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637
7월1일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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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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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LLY4sKlcjo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오석봉 바오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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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마귀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은 오직 주님에 대한 굳센 믿음!>
오늘 복음 말씀 분위기가 꽤 음산하고 우울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라다인들의 지방에 이르셨을 때, 마귀 들린 사람 둘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다가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두 사람의 얼굴과 행색을 보니 기가 막혔습니다. 밤낮없이 마귀들이 횡포를 부리니, 두 사람의 심신은 극도로 피폐해져 있었습니다. 마귀에 시달리느라 자신을 돌볼 시간이 없었습니다.
몇 달째 제대로 씻지도 못했으니 심한 악취가 진동했습니다. 밤잠을 제대로 못 자니 눈은 빨갛게 충혈되었습니다. 머리는 산발한 채, 사람들의 눈을 피해 무덤을 거처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너무 괴로우니, 목청 높여 소리를 지르고... 다들 무서워 도망갔습니다. 그들은 목숨이 붙어있었지만, 이미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마귀들은 예수님께 돼지 떼 속으로 들여보내 달라고 청합니다. 그분께서 그리하시니, 마귀들이 사람들로부터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러자 돼지 떼가 모두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달려, 모두 익사하고 맙니다.
마귀란 선하신 하느님의 대척점에 서서, 그분을 모욕하고, 그분의 나라와 다스림을 폄하하며, 사람들을 악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존재입니다. 그들이 지닌 두드러진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음산하고 기괴합니다. 그들에게서 기쁨이나 희망, 사랑이나 자비의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꼭 가보자고 해서 어딜 갔는데, 분위기가 음산하거나 기괴하다면, 영 불편하고 꺼림직하다면, 초 스피드로 빠져나오는 것이 좋습니다.
깜도 안되는 나약하고 부족한 한 인간 존재에게 황금색 도포를 입히고, 왕관을 씌운다고 그가 구세주가 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어색하고 우중충한 분위기가 거듭 연출되고, 인간의 기본 상식으로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엉뚱한 이벤트가 계속되는 그런 장소는 마귀가 활동하는 장소가 틀림없습니다.
우리 가톨릭 신앙의 분위기는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분위기는 기쁨 충만한 분위기입니다. 밝고 화사한 분위기입니다. 비록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오늘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비록 살아있지만, 죽음의 권세에 억눌려 참삶을 살지 못하고 죽은 사람처럼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희망이 없는 상태가 곧 죽음입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 마귀의 세력이 창궐합니다.
틈만 나면 폭력을 휘두르고, 분열과 전쟁을 획책하는 무리들이 곧 악령입니다. 마음이 부서진 사람들을 감언이설로 살살 꼬드겨 벗겨 먹고 삶아 먹는 사이비 교주들이 곧 이 시대 사탄입니다.
오늘 우리 역시 자신도 모르게 죽음의 세력, 사탄의 권세 안으로 들어가, 자신도 모르게 영향을 받고 있는지 잘 성찰해봐야 하겠습니다. 가까운 이웃들이 저리도 소리 없이 죽어가고 있는데, 나만, 우리 가정만, 우리 공동체만 별 탈 없으면 그만이라며 희희낙락하는 이기주의도 큰 악입니다.
반민족적이고 악의적인 가짜뉴스를 끝도 없이 유포시켜 선량한 백성을 악으로 끌어들이는 매체들도 반드시 배척해야 할 이 시대 악령입니다.
숱한 죽음의 세력과 사탄의 무리에 꿋꿋이 맞서고 극복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은 오직 우리 주님에 대한 굳센 믿음, 그리고 그분 현존에 대한 강력한 확신, 그분에게서 퍼져나오는 강력한 구원의 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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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fUH-nmjtT6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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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돼지 대신 그리스도를 선택하게 하는가?>
오늘 복음에는 참으로 씁쓸하고도 기막힌 장면이 펼쳐집니다. 예수님께서 가다라 지방에 이르시자, 무덤에서 마귀 들린 사람 둘이 튀어나와 길을 막습니다. 그 마귀들은 사납기 그지없어 아무도 그 길로 지나다니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 한마디로 그들을 돼지 떼 속으로 몰아넣으시고, 그러자 돼지 떼가 비탈을 내리달려 호수에 빠져 몰살합니다.
자, 여러분이 그 고장 사람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온 마을이 두려워하던 그 사나운 이웃 둘이 멀쩡한 사람으로 돌아왔습니다. 마땅히 잔치를 벌이고 예수님을 은인으로 모셔야 상식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은 정반대였습니다. 복음은 이렇게 전합니다. "온 고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나왔다. 그분을 보고 나서, 자기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였다."(마태 8,34 참조)
우리는 이 대목을 읽으며 혀를 찹니다. "어리석은 속물들. 사람 둘이 살아났는데, 하느님보다 돼지가 더 중했단 말인가." 그러면서 은근히 선민의식에 빠집니다. 나는 주일 미사도 꼬박꼬박 나오고 봉사도 하니, 저들과는 수준이 다르다고 여깁니다. 과연 그럴까요. 오늘 저는 바로 이 착각을 깨뜨리는 데서 시작하고자 합니다.
먼저 한 가지를 분명히 합시다. 가다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내쫓은 진짜 이유가 무엇입니까. 돼지가 본래 악해서가 아닙니다. 돼지는 그들의 생계 수단이었을 뿐, 그 자체로는 죄가 없습니다.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은 본래 나쁜 것이 아닙니다. 돈이 없으면 가족의 생명도 지킬 수 없고 이웃도 도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그 돼지가, 그 재물이 예수님을 내 삶에서 밀어내게 만드는 순간, 바로 그때 그것은 마귀 들린 것이 됩니다. 가다라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귀,
곧 재물을 이미 섬기고 있었기에, 사람이 치유되는 하느님의 기적 앞에서도 기뻐하지 못하고 잃어버린 돼지만 헤아렸던 것입니다.
여기에 오늘 복음의 핵심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것은 내 것"이라며, 그 내 것이 조금이라도 손해 보는 것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잃었습니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무서운 진실이 이것입니다. 내 것이라 움켜쥔 그것에서 단 한 푼의 육적 손해도 보지 않으려 할 때, 우리는 바로 그 순간 하느님을 잃습니다. 영적인 이득을 챙길 것인가, 육적인 이득을 챙길 것인가. 우리는 매 순간 이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사탄은 바로 이 지점을 공략합니다. 사탄은 결코 뿔 달린 괴물로 나타나 "네 영혼을 내놓아라" 협박하지 않습니다. 사탄의 수법은 훨씬 교묘합니다. 사탄은 우리가 육적인 손해를 보게 하는 모든 것을 슬그머니 멀리하게 만듭니다. "성당 다니면 헌금 내야 하고, 시간 뺏기고, 봉사하느라 몸 축나잖아." 이렇게 속삭여, 영적인 이득을 위해 육적인 손해를 치러야 하는 그 자리에서 우리를 데리고 나옵니다. 그렇게 사탄은 사람을 조금씩 철저한 물질주의자로 만들어 갑니다. 손해 보지 않는 것을 가장 똑똑한 삶이라 믿게 만드는 것, 그것이 사탄의 가장 큰 승리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이야기가 아님을, 성경의 첫 장이 증언합니다. 에덴에서 사탄이 하와를 어떻게 무너뜨렸습니까. 그는 "하느님을 배신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선악과를 가리키며, 저 열매를 먹지 않는 것은 너의 손해라고 속삭였습니다. "그것을 먹는 날, 너희가 하느님처럼 된다."(창세 3,5 참조) 곧 "저 열매라는 육적 이득을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손해다" 하고 꼬드긴 것입니다. 하와는 그 손해를 거부했습니다. 눈에 좋아 보이고 탐스러운 그 육적 이득을 차마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 열매 하나를 손해 보지 않으려다, 그들은 하느님을 통째로 잃었습니다. 낙원을 잃고, 생명나무를 잃었습니다. 작은 육적 손해를 거부한 그 선택이, 가장 큰 영적 파멸을 불러온 것입니다. 가다라 사람들이 돼지를 지키려다 그분을 잃은 일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물질주의의 덫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겠습니까. 답은 하나입니다.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곧 육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이 비교할 수 없이 값지다는 것, 그 영적인 보화를 얻기 위해서라면 육적인 손해쯤은 기꺼이 감수할 만하다는 것을 아는 지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지혜를 한 폭의 그림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하늘 나라는 밭에 묻힌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 13,44 참조) 보십시오. 그는 가진 것 전부를 손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기뻐하며 그렇게 했습니다. 어리석어서가 아닙니다. 그 밭에 묻힌 보물이 자기 전 재산보다 비교할 수 없이 값지다는 것을 아는 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된 지혜란, 무엇이 더 값진지를 알아 기쁘게 손해 볼 줄 아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귀한 지혜는 어디서 얻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과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를 보십시오. 그들은 길에서 만난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 끝내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먼 길을 걸으며 그분께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말씀을 풀이해 주시는 것을 오래도록 들었습니다. 마침내 집에 이르러 그분께서 빵을 떼시는 순간, 그들의 눈이 열려 그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고는 서로 말합니다. "길에서 그분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또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2 참조) 보십시오.
그들이 마침내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맞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오랜 시간 그분께 성경 말씀의 해설을 들으며 마음이 데워졌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깊이 듣고 새기는 일, 곧 거룩한 독서가 영적인 눈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지혜를 얻는 가장 좋은 길은 좋은 책을 읽는 것입니다. 책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가치를 보는 눈을 길러 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무엇을 물려주고 있습니까. 얼마 전 한 자매님이 아이가 수학을 못해 학원에 보낸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오히려 책을 많이 읽히시라 말씀드렸습니다. 학원에 보내 봐야 그저 보통 사람 하나가 될 뿐입니다. 그러나 책을 읽어 참 인생의 가치를 깨달은 아이는, 훗날 수학이 필요해지면 스스로 깊이 파고듭니다.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지를 아는 아이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나아갑니다. 성당의 신앙 교육도 꼭 이와 같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고등학교만 들어가면 거의 성당에 나오지 않습니다. 대학 입시가 더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중학교 때까지 책을 읽히지 않아, 그 참된 가치가 온통 현세에만 묶여 버렸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에서 자수성가한 사람치고 독서를 강조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책은 사람을 사고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아이들이 빠져 있는 쇼츠와 짧은 동영상은 정반대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보는 이의 사고를 강요하여 점점 더 현세적인 존재로 만듭니다. 한쪽은 보이지 않는 가치를 보는 눈을 길러 주고, 다른 한쪽은 눈에 보이는 자극에만 매이게 합니다. 그러니 아이 때부터 무조건 책을 읽혀야 합니다. 그래야 고등학교에 가고 대학에 가더라도, 결정적인 순간에 돼지 대신 그리스도를 택할 줄 아는 사람, 참된 가치를 아는 사람으로 자랍니다.
오늘 우리 앞에 두 길이 놓여 있습니다. 돼지를 지키며 그분을 떠나보내는 가다라의 길과, 가진 것을 기쁘게 내려놓고 보물을 얻는 지혜의 길입니다. 이것은 동영상을 선택하느냐, 책을 선택하느냐의 차이입니다. 영적인 것이 더 값지다는 지혜를 구하십시오. 우리 자신도, 우리 아이들도 좋은 책을 가까이하여, 그 지혜로 무엇이 참으로 값진지를 보는 눈을 기르게 하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에게 손해가 올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거부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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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녹용은 예로부터 귀한 약재로 여겨졌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효능이 좋은 녹용은 시베리아의 매서운 추위를 견디고 살아가는 사슴의 녹용이라고 합니다. 따뜻하고 편안한 곳에서 자란 것이 아니라, 혹독한 추위와 거친 환경을 견디어 낸 생명력이 그 안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삶도 그렇습니다. 편안함만이 사람을 깊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시련이 사람을 단단하게 만들고, 눈물이 사람을 깊게 만들고, 고통이 사람을 성숙하게 만듭니다. 지난 5월 17일에 본당에서 ‘제8회 청소년 음악회’가 있었습니다. 38명의 아이가 함께했습니다. 어떤 아이는 피아노의 발판을 밟기에도 아직 어려워 보였습니다. 어떤 아이에게는 첼로가 자기 몸보다 더 커 보였습니다. 그러나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은 참으로 대견했습니다. 3년 전에는 조금 어설펐던 아이들이 이제는 자기만의 음악을 표현하며 성장한 모습도 보았습니다. 한 곡의 음악이 무대 위에서 아름답게 울리기까지는 보이지 않는 연습이 있었습니다. 실수도 있었고, 지루함도 있었고, 다시 시작하는 수고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8년 동안 청소년 음악회를 이끌어온 음악 감독의 열정과 헌신이 있었습니다.
오늘 아모스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강한 말씀을 전합니다. 겉으로는 제사를 드리고, 노래를 부르고, 축제를 지냈지만, 그들의 삶 안에는 정의가 없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이 짓밟히고, 약한 이들이 억울함을 당하고, 힘 있는 사람들이 자기 이익을 챙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아모스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겉모양만의 제사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삶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정의와 진실과 자비가 흐르는 삶입니다. 우리 사회에도 한때 ‘사바사바’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밀가루 선거’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촌지 문화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우리 안에는 정의와 부정이 함께 머물 때가 있습니다. 편의성이라는 이유로, 학연과 지연이라는 이유로, 경제적인 이익이라는 이유로, 우리는 때로 진실을 외면하고 불의와 타협하려 합니다. 그러나 정의와 부정은 함께 살 수 없습니다. 진실과 거짓은 한집에 오래 머물 수 없습니다. 손에 박힌 가시는 뽑아야 하듯이, 마음과 공동체 안에 박힌 불의와 부정도 뽑아내야 합니다. 그래야 평화가 옵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구원이 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귀 들린 사람을 고쳐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은 예수님께 마을을 떠나 달라고 청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의 불편한 평화를 흔드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감추고 싶었던 욕망과 두려움을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치유받은 한 사람의 생명보다 자신들의 손해와 불편함을 더 크게 보았습니다. 그들 안에도 편견과 이기심과 욕망과 탐욕이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은 이런 불편한 동거를 밝히는 빛입니다. 신앙은 진실과 거짓이 함께 살 수 없다고 말합니다. 신앙은 정의와 부정이 함께 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신앙은 사랑과 미움이 같은 마음 안에서 오래 머물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신앙은 때로 우리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 불편함은 우리를 살리는 불편함입니다. 가시를 뽑을 때 아프지만, 뽑아야 상처가 낫습니다. 회개는 아프지만, 회개해야 영혼이 삽니다.
청소년 음악회에서 아이들이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기까지 많은 연습과 기다림이 있었듯이, 우리의 신앙도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대나무가 마디를 통해 곧게 자라듯이, 우리의 삶도 시련과 회개의 마디를 통해 하느님께로 자랍니다. 시베리아의 추위를 견딘 사슴의 녹용이 귀한 약재가 되듯이, 신앙인은 고통과 시련을 통해 더 깊은 은총의 사람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아모스 예언자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 좋겠습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그리고 오늘 화답송의 말씀도 마음에 새기면 좋겠습니다.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곳에 하느님의 평화가 있습니다. 진실이 강물처럼 흐르는 곳에 하느님의 구원이 있습니다. 사랑이 강물처럼 흐르는 곳에 성령의 기쁨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 안에 있는 편견과 이기심, 욕망과 탐욕, 시기와 질투를 몰아내 주시기를 청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 안에 진실과 정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게 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그 길을 걷는 사람이 참으로 하느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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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전주교구 백재욱 스테파노 신부님]
복음 말씀을 글로 대하다 보면 당시 상황이 선명하게 그려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낯선 지명이나 등장인물의 뜻밖의 말과 행동 때문이기도 하지만, 짧은 호흡으로 전개되는 사건의 속도감 때문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어려움을 마주합니다. 호수 건너편 가다라인들의 지방, 마귀 들린 사람 둘, 그들이 예수님과 주고받는 대화, 그리고 갑작스러운 돼지 떼의 죽음과 고을 주민들의 반응까지, 여러 가지 상황이 연이어 펼쳐집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미궁에 빠뜨리는 물음은 과연 이 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입니다.
두 가지 장면에 초점을 맞추어 봅시다. 첫 번째는 마귀 들린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알아본 그들은 그분의 칭호를 대담하게 부르며 외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태 8,29) 그들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부인합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자신들의 자리가 위협받는 것이 불편하고 못마땅하였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고을 주민들의 반응입니다. 예수님의 한마디에 마귀들이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 모두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주민들은 예수님께 그 고장을 떠나 달라고 청합니다. 마귀를 쫓는 놀라운 기적보다 경제적 손실을 입은 것이 그들에게는 더 큰 문제였나 봅니다. 그들 또한 예수님과 관계를 끊고자 합니다.
너무 오래 어둠 속에 머물러 있던 탓일까요. 마귀들은 돼지 떼와 함께 사라진 것이 아니라 어느새 고을 주민들의 마음에 다시 자리 잡았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돼지’, 곧 세속적 가치나 소유물을 잃을까 두려워 예수님과 맺은 관계를 부인하려 한 적은 없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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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8,28-34: 가다라인들 지방의 마귀 들린 사람
오늘 복음은 무덤 사이에서 살며 쇠사슬조차 끊어버리는, 인간성을 잃어버린 마귀 들린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자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마태 8,29)하고 외친다. 이제, 예수님 앞에서는 마귀도 그분이 누구신지 고백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오리게네스는 이렇게 말한다. “악마들은 그리스도를 알아보았으나, 그분을 사랑하지 않았고 그분께 순종하지 않았다.”(Commentarium in Matthaeum 요약) 즉, 지식으로 구원받지 못한다. 구원은 주님께 대한 사랑과 순종으로 이루어진다.
마귀 들린 사람들은 단순히 고대적 미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우상과 죄에 사로잡힌 인간의 모습을 드러낸다. 무덤에 산다는 것은, 죄 안에서 이미 영적으로 죽어 있음을 의미한다. 쇠사슬을 끊는다는 것은, 사회적 관계조차 파괴된 인간 고립의 상징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인간의 내적 분열을 이렇게 설명한다. “죄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기 안에서 둘로 나뉘어 있다. 그는 자유로워지려 하지만 죄의 사슬이 그를 붙잡고 있다.”(Confessiones VIII,5 요약) 따라서 예수님의 만남은 단순한 기적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을 다시 온전히 회복시키시는 하느님의 구원 행위다.
마귀들은 예수님의 권능 앞에서 쫓겨나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간다. 유다인에게 돼지는 부정한 동물이었고, 탐욕과 무절제의 상징이었다. 돼지 떼가 호수에 몰려가 몰살당한 것은, 죄의 세력이 궁극적으로 파멸할 운명임을 드러내는 표징이다. 성 에프렘은 이렇게 주석한다. “군중은 돼지 떼를 잃었다고 슬퍼했으나, 하느님은 사람 하나를 되찾으심을 기뻐하셨다.”(Commentarius in Diatessaron 8,28 요약) 이는 우리에게도 큰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영혼의 구원보다도 세속적 손실을 더 크게 여기는 것은 아닌가?
마을 사람들은 치유된 기적을 보고도 예수님께 떠나 주십사고 요청한다.(34절) 이는 구원의 기쁨보다 현세적 손실을 더 중시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교리서도 이 긴장에 관해 설명한다. “예수님의 현존은 사람들 앞에 선택을 요구한다. 사람은 빛을 따르거나, 혹은 빛을 거부할 수 있다.”(548,142-143항 참조) 우리 역시 신앙 안에서 날마다 같은 갈림길에 서 있다. 진리를 따르느냐, 편안함을 따르느냐? 십자가를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포기하느냐? 하느님의 뜻은 언제나 십자가의 도전으로 다가온다. 십자가는 우리를 두렵게 하지만, 동시에 영광의 길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격려한다. “그리스도와 함께라면 어떤 십자가도 무거움이 아니라, 영광의 관문이 된다.”(Homilia XXIX 요약)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께 올바른 응답을 드리는 선택이다. 믿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이고, 우리 자신을 그분께 봉헌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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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길을 걷다>
마태오 8,28-34 (마귀들과 돼지 떼)
예수님께서 호수 건너편 가다라인들의 지방에 이르셨을 때, 마귀 들린 사람 둘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너무나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다닐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하고 외쳤다.
마침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 놓아 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마귀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쫓아내시려거든 저 돼지 떼 속으로나 들여보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가라.” 하고 말씀하시자, 마귀들이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돼지 떼가 모두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물속에 빠져 죽고 말았다.
돼지를 치던 이들이 달아나 그 고을로 가서는, 이 모든 일과 마귀 들렸던 이들의 일을 알렸다. 그러자 온 고을 주민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나왔다. 그들은 그분을 보고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하였다.
<길을 걷다>
“예수님께서 호수 건너편 가다라인들의 지방에 이르셨을 때, 마귀 들린 사람 둘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너무나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다닐 수가 없었다.”(마태 8,28)
길을 걷다
새로 길을
내고자
길을 걷다
닫힌 길을
열고자
길을 걷다
막힌 길을
뚫고자
길을 걷다
끊긴 길을
잇고자
길을 걷다
다시 길을
내고자
길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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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돼지보다 젖소가 좋다>
“돼지가 젖소에게 물었다. 나는 죽은 후에 햄이며, 베이컨에 족발, 곱창, 삼겹살까지 몽땅 주는데 겨우 젖과 치즈만 주는 너보다 인기가 적은 이유가 뭘까? 그러자 젖소가 대답했다. 글쎄 내 생각에 말이야, 넌 죽은 후에야 모든 걸 주지만 난 살아생전에 좋은 것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돼지는 새김질을 안 해 구약에선 더러운 짐승으로 먹지 못하게 했고, 지금도 이스라엘과 아랍 사람들은 먹지 않는다. 가나안과 시리아, 로마 사람들은 돼지를 제물로 바쳤다. 유다인에게는 돼지를 키우는 일조차 금기사항이었다. 그러나 이방인 지역은 하느님의 뜻이 전해지지 않는 곳으로, 먹어서는 안 되는 돼지를 키웠다.
결국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은 돼지 취급받았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이방인 지역에 가셨다. 그리고 한 말씀으로 마귀들이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 물에 빠져 죽게 되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자기 고장에서 떠나달라고 청하였다. 돼지들이 죽었으니, 예수님께서 거기에 머무신다는 것은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벌써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에게는 악의 세력인 마귀가 죽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경제적 손실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돼지를 잃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잃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
예수님의 행위는 하느님을 모시지 못하고 악의 세력이 자리할 때 이방의 지역이 되는 것이고, 그곳에 죽음이 온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그런데 그 이방 지역이란 다른 곳이 아닌 내 삶의 자리에 있다. 살아생전에 남을 위해 배려하지 못하고 나중에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 이기적인 마음, 힘들이지 않고 한몫 챙기려 하는 한탕주의, 소위 용하다는 곳을 다니며 하는 미신 행위, 가정을 뒤흔드는 향락을 쫓아 즐기는 행위 등등 우리 삶의 자리가 유혹의 자리요, 이방의 자리가 되고 있으며 죽음의 자리가 되고 있다.
마귀들은 사람들을 뒤흔들었지만, 예수님께는 꼼짝을 하지 못했다. 마귀들은 예수님 앞에서는 힘을 못 쓰고 꽁무니를 뺐다. 그렇다면 마귀들이 아무리 날뛰더라도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아무 걱정이 없다. 예수님과 함께하면, 근심하지 않고 방황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떠나서 방황하면 마귀는 다가오고 절망이 기다린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꼭 잡길 바란다.
우리는 각자 삶의 자리를 하느님 모신 자리로 빛내야 한다. 결코 자신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하느님의 힘에 의탁하여 하느님 안에서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어야 한다. 누구를 기쁘게 하기를 원하는가? 하느님? 아니면 세속인가? 주님의 뜻을 따라 악을 미워하고 선을 행하며 부족함을 주님께 봉헌하는 오늘이길 희망한다. 무엇을 하려거든 돼지보다 젖소가 되어 지금 하길 바란다.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은총으로 오류의 어둠 속을 헤매지 않고 언제나 진리의 빛 속에 살며 길이 남을 열매를 맺게 하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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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견딜 수 있는 시련을 주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도저히 견딜 수 없다며 최고조로 스트레스 지수가 올라갔다고 말합니다. 이제 시간이 지나면서 도저히 견딜 수 없다던 시련이 조금씩 극복됩니다. 그리고 이보다 작은 시련이면(또는 같은 크기의 시련이면) ‘이쯤이야’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결국 시련을 통한 스트레스가 우리의 면역력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25년 전, 처음 갑곳성지에 갔을 때가 생각납니다. 그때는 막연하게 ‘잘될 거야’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었습니다. 처음 시작하는 갑곳성지의 삶은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보일러도 없고, 온수도 나오지 않고, 아토피까지 생겼습니다. 아직 알려지지 않아서 순례객도 없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소위 ‘노가다’의 연속이었습니다. 하루에 한 번 있는 미사에는 동네 어르신 한두 분 오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포기하고 싶고,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지나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생활이 신부 생활에 큰 면역력으로 자리 잡아서 웬만한 일로 흔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승용차에 운전사와 조수석에 한 명씩 타고 있습니다. 아주 먼 거리로 장거리 여행을 합니다. 이 둘 중에 누가 더 힘들까요? 운전하는 사람이 더 힘들 것 같지만, 실제는 조수석에 앉아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조수석에 앉으면 운전자와 같은 시야로 전방을 주시하게 됩니다. 다른 차가 끼어들 때, 내 차가 차선을 바꿀 때, 속도를 낼 때…. 운전자처럼 반응하게 됩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자기가 차를 제어할 수는 없기에 피곤한 것입니다.
조절 가능성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고통과 시련을 받아들이는 무게가 달라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유의지를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배려가 놀랍지 않습니까? 면역력을 주시고, 조절 가능성까지…. 감사의 이유가 충분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생각과 하느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마귀 들린 이들을 치유하십니다. 그런데 고을 주민들의 반응은 치유되어 건강해진 것에 환희하고 감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 한 명도 구원의 길에서 제외되지 않는 것이고, 그 고을 사람들은 자기 이기심과 물질적 풍요를 지키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사실 마귀들은 예수님의 권위 앞에 쫓겨날 것을 직감하고 부정한 짐승인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귀들이 들어간 돼지 떼는 비탈을 내리달아 물속에 빠져 죽습니다. 이렇게 악령의 궁극적인 목적이 생명의 파괴와 죽음뿐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악령의 목적을 따르는 우리는 아닐까요? 그래서 폭력과 생명 경시가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목적을 따라야 합니다. 그 목적은 오로지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우리의 구원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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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마귀들과 돼지 떼>
예수님께서 건너편 가다라인들의 지방에 이르셨을 때, 마귀 들린 사람 둘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너무나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다닐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하고 외쳤다. 마침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 놓아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마귀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쫓아내시려거든 저 돼지 떼 속으로나 들여보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가거라.” 하고 말씀하시자, 마귀들이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돼지 떼가 모두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물속에 빠져 죽고 말았다. 돼지를 치던 이들이 달아나 그 고을로 가서는, 이 모든 일과 마귀 들렸던 이들의 일을 알렸다. 그러자 온 고을 주민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나왔다. 그들은 그분을 보고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하였다.(마태 8,28-34)
1) 예수님께서 가다라인들의 지방에 가신 것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제자들과 함께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복음을 선포하려고 가신 것이라면, 겉으로 보기에는 실패한 일로 보이지만, 실패는 아니고, 그 지역에 ‘복음의 씨’를 뿌리셨습니다.(마르 5,19-20; 루카 8,38-39) 쉬려고 가신 것이라면, 마귀들 때문에 쉬시지 못하고, 그것들을 쫓아내는 일을 하신 것이 됩니다. <그 지역의 마귀들이 너무 사나워서(28절) 그 소문이 널리 퍼지고, 소문을 들은 예수님께서 그것들을 쫓아내려고 일부러 그 지역으로 가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떻든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내용은, 아무리 사나운 마귀라도 예수님 앞에서는 무력하다는 것, 예수님께서는 인간 세상에서 마귀들을 쫓아내려고 오셨다는 것, 마귀들은 인간 세상에서 완전히 쫓겨나는 것을 피하려고 돼지 떼 속으로나 들어가게 해 달라고 타협안을 제시했지만 돼지 떼마저도 마귀들을 거부했다는 것, 마귀들이 완전히 제거되었는데도 사람들은 예수님께 고마워하기는커녕 떠나라고 요구했다는 것 등입니다.
사람들은 마귀들이 제거된 것보다 돼지 떼를 잃은 것만, 즉 재산 피해만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 낯선 유대인을 경계했을 것이고, 예수님의 권능과 권한을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귀들과 함께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고, 새로운 변화를 싫어했을 것입니다.
<변화를 거부하고 살던 대로 살겠다고 고집부리는 것은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입니다. 이 말을 반대로 하면,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받아들인 신앙인들은 낡은 삶을 버리고 새 인생을 살기 위해서 끊임없이 새로워지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2) 마귀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이미 알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마귀들은 예수님을 안 믿는 존재입니다. 믿는 것이 아니면 아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는, 예수님과 자기들은 아무 상관이 없으니, 자기들이 하는 일에 간섭하지 말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이 말은 거짓말입니다. 예수님은 마귀들에게서 사람들을 해방하려고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때가 되기도 전에”라는 말도 거짓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때가 바로 마귀들이 쫓겨나는 때입니다.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왜곡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마귀들을 ‘괴롭히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그것들을 완전히 ‘쫓아내려고’ 오신 분입니다.
마귀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것과, 쫓겨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인간 세상에서 완전히 쫓겨나는 것을 피하려고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돼지 떼는 마귀들이 들어가기 적당한 ‘더러운 짐승’이라고, 또는 마귀들이 좋아하는 짐승이라고 해석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마귀들이 여러 가축 중에 돼지 떼를 선택한 것은 아닙니다. 돼지 떼밖에 없었으니까 어쩔 수 없이 돼지 떼를 말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돼지 떼는 마귀들보다 그 지역 사람들 쪽에 더 관련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돼지들도 거부하는 마귀들을 너희는 왜 거부하지 않았느냐?”라고 꾸짖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3) 예수님께서 마귀들의 청을 들어 주신 이유는 모릅니다. 어떻든 결과적으로 그곳에서 마귀들이 완전히 제거되었고, 그것들은 지옥으로 떨어졌을 것입니다.(루카 8,31) 원래 지옥은 마귀들을 가두어 놓는 감옥입니다.(묵시 20,3) 사람들이 예수님께 ‘떠나가 주십사고’ 청한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요청이 아니라 요구이고, 사실상 예수님을 쫓아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을 쫓아내셨는데, 인간들은 예수님을 쫓아냈습니다. 말 못하는 짐승들은 마귀들을 거부했는데, 인간들은 메시아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이 아직 예수님을 모르고 복음도 몰라서 그랬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마귀들이 제거되고 평화를 되찾은 것은 분명한 사실인데도 사람들이 그것을 기뻐하지 않고, 눈앞의 재산 피해만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음이고, 그런 어리석음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복음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어리석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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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차라리 예수님을 볼모로 잡아라.>
예수께서 거친 풍랑을 잠재우자 배는 어느덧 호수 건너편에 다다랐다. 풍랑을 잠재운 기적은 마태오복음의 이적사화 집성문(마태 8-9장) 가운데 네 번째 기적이었다. 예수께서 먼저 배에서 내리셨을 것이고, 제자들도 따라 내렸을 것인데, 제자들에 관한 언급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나 제자들은 배경에 머무르면서 오늘 복음이 보도하는 스승의 구마기적사화를 지켜볼 것이다. 이는 다섯 번째 기적에 해당한다.
공관복음은 예수께서 마귀 들린 많은 사람들을 치유하셨다고 하지만(마르 6,13) 이에 대한 구체적인 보도는 두 편에 달한다. 이는 “마귀와 돼지 떼”에 관한 구마사화(마르 5,1-20; 마태 8,28-34; 루카 8,26-39)와 “악령에게 사로잡힌 아이”에 관한 구마사화(마르 9,14-29; 마태 17,14-20; 루카 9,37-43)이다.
원전(原典)에 가까운 마르코복음은 마귀와 마귀 들린 사람의 성질, 습관, 태도 등을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고, 마귀의 고백, 예수님과의 대화,
구마 수행방법, 구마결과 및 반응에 관한 서술을 잊지 않고 있으며, 대략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를 장식하고 있다.
이에 비하여 마태오와 루카는 상당부분 수정을 가하였고, 특히 마태오는 내용도 대폭 축소시켜 보도하고 있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가 마르코복음을 인용한 부분으로서, 마르코의 “구마와 마귀에 의해 익사한 돼지 떼” 대목(마르 5,1-20)을 대폭 축소시켜
보도하고 있으며, 내용도 많은 부분 변질시켰다.
마태오에 의하면 배가 도달한 호수 건너편은 “가다라” 지방이었다.(28절) 마르코는 “게라사” 지방이라고 하는데, 게라사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동남쪽으로 무려 55Km나 떨어져 있기 때문에 마귀 들린 돼지들이 달리기에 너무 먼 곳이다.
그래서 마태오는 호수에서 약 10Km 떨어진 “가다라”와 그 주변, 즉 가다라 지방이라고 고쳤다. 마르코에 의하면 배에서 내린 예수께서는 곧바로 무덤 사이에서 나온 “더러운 악령 들린 사람 하나”를 만났다고 하는 반면, 마태오는 복수형인 “마귀 들린 사람들”로 고쳤다.
이는 예수께서 대적하는 상대가 쉬운 상대가 아님을 암시하면서, 역으로 예수님의 권능이 우세함을 드러내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그들의 성질은 “사납다”는 말로 아주 짧게 묘사된다. 마귀들이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대목은 그리스도론적 의미를 가진다.
쫓겨난 마귀들이 돼지 떼에 들어가 물 속에 빠져 죽는 사건(32절)이 가다라 마을에 알려지자(33절) 온 마을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떠나 달라고 청한다(34절).
마르코복음은 예수께서 마을 사람들의 청을 받아들이신 듯 배를 타고 떠나려 하시는데, 마귀로부터 치유된 사람이 제자 되기를 부탁했다고 한다. 그러나 부탁은 거절당하고 은혜 입은 일을 선포하라는 명령이 주어진다.
예수의 명령을 받은 그 사람은 데카폴리스 지방(요르단 강 유역을 일컫는 10개 도시의 총칭)을
두루 다니며 예수와 그 하신 일을 선포한다.(마르 5,18-20)
마태오는 마을사람들이 예수께 떠나 달라고 청한 대목을 그냥 넘기지 않는다. 그냥 넘기지 않았다는 말은 여기서 끝난다는 말이다.
가다라 지방 사람들이 예수를 거절하는 것은 곧 불신(不信)으로 인정된다. 그들의 불신은 수많은 돼지들을 손해(損害) 본 것에 기인한다. 마르코는 호수에 빠져 죽은 돼지 떼가 약 2,000마리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마르 5,13)
마태오가 전하는 오늘 복음은 마르코의 원전(原典)을 대폭 축소하면서 자신의 편집의도를 가미(加味)하였다. 마태오는 의도는 결국 앞서간 대목,
즉 호수 반대편에서 가르치신 예수 추종의 대목(8,18-22)과 깊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제자들이 추종하게 될 예수님은 세상의 마귀들을 깡그리 소탕하는 권능을 지니신 분이며, 이 분을 추종한다는 것은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마태오는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마르코복음의 “마귀 하나”를 복수로 수정함으로써, 수많은 마귀 떼를 쫓아내는 기적을 통하여 예수님의 권능을 한층 과시하는 동시에 예수 추종의 진정한 의미를 재삼 강조하는 이중효과를 노리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가다라 지방의 사람들은 그들 곁에 예수를 머물게 하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도래한 하느님나라와 구원에 관한 복음과 가르침을 듣고 배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이는 곧 세상을 만드시고 사람에게 생명을 주신 하느님을 놓친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장 다시 배를 타고 가파르나움으로 건너가실 것이기 때문이다.(9,1)
예수 때문에 손실을 입었다면 예수를 볼모로 잡아두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그 옛날 이집트의 재상 요셉이 동생 베냐민과 아버지 야곱을 만나기 위해서 식량을 사러왔던 10명의 형들 중에 시므온을 볼모로 잡아 두었던 것처럼 말이다.(창세 4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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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너희는 악이 아니라 선을 찾아라. 그래야 살리라.” 아모스 예언자의 선포에는 성경을 관통하는 예언자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곧 세상 속에서 선과 악이 대결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결국 하느님과 그분의 자비가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마귀들은 하느님께 대적할 수는 없지만, 인간의 약점을 파고들어 하느님을 거부하도록 유혹합니다. 그러나 마귀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알아보았기에, 결코 대적할 수 없는 하느님의 능력 앞에 자신들의 존재감이 사라질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때가 되지도 않았는데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몰아낼까 봐 두려워하고, 결국 유다인들이 가장 부정하게 여기던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 물속에 빠져 죽어 버리고 맙니다.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이미 악에 대한 선의 승리를 예고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이 광경을 목격한 마을 사람들은 두려움에 빠집니다. 하느님의 생명과 구원을 얻으려면 세상의 악과 타협하는 일을 끊어 버려야 하지만, 그렇게 살려면 포기하고 잃어버릴 세상의 즐거움들이 너무 많을까 봐 두려운 것입니다.
하느님을 그리워하면서도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데에는 주저하는 우리네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아모스 예언자는, 세상의 악을 이기는 선의 승리는 화려한 축제나 잔치, 생색내기 예물 봉헌이나 위선이 아니라,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는 것임을 선포합니다.
우리가 악의 존재를 몰라서 세상이 악한 것이 아니라, 악과 죄를 알면서도 선을 사랑하는 데 주저하기에 세상에는 마귀들의 유혹이 더 커지는 것입니다.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는 시편 저자의 말씀을 오늘 하루 새겨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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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남상근 라파엘 신부님]
<마귀만도 못한 신앙>
복음에서는 마귀 들린 이들이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그들의 고단한 처지를 굽어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시어 그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주십니다. 온전하고 자유로운 삶으로 새롭게 불러주시는 것이지요.
그런 대목을 보면, 마귀 혹은 더러운 영들의 공통된 반응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두려워할 뿐만 아니라 그분께 애원하고 청하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마르 1,34)입니다.
가다라 지방의 마귀들도 예수님을 이렇게 부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카파르나움의 더러운 영들도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
저는 이 대목을 마귀의 신앙고백, 역설적인 신앙고백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래서 마귀만도 못한 신앙이 있을 수 있구나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알아채지 못하는 믿음이라면 말입니다.
예수님 앞에 나올 때마다, 그분 앞에서 물러날 때마다 자문해봅니다. 과연 가다라의 마귀만큼이라도, 카파르나움의 더러운 영들만큼이라도 나는 그분을 고백하고 있기나 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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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혹 우리도 하느님께 항변하고 있지는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첫 이방인 지역 나들이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다라인들 지방에서 더러운 영을 쫒아내시는 장면입니다. 앞 장면에서, ‘호수의 큰 풍랑’을 잠재우신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큰 풍랑’, ‘마귀 들려 사나워진 두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길로’ 다니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길’은 관계 맺는 소통의 통로입니다. 그래서 ‘길이신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을 ‘길 밖’으로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로 추방시킵니다. ‘길’을 여시고, 동시에 마귀 들린 이들도 회복시킵니다. 사실 당시에는 마귀들과 악령들이 추방되는 사건은 ‘종말의 표징’으로 생각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귀들은 말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마태 8,29)
그러니 마귀들의 이 외침은 ‘종말의 때가 되기 전에는 당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지 않느냐’는 항변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을 쫓아내시면서 ‘종말의 때’가 왔음을 드러내시면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오늘, 혹 우리도 하느님께 항변하고 있지는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마치 마귀들처럼,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간섭하지 말고 괴롭히지 말라’고, ‘관계 맺기를 거부’하고 있지는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돼지를 치던 고을 주민들은 예수님을 보고서, 오히려 자기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말합니다. 그들은 당신의 권능을 보고서도 오히려 달아납니다.
그렇습니다. ‘빛’은 ‘빛’을 반겨 맞아들이지만, ‘어둠’은 ‘빛’을 보고 오히려 도망칩니다. ‘빛’이 ‘어둠’을 몰아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들은 자신들의 재산 손실을 볼 뿐, 이웃의 고통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들 또한 ‘관계 맺기를 거부하는 이들’이요, 어둠에 물든 이들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과 이웃과의 통교를 막는 ‘돼지 떼’가 판치게 방치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기꺼이 빛이신 그분의 말씀과 권능을 반겨 맞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빛이신 주님’만이 우리 안에서 어둠을 몰아내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토록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빛’을 밝혀주시고, ‘빛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우리가 죽은 이들의 무덤 가운데 살지 아니하고, 살아계신 당신의 사랑 가운데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오니, 주님!
빛이신 당신을 찬양합니다.
제 안에 빛을 비추시고 구원을 이루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의 권능과 영광이 빛나소서.
제가 당신 빛 가운데 살겠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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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그들은 그분을 보고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하였다.'(마태 8,34)
주님!
어둠을 몰아내소서.
제 안에 돼지 떼가 판치지 않게 하소서.
저는 본래부터 주님의 거처이니, 제 안에 빛을 밝히소서.
진정, 제가 죽은 이들의 무덤이 아니라 살아계신 당신의 사랑 가운데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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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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