 배고픈 자에게는 밥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는 물을 주고, 고통 받는 자에게는 시간을 내서 상담을 해주고 대화를 나누었어요. 어떤 때는 하루 24시간 동안, 그리고 주말도 없이 지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는 수행자로서 큰 실수를 했는데, 그것은 제가 한국에서 너무 유명해진 것입니다. 어디를 가나 사람들의 시선이 있었고 너무 바쁜 생활이 계속되었어요. 불교의 행사가 있을 때는 물론 대학교에서의 특강, 문화강연회, 결혼식 주례, 예술가들의 전시회 참석 등 수행자의 길에 전념할 수 없는 상황으로 발전했어요. 물론 저에게 잘 해주신 한국에 계신 분들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독일에서는 저 자신의 수행을 위해 시간적으로 여유가 생겼어요.”
뮌헨선방을 불이선원으로 작명한 의미는?
“불이(不二), 둘이 아닌 선원이란 뜻입니다. 불교는 다른 종교들과 달리 ‘불이사상’이 기본입니다. 인간들이 고통을 받는 이유는 머릿속에서 습관적으로 항상 둘을 만드는 데 있습니다. 나와 너, 아군과 적군, 천한 것과 귀한 것, 동쪽과 서쪽, 좋은 것과 나쁜 것 등으로 구별합니다. 우리가 이런 생각을 만들어 현실생활에 드러낼 때 항상 갈등이 일어납니다. 모든 종교가 갈등하는 이유는 이렇게 둘을 만드는 습관 때문입니다. 불이사상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아주 중요한 재산입니다. 이곳 독일도 한국처럼 2개로 분단되었던 나라입니다. 독일이 통일해서 불이(不二)의 나라가 된 것처럼 한국도 통일해서 두 개가 아닌 하나의 나라가 되기를 염원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2008년 미국이 아닌 노르웨이, 독일, 체코, 헝가리, 폴란드 등지를 돌아보며 유럽에서 만행의 길을 걸으셨는데….
“그 당시 미국은 부시 정권 아래 있었고, 기독교가 주축을 이루는 미국 사회의 종교관은 닫혀 있는 것이었어요. 다른 세력은 적으로 만들어버리는, 막힌 생각이 주류를 이루었지요. 그러나 유럽은 종교문화와 정신문화가 열려 있는 사회입니다. 독일인의 경우 정기적으로 교회에 나가는 기독교인은 전체 기독교인의 10%도 안 되지만 남녀평등, 비폭력주의, 사형금지, 친환경주의, 반전운동 등을 중시하여 예수님의 뜻에 가장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타 종교에 대해서도 매우 관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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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선원의 창원은 언제이며, 지금 불이선원의 수행자들은 몇 명 정도 있지요?
“2009년 9월입니다. 수행자들은 40명 정도 됩니다. 한국인이 20여 명 그리고 독일인을 포함한 외국인이 20여 명입니다.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법회가 있는데, 늘어가는 수행자들을 위해 좀 더 넓은 곳으로 선원을 옮기려고 합니다. 훗날에는 농가의 외양간이라도 깨끗하게 개조해서 절을 만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티베트의 스님들이 스위스와 프랑스의 농촌에 많은 절을 세운 것처럼 저도 이곳에 절을 세우고 싶어요.”
현각 스님의 한국 사랑이 대단하신 걸로 알려져 있어요. 지금 이곳에서 포교활동을 하심으로써 한국 불교를 세계에 알린다는 의미도 있겠는데, 지금도 한국 내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계속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지요?
“물론 저는 미국과 한국 생각을 많이 합니다. 한국이 그리울 때나 한국에 계신 분들이 보고 싶을 때는 인터넷을 통해서 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기도 하고, 일과 관련해 매스컴을 통해서 한국 소식을 수시로 접하고 있습니다, 항상 한국이 잘되도록 빌고 있어요. 특히 이산가족 문제와 북한 문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일이나 행사가 있을 때는 한국을 방문합니다.”
11월에 G20정상회담을 계기로 한국을 방문하신다고 들었는데.
“예, 이번에 4개월 만에 갑니다. NGO 여성평화단체의 초청으로 가는데, 세계 종교지도자들이 세계 정상들에게 금융 위기에 대해서만 회담할 것이 아니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대책을 강구하도록 요구하는 행사에 참가하게 됩니다.”
한국의 깊은 산골에서 수행에 정진하실 수는 없었는지….
“무소유의 법정 스님이 강원도 오두막에서 15년간 사셨는데, 저에게 ‘나는 이곳에서 그냥 할아버지로 불리면서 살 수 있었지만 너는 문제야, 너는 오두막에서도 살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제가 아무리 깊은 산중에서 정진을 해도 사람들은 오두막까지 저를 찾아와서 행사나 강연회 등에 참석해주기를 원했습니다. 한국에서 살면 경제적으로는 잘살 수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일정이 바쁘다 보니 제 스스로 부끄러워서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수행자로서의 생활에는 충실할 수 없었지요. 그래서 2004년에 돌아가신 숭산 스님의 3주기를 마치고 불자로서의 자식 된 도리를 한 뒤에 2008년에 유럽 만행길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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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이효리, 비, 원빈 씨 같은 연예인들의 경우에는 인터넷에서도 찾을 수 없게 거주지를 공개하지 않고 경호원들이 외부인들의 출입을 통제하지만, 저는 종교인이기 때문에 열려 있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오는 분들을 막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저에 관한 인터넷사이트도 생기고, 또 ‘현각 스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생기고, ‘현각 스님께 물어보기’ 라는 코너가 생겨서 저 자신도 모르는 저의 답변이 나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저의 답변을 받았다고 ‘바쁘신데 답변해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뻐하시는 분이 있었는데 물론 그 답변은 제가 한 것이 아니었어요. 그렇다고 제 이름을 남용하거나 도용하는 분들을 법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도 없지요. 그럴 때는 그저 ‘관세음보살’을 되뇌며 이해하고 넘어갑니다. 다른 예를 더 들자면 독일에서는 볼 일이 있을 때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지만 한국에서는 자전거 타는 것도 어렵지요. 신도님들이 너무 놀라는 반응을 보이고 말리시니까.”
뮌헨에서의 포교와 수행생활은 한국 불교를 독일에 알린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
가 깊은데, 어려움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는지?
“독일어를 잘하지 못해서 불편합니다. 법회는 한국어와 영어를 사용합니다만 평소에는 독일어를 해야 합니다. 1988년 학생시절에 독일의 슈바르츠발트에서 3개월간 독일어를 공부했는데 한국에서 18년을 살다 보니 독일어를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뮌헨의 물가가 너무 비싸서 당황하고 있어요. 제가 살았던 파리, 뉴욕, 보스턴, 서울 중에서 뮌헨이 물가가 제일 비쌉니다. 이곳에서는 보시도 많지 않고 제사 같은 것도 지내지 않기 때문에 춥고 배고픈 생활이기도 하지요. 생활비를 벌어야 해서 식당이나 호텔에서 접시닦이로 일하려고 합니다.”
생활고가 심해진다면 뮌헨을 떠나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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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아주 많이 사랑하기 때문에 가끔 행사참가를 위해 방문하고 있고, 지금도 한국에 계신 분들이 그립고 그분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뮌헨은 지금 제가 수행자로서 정진할 수 있는 곳입니다. 한국에서는 보살님들께서 밥을 해주시기 때문에 시장 보러 갈 일도 없었고 설거지도 안 했어요. 이곳에서는 제 스스로 요리, 빨래, 청소, 집무 등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고 가난하지만 그래도 마음은 편안합니다. 서산 대사께서 ‘수행자들은 춥고 배고파야 도심이 생긴다’고 말씀하셨듯이 저는 가난도 무섭지 않습니다. 외롭고 쓸쓸해져도 수행자의 길을 가고 싶습니다. 제가 살고 싶은 방식대로 살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합니다. 제가 머리 깎은 뜻을 이룰 수 있는 것과 가까운 생활이 지금의 뮌헨이며 만족하고 있습니다.”
현각 스님이 머물고 있는 뮌헨에는 현재 약 132만 명이 살고 있다. 주민들이 시내를 거닐다 보면 가끔 뮌헨 시장이나 독일 정부의 장관이나 유명 연예인과 마주치기도 한다. 그들이 어떤 특정 행사장에 참여해서 활동하지 않는 이상, 다른 행인들과 마찬가지로 어딘가로 볼일을 보러 가던 중이건, 산책을 하건, 누구와 데이트를 하건 시민들은 그들에게 커다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타인에 대한 무관심일 수도 있지만, 사생활을 존중하는 배려가 생활 속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호감 가는 유명인사에게는 눈인사 정도는 교환한다.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고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면 사회에도 자연스럽게 기여하게 된다는 단순한 논리가 밑바탕에 깔린 환경이기에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물론 뜨겁고 끈끈하고 열정적인 인간관계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썰렁해 보일 수도 있지만, 개인이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 일에 몰두하고 연구 전념하기에는 최상의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 여성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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