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3.11.30.목요일 성 안드레아 사도(1세기 초반-1세기 중반) 축일
로마10,9-18 마태4,18-22
버림과 따름, 믿음의 여정
-제자이자 사도의 삶-
주님을 믿고 따르는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이른 밤 눈뜨자 저절로 나온 말마디는 “주님, 감사합니다!”였습니다.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 때도 “주님, 감사합니다!”고백합니다.
감사로 시작해서 감사로 끝나는 인생이기를 소망합니다.
사실 단 하나의 소원은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죽는 그날까지 한결같이 주님을 믿는 제자로
주님을 따르는 삶, 하나뿐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바치는 기상시, 취침시 바치는 만세육창의 평화의 기도와 제 신원에 대한 고백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수도원 만세!”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 주님의 ‘평화(平和)의 전사(戰士)’다!”
주님을 따르는 모범이 바로 그 믿음의 제자인 오늘 축일을 지내는 안드레아 사도입니다.
베드로의 형제로 요한 복음에 보면 형을 주님께 인도했으며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이름 뜻은
‘사내다움’ 또는 ‘용기’를 뜻합니다.
형과 달리 성실하고 온건하며 신중한 성격의 인물로 최초로 러시아에 복음을 전했으며
초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를 지냈습니다.
상징물로 X자형 십자가이며, 어부, 생성장수, 스코틀랜드, 러시아, 우크라이나 수호성인입니다.
그래서 스코틀랜드 국기는 푸른색 바탕에 X자형 흰색으로 되어 있습니다.
참 이해하기 힘든 사실은 같은 수호성인을 모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국가간의 전쟁인데
말그대로 형제국끼리의 전쟁입니다.
위경 “사도 안드레아의 행전”은 비신화화하기 어려운 역사적 사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전승에 의하며 안드레아는 로마제국의 속주인 마케도니아 이남 지역인 아카이아(오늘날 그리스 전역)
남부지방에서 체포되어 심문을 받고 X자 형태의 십자가에 목박혀 순교했다 합니다.
까닭인즉 X자는 ‘그리스도’라는 단어의 첫글자로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갈망했기 때문입니다.
형장에 끌려갔을 당시 안드레아는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기쁨에 넘쳐 다음 기도를 바쳤다 합니다.
“오, 영광의 십자가여! 너를 통하여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께서는 지금 나를 부르시는가!
속히 나를 이 세상에서 끌어올려 주님곁으로 가게 해다오.”
전설같은 일화지만 시종여일 한결같이 순교하기까지 주님을 충실히 따른 사도 안드레아의 생애가 감동적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이 그림처럼 묘사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시자 그들을 부르십니다.
말그대로 운명적인, 은총의 만남이요 첫눈에 반했음이 분명합니다.
“나를 따라라. 내가 너희를 사람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그들은 전광석화,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이어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시자 이들 역시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주님을 따릅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충격인지 깨닫습니다.
갈망하던 주님을 만남으로 참나를 만났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첫눈에 이들의 갈망을 알아챘음이 분명합니다.
서로 첫눈에 반한 운명적인 만남입니다. ‘구원의 출구’를 발견한 것이지요!
이들 어부들은 갈릴레어 호수에서 고기잡이 생업에 종사했던 젊은이들이지만 끊임없이 주님을 찾는
갈망의 사람들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참으로 이들의 참 진리를 찾는 갈망을 첫눈에 알아챘고 부르시자 즉각 응답한 두쌍의 어부 형제들입니다.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이들 어부형제들이 주님의 부르심이 없었다면 어떻게 지냈을까요?
우리에게 주님의 부르심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서 어떻게 생활하고 있을까요?
평생 단조로운 반복의 일상을 살다가 무지와 허무속에 인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릅니다.
정말 우연이 아닌 필연같은 주님 은총의 부르심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어부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즉각 응답하여 모두를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제자들처럼 우리의 부르심과 버림, 따름은 한 두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죽을 때까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끊임없이 버리고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제자로서 우리 삶의 여정은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의 여정, 버림의 여정,
따름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참으로 끝까지 죽을 때까지 한결같이 부르심-버림-따름의 여정에 항구할 때
비로소 성소의 완성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살아 있는 그날까지 방심은 금물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여정은 나 홀로의 여정이 아니라 더불어의 여정이요, 이웃에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
복음 선포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주님이 네 어부를 부른 목적도 사람 낚는 어부로, 즉 복음선포의 일꾼으로 뽑은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복음선포는 제자는 물론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이자 존재이유입니다.
그러니 안으로는 주님의 제자요 밖으로는 주님의 사도로서의 우리의 신원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우리가 복음 선포 사명에 분발의 노력을 다할 것을 호소합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저절로 나오는 고백입니다.
‘기쁜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참 아름다운 모습이, 참 멋지고 매력적인 모습이 기쁜소식을, 복음을 살며 전하는 이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한결같이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리스도의 복음을 살며 선포하는 일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하늘나라의 복음이야말로 인생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삶 자체가 주님과 하나되어 복음이, 하늘나라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이러면 복음선포는 저절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부단히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버림과 따름의 여정에,
복음선포의 여정에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날마다 미사를 봉헌하면서 주님의 성체를 모실 때 마다 바치는 주님 사랑의 고백기도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평화,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시작하는 아름답고 거룩한 하루이옵니다.”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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